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 기자회견서 호소
북한 요덕수용소에 수감된 아내 신숙자 씨와 두 딸인 혜원·규원의 구명운동을 펼치고 있는 오길남 박사(서울대)가 5일 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대표 김태진)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제발 죽기 전에 내 딸과 아내를 귀향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오 박사는 “1995년 국제앰네스티를 통해 가족의 생존을 확인했고, 4년 뒤인 1999년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를 통해 아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후로는 생사를 알 수 없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그는 또 “1990년대에 대한적십자와 홍콩적십자를 통해 가족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종북좌파 인사들이 두더쥐처럼 사회 곳곳에 들어가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고 두렵기까지 하다”고 전했다.
1985년 “북한에서 경제학자로 일해 보겠느냐”며 접근한 북한 요원의 공작에 넘어가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간 오 박사는,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된 후 부인 신 씨의 강력한 권유로 1986년 홀로 북한을 탈출하게 됐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오 박사는 당시 입북을 강요했던 인물로 작곡가 윤이상,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 북측 행동대장 김종한 등을 언급했다.
이어 1988년 3월 북한을 이탈한 죄로 요덕수용소에 수감된 경험이 있는 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의 김태진 대표는, 당시 만났던 오 박사의 아내와 두 딸에 대해 회상했다.
수감 1년 뒤인 1989년, 수용소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 행동이 자유로워진 김 대표는, 어느날 신숙자 씨 모녀가 머무는 집에 방문하게 됐다. 김 대표는 “수용소에서는 주식으로 옥수수가루를 먹는데, 신숙자씨가 옥수수가루를 버무려 와플을 만들어줘서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김 대표는 마지막으로 “아직도 북한을 찬양하며 잘못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북한의 지령을 받은 소수 무리가 사회에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며 “북한은 우리가 환상을 가질 수 있는 곳에 아니며, 그 현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전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북한 수용소에 수감됐던 탈북자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1999년부터 3년간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던 정광일 씨는 “간부들이 오각대를 가지고 가차없이 때려 뒷머리가 깨졌고, 양팔을 등 뒤로 꼬게 한 후 허벅지를 발로 찼다”고 했다. 결국 함께 지하 유치장에 있던 2명의 수감자는 모두 죽었다. 그는 “처음 수용소에 들어갈 때는 몸무게가 75kg이였지만, 심문의 고통으로 몸무게가 38kg으로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2003년 4월 탈북해 2004년 4월 한국으로 온 정 씨는 “남한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요덕 수용소의 악몽을 계속 꾼다”며 “가끔 술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고, 악몽을 꿀 때는 몸이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