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봉독>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38-44)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복음 11장 38절로 44절 말씀 가지고 “나사로야 나오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따라하시겠습니까?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야 나오라.”
참된 행복은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것을 많이 가지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전 세계 행복지수를 조사해보면 잘 사는 나라가 행복지수가 높은 것이 아닙니다.
서던 캘리포니아대학교의 리처드 이스털린 교수는 70년대 중반에 방글라데시, 부탄 과 같은 빈곤 국가들의 행복지수가 아주 높았고 선진국들은 행복지수가 낮았다고 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바 있습니다. 최근 그는 한국, 중국, 칠레의 경우를 보면 지난 20년 동안 일인당 국민소득이 두 배 이상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만족도는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행복의 수준이 소득수준과 함께 높아지지 않는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을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가난한 나라에 입을 옷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맨 발로 다니고 있지만은 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행복지수가 그렇게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 것의 소유를 하고 안하고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고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영접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오실 때 참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치료가 있는 것입니다.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절망하고 좌절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 예루살렘 입구에 베다니라고 하는 동네가 있었는데 그 곳에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오라버니 나사로와 그 여동생 둘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아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가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 꼭 이 집에 들러서 머무시면서 말씀을 전하시고 쉬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정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참된 행복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예수님 오시면 온갖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잘 섬기고 또 말씀을 통하여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갑자기 중병이 들어서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오라버니를 부모님처럼 여기고 믿고 의지하고 살았던 누이들이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예수님을 모셔와야지 우리 오라버니가 낫겠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는데 소식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나사로가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입니다. 두 여동생이 통곡하며 울며 “오빠, 오빠, 우리를 두고 가면 어떻게 해.” 눈물을 흘리고 큰 소리로 외쳤지만 오빠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행복으로 가득했던 가정에 절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1. 죽은 나사로
첫째로 죽은 나사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 찾아왔을 때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7절에,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지 4일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예수님이 일찍 오셨더라면 참 좋았을텐데’하고 예수님 오실 그 때만을 기다렸는데 나사로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하루, 이틀, 삼일, 사일이 된 다음에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 마르다가 멀리 동네 입구까지 뛰어 나가서 예수님한테 안타까운 마음을 전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1절에,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사흘 전에만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예수님은 우리 오라버니를 살릴 수 있으셨을 텐데 왜 이제 오십니까? 마르다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님을 아직 그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속의 4일 전의 예수님만 찾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일 이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이 나도 그 때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걸 하는 얘기를 합니다. 저도 어린 때에 우리 조용기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열두 해 혈루병을 앓은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을 붙잡고 병이 고침 받았다는 설교를 들으면서 야, 나도 그 때 있었으면 붙잡았을 텐데 나도 옷자락 한 번 붙잡았으면 기적이 일어났을텐데 그런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천년 전에 옷자락을 붙잡을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으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과거의 예수님을 찾고 있어요. 사일전에 예수님이 오셨으면 살았을텐데. 그리고 마르다는 이미 오라버니가 죽었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죽음이외에 영원한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 영생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에,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예수님은 어제의 예수님이 되시고 오늘의 예수님이 되시고 영원한 미래의 예수님이 되셔서 우리를 저 천국까지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눈먼 자를 뜨게 하고,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이 오늘도 그와 같은 놀라운 기적을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셔드리면 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와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스토미 오마샨 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지금 기도할 때다” 이런 책을 쓰셨고, 또 기도의 능력 시리즈를 쓰셨는데 책이 1200만부가 넘게 팔렸습니다. 이 분은 어릴 때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어머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니까 이 딸을 너무나 못살게 굽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아내가 정신질환이 있고 하니까 아예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라나면서 큰 마음에 절망과 상처를 안고 자라났습니다. 우울증, 불안, 초조, 그리고 자살충동 이런 것 때문에 그는 아주 불행한 어린 시절을 지나고 그가 장성하여서는 알콜 중독에 빠지고 마약 중독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괴로워서 동양종교도 찾고 신비종교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처치 온 더 웨이를 목회하고 계신 잭 헤이포드 목사님을 통하여 예수를 만났습니다. 할렐루야. 이 잭 헤이포드 목사님은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아주 큰 교회를 목회하시는데 우리 조용기 목사님과 가깝게 지내시고 성령운동 하는 목사님이세요. 그 곳에 와서 예수 믿고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그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가 상처투성이인 인생을 살았지만 예수 믿고 나서 변화되어서 받은 은혜를 전 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고 그리고 자기가 그와 같은 절망의 상황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지금 미국의 또 전 세계의 자기와 같이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 복음의 소식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치료하는 용서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고백했습니다.
“내 힘으로 인생을 잘 살아보겠다고 했던 모든 시도는 나를 거의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 나는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어머니의 손에서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 나는 약물을 과용하고 술을 과음했다. 수많은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꼈고, 술과 약물로 두려움과 불안과 우울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나갔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에 시달리며 살았고, 밤새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몰라 잠자리에 들기조차 두려웠다. 하루를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아 아침에 눈 뜨기가 무서웠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 하지만 나는 구원받고 자유로워졌고 변화되었고 온전해졌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하신 일을 지금 당신에게도 해주실 것이다.”
자신을 변화시킨 것처럼 절망에 처한 모든 사람을 구원해준다고 그가 다니며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젊은이들이 상처입은 그 모습에서 벗어나서 예수님 안에서 꿈과 희망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 냄새나는 그 나사로와 같은 모습으로 살았다 할지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삶에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분인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우리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동일하시니라. 동일하시니라. 어제의 예수님만 바라보지 마시고 오늘도 역사하시고 다가올 미래 가운데 역사하실 우리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나사로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썩어지는 냄새를 냅니다. 절망의 냄새, 슬픔과 좌절의 냄새, 그 삶 속의 부정적인 생각의 냄새, 죄와 탐욕의 냄새, 온갖 냄새를 풍기며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 인간이 죄 짓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썩어진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악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악취를 풍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거듭나야만 우리는 썩어져 냄새나는 인생에서 살아있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2. 다시 살아난 나사로
둘째로 다시 살아난 나사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 그 앞에 나와서 울면서 ‘예수님이 사일전에 오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살았을텐데’ 말하는 마르다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 마리아도 예수님 앞에 와서 울면서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좋았을텐데’ 이야기합니다. 저들이 얼마나 슬피우는지,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그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보다 앞에 와서 지금 무덤에 들어가 돌을 가로막았는데 그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 말씀하셨어요. 당시 유대인의 장례법에 굴을 파고 그 안에 무덤을 만들어 그 무덤 입구를 돌로 막습니다. 시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돌을 막습니다. 또는 바위에 구멍을 파서 그 안에 시신을 두고 돌로 가로막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와서 그 돌을 옮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옮기라고 하면 옮기면 되는데, 마르다는 인간의 생각을 말합니다. “예수님 지금 오빠가 죽은지 나흘째가 돼서 지금 썩은 시체 냄새가 나는데요.” 마르다는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이야기합니다. 3차원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눈 앞에 있는 현실 속의 절망과 좌절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보고 낙심하고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3차원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4차원의 인생, 영적 차원의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보이는 것 없고, 귀에는 들리는 것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믿음으로 나아갈 때 기적이 다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11장 40절에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여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믿으면,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믿음인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것을 우리가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꿈꾸고 믿고 바라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기적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축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꾸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갖고 이야기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그대로 것은 일상적인 믿음이예요. 그것은 ‘내가 기차를 타면 목적지까지 날 데려다줄 것이다’라는 일상적인 믿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이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아브라함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믿었던 그 믿음을 말합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랬다 했어요. 3차원적인 인생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미 본인도 나이가 너무 들었고 아내도 나이가 너무 들어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자녀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된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저 믿었던 것입니다. 믿을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여러분 무조건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주님 말할 때 자꾸 토를 달면 안돼요. “살이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요.” 이렇게 되었는데요, 저렇게 되었는데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옮기라고 하면 옮기면 되는 것이지. 우리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자꾸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 돌을 옮겼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1절에, 돌을 옮겨놓으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불신앙의 돌을 옮겨야 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의 돌을 옮겨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의 돌을 옮겨야 되는 것입니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끝났다. 죽고 싶다.’ 이런 생각의 모든 잘못된 모습을, 그 돌들을 옮겨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의심의 돌, 고집과 교만과 불순종의 돌을 옮겨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도 마음에는 의심이 가득하면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을 때 확실하게 믿어야 되요. 주님께 맡기고 믿고 나아가면 기적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심한 감기가 걸렸는데 약국에 가서 약을 사다가 놓고 “하나님 아버지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안 고쳐주시면 이 약을 먹겠습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약을 갖다 놓고 안 고쳐주면 약을 먹겠습니다. 하는 것은 약을 먹겠다는 얘기거든. 그냥 약을 먹으려면 “하나님, 이 약을 먹고 속히 낫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하고 약을 먹던지, 이것 본인이 그렇게 믿음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믿음은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기적을 사모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돌을 옮겨놓았을 때, 예수님이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보세요.
요한복음 11장 41, 42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할렐루야. 어떤 절망 적인 상황에서도, 문제를 만났어도,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이 다가와도 감사하십시오.
시편 50편 14, 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무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할렐루야. 감사기도를 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3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할렐루야. 여러분,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절망에 처한 자들아 주님께 나오라. 슬픔에 처한 자들아 주님께 나오라. 죽고 싶어서 이대로 살 수 없다고 하는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 자들아, 주님께 나오라.
여러분, 세상의 부정적인 생각, 자살 충동, 저주 받은 생각, 실패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죽은 나사로처럼 살지 마시고 오늘 주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는 음성을 듣고 모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문제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큰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3. 자유케 된 나사로
셋째로 자유케 된 나사로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요한복음 11장 44절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나사로가 나오는데요. 베를 칭칭 감고 쭈뼛쭈뼛 나오는 거예요. 주님 말씀하시기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되었는데도 온 몸을 칭칭 베로 감은 나사로처럼 문제를 감고 삽니다. 죄의식의 베를 칭칭 감고 살아요. 그래서 늘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그럼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요. 마음이 어두워요. ‘나는 실패한 과거가 있습니다. 상처 입은 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에 칭칭 감겨 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불우하게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에 대한 마음의 아픔이 있어요. 그래서 아픔의 베를 칭칭 감고 있습니다. 그 시험이 뭐라고, 시험에 떨어졌던 실패의 경험 때문에 그것을 칭칭 감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재수를 하느라고 너무 고생을 했습니다.’ 지나간 지가 언젠데 지금도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시집와서 시어머니에게 너무 구박을 받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천국간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베를 칭칭 감고 사는 사람이 많아요. 가난과 저주의 베도 감고 있고, 질병의 베도 감고 있고, 우리가 이 모든 베를 풀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오늘 모든 결박을 풀어 놓아라. 예수 믿고 나서 지금까지 너를 붙들어 매고 있는 모든 결박을 풀어버려라. 가난과 저주와 질병과 죄의식과 과거의 상처와 염려와 근심 걱정의 결박을 풀어버려라.”
무엇이 여러분을 묶고 있던지 간에 이 시간에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모든 결박에서 자유케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베로 감긴 나사로의 모습으로 살지 마시고 이제 모든 것을 풀어버리고 이제는 주님 안에서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죄의식의 결박에 묶여있지 말고 죄의식의 결박을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질병의 결박에 묶여있지 말고 그 질병의 결박을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가난과 저주의 결박을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우리가 풀기가 힘들어요. 누가 풀어줘야 되요. 누가? 성령께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오늘 내 마음 가운데 오시옵소서. 바람같이, 불 같이, 생수같이 임하여 주옵소서. 나를 사로잡아 주옵소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성령 충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 19절, 예수님의 첫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에게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할렐루야. 성령이 임해서 나를 기름부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와 절망의 포로 된 자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눈 먼 우리를, 영적으로 눈 먼 우리를 다시 보게 하시고, 우리를 눌린 모든 것에서 자유케 만들어주시고, 주의 은혜의 해, 희년의 축복을 누리며 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성령님은 살리는 영입니다. 생명의 영입니다. 치료의 영입니다. 복음 증거의 영입니다.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고,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 치료함이 있고,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 용서함이 있고,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 복음 증거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 53년의 역사가 성령 충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은 우리 교회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조용기 목사님을 세워주셔서 잠자고 있는 한국 교회를 깨우고 전 세계에 성령운동을 확산시키셔서 오늘날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성령 충만의 은혜를 사모해야 됩니다. 예수 믿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베에 감겨있습니다. 패배의식, 좌절의식에 감겨있습니다. 이를 성령으로 풀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옆에 계신 두 분 이상 이렇게 인사하세요.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평생 많은 패배의 삶을 살았는데 예수님의 은혜로 승리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군으로 쓰임 받은 분의 이력서를 소개합니다. 1831년 사업에 실패하다. 1831년 사업에 실패하다. 1832년 주 의회에 진출하려다 패배하다. 1833년 두 번째로 사업에 실패하다. 1836년 신경쇠약으로 고생하다. 1838년 국회 하원의장 선거에서 패배하다. 1840년 대통령 선거 위원 선출에서 패배하다. 1843년 하원에 진출하려다 패배하다.(뭐 되는 게 없어요.) 1848년 또 다시 하원에 진출하려다 패배하다. 1855년 상원에 진출하려다 패배하다. 1856년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패배하다. 1858년 또 다시 상원에 진출하려다 패배하다. 그런데 1860년 대통령에 당선되다.
할렐루야. 이분이 바로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입니다. 그의 이력을 보면 계속 패배의 연속이었는데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 십자가 붙잡고 승리한 것입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고향을 떠나며 남긴 그의 연설이 매우 유명합니다. 그의 일부분을 소개해드리기 원합니다.
“이제 나는 언제 돌아오게 되는지, 또 과연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지 모르면서, (이 말을 했기 때문에 살아서 못 돌아 온 것 같아요.) 초대 대통령 워싱턴에게 부여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정든 이 마을을 떠납니다. 그를 돌봐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나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도움이 있는 한 나는 절대로 실패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함께 워싱턴으로 가실 하나님! 여러분과 함께 이 마을에 남아 계실 하나님! 그리고 선을 위하여 어느 곳에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으면서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자신과 희망을 우리 모두 가집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도록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해 줄 것을 바라는 것처럼 나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며 눈물어린 작별을 고하는 바입니다.”
위대한 선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는 한 나는 결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는 한 나는 어떤 절망도, 어떤 슬픔도, 어떤 좌절도 이깁니다.
왜냐? 살아계신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셔서 주의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우리를 풀어놓아 자유케 만들어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패배의식도 풀어놓아주시고, 가난의식도 풀어놓아주시고, 저주의식도 풀어놓아주시고, 우리를 꽁꽁 묶고 있는 실패의식, 정죄의식, 과거의 상처, 질병, 고난, 모든 인생의 역정에 고통의 결박을 풀어놓으시기 때문에 주님이 함께하시는 한,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아니하고 이기고 또 이기며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위대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큰 복을 누리며, 풀어 놓아 자유케 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2011. 5. 29.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