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설교]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조용기 목사 강남교회 축복성회

▲조용기 목사 강남교회 축복성회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12~14, 20~25)

저는 사람이 머리가 좋고 지혜로운 사람보다도 마음에 뜨거운 열정이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성가대도 한가지에요. 열정을 가지고 부르는 성가가 기교를 가지고 부르는 것보다 좋다고... 우리 박수 한번 쳐주십시다.

우리 환경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것처럼 평탄하기만 되지 않습니다. 비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고 고통이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그 환경을 어떻게 대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나는 행복하다. 나는 기쁘고 즐겁다. 나는 평안하다. 나는 형통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가면 그것이 여러분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다같이 말씀해 보십시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기쁘고 즐겁습니다. 나는 평탄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계십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당신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할렐루야~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이것이 좋은 것입니다. 텅빈 공간을 바라보고 탄식하지 않고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가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서론>

오늘 저는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제목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베다니에서 나오셨을 때 시장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성경 읽을 때마다 늘 신기하게 여깁니다. 하나님 자체이시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시장하셨다. 예수님은 배 안고플 것 같은데 시장하셨다. 예수님은 그만큼 여러분과 나와 같은 인간의 형상과 모양을 그대로 닮아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희생재물이 되기 위해서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아침에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래서 무엇 먹을 것이 없는가하고 살피시는 중에 무화가 나무가 있는지라 무화과나무 곁에 가서 쳐다보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매맺을 때가 아닌데 주님이 오셔서 찾으니 열매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것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나는데 주님이 뜻이 있어서 그 무화과나무 곁에 오신 것입니다.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다시는 사람들이 너에게 실과를 따먹지 못하리라. 무화과나무보고 너무 가혹하게 하신 것 같지만 그 다음날 제자들이 다시 베다니에서 나오면서 무화과나무 곁을 지나는데 베드로가 보니까 바짝 말라 버렸습니다. 하루 만에 말라 버렸습니다. “주님, 어제 저주하신 무화과가 말라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살펴보시고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져지라 하고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단지 나는 무화과나무보고 열매 맺지 말라고 했는데 무화과나무가 마른 이것은 하나의 비유에 불과하다. 무화과나무 정도가 아니다.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 하고 마음에 그것이 이룰 줄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는 권세가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괭이를 들고서 파헤친 것도 아니고 톱을 가지고서 벤 것도 아닙니다. 그냥 말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을 할 때 그 믿음의 말씀과 명령 속에 엄청난 변화의 권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가 말씀과 믿음에 서면 엄청난 권능이 행사된다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켜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권능에 대하여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창세기부터 우리에게 그것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본론>

1.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능

첫째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능 즉, 권세에 대해서 하나님은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 같아도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굉장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누구인가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세는 어떠한 것이냐,

성경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은 3차원의 세계의 모습인 것입니다. 비유컨대 물질적인 우리 인간, 우리의 삶이 공허하고 무질서하고 어두움이 마음을 깊게 점령하여 우리 마음이 절망상태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절망에서 그냥 자살해 버려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지혜나 지식이나 총명이나 노력으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문제가 절망적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런데 그런 상황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운행하시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이 세계 및 인간의 삶을 재창조하기 위해서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창조의 영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권세가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권세와 능력은 다릅니다. 권세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능력도 하나님이 나타낸 것이지만 권세와 능력은 그 사용방법이 완전히 다릅니다. 3차원의 시간, 공간, 물질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4차원의 권세로 운행하는 것이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은 조용하게 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 따라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04편 29절로 30절에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성령이 오시면 창조하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령이 생활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이제는 절망이다. 나는 살아갈 길이 없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오셔서 뭐라느냐. 창조하고 여러분을 새롭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가정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아무리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30세 요단강에 가서 침례 받을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는 주님은 아무것도 안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성령께 끌려 광야에 들어가서 사십 주 사십 야 금식하시고 나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고 12바구니 남게 하시고 뭐 희한안 일이 생겨났습니다. 문제가 없어요. 주님이 다 해결했어요. 성령이 임하셔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 때 제자들에게는 절망이었습니다.

120문도 제자들에게는 절망이었습니다. 로마의 권세가 완전히 자기들을 점령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고아와 같이 남아서 소망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은 끝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떠나지 말고 성령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 그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한 열흘 동안 기다리는데 성령이 임하셨거든... 그러자 확 달라져 버렸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새로운 창조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서 그들이 나가서 온 천하 만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병자가 낫고 귀신이 뜯겨 나가고 기적이 일어나고 나라가 뒤엎어졌습니다. 천하가 뒤엎어졌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눈에 안보이지만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 이 우주가 절단강산이었을 때 그 해결책으로 눈에 안 보이는 성령이 와서 운행하셨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왜 오십니까? 교회 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 교회에 성령이 와서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 성령이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이게 해답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기도하십니까? 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여러분 마음 속에 임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창조의 능력을 주시고 새롭게 해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역사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4차원의 영적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권세인 것입니다. 성령은 능력이고 말씀은 권세인 것입니다. 그냥 말만하는 거예요.

사실은 보면 말조차 되는 것 아무 능력도 없는 것 같은데 말만 하는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고 성령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서 창조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순서를 보면 먼저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권세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다음 보기에도 좋은 아름다운 세계가 창조되는 것입니다. 첫째 날에 빛이 생기고 둘째 날에 하늘이 생기고, 셋째 날에 바다와 땅, 식물이 생기고, 넷째 날에 해, 달, 별들이 생기고, 다섯째 날에 새, 물고기가 생겨난 것은 모두다 주님이 말씀하시니까 생겨난 것입니다.

말씀 안하셨을 때에는 성령이 그냥 임하여서 운행하고 계시지 아무것도 안 생겼어요. 말씀이 주어지니까 말씀의 권세를 따라서 성령의 능력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2. 권세와 능력

둘째로, 우리는 권세와 능력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돼요.

말씀에는 권세가 있고 성령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좀 복잡하겠지만 내 말을 들으면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말씀에는 권세가 있고 성령에는 능력이 있다. 권세와 능력이 뭐가 다르냐면 집안에서 늙은 부모가 계시면 늙은 부모는 아무래도 힘이 없습니다. 젊을 때는 발랄하여 힘이 있는데 나이 잡수시면 일어났다 앉는 것도 별도리없이 힘이 드는 것입니다.

젊은 자의 힘은 능력이 있는데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라고 말합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두나미스. 그리고 권세는 아버지, 어머니가 나이가 많으시고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익수시아라고 말합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익수시아. 더 쉽게 말하면 건축용 트럭이 얼마나 힘이 셉니까? 강력한 엔진을 달은 건축용 트럭이 건축자재를 싣고 웽~하고 달려오는데 그것은 굉장한 두나미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이나마이트 같은... 두나미스는 바로 다이나마이트의 원어인 것입니다. 다이나마이트의 힘인데 그것을 누가 중지시킬 수가 있습니까? 막 달려오는데...

그러나 키가 적고 왜소한 경찰관이 장난감 같은 호루라기 가지고 휘리릭~ 덜컥하고 섭니다. 그러면 제가 생각하기를 ‘저 바보같은 트럭 운전수! 저 빼빼한 경찰관 아무것도 아닌데 호루라기 분다고 설게 뭐냐. 그냥 달려가 버리지...’ 그러나 트럭은 두나미스, 능력이 있어도 경찰관은 권세가 있습니다. 익수시아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 안들었다가는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권세를 주셨습니다. 능력은 솔직히 말해서 없습니다. 능력은 성령이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권세를 사용하면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이 권세를 따라 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창조의 역사를 할 때 말을 권세있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권세있는 사람이 말을 더듬더듬하고 벌벌 떨면은 안돼요.

요한복음 11장에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을 때 예수님께서 “무덤 문을 열어 놓아라!”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의사들을 데리고 와서 빨리 주사 놓아라. 닝게르 놓아라! 혈압 재어 보라!” 그렇게 했나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시체를 향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굉장히 권세있게 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권세는 말씀을 통해서 사용하는 것인데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가서 능력으로 나사로를 당장 재창조해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나온 것입니다. 권세있게 말을 해야 돼요. 누가복음 7장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인성으로 가는데 죽은 사람을 매고 나오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뒤에는 독자를 잃은 어머니가 통곡을 하고 따라오기에 예수님이 그 사람들을 중지시켜서 죽은 청년을 보고서 “청년아, 일어나라!” 화닥딱 일어났습니다. 매고 가던 사람이 기겁 초풍을 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예수님께서 권세있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는데 예수님께 와서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니까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들이 비웃었습니다. “지가 뭘 안다고 여기 왔느냐?” 그러니 예수님이 우는 사람들 다 내보고내고 난 다음에 딸 손을 잡고 “달리다굼, 딸아 일어나라!” 죽은 딸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말씀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경에는 곳곳에 이러한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4차원의 영적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권세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도 예수 믿을 때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로 20절에 보면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이 권능이란 말이 바로 권세와 똑같은 말입니다.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제가 말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권세 즉, 익수시아.

로마서 13장 1절에 보면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 하나님이 예수 믿을 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권세는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필링이 아니에요. 권세는 느끼지도 아니하고 등이 근질근질하지도 않아요. 그러나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주어진 거에요. 사용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능력은 두나미스인데 물리적인 힘, 육체적인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말씀과 권세는 담대하게 명령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창조적인 능력이 그를 따라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으면 아멘 하십시다. 와~ 권세가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다 권세가 있어요. 하나님의 역사는 알고 바라보고 믿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 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서 알고 그 다음에는 바라보고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고 그 다음에는 기도해서 믿고 그 다음에는 입술로 명령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알고, 바라보고,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바라보고 그 다음 믿고, 명령한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네 단계는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이 네 단계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알고 기도해야지 뭣도 모르고 고함만 치면 안돼요. 병자가 병낫기 위해서 기도하려면 성경에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병을 짊어지고 갔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저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걸머졌다는 것을 알고 아니까 내가 건강하게 되어서 두발로 선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꿈을 꿀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알고 보고 그 다음에는 믿는다. 믿음이 안생기거든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고 믿고 믿음이 생기면 그 다음에는 창조해야 되는 권세있게 나아라! 병은 물러가라! 건강하라! 그렇게 해야 돼요.

기도를 알고 기도를 해야 돼요. 주님 알게 해주십시오. 깨닫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생각인 이 성경이 있으니까 주님의 생각인 말씀을 내 생각으로 읽어보고 그 다음에는 내가 알아야 돼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것이 하나님 뜻인지 모든 것이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알아야 돼요. 따라 말씀하세요. 알고 그 다음에는 알기만 하면 뭐해요? 내 아는 지식을 통해서 장차 내가 이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다는 것을 보아야 돼요. 내가 이대로 하면 부자가 되겠다. 건강한 사람이 되겠다. 승리한 사람이 되겠다. 훌륭한 주의 종이 되겠다. 바라보아야 돼요.

자기가 무엇이 될 것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여, 내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알게 되었사오니 주님 이 지식에 의해서 꿈을 꿉니다. 장차 나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 과부와 고아들을 많이 도와줄 수 있는 거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물질을 가지고서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돕는데 사용하겠습니다.’ 기도를 알고해야 되는 것입니다. 알고 바라보고 자기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돼요. 내가 부자되는 것이 하나님 뜻이요, 십일조와 헌물을 주님께 드리고 심고 그 다음에는 나는 부자가 된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돼요.

바라만 보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믿어야 돼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했으니 믿어야 돼요. 믿었으면 그 다음에는 이제는 기적이 창출되는 명령을 내려야 돼요. 그 다음에는 사업이 잘될지어다. 기적이 일어날지어다. 장사가 잘될지어다. 그렇게 말해야 돼요. 사람들이 들으면 바보같은 것이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주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빛이 있으라. 아무것도 없는데 말씀 하셨어요. 빛이 생겼어요. 궁창아 생겨나라. 궁창이 생겨났어요.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그런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께 말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은 굉장한 권세가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이 공짜로 선물로 권세를 주셨습니다. 권세를 쓰든 안쓰든 그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어요. 권세를 안쓰면 여러분은 녹슬고 먼지가 쌓일 것입니다. 권세를 사용하면 번쩍번쩍 빛나고 아름답고 좋을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권세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세요. 또한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 안에서 권세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와~ 여러분 권세가 있으니까 이제 여러분 뱀을 집으며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낫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모르고 흉내만 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확실히 알아야 돼요. 알고 그렇게 하는 여러분 모습을 마음 속에 바라보고 할 수 있다 하면된다. 해보자. 믿고 그 다음에 말해야 돼요. 실제로 앉은뱅이보고 일어나라! 절름발이 보고 일어나라! 담대하게 말해야 돼요.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수요 예배 시간입니다. 어떤 40대쯤 되는 남자가 그 부인과 함께 70이 넘은 할머니를 업고서 교회와서 2층에 할머니를 자리에 눕혀 놓았어요. 그래서 나는 그냥 나중에 알았는데 이 할머님이 넘어져서 허리가 부러졌어요. 병원에 데려가니까 나이 70이 넘은 할머니가 척추가 부러지니까 못살아나니까 그냥 집에 데려가서 장례치를 준비나 하라. 그때만 해도 우리 한국이 아직까지도 많이 원시시대에 가까웠을 때니까. 병원에 가니까 병원에서 그냥 돌아가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집으로 모시고 가는데 그 할머니가 그 아들과 며느리에게 말하기를 “오늘 수요일이지? 저 서대문순복음교회 가면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셔서 병든 자들을 고친다. 나 서대문순복음교회 좀 데려다 달라.” 그 할머님이 건강할 때 교회 몇 번 와본 것 같아요. 그 할머니 소원을 따라서 아들과 며느리가 데리고 교회 왔는데 제가 설교를 마치고 난 다음 병자위한 기도를 했는데 마음 속에 하나님 성령께서 말씀하기를 허리를 다친 사람이 나았다고 말하라!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병고치는 것을 알고 말하면 믿는 것을 낫는 것을 마음 속에 보고 믿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담대하지요.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 허리가 부러진 사람 왔는데 예수 이름으로 나았다고 하니까 할머님이 부시시 일어나더니 손을 들고 할렐루야~ 그러니까 그 옆에 있는 아들과 며느리가 막 울고 고함을 치고 야단이에요. 그리고 나중에 예배를 필하고 난 다음에 내 사무실에 왔는데 얼굴이 태양같이 빛나요. 그 할머니가... 빛나면서 자초지정을 얘기하는데 바로 허리가 부러졌다가 나았다고 그래요. 그래 어떻게 나았냐고 물으니까 “목사님이 기도할 때 자기가 낫는다고 확신을 하고 있었는데 허리가 아픈 사람이 나았다 하니까 나보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불이 확 몸에 들어오더니 아픈 곳이 싹 나아버렸다.”

익수시아, 권세는 말을 해야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입 딱 다물고 있는데는 아무 권세도 없어요. 그러나 권세있는 사람은 권세있게 말을 해야 돼요. 사정하면 권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걸하는 것이지... 권세있게 말해야 돼요. 요사이 학교의 선생님들이 학생들 징계하지 못하니까 애들이 선생님을 우습게 여기고 때려봐! 때려봐! 이러니까 교육이 안됩니다. 사랑은 권세가 있어야 되는데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종아리도 맞고 벌도 서고 소재도 하고 그러면서 달라졌거든요. 무조건하고 오냐오냐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방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녀들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채찍 때리시는데요. 하나님도... 사랑이신 하나님도 채찍을 때리시는 것을 채찍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의 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권세는 사랑의 매를 쓸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자식을 기를 때 사랑의 매를 들므로 아버지, 어머니의 권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권세를 단호하게 쓸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권세는 담대하고 타협함이 없고 단호하게 말해야지 이것이냐, 저것이냐 머뭇머뭇하면 권세가 안되는 것입니다. 병자보고서 병아 물러가라. 물러가라. 마귀보고 나가다오~ 플리즈~ 나가다오~ Please go out. 그러면 그것은 권세가 아닙니다. 구걸이지. 그러면 웃기네 웃겨 하고서 안나가요. 병을 보면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암아 떠나가라! 관절염은 물러가라! 신경통은 떠나가라! 귀신아 물러가라! 그렇게 해야지요.

3. 믿음과 말씀의 권능의 사용법

셋째로, 마음에 주신 믿음과 말씀의 권세를 이제 사용하는 방법을 제가 똑똑히 여러분에게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고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마가복음 11장 13절로 14절에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분명한 목표가 뚜렷합니다.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냥 많은 나무를 다 보신 것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 하나를 딱 보시고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같이 분명한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 그 목표를 정한 그 목표와 꿈에게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기를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얼마나 권세있게 명령하신 것 아닙니까? 나무보고서 주님이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단호하게. 다시는 너에게 와서 아무도 열매 못 따먹는다. 주님께서 그 나무 보고서 “이제 열매 맺지 말라. 응~ 이제 아무도 사람이 너에게 와서 열매 못 따먹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이 나무를 보시고 단호하게 딱 서서 엄하게 엄하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들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제자들이 보시고 “주님이 별 할 일이 없으신가보다. 나무 보고서 사람에게 말하듯이 호통을 치는 것 보니까...”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권세를 사용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말을 권세 있게 해야지 권세 있게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게도 권세 있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권세 있게 명령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안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모두 다 권세있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6절에 보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너 일어나 침상을 걸머지고 집으로 갈똥말똥 하여라. 그렇게 안했습니다. 가라!

마가복음 1장 25절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보고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잔소리 하지 말고 나오라!

그 다음에 누가복음 7장 48절에 죄 지은 여자를 보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다음 요한복음 11장 43절에 죽은 나사로를 보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얼마나 권세있게 말했습니까? 여러분도 권세 있게 말을 해야 돼요. 저주야 물러가라! 가난아 물러가라! 낭패와 실망아 물러가라! 우울증아 물러가라! 슬픔아 사라질지어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단호하게 명령해야 돼요.

성경에 주님께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강하고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명령하고 난 다음에는 알고 보고 믿어야 돼요. 자기가 말한 것이 이루어질 줄 믿어야지 말을 해 놓고 난 다음에도 될동 말동 하여라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강하게 믿어야 돼요.

마가복음 11장 22절로 23절 우리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제일 좋은 방법이 믿고 난 다음에 이루어진 상황을 종이에 기록하고 바라보는 것이 참 좋습니다. 기록하는 것이 굉장히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안생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았고 바라보았는데 믿음이 안생기면 기도하고 난 다음 그 모습을 기록해야 돼요. 적으면 굉장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꿈꾸는 것을 적으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에 바라는 것들을 자꾸 적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긍정적인 입술의 명령과 고백을 계속한다. 명령을 내려야 돼요. 명령을 입술로써 단호하게 한번 명령해서 안되면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명령해야 돼요. 마귀를 나가라고 한다고 안나간다. 한번 명령해서 안나간다고 물러가면 안돼요. 나가라! 나가라! 나가라! 계속해서 긍정적으로 계속해서 말해야 돼요.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가 긍정적으로 말하기를 원하느냐면 이름을 바꿔 버렸습니다.

아브람 보고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라!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 매일같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라고 별들을 바라보고 그렇게 말하지 말고 이름을 바꿔라. 너 이름을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고 해라. 우리는 우리 한국에서는 부부간에도 여보, 당신이라고 하지만 중동이나 구라파에서는 이름 부르지 않습니까? 그 부인이 매일같이 남편 이름을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이여. 입으로 시인한다 말입니다. 아에 긍정적으로 권세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건강하다. 나는 건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아침 일어나서 여러분 직장에 나갈 때나 교회 올 때나 그 말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라. 나는 기쁘고 즐겁다. 나는 기쁘고 즐거워라. 나는 평안하다. 나는 번창한다. 시편 23편 보십시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있을는지 없을는지 모르겠다가 아닙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단호합니다. 단호한 선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단호한 선언을 거듭거듭 하면 그것이 거대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매고 푸는 것은 여러분이 해야 돼요. 하나님 왜 나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안 만들어 줍니까? 김집사는 그렇게 만들어 주고 박장로는 그렇게 만들어줬는데 나는 왜 안만들어 줍니까? 하나님은 네 입의 말로 네가 묶였으며 네 입의 말로 네가 사로잡혔다. 입의 말로써 먼저 시인을 하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입술의 말로써 먼저 시인을 해야 돼요. 천국 열쇠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천국 열쇠를 여러분이 가지고 계세요.

그러니 알고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천국의 열쇠라구요. 여러분의 운명을 좌우하는 열쇠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 왔다갔다 하면서 빈손들고 왔다가 빈손들고 가는 것은 열쇠를 안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누구 원망하리요.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열쇠 줬는데 네가 안쓰니까 그렇지 않느냐. 오늘부터 여러분께서 열쇠를 쓰십시오. 알고 바라보고 믿고 말하라.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 얼마나 놀라운 말인 것이니까?

4. 믿음의 걸림돌을 제거하라

이제 마지막 넷째로, 우리가 이 믿음의 생활을 하는데 4차원의 영성을 사용하는데 걸림돌을 제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걸림돌이 뭐냐 하면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참 중요합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5절에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기도할 때 용서하라. 네가 용서해야 하나님이 너의 죄도 용서해 주신다. 죄가 있으면 안되잖아요.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해줘야 내 죄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네가 예수 안에서 용서받은 만큼 너도 네 이웃을 용서해 줘라. 베드로가 한번 큰 마음 먹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나에게 잘못을 저질른 사람을 얼마나 용서해 줄까요? 하루에 일곱 번씩 용서해 줄까요 하니까 주님이 베드로를 보고 베드로야,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번 용서해줘라. 일곱 번 용서하니까 490번 용서하라. 하루종일 용서해도 490번 용서 못합니다. 그러니까 한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할 때 한없이 용서해준 것처럼 너에게로 와서 잘못했다고 회개하거든 한없이 용서해줘라. 그러니 주님께 용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몰라요.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이 틀림없이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9장 17절에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회개만 하면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 당하지 회개만 하면 적은 죄로부터 큰 죄까지 다 용서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받아 벌받고 몸찢고 피흘려 청산했기 때문에 회개만 하면 다 용서받는다. 그러니 너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다 받을 수 있으니까 너에게 죄 지은 자도 다 용서해줘라.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만은 말년에 여러 가지 질병으로 불행한 나날을 보냈었습니다. 휘트만은 미국의 저명한 시인인 것입니다. 어느 날 의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의사가 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환자에게 처방을 해왔지만 아픈 사람에게 가장 좋은 처방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휘트만은 크게 공감하면서 “맞았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약이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의사가 휘트만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의사가 처방할 때 한 봉지 처방해서 안 나으면, 두 봉지, 세 봉지, 네 봉지, 열 봉지라도 줘야지요. 한번 사랑해서 안되면 열 번이라도 사랑을 해야지요.”

가슴이 뜨끔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되 끝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믿음과 말씀의 권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기 위해서는 믿음의 걸림돌을 제거해야 되는데 가장 먼저 용서하는 마음, 즉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8장 12절에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를 용서하시면 다시 기억도 안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용서가 나를 치료하고 이웃을 치료하는 큰 힘이 있습니다.

폴 투르니에는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는「폴 투르니에의 치유」라는 자신의 책에서 그가 경험한 임상 기록을 적었습니다. 악성 빈혈이 있는 한 여인이 무려 반 년 동안 다니면서 치료를 받아도 점점 병이 악화되고 그대로는 죽을 수밖에 없어요. 의사는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 병원에 입원해서 집중적으로 치료를 해야 되겠으니 준비해서 병원에 오라.”고 하니까 오겠다고 해놓고 난 다음 약속한 날짜를 지키지 않고 병원에 오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후에 그녀의 얼굴빛이 환하게 빛나면서 병원에 왔습니다. 빈혈 검사를 해 보니까 빈혈이 깨끗이 나았어요. “6개월을 지나면서 치료해도 낫지 않던 병이 어떻게 일주일만에 나았느냐?” 의사가 놀라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여인은 “제가 오랫동안 미워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며칠 전에 그를 찾아가서 용서했습니다.” 악성 빈혈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다가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자 단번에 나아버렸습니다. 그러니 치료와 용서는 얼마나 관계가 많지요?

여러분 기도를 해도 병이 안 낫거든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지 가슴을 한번 살펴 보세요. 그러면 그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마음으로 용서해주면 여러분 동시에 병도 나아버리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와 사랑이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은 크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루이스 B. 스메데스라는 미국의 작가가 말하기를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용서할 때, 당신은 당신의 내면세계에서 자라던 악성 종양을 제거하는 것이다.”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해 주었는데 그 용서한 만큼 내 몸에 자라는 종양을 잘라내는 것과 같다. “죄수 한 명을 해방시켜 주었는가? 그 죄수는 바로 당신 자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해 주면 내가 그만큼 용서받고 남을 사랑하면 내가 치료를 받고 남에게 은혜를 베풀면 내가 은혜를 받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결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태산을 옮기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은 다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여러분 오늘 교회 오셔서 저의 설교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들어가서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먹는 음식이 뱃속에 들어가서 양분을 만들어 내듯이 믿음은 듣고 나면은 그것이 들어가서 믿음을 만들어내요. 성경을 보고 읽든지 설교를 듣든지 하면 믿음이 생겨나요. 큰 믿음이 안생겨나도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만 있어도 충분해요.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이 있으면 태산이 옮겨간다. 태산같은 슬픔과 우울증과 고통과 질병과 염려와 근심과 불안과 초조와 절망과 좌절과. 다 물러가요. 어떻게 물러가느냐. 내가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권세를 사용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고 그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 그대로 되리라. 안다는 것은 말씀을 읽어서 아는 것입니다. 생각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성경에 있어요. 하나님의 생각을 내가 읽어서 내 생각 속에서 깨닫게 되면 아는 것입니다. 산이나 바다는 3차원, 믿음은 겨자씨 만해도 4차원인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으면 3차원입니다. 내 마음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우리 생활이 흑암이 깊음 위에서 좌절과 절망, 희망이 없다. 그러나 아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십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이 운행하십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여러분이 오늘 내 설교를 기억하십시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어떻게 된다는 것을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 빛이 있으라. 궁창아 생겨나라. 바다야 만물아 생겨나라. 그대로 되고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011. 1. 16.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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