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박사의 기독문학세계] 근·현대 기독문학 이야기
포스트모던시대 기독문학의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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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에서 시작된 인본주의(Humanism)는 1400년경 르네상스, 1700년경 계몽주의로 발전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기독교는 300년경 로마 제국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1500년경 종교개혁을 맞이함으로 영적 대각성운동으로 이어져 18-19세기를 거치면서 영적 부흥과 교회성장을 폭발적으로 이룬다.
분명히 인본주의와 기독교는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창출할 수밖에 없었다. 인본주의는 근대 과학에서부터 출발하였고 과학은 인간이 모든 것을 측정한다는 원칙에 충실하다. 때문에 신의 존재는 부정된다. 휴머니즘을 신봉하면 사람들은 매우 단순하고 평면적인 인생관을 갖게된다. 어느 팝송의 가사처럼 ‘There is no God, enjoy your life’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에 인본주의는 기독교의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경건주의와 카리스마적 신앙을 부정함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거부한다. 다시 말하면 인본주의 문화 속에서는 복음의 순수성이 사라진다.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길이요 진리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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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시대의 특징은 모든 가치의 부정이다. 한국문단의 예를 들면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논쟁이 한창이던 1980년대부터였다.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는 원래 건축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인데, 문학에서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반발하여 새롭게 시작된 지적 움직임을 일컫는 말이다.
이 지적 움직임의 핵심적 이유는 종래 관습적 문학 양식으로는 20세기 후반의 계시록적 시대의 리얼리티를 도저히 담아낼 수 없다는 문학적 고갈의식 때문이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문학의 이 부정적 한계는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오직 작가는 파편화한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제시하여 포용할 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시대에 작가란 특별한 사람으로서 사회로부터 분리된 자이며 전지전능한 신적인 존재라는 낭만주의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작가의 상상이 창조력을 지니기 때문에 문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작가의 현실참여는 문학적 사명으로서 상당한 권위의식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작가들은 이러한 작가적 존재 의미와 사명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나는 이런 현상을 ‘미적 정서의 불확실성’이라 정의 하고자한다.
미적 정서의 불확실성은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독자들은 문학작품의 에피파니(epiphany·계시의 현현)를 거부한다. 작품을 통하여 고양되고 심오한 지적 내지 정서의 깨우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에피파니의 부정은 질서의 회복에 대한 불신이다. 한 작품이 추구하는 구심점을 거부하며 작품이 지향하는 사상도 인정하지 않는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시대 작가의 권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독자의식의 한 예를 우리는 패러디(parody)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패러디는 기존의 어떤 것에 대한 흉내를 통해 그것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또는 그것이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하나의 전략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패러디를 독자는 일종의 창작으로 느끼며 쾌감을 얻고 스스로를 비평가의 입장으로 승격시킨다.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열린 시대, 열린 사조의 흐름 속에서 문학 작품은 나름대로의 결말조차 내지 못한 채 막을 내린다. 그리고 결말은 독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미 학자들과 작가들은 문학과 기독교 신앙의 통합을 위한 기반으로서 성경의 본보기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과 성경은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것을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루이스(C.S.Lewis)는 “건전한 의미에서, 성경은 결국 문학이므로 문학으로서가 아니면 올바로 읽을 수 없다” 고 하였으며 프라이(Northrup Frye)는 “성경은 실제로 문학이 되지 않고도 최대한 문학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폴진(Polzin), 크로산(Crossan), 데트바일러(Detweiler)등의 성경학자들은 성경연구의 도움을 얻기 위해 문학적 방법을 도입하였으며 알터(Robert Alter), 라이컨(Leland Ryken), 커모드(Frank Kermode), 프라이(Northrop Frye)등의 문학 연구가들이 문학 비평으로서의 성경에 접근함으로써 미학이나 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뿐만 아니라 독자와 청중에게 감명을 주는 예술적 수단으로서의 성경 연구를 체계화 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금세기의 위대한 작가들, 엘리옷(T. S. Eliot)나 카프카(Franz Kafka), 톨스토이(Lev N. Tolstoj) 등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성경은 추상적인 교리의 형태로나 조직신학의 형태로가 아니라 문학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해석하면서 기독교는 세계에서 가장 문학적인 종교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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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문학을 통하여서도 길을 찾고 진리를 모색하고 생명을 꿈꾼다. 문학을 통해 찾아가는 길은 감동이라고 하는 심리적 반응을 통해서이다. 감동이라는 이 울림은 한 인간이 대상을 자기의 온 몸으로 직관으로 파악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문학적 감동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의 기쁨에 동참한다. 그리고 슬픔과 고통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것들이 자기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느낌으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이 반성으로 인한 각오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게 만들며 그것의 부정적 힘을 인지하게 한다. 인간을 억압하는 이 부정적인 힘에 대한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여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하는 열망을 갖게 한다. 에덴 회복에의 열망은 인간의 잠재된 욕망이다.
우리가 이러한 문학세계에서 ‘성서문학’과 ‘기독문학’을 관찰한다면, 문학이 인간에 의해 말하여지고 만들어진 인간을 위한 진리의 길이라면 성서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말하고 그에 의해 만들어진 진리의 길이다. 그렇다면 성서문학은 문학의 장치들로 쓰여진 성서를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학문이며 이는 성서가 문학에 끼친 영향을 함께 연구한다. 그리고 기독문학은 성서의 미적 정서를 통한 감동을 문학의 형식으로 형상화함이다. 때문에 인간이 문학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길은 결국 성서문학 속에 숨겨져 있는 길이 아닐까한다. 내가 기독문학을 전력적(全力的)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위대한 일은… 하나님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 태도가 아니라, 진리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 주 임마누엘을 추방하지 않는 일”이라 하였다. 나는 미학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추방해서는 안 되며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문학이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상상을 통하여 미학적 언어로 창조해 나가는 작업이라는 작가적 신념을 갖고 있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탄생시키는 작업이 아니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즉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있는 이미지를 살아 숨쉴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나는 여러분의 삶이 기독문학을 통하여 감정을 자극하는 아름다움과 아이디어를 자극하는 호기심과 존재의 근원을 자극하는 영성을 간직하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아울러 학문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가 ‘성서는 바로 문학작품의 이상’이며 ‘예술의 대법전’이라는 인식의 차원으로 비상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