소원의 항구
시편107편30절에는 다음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
2000년 헝가리로 들어오면서부터 성령의 뜻과 인도하심 따라 시작했던 빈민 구제사역! 먹을 양식을 나누고 의료약품과 기타 생활필수품 등을 나누었다. 그리고 헌 신발과 헌 옷을 종종 나누면서 늘 가슴속에 소원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저 사람들이 새 옷을 입어본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저 사람들에게도 새 옷을 한 번 입혀봤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었다.
매년 초겨울이 되면 장갑만을 나누었었는데 2006년에는 하나님께 정말 소원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저들에게 새 옷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리고 몇 가정 되지는 않지만 진실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애쓰는 우리 한인은혜교회 성도들에게 기도제목을 나누고 방한복나누기 특별헌금을 하였다. 그리고 한 해 동안 모은 헌금을 정리하였다.
그래서 그해 10월 마지막 주 화요일 거리전도를 끝내고 130벌의 방한복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누어 주었다. 참으로 감사하고 감격한 날이었다. 마음의 오랜 소원을 풀고 나니 감사와 찬양이 절로 나왔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뭐 저런 것을 마음에 소원하나! 자기가 뭐 성인(聖人) 인가?’ 할 테지만 웬일인지 내 마음 속에는 그런 소원이 생겼다.
그러나 사실 그 소원은 나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품고 계신 소원을 내 마음속에 베풀어 주신 것이었다. 빌립보서 2장13절에는 이렇게 기록 되어 있다.“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러고 보니 나는 가난하고 헐벗고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로하고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의 통로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나타나셔서 일하시지 않는다.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나타내시며 그 소원을 열매 맺어 가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원은 사람들의 것처럼 이기적이거나 탐욕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소원은 언제나 가난한사람에겐 부요함의 소망으로 병든 사람엔 회복의 은혜로, 고통 받는 사람에겐 위로의 풍성함으로 외로운 사람들에겐 사랑의 은총으로 가득하시다.
그러하기에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향해 돕고 싶은 선한 마음이 들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 들 때는 그 마음에 순종해야한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이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소원의 통로가 되는 거룩한 축복이기 때문이다.
아! 지금은 아까워서 못 입어요!
디모데 후서 4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이 말씀은 사도바울께서 그 제자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자신의 외투를 가져오라고 부탁하는 말씀이다. 유럽의 겨울은 뼈 속까지 스며오는 추위가 11월부터 시작되어 3월까지 계속되니 겨울을 지내려면 반드시 겉옷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의 겨울도 만만치 않다. 눈도 많이 내릴 뿐 아니라 바람이 뼈 속에 녹아들 정도이다. 그러기에 노숙인들에게 있어서 방한복은 한 겨울을 이겨낼 절대적 무기인 것이다. 2006년 겨울부터 시작한 일이 올해로 5년째이다. 방한복을 받기위해 줄을 선 사람들! 그들 가운데는 진짜 걸인도, 보통의 노숙인들도 그리고 몸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거리의 여자들도 참 많이 있다. 정부에서 발행한 노숙인(Hontalan 혼 떨런:집이 없는 사람)이라는 증명서를 들고서 방한복을 받기위해 줄을 선 사람들의 얼굴은 마냥 어린아이 같았다. 마치 내가 어릴 적, 설날에 새 옷을 입을 때의 그런 마음, 그런 얼굴이 모두에게 있었다.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씩 방한복을 받아들고서 입어 보며 행복해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더 할 것 없이 참 행복하였다. 그런데 방한복을 받았던 나이가 지긋하게 들은 ‘미하일’ 아저씨가 몇 칠이 지나도록 방한복을 입지 않는 것이었다. 여전히 찌든 때, 오물냄새 가득한 옷을 아직 그대로 입고 있었다.
‘미하일! 왜 방한복을 입지 않아요? 혹시 다른 사람이 훔쳐갔나요? 날씨가 추운데 어서 입어야지요.’ 했더니‘ 아! 지금은 아까워서 못 입어요. 나중에........ 나중에 입을 거예요. 지금은 내 숙소에 (시에서 거리정화 차원으로 마련한 저녁에만 사용 할 수 있는 잠자리) 잘 숨겨 놨어요.’ 하며 걱정 말라는 미소까지 짓는 것이었다.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풀어서 얼씨구나 좋다 하고 입었을 텐데 미하일 아저씨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받아든 방한복이 단번에 입기에는 너무도 귀한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의 새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나눔이라 생각했는데 그들에게는 작은 것이 아닌 크고 소중한 것이었다. 새 옷을 받아든 모든 사람들이 더 없이 행복했던 날이었다.
그리고 나누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해 함께 동참했던 부다페스트 한인은혜교회성도들도
기쁨이 넘친 날이었다. 나눈 사람은 나눈 대로 행복했고 받은 사람은 받은 대로 행복하였다. 그리고 나도 높다란 기쁨과 향긋한 행복을 누렸다. 그것은 나눌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에 응답할 수 있어서였다. 하나님의 소원의 통로로 사용된 기쁨과 행복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방한복을 나누는 것도 귀하고 소중하지만 더 귀한 옷을 세상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나누어주고 싶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옷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때 입는 옷, 예수그리스도의 순결하고 보배로운 피로 짜여 지고 수놓아진 구원의 옷이다. 이사야서 61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풍요로움이 넘치는 이 시대 속에서도 한 겨울을 헐벗은 채 지내는 우리의 부족한 이웃들을 돌아보자. 그리고 아주 값비싼 채색 옷과 명품의 겨울옷을 보란 듯이 입기는 하였지만 영적인 헐벗음으로 추위에 떨고 있는 이웃들도 돌아보자.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엮은 외투를 입혀주고 십자가로 수놓은 구원의 옷으로 입혀 행복하게 만들어 주자.
그리고 우리도 더불어 행복하자. 그리하면 하나님도 행복하실 것이다. ‘성 어거스틴’ 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참다운 행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에게 고백하는 당신 종의 마음에서 이런 것들을 멀리해 주소서. 즉,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기쁨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내가 참으로 행복하다고 느끼지는 말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참다운 기쁨을 불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고 당신만을 목적으로
예배하는 자들에게만 주시옵니다. 그러기에 당신만이 그들의 기쁨이 되옵니다. 참다운 행복이란 당신 안에서, 당신을 향하여, 그리고 당신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옵니다. 참 행복이란 이것뿐 그 외에는 없습니다. 혹시 다른 종류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기쁨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다운 기쁨이 아닙니다.”
뭐 큰 도움이 되겠어?
2006년부터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면 간단치 않은 숙제가 생겼다. 그것은 노숙인들에게 나눌 방한복 때문이다. 첫째의 숙제는 방한복을 마련할 재정이요 둘째는 방한복을 저렴한 가격에 잘 구입하여 서부역까지 운반하는 것이다.
매년 하나님의 놀랍게 일하심의 은혜가 임하였는데 올해, 2010년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 작은 일에도 함께하고 계시다는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재정문제는 우리 은혜교회식구들이 자신의 월급의 반 이상을 헌금하는 등 힘써 동참하여 거뜬히 해결되었다. 이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두 번째의 숙제였다.
찬양전도사역을 거의 끝마칠 무렵이었다. 부다페스트서부역 지하보도 근처에 작은 간이 중국음식점이 생겼는데 그곳의 주인이 찬양하는 곳으로 와서 한참이나 찬양을 듣는 것이었다. 다가가 그 전 화요일처럼 복음을 전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혹시 옷은 팔지 않습니까? 우리가 겨울코트가 많이 필요한데.........우선 130벌........... ”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주머니는 “내 친구가 의류도매를 합니다. 전화번호를 주세요. 알아보고 내일 연락해줄게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묻기는 물었지만 뭐 큰 도움이 될까?” 그런데 다음날 오전 진짜 전화가 온 것이다. 약속시간과 장소를 정해주며 그리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곳은 매년 우리들이 방한복을 구입하고 장갑과 양말을 구입하기위해 가던 중국인들의 도매시장 근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마음은 여전히 “뭐 큰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약속 장소로 시간에 맞추어 나갔다. 아주머니도 시간에 맞추어 나왔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자가용에 우리를 태우고는 매년 우리들이 다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도 중국인들이 새롭게 타운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한 곳에 가니 가격은 싼데 젊은이들이 입는 코트였다.
“노숙인들은 길고 두툼한 옷을 입어야합니다.” 하며 난처해했더니 아주머니는 자신의 친구에게 다시 연락하더니 근처의 다른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였다. 그곳엔 겨울 잠바 종류가 참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정말 노숙인들에게 딱 맞는 기지의 두툼한 잠바가 있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구입했던 방한복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이었다. 그리고 제일 큰 문제였던 가격도 본래 생각했던 것의 반 가격에 150벌을 구입하였고 서부역까지 시간에 맞춰 배달까지 해주는 보너스 선물을 받고 기쁨과 감격으로 가난한 이웃들에게 입혀주었다. 뭐 큰 도움이 될까? 했던 것이 참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러한 은혜를 과연 누가 가져다주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알고 보니 그 중국아주머니는 헝가리인 직원을 100명이나 거느리고 있는 식품공장의 사장이었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고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집과 공장은 부다페스트에서 약 30km 떨어진 Duna haraszt 라는 곳이었다.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 일에 그 여사장은 무엇 때문에 먼 곳에서 시내까지, 자기 시간, 자기 돈 들여가며 그런 수고를 하였겠는가?
요즘같이 자기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시대에서 이런 일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다. 그러한 놀라운 일이 그저 일상의 일처럼 내게 일어난 것이다.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한 명쾌한 답은 이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사장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11월의 방한복 숙제를 안고 끙끙거리는 서부역의 나에게로 돕는 천사로 보내 주신 것이다.
“끙끙대지 마라. 내가 쉽게 해결해주마! 은혜를 맛보아라!”하시면서 놀랍게 일하시는 자신을 나타내 주신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길은 늘 삶의 숙제들로 가득한 길을 걷는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일, 자녀들을 낳고 잘 성장시키는 일,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을 얻는 일, 건강하게 사는 일, 사업에서 성공하는 일, 집을 짓거나 마련하는 일,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일.............. 각자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숙제들이 가득하며 한 가지를 해결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숙제가 또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낙심할 것이 없다. 끙끙대는 우리에게 신비한 은혜를 가득 들고 달려오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마음의 소원, 삶의 숙제들을 붙들고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기다리면 어떨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신부감 찾기의 숙제를 받아들고 끙끙대던 아브라함의 종에게 리브가를 극적으로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 홍해를 앞에 놓고 끙끙대었을 모세에게 신비한 동풍을 날려 바다에 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 죽음을 부활의 아침으로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께서 다시금 해결의 열쇠를 들고 달려오시지 않겠는가?
시편11편 2절 (쉬운 성경) 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은 위대합니다. 그것들을 생각할수록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