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 설교] 내가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았을 때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창 39:10~20)

할렐루야~ 한번 신앙고백을 하십시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행복합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평안합니다. 건강합니다.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룹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에게 좋게 될 거에요.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은혜 나눌 제목은 “내가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았을 때” 이 제목인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씨줄 날줄처럼 서로 연결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와 같은 상처를 어떻게 해야만 우리가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예전에 TV ‘동물의 세계’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동물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정글의 법칙에 큰 관심을 기울여 보았었습니다. 동물의 세계가 같은 동물들이 모여서 군거하기 때문에 다 똑같은줄 알았는데 거기에도 계급 차별이 있어요. 제일 왕초가 있고 그 다음 부하들이 있고 끊임없이 자라오는 부하들은 왕초에 대해서 도전하고 왕초는 부하들을 다스리고 억압하고 하다가 나이 늙고 힘이 없으면 쫓겨나고 쫓겨난 동물은 무리에서 사라지고 혼자 외롭게 정글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인간사회도 공식적인 역사의 뒤에 감추어진 숨은 힘으로, 때로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 개인이나 집단을 파괴합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익과 결탁된 음모를 가지고 온갖 공격을 다합니다. 인간사회는 이처럼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서로 간에 긴밀한 관계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에는 언제나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고 마음에 깊은 원한과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스스로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집단 속에서 잘못한 사람으로 치부시켜서 고난을 당하게 합니다. 그는 집단에서 쫓겨나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그것을 치유하지 못해서 슬픔을 마음 속에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될 것입니까?

<본론>

1. 요셉이 당한 억울한 일

우리는 성경에 보면은 요셉이 당한 너무나 억울한 일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열한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열둘이나 있는데 다른 열한 아들들은 다 마음속에 세상이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았는데 요셉만이 유독히 달랐습니다.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꿈을 품고 살았었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꿈이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그냥 세상을 따라 삽니다. 그런데 요셉은 유독히 꿈이 있어 그 꿈이 마음을 점령했기 때문에 꿈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형들과 모여서 앉으면 자기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형들 내 꿈이야기 들으십시오. 형들과 내가 추수를 하러 갔는데 형들의 단과 내 단이 함께 섰는데 형들 단들이 내 단을 쭉 둘러서더니만 절을 합디다. 형들이 들으니까 기가 막히거든. 이 고약한 놈 지가 우리 왕이 되겠단 말 아닌가?

그리고 그만 두었으면 좋겠는데 요셉이 또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형들 내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형들은 별들이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나를 향해서 넓적 절을 합디다. 그러니 형들이 일어나서 이 죽을 놈의 자식, 이게 뭐 건방진 놈이 한번 꾸어도 좋을 텐데 두 번 세 번 꿈 이야기를 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어디 두고 보자. 그리고 완전히 사귀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 양을 치는 들판으로 갔다가 형들이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저 자식 꿈꾸는 놈이 온다. 꿈꾸는 놈을 잡아 죽여 버리자! 그래서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 한번 알아보자.

여러분, 이 어려운 세상에 살면서 꿈을 품은 사람이 고난과 핍박을 받습니다. 그런데 꿈을 품은 사람을 사람들은 죽여 버리려고 하지만 일단 가슴에 꿈을 품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육체적인 인간일 뿐 아니라 그 속에 4차원이 영성인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꿈은 현실을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요셉이 그와 같았습니다. 억울하게 형들에게 들에서 잡혀가지고서 옷이 발가벗김을 받고 마른 우물에 던져 넣었다가 아라비안 대상이 오니까 종의 돈을 받고 종으로 팔아먹었습니다. 그는 17살에 아버지를 떠나 가정을 떠나 멀리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 하인으로 팔렸습니다. 보디발은 그때 애굽 임금님의 경비병 대장이었습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 종이 되어 그 주인을 위해서 일을 하는데 꿈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형통함이 따르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를 않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꿈을 마음 속에 품으면 여간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고통 속에 항상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형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좋은 일을 이루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지으셨을 때 다섯 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좋은 일입니다. 마귀가 하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나쁜 일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좋은 일인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마음에 꿈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좋은 일이 생겨납니다. 아무리 현재에 어둡고 캄캄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참고 견디면 꿈이 여러분의 인생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꿈을 품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갈보리에서 피흘려 달려있는데 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죄도 불의도 질병도 저주도 죽음도 다 청산해 버리고 우리에게 용서와 의, 거룩함과 성령충만, 치료와 건강,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 부활과 영생천국을 허락해주는 꿈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하나님이 이 꿈을 우리에게 주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이 꿈을 마음 속에 품고 있으면 이 꿈을 통하여 어떠한 형편과 환경에 있던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 마음 속에 꿈을 품으면 그 꿈이 여러분과 나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을 꿈이 다스려 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운명이 바꾸어질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꿈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내 힘으로 이전 것을 지나가게 하고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 속에 꿈을 품으면 꿈이 여러분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어서 보디발의 집이 잘되고 모든 것이 형통하니까 요셉을 가정총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보고 마음에 흑심을 품고 자꾸만 꾀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 그 꼬임에 빠지지 아니하고 저항했습니다. 하루는 대낮에 다 종들이 들로 일하러 갔는데 대청마루에 할 일이 있어서 요셉이 가는데 늦잠을 자고 잠옷 바람으로 기지개를 켜고서 보디발의 아내가 나오다 보니 요셉이 바로 대청에 와서 일을 보고 있거든. 이때다 싶어서 달라들어서 붙잡았습니다.

요셉이 놀래서 도망을 치는데 옷이 그 보디발의 아내의 손에 잡혔기 때문에 옷을 벗어놓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니 부인이 흠모하던 마음이 미움과 원한으로 변화되자 고함을 쳤습니다. 사람 살려라. 온밭에 있는 종들이 다 돌아오고 주인도 돌아옵니다. 요셉의 옷을 들고 흔들면서 이 놈이 나를 겁탈하러 온 것을 내가 고함을 치니까 옷을 벗어 놓고 도망쳤다. 사람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원통하지요. 변명을 할 수 없습니다.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증거는 옷을 벗어 놓았으니까 무슨 말로도 증거를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그 남편이 분이 났겠습니까? 더구나 군인인데... 성경은 기록 안했지만 요셉이 거의 못 일어날 정도로 얻어 터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시위대 뜰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인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정치범 수용소인 그 감옥에 들어가면 평생에 감옥에서 나오지 못해요. 요셉이 그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 마음 속에 꿈을 품고 있습니다. 그 어려운 환경에도 하나님이 주신 꿈은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계획을 초월해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마음 속에 요셉은 꿈을 품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이 우리보다 위대한 점입니다. 우리는 그쯤 되면 신앙도 버리고 꿈도 버리고 원망하고 탄식할 것인데 요셉은 그 속에 꿈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감옥에 그 당시 있으니까 여러분 형편없는 대우를 받지 않습니까? 대소변을 감옥 안에서 보고 빵조각 하나 던져 주면 그것을 받아 먹고 그 어려운 비위생적인 곳에서 2년이 넘도록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왕궁에서 사람들이 와서 요셉을 찾았습니다. 요셉이 나가니까 갑자기 요셉을 이발을 시키고 옷을 입히고 그리고 왕금수레에 태워서 임금에게로 가는데 임금님이 당신이 요셉이냐? 그렇습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우리 학자들이 다 와서 꿈을 해석하려고 해도 해석을 못하는데 당신은 꿈을 잘 해석한다는 말을 술장관을 통해서 들었으니 그 꿈을 해석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해석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자기 꿈을 말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인즉 7년 대풍이 왔다가 7년 큰 흉년이 올 꿈이었습니다. 요셉이 그 말을 하고 풍년에 알곡의 5분지 1을 저장해 놓았다가 흉년 동안에 이를 백성에게 풀어 주면 나라가 살고 민족이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니 왕이 무릎을 치면서 이렇게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을 얻을 수가 있느냐. 내가 오늘 너를 국무총리로 삼노라. 자기 반지를 뽑아서 끼워주고 둘째가는 두레에 태워서 엎드리라고 하니 모든 관리와 백성들이 요셉에게 엎드렸습니다.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꿈을 버리지 아니하면 꿈이 결국 성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삶이 고달프고 괴롭고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절망 상태에도 꿈을 갖고 있으면 꿈이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찬 꿈을 가슴 속에 품고 포기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환경이 좋다고 말은 안합니다. 어렵고 고통스럽고 쓴물이 넘쳐나는 환경일 수가 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꿈을 가질 수 있도록 마련해 주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우리가 꿈을 가질 수 있는 터전인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부정적인 파괴적인 흑암의 세력의 열매를 멸하셨습니다.

저는 실로 우리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이 그릇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에게 담당시켰다. 바로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음을 걸머지고 갈보리산에 달려서 오늘 여러분보고 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 그의 고난을 통해서 승리의 꿈을 마음 속에 심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 의미없이 예수님 고난당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과 나에게 꿈을 심어 주기 위해서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 꿈을 받아들여서 우리가 믿고 나가면 그 꿈은 우리의 모든 역경을 물리치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영광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13년 동안 그 험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꿈을 버리지 않았을 때 꿈이 요셉을 이끌어 갔습니다. 그 형들은 이 놈을 잡아 죽여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 했는데 꿈이 요셉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그를 영광으로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요셉이 나중에 형들에게 말하기를 형들은 나를 해하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이것을 영광이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 속에 꿈을 품고 있으면 해하려고 해도 그것이 오히려 선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헬렌 켈러는 시각, 청각의 장애를 지닌 복수 장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후 19개월만에 뇌척수막염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시각도 잃고 청각도 잃어버렸었습니다. 그녀는 성장하면서 자신과 같은 장애자를 돕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으로서 처음으로 학사 학위를 받고 작가로서 그리고 사회사업가로서 활동하며“빛의 천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련은 있으되 꿈이 없는 것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시련은 다가와요. 헬렌 켈러에게는 눈도 못보고 귀도 못듣는 시련이 다가와요. 그러나 꿈을 버리지 않으니까 꿈이 그로 하여금 역사에 남는 인물로 만든 것입니다. 시련은 있어도 꿈은 버리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불광동에서 천막치고 가마니 깔고 개척할 때 내 마음에 잊어버리지 않는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14세 먹은 아주 영양실조에 걸리고 옷한벌을 입고 겨울에 벌벌 떠는 소년이 그 여동생의 머리도 씻지 않고 아주 새집처럼 된 머리털을 가진 여동생이 콧물을 역시 질질 흘리면서 그 오빠의 손을 잡고 우리 천막교회에 왔어요. 그 보니까 그분이 시력을 잃어버렸어요. 눈뜨기 위해서 천막교회에 왔는데 내가 아무리 안수해도 눈이 안떠졌어요. 그래서 내가 참 마음에 너무 불쌍히 여기고 괴롭게 여겼는데 그는 육신의 눈은 못떳지만 영의 눈을 뜬 사람이었습니다.

천막교회 와서 설교 듣고 그 추운 가운데 헐벗고 굶주리면서 놀랍게 신앙 속에 있더니 후에 하나님이 그 꿈을 통해서 그 사람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나중에 백악관 대통령 참모까지 되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이 강영우 박사입니다. 나는 그분의 과거를 너무나 생생히 알기 때문에 너무나 비참하게 헐벗고 굶주리고 눈도 안보이고 추운날에 여동생의 손을 잡고 콧물을 흘리면서 천막교회에 와서 구석에 앉아있던 그가 꿈이 있으니까 그 꿈이 그를 붙잡아 이끌어서 미국의 백악관에 대통령 장애인 참모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그 아들들이 출세하여 외과 의사도 되고 또 둘째 아들은 최근에 대통령 비서관이 되었다는 신문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왜 감동을 느끼냐면은 나는 그 과거를 보았기 때문에... 사람이 헬렌 켈러가 말한 것처럼 시련은 반드시 다가오지만 꿈을 갖지 못한 것이 참된 비극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시련이 와도 꿈을 버리지 아니하면 꿈이 여러분을 끌고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꿈이 여러분을 붙잡고 이루어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 문제 없고 어려움도 없이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가운데에서도 마음에 꿈을 놓지 않을 때, 그 꿈이 우리를 형통의 길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꿈을 꾸지만 나는 꿈이 없는데요. 왜 없어요? 주님이 다 주시는데...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여러분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꿈을 마음 속에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셉의 열한 형제들은 세상만 가슴에 가득찼지 꿈이 없었는데 요셉은 가슴 속에 꿈을 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음 속에 십자가 구속의 꿈을 담고 있으면 그 꿈이 여러분에게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불쌍한 것이 바로 고난은 있으되 꿈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당하신 억울한 형벌

여러분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인간을 구원하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헌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자마다 남녀 노유, 빈부 귀천 신분의 고하를 불구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 주셨는데 예수께서 마태복음 4장 23절에 보면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 주님이 모든 병을 다 고치셨다. 모든 약한 것을 다 치료해 주셨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좋은 일이 생겨났었습니다. 좌절과 절망에서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장차 제사장으로 오실 구주여! 라고 환영을 하고 고함을 치고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서 그 발앞에 깔고 하던 그 군중이 일주일 후에는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빌라도 앞에서 고함을 쳤습니다. 인심이 조석지변입니다. 한주일 전에 다윗의 자손이여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라고 그렇게 찬양을 하던 그 군중이 순식간에 악마로 변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고함 쳤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2절로 15절에 보면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여러분 그러므로 이 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하는데 예수님이 당한 이 사건은 형언할 수 없이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그 억울한 일을 당하고 무덤에 들어가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흘만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짊어진 십자가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울하게 못박았지만 하나님은 배후에서 그 고통을 통해서 여러분과 나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청산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로 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죽음을 멸하시고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시고 여러분과 나에게 구원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치료를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영생복락을 주시는 희망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종교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영광을 주실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은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을 주실 것을 우리는 믿어마지 않습니다.

3. 내가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을 때

내가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요?

우리는 요셉을 보고 예수님을 보고 억울한 누명을 덮어쓰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꿈을 버리지 않고 희망을 갖고 있으면 반드시 영광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환난과 고통은 영광과 승리를 그 후에 반드시 가지고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된 대우를 받고 마음이 억울할 때 왜 내가 이 억울한 대우를 받아야 되느냐. 내가 뭘 잘못했냐? 왜 나를 이렇게 취급하느냐. 그러한 마음을 품고 역경을 적대시 하면 한없이 분노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노가 생겨나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되어요. 마음에 미움이 끌어오르고 원한이 끌어오르고 그 미움과 원한은 영혼의 암입니다. 내가 암이 걸리게 돼요. 영혼에...

역경을 믿음으로 끌어 안으면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된 대우를 받았다고 고통과 괴로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끌어안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역경을 하나님은 희망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작은 고난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에 모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이익되는 것도 손해되는 것도 축복이 되는 것도 저주가 되는 것도 우리가 끌어안고 참으면 결국에 합동해서 선을 이룬다. 우리 인생은 그냥 인생이 아니라 비빔밥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비빔밥에 보면 콩나물도 있고 고추장도 있고 파도 있고 나물도 있고 마늘도 있고 밥도 있고 온갖것 다 있다 말입니다. 그러나 섞어서 먹으면 맛이 있거든. 결국에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비빔밥처럼 만들어서 우리 보기에는 성공과 실패, 고통과 즐거움이 함께 비빔밥이 된 것 같아도 종국적으로는 맛이 있고 영양분이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좋은 일을 예비하신다. 좋은 하나님,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보기에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때 여섯 번이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은 좋은 것을 창조하는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극심한 고통도 나중에 엄청나게 큰 영광과 승리의 좋은 것으로 바꾸신 것처럼 하나님도 여러분 개인의 십자가를 큰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당할 때 성급하게 대하면 낭패하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생각하고 성급하게 말하고 성급하게 행동해서 집어치워 버리라. 그리고 모든 것을 막판으로 포기해버리고 손털어 버리면 그것은 반드시 낭패에 처합니다. 오래오래 참고 또 오래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조금 참고 또 좀 더 참고 또 조금 더 참고 나중에 한계점에 도달할 때까지 참고 있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열매는 심어 놓으면 당장 줄기가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맺지만 다른 것은 오래 기다릴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잠언서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참 놀라운 말 아닙니까? 마음인데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싸움에 이기는 용사보다 낫고 성을 빼앗는 큰 전승한 용사보다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 뒤에는 반드시 소망이 온다. 좋은 일이 생겨날 것 소망하는 소망이 온다. 환난만 있고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은 죽음의 시작이지만 소망은 생명의 시작인 것입니다. 환난을 참고 기다리면 환난은 결국 소망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드워나 선교사가 시카고에서 윤락녀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때였습니다. 그녀는 아직 한 사람의 영혼도 건지지 못한 채, 윤락녀들의 상담과 건강 복지만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갔지만 자기의 교구는 윤락여자들이 사는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주 험상궂게 생긴 깡패가 윤락녀를 취하려고 왔다가 이 에드워나 선교사를 보고 너 이리와! 너 오늘 나하고 같이 자자! 큰일났습니다. 나는 윤락녀가 아니에요. 나는 선교사에요. 그 말을 하면은 그로부터 시작해서 그는 윤락녀들이 있는 촌에서 쫓겨나야 되는 것입니다.

오냐, 너는 선교사고 우리보다 나은 사람인데 왜 우리에게 와 있느냐. 그러니까 나는 윤락녀가 아니라는 말도 못하겠고 또 아무말도 안하고 있으면 윤락녀가 되어서 그 깡패에게 끌려가서 윤락녀처럼 몸을 팔아야 되고 이 말도 못하고 저말도 못해서 그는 고개를 숙여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나를 도와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 깡패가 와서 그 에드워나 선교사의 손을 잡고서 왜 머뭇거리냐? 가자! 끌고 가니까 끌려가는데 다른 여자 윤락녀가 뛰어 오더니만 여보시오. 당신 죽고 싶냐? 이 여자는 특별한 여자다! 무슨 특별한 여자냐. 우리 윤락녀 중에서도 에이즈를 가장 크게 앓는 여자다! 오늘 죽으려고 하면 이 여자 데리고 가라. 뭐 이 깡패가 놀라서 이 여자를 밀어 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고 도망을 치고 살아났어요.

하나님이 도와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윤락녀들이 쫙 둘러서더니만 당신 정말 선교사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다 윤락녀라고 손가락질하고 우리를 향해서 얼굴을 찡그리고 침을 뱉는데 당신은 끝까지 우리와 같은 처지에 당신을 놓고 당신을 윤락녀로 전락시킬 수 있는 위험까지 있어도 사양하지 않았다. 좋아요. 당신이 우리처럼 되었으니 나도 우리들도 당신처럼 되겠습니다. 이번 주일날부터 모두 다 우리 직업 그만두고 교회 출석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날은 교회 윤락녀들이 모두 다 와서 모였어요.

이와 같이 역경 가운데서 성급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기다릴 때 희망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받은 억울한 일과 잘못된 대우는 믿음으로 끌어 안고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에드워나 선교사가 끝까지 기다리니까 하나님이 책임을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어나서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하나님께 맡겨 버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같이 하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요새요 우리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이는 저가 너를 새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라. 저가 그 깃으로 너를 덮으시니 내가 그 날개 아래 거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내 곁에서 만인이 내 우편에서 엎드려 지나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철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함께 에드워나 선교사가 이 창녀들 가운데서 한 창녀들처럼 섞여서 그들을 도와준 것처럼 우리 가운데 와서 계신 것입니다. 그 증거로써 예수님이 하늘보좌 버리시고 사람 몸 쓰고 여러분 인간으로 인간 사회 가운데 와서 함께 울고 웃고 함께 고통을 당하면서 건져준 그 예수님이 오늘은 성령으로 여러분 속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저 만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보혜사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아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 보혜사로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한번 크게 아멘 하십시다.

영국의 격언에 보면 인내와 기다림은 희생 이상의 큰 일을 한다. W. 벤은 말하기를 인내와 신앙은 산이라도 움직인다. 사무엘 존슨 영국의 시인이요 평론가는 위대한 일은 강인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내와 기다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인내하고 믿고 기다린다는 것은 큰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인내를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해 주시기를 기다리는가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인내와 기다림이 있으면 그 뒤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절대로 고난 중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원망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원망하는 자기 자신도 상처를 입고 원망하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마음에 부정적이 되고 하나님도 원망하는 사람을 코에 연기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어주는 것은 하나님께 특전을 베푼다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어 주는데.. 하나님께 이렇게 우리가 좋은 일을 베풀어 주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베푸느냐. 그래서 어려움만 당하면 잘못 대접 받는다고 생각해서 원망하고 원망하다가 버림 당했습니다.

조금만 버림 당하면 이렇게 우리를 대접할 수 있느냐.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 주는데... 믿어주는 것이 큰 제사냐... 자기들 잘 되라고 믿었지 하나님 잘되라고 믿은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어주는 것이 하나님께 큰 이익을 갖다 주는 줄 알고 조금만 어려움이 되면 하나님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믿어주는데 우리를 대접을 이렇게 소홀하게 하느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 보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당할 때 삶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으므로 하나님께 맡겨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해서 가슴을 치게 될지라도 사람들은 다 나의 억울함을 동정하지 않고 돌봐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편에 서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 버려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좋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내어 맡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자식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자가 있겠는가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안주시겠느냐. 악한 우리도 자식에게 좋은 것 줄줄 아는데 좋은 하나님이 어떻게 구하는 자식에게 좋은 것 안주시겠느냐. 아예 눈 딱 감고 믿고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역대상 29장 11절로 12절 우리 다같이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다. “야훼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야훼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얼마나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까? 부귀와 영화와 공명이 다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내 길을 야훼께 맡겨라 그리하면 저가 이루시고 내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내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라고 하나님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까요? 인생의 밤을 통할 때 무조건 감사하십시오. 아예 그냥 바보천치 같은 사람이 될지라도 감사를 하십시오.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예수의 생명도 다가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인생의 밤을 통할 때 무조건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옛날에 군대에 입대하여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 받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저의 군번은 10822398입니다. 당시 훈련소의 훈련은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지금은 훈련소가 호텔같지만 그때는 그냥 천막에 맨마루바닥이었습니다. 그리고 먹는 밥도 허술하고 어찌나 고달픈 훈련을 했던지 훈련하고 난 다음에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면 안 우는 사람이 없었어요. 다 흐느껴 울며 좀처럼 부모에게 편지 안쓰는 자식들도 만리장성의 편지를 써요.

그런데 그 편지를 가만히 보니까 모두 다 감사하는 편지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품에 있을 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겠다. 집을 떠나 군대생활을 해보니 이렇게 괴로운줄 몰랐다. 어머니 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런데 나는 전도사로 있다가 군대에 갔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너무나 커서 교인들에게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는 편지를 늘 쓰는 것이 기억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을 주신 것은 맑은 날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좋은 일만 있으면 감사를 안해요. 나쁜 일이 있어야 좋은 날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낮이 있는 것을 감사하고 추워봐야 따뜻한 봄날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밤을 통할 때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를 하십시오.

2010년에 “올해의 부부상”을 받은 이상택 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수상은 전적으로 아내 황영희 씨의 헌신과 인내 덕분”이라며 모든 공을 아내에게 돌렸습니다. 두 분은 대학 동창으로 만나서 결혼하여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결혼 5년 째, 시부모님과 식구들을 모시고 살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시어머니가 아들 부부의 신앙을 미워하며 더구나 예수 믿는 며느리를 무척 미워했었습니다. 황영희 씨는 8명이나 되는 식구를 봉양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신앙생활에 대한 핍박으로 인해 더욱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시집살이 8명이나 되는 식구들을 돌보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다가 예수 믿는 것을 핍박을 받으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황영희 씨는 시부모님은 물론 남편에게 조차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시댁 식구들을 섬겼습니다. 그녀의 인내가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아들이 죽어도 예수는 안 믿는다고 하던 그 시어머니가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며느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전도하고 섬겨준 것을 오늘날 감사를 해요. 인내의 신앙으로 온 가족을 전도한 두 사람은 이제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려고 그 꿈을 품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내하며 감사할 때 끝에 가서 넘치는 축복으로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삶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 마음이 미움과 원한으로 부정적이 되면 큰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과 원한을 빨리 십자가 밑에서 씻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도 있지만 잊어버려야 될 것도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잊어 버려야 돼요. 좋은 것을 기억하지만 나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맡기고 잊어버릴 것은 나쁜 것 여러분 힘으로 해결 못하잖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데 왜 맡기지 않고 자꾸 손에 쥐고 하나님, 이것 어떻게 할까요? 맡겨라. 아니 맡기지는 못하겠고 이것 어떻게 할까요? 그러면 하나님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네 짐을 야훼께 맡겨라. 오늘도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은 기억하고 나쁜 일은 맡겨 버리십시오. 옛날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은혜는 물위에 기록하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고 했습니다. 남에게 받은 은혜는 물에 새기듯이 잊어버리고 남에게 잘못 대우 받은 것은 원한은 돌에 새기듯이 마음에 새기고 두고보자! 너 잘되는 것 한번 보자! 그렇게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도 고통스럽고 남도 고통스럽고 삶이 어둡고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삶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서 마음이 미움과 원한으로 부정적이 되면 그것이 끝없는 시련과 고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어두운 가운데서 좋은 일이 생겨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우리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이 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은 그때 기적을 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신발을 벗으라고 말했고 여호수아에게도 신발을 벗으라고 말했는데 신발이란 내 행위의 선택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겠다. 내 계획을 말하는데 너 계획을 벗으라. 내가 맡아 주마. 하나님이 여러분 일을 맡아서 아름다운 결과를 맺어주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현재 다가오는 시련과 환난이 왜 다가오는지 알 수 없어요.

여러분,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이 억울할 때가 많습니다. 왜 내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야 되느냐. 내가 뭘 잘못했느냐. 내 잘못한 것을 내게 말하라. 왜 나를 이렇게 하느냐. 이런 심정이 안 생기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생기지요. 원래 시련과 환난과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은 이유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또 이유가 있어도 우리는 인정 안합니다. 내 주장만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므로 내가 억울하고 원통한 사항을 하나님께 맡겨 놓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합동하여 유익이 되게 꼭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루벤 토레이 목사님은 중국 선교사로 오랫동안 헌신했습니다. 하루는 중국에서 설교 통역을 하고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서 깨어나니까 한쪽 팔이 없어졌습니다. 팔이 잘려 나갔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한쪽 팔을 가져가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두 팔을 주셔서 잘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저의 한쪽 팔을 가져가셨음을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니까 아는 사람들이 하하 교통사고 당해서 팔이 하나 날라가더니 정신도 날라가 버렸다. 팔이 없어졌는데 감사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그래도 끝까지 이 루벤 토레이 목사님은 팔을 주신 것도 하나님 감사하고 팔을 가져가신 것도 감사하다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팔이 의수를 해서 넣고 난 다음에 미국에 돌아와서 한국에 6.25사변이 나서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한국 선교사로 다시 자원해서 한국에 나왔습니다. 나와보니 6.25사변 때 팔다리 잃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는 의족을 만드는 곳이 없었어요. 아주 몸에 불구를 돌보는 의학이 전혀 발전되지 않았습니다. 루벤 토레이 목사님이 한국으로 와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상처로 팔다리를 잃고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활병원을 시작하여 의수족을 만들어 보급하며 예수님을 전달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왜 교통사고로 한쪽팔을 잃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습니다. 아~ 내가 중국에서 팔다리를 잃지 않았었으면 한국에 와서 팔다리 잃은 사람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고 미국의 도움을 받고 기술자를 불러서 의수족을 만들지 않았겠지 않느냐. 내가 고통 중에 있었으니 고통당하는 사람을 도와주시니 얼마나 감사하냐. 또 한국에 와서 감사 감사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재활의학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한쪽 팔을 잃으면서 겪은 고통과 아픔으로 이들을 인하여 치료해 주는 계기가 되었음을 감사했습니다.

그 후 토레이 목사님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왜 라는 의문을 품는 대신, 하나님, 왜인지 제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평생에 그것이 고백이었지 그는 하나님께 왜라는 질문을 안했습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나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합동하여 선을 이룰줄 믿고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긍정적이 되고 건강한 모습을 생각하고 꿈꾸며 믿음과 소망으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일이 내게 생겼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종국적으로 유익이 되기 위해서 보냈다고 생각하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탄식은 버리십시다. 바보 천치가 되십시다. 저 사람 머리가 돌았다고 해도 좋으니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감사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견디십시다. 그러면 좋은 날이 반드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 2011. 9. 4. 성찬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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