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이재철의 ‘문화로 성경읽기’ 전문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탕자의 비유

▲이재철 목사와 이어령 박사가 김경래 장로와 함께 대담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재철 목사와 이어령 박사가 김경래 장로와 함께 대담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재철 목사)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선생님 뵈면 언제나 청년의 열정을 간직하고 계신데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이어령 박사) 사실 최근 동아일보에도 나왔지만 내년에 제가 80입니다. 8자를 눕히면 뫼비우스의 띠, 무한대에요. 영원히 계속하겠다는 얘기입니다(웃음). 사실 제가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세례 받지 않았다면 지금 분명히 한국 나이로 79세인데 세례 받고 다시 태어난 수로 보면 6살밖에 안 됐어요. 오히려 늙었지요. 세례 받고 가장 덕본 것은 나이, 10대 소년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재철) 저는 17년 후면 80이 됩니다. 기대하면서 살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오늘은 이어령 선생님 모시고 문화로 성경읽기 시간을 가집니다. 제가 취지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서공회 총무를 역임하시고 한국의 대표적 성서신학자이신 민영진 박사님 책 제목 중에 ‘한반도에서 읽는 구약성서’라는 게 있습니다. 그 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 지지요. 이를테면 우리나라보다 훨씬 광활한 미국 사람이 읽는 구약성서와 이 좁은 한반도, 분단 한국에서 읽는 구약성서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민 선생님이 그 책을 쓰실 때는 우리나라가 여러모로 인권이 억압받던 시절입니다. 인권이 꽃핀 미국 땅에서 읽는 구약성서와 인권이 억압되던 시절 한반도에서 읽던 구약성서도 이해가 다를 것입니다. 같은 성경인데 어떤 삶의 자리에서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와 닿습니다.

또 현재 연변과기대에 재직중인 정진호 교수님은 미국 MIT 재료공학 전공하시고 박사학위 취득 후 포항공대 재직하다 조선족에 대한 소명을 품고 자진해서 자비량으로 연변과기대에서 오래도록 봉사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루카스 이야기’라는 책을 쓰셨는데 다니엘 2장의 신상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제국 느부갓네살 왕이 밤에 꿈을 꾸지 않습니까? 갑자기 뜨인 돌 하나가 날아오더니 신상을 깨 버렸어요. 그런데 정 교수께서 재료공학자 입장에서 그 신상의 금, 은, 놋, 쇠, 진흙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글을 썼는데 저는 그 신상과 관련해서 수없이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글을 봤지만 정 교수 글보다 많은 것을 깨우치는 글을 못 봤습니다.

같은 성경이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삶의 자리, 관점이 굉장히 중요하지요.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알려면 당시 언어를 알아야 하고, 문학을 알아야 하고, 철학을 알아야 하고, 역사를 알아야 하고,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인문학의 도움 없이는 성경을 사실상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의 대가이신 이어령 선생님 눈에 비춰진 성경을 같이 들여다보는 일은 분명 우리의 지경을 확대 심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어령-이재철 공개 대담’이라는 제목은 적합하지 않고, 매달 마지막주 목요일에 열리는 이 시간은 ‘이어령의 성경교실’ 이렇게 붙여야 타당합니다(웃음). 제가 주로 여쭙고 선생님 답변을 듣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 선생님 말씀을 듣기 전에 사전 질문을 몇 가지 드리겠습니다. 한국에 기호학을 처음으로 소개하셨지요?

(이어령) 기호학 소개하고 기호학회를 만들고 대학에서 기호학 구조주의 쪽을 했는데, 우리가 달을 볼때 한면만 보듯 여기 계신 분들도 저를 잘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기호학자나 문학 연구가로서는 참 생소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저의 성경교실이 아니고(웃음), 저는 기독교 믿기 전에도 성경을 많이 읽고 대학원에서 가르쳤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읽는 책이 성경이에요. 여러분은 믿으면서 읽으시지요. 믿지 않는 사람도 읽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 기독교인들이 몰라요. 믿으니까, 모두 목사님 말씀 듣고 믿음으로 읽기 때문에 오히려 성경의 재미난 부분, 믿지 않는 사람 눈에 비치는 즐거움을 모릅니다.

제 자신 대학에서 가르치고 성경 가르친 것은 기호학적 입장입니다. 구조가 어떤가, 예수님의 비유를 이렇게 썼는데, 분석해 보면 이런 의외의 것들 나와요. 그런 것들을 즐기고 학문으로 가르쳤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성경 읽는 게 자꾸 목사님 닮아갑니다(웃음). 이렇게 읽었다가 지금 이렇게 읽는데 맞습니까? 하는 시간이지, 성경교실이 아닙니다.

오늘은 쿨하게, 대학에서 처음 기독교 관계없이 책으로 읽던. 바이블이 책이라는 뜻이에요. 어원이 그냥 책, 무신론자도 읽고 다른 종교 가진 분들도 읽는 책 중의 책. 그 요소에서부터 다시 기독교적인 걸로 가는 게. 그걸 모르고 그냥 기독교적 해석만 한 분들에게는 사실상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함께 살다가 나중에 부활하셔서 하나님이 되는 과정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그냥 말부터 부활의 언어까지 가는 프로세스를 제가 기본으로 얘기하고 부활은 거기서 말씀하시면 완전한 책이 될 거라고 봅니다.

겸손이 아니라, 지금 믿는 게 아니라 기호학의 문제다. 믿으면 이런 문제들이 전부 가십니다. 다른 데서도 성경은 여러 가지 무신론자들이 읽고 성경을 공박하는 모순점도 프로세스를 따지고 가 면 일반적 비판과는 다른 이야기들로 이어집니다. 요 매듭을 여기 오신 분들이, 이걸 잘 하시는 분들 있는데 매듭이 없으면 늘 회의가 들고 납득을 못 해요. 이 시간을 통해 여쭤보면서 해소해 봅시다. 마음 속에서 꺼림칙하게 이치가 안 맞는다, 이런 것들이 해결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재철) 구조주의를 말씀하셨는데, 구조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올라가는 학문이지요. 중세 신학교, 인문학자들을 거쳐 100년 전부터 이론적으로 학문으로 정립됐는데. 그때로부터 100년 후인 지금은 언어기호학, 시각기호학, 건축기호학, 연극 음악 등 우리 삶의 전반에서 기호학이 적용됩니다. 기호학 역사가 그만큼 깊고 우리 삶 전반에 적용되는 데 반해 일반인들에게는 굉장히 생경한 말입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하시면서 직·간접적으로 기호학 언급하시리라 생각되는데, 기호학이 뭔지 쉽게 간단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이어령) 아주 쉬워요.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은 물질로 된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름을 붙였거나 언어를 붙였거나 하는 그건 자연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 신호등을 봅시다. 빨강이면 가지 마라, 파랑이면 가라는 건 인간이 멋대로 붙인 것이에요. 희랍 사람들은 피시스(physis)라는 자연물이 있고, 거기에 의미나 기호로 어떤 사인으로서 의미를 주는 게 있다는 것이지요. 언어가 대표적이죠. 법, 이런 것들을 노모스(nomos)라 합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른 것. 어제 죄였던 것도 오늘 무죄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피시스, 노모스와 세뇨시스. 세뇨시스는 피시스와 노모스의 중간입니다. 노모스는 법규, 종교에서 십계명 같은 거죠. 그런데 피시스를 제외하고 세뇨시스와 노모스는 피시스가 아니므로 사실 근거가 없어요. 그런데 법과 화폐, 언어 세 가지가 오늘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사실상 피시스가 아니니까 허공에 붕 뜬 것이죠. 이렇기 때문에 오늘 현대 사람들은 피시스보단 화폐나 법, 언어 등의 문화적 생활이 자연적이고 구체적인 거보다 훨씬 많다.

쉽게 얘기하라면 질문할께요. 이사를 가셨어요. 아침에 목욕탕 가고 싶은데 지리를 전혀 몰라요. 그때 타월하고 들고 일단 나왔는데 뭘 보고 찾아가겠어요? (청중들) 굴뚝이요. 주택가에 제일 높은 굴뚝 있으면 그게 목욕탕일 것이다. 피시스는 목욕탕에 굴뚝이 생긴 건 높이 연기를 내보내기 위한 물리적 기능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높은 굴뚝을 목욕탕이라는 의미로 본 거니까 언어로 변한 것, 기호가 됐습니다. 또, 우리가 시장에 가서 사과를 사러 갔는데 저기 배가 있다. 사과 사러 갔지만 저기 배가 있구나, 하고 청과점으로 들어가면 이 배는 과일입니까 언어입니까?

자연과학과 달리 의미와 원래의 목적과 다른 의미로 사용됐을 때는 물질이라도 기호화된 것입니다. 슬퍼서 엉엉 우는 것은 자연·심리 과학이지만. 어이 어이 하면 상주 아이고 아이고 하면 문상객의 울음이지요. 목소리에 의해 상주와 문상객이 제도적 시스템으로 만들어지면 울음이 기호화된 것입니다. 자연에서 기호로 갔다. 사람은 근데 그걸 안 믿고 자연의 일부로 봅니다. 법을 자연의 일부로 봐 버리면 이 세상의 해석이 엄청나게 잘못되는데 인문학을 과학 하듯이 하게 돼 버리면…. 인간도 이렇게 하면 악하고 저렇게 하면 선하고 하니 유물론자들은 전부 기호로 보는 게 아니라 인간을 사물화해 버렸다. 인문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을 인문학처럼 하고 있다. 인문학은 기호학이다.

들어보시면 알지만 하나님 말씀이라는 게 자연물은 아니죠. 모든 걸 해석하고 분할하는 기호학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피시스로 알아버리면, 비유를 진짜로 알아버리면 엄청난 오해가 생길 수 있어요. 그걸 진짜라고 하면 거기서 사교가 나오고 여러 잘못된 것들이 나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성경을 문학 작품이나 구조 분석하듯 해 보면, 정말 예수님이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도 엄청난 시인이고 메신저고 기호를 다루는 천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레토릭(rhetoric·수사학)의 천재다. 예수님 믿지 않더라도 그 능력 이용해서 사목 하고 교수 되고 정치를 하면 오바마 정도는 문제도 안 돼요. 오바마는 체인지 하나로 됐지만, 문제도 아닙니다.

(이재철) 제가 기호학에 관한 책을 몇권 읽었는데 다 읽고서도 이해 안 되던 기호학이 선생님의 짧은 설명으로 이해가 됐습니다. 기호학에 대한 이해 있을 때 성경을 더 바르게 분별할 수 있겠다는 말씀이시네요.

성경에는 비유도 있고 사사기 9장처럼 가시나무 포도나무처럼 우화도 나오는데 비유와 우화의 차이점을 쉽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어령) 성경에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메타포(metaphor·은유)와 심볼(symbol·상징) 등등.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노아의 홍수 났을 때 육지가 나타나는지, 땅이 보이는지 비둘기를 보내죠. 하지만 먼저 까마귀 보낸 건 잘 모르십니다.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 성서에다 까마귀를 보내고 다음에 비둘기를 보낸 걸 적었을까. 이런 것이 사실이니까 나열했다, 그런 건 아니죠. 우리가 글 쓸 때 나 신발 신고 학교 갔다 하는 사람 없죠. 그냥 학교 갔다고 하지. 많은 이야기 중에 왜 쓸데없이 돌아오지도 않은 까마귀 이야기를 했을까.

기호학에서는 대조법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까맣고 하나는 하얗지요. 지금도 비둘기는 메신저 역할을 하지요, 돌아온다. 노아 때도 비둘기는 돌아오는데 까마귀는 시체 파먹는라 오지 않았어요. 틀림없이 그 까마귀가 날아갔다가 홍수도 지고 그랬으니 먹다가 미션을 잃어버린 거죠. 그러니까 적어도 너는 이러이러한 것을 하라고 시켰는데 까만 까마귀는 사라지고 비둘기는 정직하게 돌아왔다. 까만 건 거짓, 흰 건 정직 이렇게 볼 수도 있지요. 기호학을 보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여러 이야기 중에 소설처럼 이야기로 한 걸 페라블(parable·우화)이라고 하면, 보통 건 메타포나 심볼은…. 비유라고 했지만 사실 다 다르죠. 정확하게 예수와 성서의 레토릭입니다. 메타포는 단어에서 일어나지만, 페러블은 이야기 구조입니다. 하나는 요즘 말하는 스토리텔링이죠. 하나는 시에 해당하는 메타포, 은유. 오늘은 스토리텔링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이걸 배우면 요즘 한창 유행하는 바다 이야기, 자연 화장품 같은 데서도 무슨 스토리 하는데 스토리라는 것들이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페라블입니다. 기독교 신약 중에 착한 사마리아인, 탕자 이야기 등 많습니다. 비유를 들어 설득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야기다 보니 분석하는 방법을 모르면 비유의 원래 뜻이 뭐고, 무엇을 비유하는지 신학적 지식만 갖고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문학 작품에서 하는 스토리텔링, 이런 걸 분석해 보면 아주 정밀하게 돼 있어요.

(이재철) 일반적으로 비유는 현실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고, 우화는 예를 들어 동식물이나 사물을 의인화한 이야기라 보면 되나요?

(이어령) 의인화든 사람이든 스토리텔링을 가져서 이야기로서 얘기하려 하는 내러티브한 걸 페라블이라 하고, 단어나 어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을 비유나 직유 같은 메타포라고 하는 거죠.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참 헷갈리죠. 메타포는 수식하는 것, 페라블은 하나의 이야기라 보면 됩니다. 우화라는 페러블은 이야기체로 스토리텔링을 한 거니까, 하나는 소설이고 하나는 시입니다.

(이재철) 단순히 의인화하면 우화고 그건 아니다는 말씀이시지요. 희랍어로 비유는 파라볼레, 옆에다 둔다는 동사에서 유래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옆에 또다른 이야기를 둬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더 쉽게 설명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한 질문만 더 드릴께요.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가 2천년 전에 팔레스타인이라는 특정 공간의 삶 속에서 나왔는데, 특정 공간의 삶의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가 2천년 지나서까지 많이 회자되고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비유가 어떤 문학적 관점이나 레토릭 면에서 예수님의 비유만이 가진 독특한 특징이 있기 때문인지알고 싶습니다.

(이어령) 그걸 위해서 탕자의 비유를 우리가 보는 것이지요. 수사학에서는 기독교와 관계없이 꼭 3가지 우화를 놓고 분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얘기했을 때 고려가요 보면 ‘호미도 날히언마라난 낟가티 들리도 업스니이다 아바님도 어이어신마라난 어마님가티 괴시리 업세라(호미도 날이지마는 낫과 같이 잘 들 까닭이 없습니다 아버님도 부모님이지만 어머님과 같이 사랑하실 분이 없도다)’. 호미는 아버지고 낫은 어머니입니다. 왜 같은 부모인데, 어째서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나를 사랑해주시지 않는가 하는 겁니다. 똑같은 농부인데 호미는 왜 낫처럼 잘 들지 않나. 여기 모이신 아버님들은 모두 호미고 여성분들은 낫이라는 말이에요(웃음). 잘 든다.

틀림없이 그 비유는 농부들이 쓴 것일테지요. 오늘 같으면 같은 스마트폰인데 이것은 저것처럼 잘 안 터지나 했을텐데(웃음). 밤낮 호미와 낫을 써본 사람이 비유를 들어도 사실상 호미 낫은 문제가 안 되지요, 비유니까. 같은 도구라도 왜 이렇게 되지 않나 할때 농기구를 썼습니다. 놀라운 것은 구약성경 대부분이 유목민 사막이라는 곳을 전제로 한 비유들이 참 많아요. 그러니까 목이 탑니다, 목마른 어린 사슴이 샘을 찾는 것처럼, 절실하잖아요. 우리 그렇게 목 타본 적 없잖아요. 사막에서 목 한번 타 봐요. 하나님을 갈구하는 것이 목이 탄다고 표현하는 것. 하지만 성서인데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안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목민의 종교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잘 읽어보세요. 99%가 유목적이고 사막을 돌아다니는 유대인 역사를 다룬 것 같지만 창세기를 보세요. 분명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너희들은 죄를 지었으니 남자는 밭을 갈아서 그 빵을, 그냥 양식이 아니라 빵이라고 돼 있어요. 고통 속에서 빵을 얻으리라. 여성에게는 산고의 고통을 줍니다. 밭도 그냥 밭 아니라 엉겅퀴와 가시 있는 척박한 땅에서 밭을 갈고 땀을 흘려야 겨우 빵 하나를 먹는다는 거에요.

여러분들께서 조금 정밀하게 들어가면 얼마나 잘못 읽고 있습니까. 괴테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초년 고생을 이야기하는 줄 아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저 구절에서 나온 거에요. 죄를 지었으니 그냥은 못 먹어, 밭을 갈고 땀 흘리고 갖은 고생 해야 겨우 얻어먹어, 이게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엉뚱하게 인생을 논하지 말라. 우리가 조금만 원전을 읽어보고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 하신 말씀이 모두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탕자가 돌아오는 것도 전부 그 당시 있었던 얘기를 재해석한 것이죠. 차원을 달리 해서 업그레이드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문화로 읽고 그 오묘한 것을 읽기 시작하면 뒤에는 전부 유목민의 것으로 해석하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준 것은 밭 가는 도구이지 양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 가인과 아벨에 보면 제사를 드리는데 농산물은 받지 않았고 양은 받습니다. 유목민의 것을 받았어요. 이게 성경에서 만날 말씀하시는 거야. 하나님이 편애하지 않고 자기네들 산물을 그렇게 첫 수확한 것을 바쳤는데, 무엇 때문에 가인 것을 받지 않았나? 가인이 살인을 한 동기는 똑같이 받지 않고 차별했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것 아닙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하나님의 편협성, 유목민의 신이 농업신을 인정하지 않은 걸로 봅니다. 집단으로 보면 유목민들을 가지고 가인을 치니까 가인족들이 질투가 나 아벨을 공격하죠.

▲이어령 박사.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어령 박사. ⓒ양화진문화원 제공

그렇게만 생각하는데 그것도 아닌 게 죽이기까지 했는데도 보호해 주십니다. 해치지 말라고 이마에 증명서까지 하나 해 주시잖아요(웃음). 그걸 보면 죄인도 보호하시는, 그러니까 어느 한 부분을 읽고 우리가 보통 소설 읽듯이 하면 헷갈려서 도저히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모순과 안 맞는 이것이 성서가 지금 읽어도 감동을 주고, 한 시대에 맞았다면 다른 시대에는 다 없어질 수 있는데…. 앞에서는 밭을 갈라고 했는데, 뒤에서는 또 유목을 받아주시고. 그러니까 이게 유목신이냐 농경신이냐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하나였다면, 모두 유목 이미지였다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읽어보시면 알지만 장사꾼 현대인들이 읽어도 탄탄한 구조로 옵니다. 그러니 유니버셜(universal)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옆에 없더라도, 우리 다문화가족에 분명 있거든요. 이런 것들이 인간의 레토릭을 넘어선, 세익스피어도 못한, 넘어선 다양성과 다의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분석해 보면 알거든요.

그러므로 아까 얘기한 대로 호미도 날이지마는… 이런 것은 농경민이 아니면 도저히 느끼지 못해요. 더구나 호미는 한국에만 있어요. 앉아서 잡초를 캐는 독특한 몬순계절풍대의 도구잖아요. 서양에선 잡초 뽑는 거 없어요. 프랑스 갔더니 밀밭이 그림 같은데 나파밸리라고 빨간 양귀비 같은게 펴 있어요. 속으로 프랑스 농부들 멋쟁이다, 밭에다 꽃들을 심어놨구나, 잡초였습니다. 잡초도 없고 뽑지도 않아요. 우리는 습지대니까 잡초가 나지만, 그들은 오히려 잡초가 있어야 양들이 풀을 뜯지요. 사바나 지역이에요.

긴 시간 동안, 몇 회를 할진 모르지만 이번 기회에 성서 읽는 재미가 들면 좋겠어요. 빵이라는 건 굽는 것이죠. 우리는 전부 찧죠. 물 없으면 요리를 못해요. 정착했으니 솥에 밥 하고 국 끓입니다. 그런데 유목민들은 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뜨겁게 해서 전부 굽습니다. 빵을 자꾸 떡이라 번역하는데, 떡과 빵은 정반대에요. 떡은 수증기로, 빵은 그냥 굽는 거죠. 사막 유목민들은 특히 연료가 없는 데서는 두껍게 빵을 못하고 얇게, 인도의 난처럼요. 가톨릭에서 먹는 것도 얇지요. 물이 없으니 그대로 반죽해서 굽는다. 굽는 문화와 솥에 정주하는 사람들이 물을 끓여 데우는 문화는 완전히 달라요. 물, 직화, 공기. 연기로 굽는 것은 훈제라고 해서 또 유목민들이 먹죠.

이런 걸 알면 성서의 비유 하나, 낙타의 비유 하나, 모든 것들이 이러한 문화적 차이에서 왔구나, 그런데 성서의 말씀은 문화의 벽을 뛰어넘는 레토릭이구나. 이걸 알면 기도드릴 때, 레토릭이 문화의 벽을 뛰어넘어요. 땅끝까지 내 말을 전하라, 민족 종교가 아니에요. 그 분의 돌아가심은 한 민족을 위해 돌아가신건데 왜 우리는 자꾸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하느냐, 하지만 벽을 뛰어넘는 레토릭을 여러 군데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방인, 사마리아인, 과부를 기다리셨는지, 이 비유가 뭔지 오늘 분석하는 걸 보면 아,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해, 어떤 사막의 종교로서가 아니라 정글이든 바다든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유니버설한 레토릭이구나. 문화의 벽을 뛰어넘은, 시대의 벽을 뛰어넘은 보편적 레토릭을 썼구나. 이걸 쓰면 나의 레토릭이 유니버셜해지는구나. 우리가 고전을 읽었을 때 벽처럼 느껴지던 것들도, 성경을 읽으면 우리의 비유는 왜 이랬을까 하게 됩니다.

(이재철) 에수님 비유가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신 것은 그 비유가 유목이든 산업이든 농경이든 국적 인종 지역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의 재미 속으로 이제 함께 들어가 봅시다. 소위 탕자의 비유 본문을 같이 읽어봅시다(눅 15:11-32).

이 비유 속에는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집을 나갔던 막내아들,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던 큰아들. 작은 아들에 대해, 먼저 선생님께서 보신 작은 아들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어령) 가장 잘못 알려지고 작가들, 앙드레 지드도 그랬고 지드는 신앙심을 가졌던 삼총사라 할 수 있는 유명한 작가들, 그로델리 등이 비난한, 지드가 소설을 거의 못 쓰다가 ‘탕자 돌아오다’ 단편을 쓰고 기독교에서 절연도 당하고 문제가 많았던 대목이지요. 이 사람들이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 읽었던 것입니다. 지루하시더라도 이 탕자 돌아오다의 비유가….

(이재철)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웃음).

(이어령) 분석이라는 건 재미없어요. 어렸을 때 돌멩이를 막 부수잖아요. 자꾸 부수면 마지막에 원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쿼크도 나와요. 부수고 부수면 익숙해진 풍경 물건들이 다 없어집니다. 사실 흩어진 것이 모여야 기쁨이 되는데 있는 것을 쪼개다 보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죠. 해부라는 말, 아날로지(analogy), 로지(logy) 자가 붙으면 현대인들은 모두 분할하고 쪼갠다. 사실 생명은 모든 걸 종합해도 되지 못할 정도로 종합의 극치인데, 그래서 이 대목이 모든 사람들이 탕자 돌아오다로만 얘기하는데 잘못 읽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나와서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 하니, 바리새인들이 죄인들인데 왜 함께 얘기하느냐, 이 얘기는 누굴 들으라고 하는 거죠? 평신도나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누군가? ‘바리새(Pharisee)’라고 하는 것은 분리하다, 쪼개는 사람들. 너와 나를 쪼개고, 너는 천민 나는 귀한 사람, 너는 죄인 나는 의인, 모든 걸 쪼개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선인과 죄인을 바리새인들처럼 철저히 고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율법을 가장 많이 내세운 사람, 교조주의자들 같습니다. 바리새인 입장에서 죄인들이고 하나님 믿지 않는 자들을 왜 다 끌어들이느냐? 그래서 이 얘기를 한 것입니다.

세 가지 비유를 들어요. 한 가지만 했다면 예수님은, 성서의 생명은 사실상 일부분인데 똑같은 테마로 세 번 얘기했어요. 첫 번째가 양 1백마리. 이때 한 마리가 누구겠어요? 죄인들, 세리들. 지탄받는 사람들까지 왜 당신네들이 받느냐 하니까 너는 99마리야. 그런데 양치기한테 물어봐라. 99마리가 숫자적으로 더 많지만 양치는 사람 심정으로 보면 1마리 양을 찾으로 가는 거야. 의로운 사람 놔두고 오히려 죄 지은 자들 구하러 가는거야. 이게 내 스피릿이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의로움보다 참회하는 죄인을, 10명의 의인보다 1명의 회개한 사람을 더 찾으신다. 바리새인들 논리를 철저히 부수는 것이죠.

양 얘기는 유목민들한테만 해당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바보가 어딨어? 남은 99마리가 다 도망갈텐데, 어리석은 양치기다, 하는데 정말 양치기는 99마리를 잃을지언정 1마리를 찾아다니는 게 양치기들의 사랑입니다. 양을 쳐보지 않으면 모르지요. 한국에 이 비유만 왔으면, 뭔소리여 이게? 우리가 염소나 몇 마리 키워보던 사람들인데, 양을 키운다고 가 봐도 몇 마리 없어요. 더구나 아흔아홉마리를 언제 키워봤나? 12간지에 보면 전부 우리 것이 아니에요. 양과 원숭이 나오는데 우리와 아무 관계 없습니다. 거기 보면 우리와 관계없는 것 중 하나가 양입니다. 산양은 더러 봤을지 모르지만, 유목민을 향한 얘기지요.

그 다음엔 한 드라크마를 잃은 아녀자 이야기입니다. 은전을 여기 잔뜩 놔 두고 하나 떨어진 것을 찾으러, 우리 같으면 한 10원짜리 떨어진 건데 등불 들고 온 방을 찾아다닙니다. 양치기 해본 경험 없는 사람은 적어도 이 시대에는 동전이 생겼기 때문에. 동전에 반드시 사람 얼굴 그려놓고 희랍에서 가장 먼저 새겨 넣었는데 늘 미소짓는 얼굴이에요. 모나리자 미소가 뭔가 어색하지만, 고색적인 신비한 웃음이죠. 왠일인지 미소짓는 것처럼, 돈 보면 예나 지금이나 미소 짓나봐요(웃음). 그런데 좀 멋쩍은 웃음. 돈 보고 기뻐하는 건 죄의식이 좀 있어서, 드라크마는 희랍 단위지요. 예수님 당시만 해도 로마 통치하에 있었고, 알렉산더 이런 사람들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했을 때인데 드라크마 얘기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화폐 경계에 들어간 사람들이 가사에서 교환 수단으로 돈을 쓰기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세 번째 비유가 바로 우리가 읽은 ‘탕자 돌아오다’. 앞에는 양떼들, 생물이지만 도망가도 돌아올 수 없어요 걔들은. 돈도 한번 잃어버리면 아버지 하고 와요? 안 와요. 누가 찾아다녀야 돼요? 양치기나 누가 찾아다녀야지요. 놀랍게도 탕자는 아들이 나갔는데 아버지가 찾아나서지 않았습니다. 앞의 비유와 어때요? 이런 게 기호학입니다. A가 B를 찾다. A와 B가 C를 찾다. 그러면 여기도 아버지가 찾아나섰어야 했는데, 큰아들을 남겨두고 찾아나서도록 돼 있었는데, 그게 희랍의 원래 비유였어요.

아버지가 두 아들이 인질로 잡히니 해적한테 찾아갔습니다. 당시 비유는 그랬어요.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놔 두고 한 마리 찾으러 가는거나 모든 재산 남겨두고 아들 찾아 가는거나 같죠. 큰아들 남겨두고 작은아들 찾으러 나가야 앞뒤가 맞는데, 여기는 아들 사랑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돌아오니까 그제서야 반겨 맞이한 거에요. 찾다가 아니라 맞이하다. 앞에는 전부 찾다인데 뒤에는 맞이하다. 그런데 앞의 것은 맞이할 수 없는 게 양떼들이 한번 길 잃으면 돌아오지 못해요. 돈 한번 떨어뜨리면 어떻게 돌아와요 걔들이. 사람은 어때요? 뉘우치고 돌아오잖아요.

그러니까 찾지 않아도 사람의 영혼을 가진 것은 참회하고 돌아온다. 우리가 지금 죄인이고 더러운 여자라 하더라도 그 양이 아니고 동전이 아니기 때문에 찾아나서지 않더라도 참회하면 돌아올 수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은 찾아다녔다기보다 세리들이 왔죠. 세리들 찾아다니면서 복음 전한 거 아니죠. 왔기 때문에 참회한 거고 그래서 죄인이 아닌 거죠. 이렇게 읽어야 비로소 생생하지요. 예수님이 내가 찾아다녔어? 지들이 왔지, 그 얘기에요. 그냥 비유로 했으면 바리새인들에게 걸리는 거에요. 참회도 안 했는데 찾아다닌거니까. 하지만 내 얘기 들으려고 탕자가 찾아온 것이지요. 큰아들처럼 뭔지도 모르고 내 옆에 있는거야. 졸지에 바리새인들이 큰아들 된 거에요. 가만히 보면 통쾌하기도 하고 바리새인들이 꼼짝 못하게 비유를 쓴 것입니다.

(이재철)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트집 한번 잡아 볼까요(웃음)? 양은 짐승이고 드라크마는 물질이니까 못 돌아오죠.

(이어령) 반박이 아니라 오히려 제 말을 긍정하시는 거에요(웃음). 그렇게 교묘하게 쓰신 거에요. 살아있으되, 의지가 없어요. 찾아올 수 없어요. 그건 가서 찾아와야 해요. 엽전은 찾아가는 마음이 있어야 찾아져요. 그런데 사람은 찾아가지 않아도 맞이하면 돼요. 왜? 회개해서 돌아오는 영혼을 가진 거니까. 찾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돌아오는 참회하면 맞아주는 거죠. 여기 죄인들은 동물로 치면 양, 물질로 치면 엽전, 사람으로 치면 탕자가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 죄인들은 탕자로서 비유가 되니까 앞에 것은 빼고 뒤만 했기 때문에 사실상 예수님이 왜 똑같은 주제를 3번 얘기했나 모르고 뒤의 것만 읽으면 안 된다는 거죠.

유목민에게 전하는 메시지, 상인에게, 정주민에게 전하는 메시지. 근대 가족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유목민이 들어도, 장사치가 들어도, 근대 농민들, 현대인들이 들어도 다 납득이 돼요. 양 쳐봤어? 찾으러 가. 돈 잃어봤어? 찾으러 가. 부모 마음에 이런 아들 오면 큰아들 있어도 잔치 열거야. 시대와 직업을 초월해서 아버지의 마음, 양을 잃은 목자의 마음, 돈을 잃은 상인의 마음. 더군다나 정교한 것은 드라크마를 찾는 것이 여성입니다. 여자가 들어도 아는 거죠. 남자, 여자, 유목민, 장사치 모두가 해당되는 유니버셜한 구조로 만들어진 세 가지 페러블이다.

▲대담을 듣고 있는 성도들. ⓒ양화진문화원 제공

▲대담을 듣고 있는 성도들. ⓒ양화진문화원 제공

그런데 문제는 아들의 입장입니다. 쟤가 왜 나갔는지, 왜 돌아왔는지, 돌아와서 마음이 어땠는지, 아버지의 입장만 그렸지요. 바리새인이 물었기 때문에 하나님 입장을 쓴 거죠. 죄인들 입장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작가들이 얘가 왜 집을 뛰쳐나갔나? 그리고 가뭄이 들어 쥐엄열매도 먹지 못한 채 돼지에 먹이를 주라는 가장 천한 직업을 주니 돌아왔지, 가뭄이 안 들었더라면, 돼지 치는 거 안 했더라면 돌아왔겠어요? 안 돌아왔다고, 이게 문제가 되는 거죠. 비유를 하나님이 맞이하는 쪽으로 맞추니 기가 막히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그 좋은 아버지 놔 두고 도망갔는지, 양이 왜 무리 놔 두고 혼자 갔는지, 돈은 말할 수 없지만 양하고 아들은 왜 나갔는지….

그래서 작가들이 아들의 입장에서 썼다. 앙드레 지드 보면 참 재미나요. 성서 그대로 소설로 옮겼으면서 막내 아들까지 세 사람을 그렸어요. ‘탕자 돌아오다’는 굉장히 유명한 소설이에요. 성서를 문학화했는데 가장 말썽이 많았어요. ‘좁은 문’을 쓴 앙드레 지드가 이상한 소설을 쓴 게 ‘탕자 돌아오다’로 돼 있어요. 형이 돌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는데 불만을 가진 막내 아들. 돌아온 탕자가, 너 자냐? ‘형이랑 말하기 싫어. 나는 그래도 형님만은 이곳을 떠나 자유로운 몸이 돼서 뭔가 된 줄 알았는데 형마저 무릎 꿇고 돌아왔으니 이제 그리워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아. 형은 패배자야. 나도 언젠가 집을 떠나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 형이 집 나간 게 희망이었는데 이제 죽을 때까지 아버지 밑에서 살아야 돼. 형은 내 희망을 뺏아갔어.’

돌아온 탕자가 오죽 하면 돌아왔겄냐? 그 고생 안 했으면 난들 왔겠냐? 너 도망가려고? 형이 못한 거 해낼 거야. 나는 못했지만 너는 하거라. 그래서 막내 아들은 아예 밤중에 나간 거야. 그래서 쓴 과일 먹으면서 자기 생활이 얼마나 쓰고 그런 걸 얘기하면서 떠나는데 마지막 장면이 멋져요. 등불을 들고 돌아온 형이 도망가는 동생을 도와주면서, 얘야 계단 조심해라. 너만은 무릎 꿇지 마라. 자기는 계단에서 떨어졌다 이거죠. 이 소설을 쓰니까 주변 작가들이 맹공격했습니다. 릴케는? ‘집을 떠났을 때 그는 비로소 초원의 푸성귀같은 자유를 부르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좋았다. 난 이제 어디로 가도 좋다.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 이런 아름다운 시가 나와요.

내가 예수님 믿기 전에 이 시를 읽고 가슴을 치면서, 그래 인간은 도망가는 거야. 안전 평화 질서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있는 데서부터 도망가는 거야, 그게 삶이야. 아버지가 하라면 예 하고 매일 똑같은 거 하고 그게 아니야 했습니다(웃음).

당시에 무서운 글 많이 썼어요. 그 양치기 소년은 아무런 죄가 없다. 너 매일 매일 양만 쳐 봐라. 양은 풀 뜯는 맛이라도 있지. 오늘도 같고 내일도 같고 미치겠으니, 상상력이 보통 애가 아니고 상상력 뛰어난 아이다. 늑대 왔다 하니, 별볼일 없는 애가 한마디 했는데 동네가 난리가 난 거에요. 얼마나 재밌어요? 여태까지 나는 존재하지 않았고 양떼들의 침묵 속에서 풀 뜯어먹는 거 지켜보고 평생 이짓 하고 있는데, 늑대가 오는 상상을 한 것입니다. 질서와 안정만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이야기지요. 소년이 단지 잘못한 것은 상상력이 부족해서 똑같은 거짓말을 계속한 거다(웃음). 다른 거짓말을 했으면 그 아이는 세익스피어가 돼서 명작이 나왔을텐데, 교훈은 거짓말을 하려면 다양하게 해라(웃음). 이게 상상력인데 그런 거짓말 잘 하는 사람들이 소설가도 되고, 인간만이 거짓말하는 상상력을 갖고 있지요.

이렇게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과 다르게, 큰 아들은 동생을 위해 일하고 장자를 지켜야 하니까 복종하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냥 나가서 새로운 것을 구하는. 이걸 네오필리아(neophilia)라고, 새 것을 구하려 했기 때문에 선악과도 따먹었던 것입니다. 모든 게 완벽했는데 왜 선악과를 먹었겠어요? 뭔가 내가 살아있으니 내 의지로 뭔가 해보고 싶다, 모든 것이 하나님과 아들 관계에 있으니 이건 질서가 아니라 죽음이다. 내가 살아있다면 뭔가 저지르고 싶다. 네오필리아가 인간의 원죄를 범하게 된 하나의 이유인가. 이것이 오늘 비극이다. 인류 최초의 직업이 뭐냐? 청과점 업자? 생기기 전에 아담이 이브를 만들 때 뼈에서 여자 만들었으니 외과의사? 아니다. 아담 생기기 전에 혼돈. 혼돈을 누가 만들었나? 정치.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은 정치인들이다. 이런 조크가 있지요(웃음).

이 말을 하는 것은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들이 에덴동산이라는 완벽한 곳에 인간을 놔둬도 똑같이 형은 도망갔는데 하는 새 것을 찾는 휴머니티(humanity), 그것이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무릎 꿇는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새 관계가 이어지고 그것이 분리됐던 것이 통합되고 하나가 됐을 때 죄인들이 참회하고 모든 게 하나로 돼서 하나님 앞으로 오는 질서의 회복, 에덴동산의 회복을 나타낸다면 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아버지는 하나님이고 그 목장은 평온하고 먹을 것이 많은 에덴동산이지요. 그럼에도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은 호기심, 이것이 과학을 낳고 국가를 낳았다고 하면.

현재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되어 에덴동산에서 떠난 이 아들, 방탕한 아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다. 그래서 회개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짧은 비유에 그 속에는 구약의 에덴동산 얘기를 그대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시는 겁니다. 구약을 다시 읽히고 에덴동산 얘기를 하는 정교한 얘기지요.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바리새인들은 끝없이 도망간 아들을 단죄하고 큰아들처럼 뭔지도 모르면서 저건 도망간 아들이라 욕하는, 나는 아버지를 충실히 지키는데 저들을 왜 환영하고 잘 지킨 나는 왜 버리나? 하는 그 큰아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는. 바리새인들이 똑똑했으면, 내가 큰아들? 큰일났구나, 이런 식의 바리새인들을 향한 비유 중에 빈틈없이 짜여진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인간의 레토릭이 아니고 하나님의 레토릭. 기호학으로 하면 너무나 기가 막혀요. 에덴동산, 아들, 가인·아벨, 너무 짜임새가 전체 성경의 구조와 같은데 이걸 부분이 전체와 똑같은 프랙탈(fractal) 구조입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달이 떨어지는 것은 다른데 같다는 아날로지에 의해 이 우주는 하나의 통합된 거대한 질서 속에서 움직인다. 그렇지 않다는 쪽이 카운터 파트이고 그렇다는 쪽이 이 비유의 싸움입니다.

(이재철) 작은 아들이 뉘우치고 돌아오게 된 것을 강조하셨는데, 양과 드라크마는 스스로 못 돌아오는데 이 탕자는 스스로 뉘우치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맞아준 것 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만약 이 탕자가 스스로 뉘우친 것만 강조되면 인간이 자기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할 수 있는데요. 탕자가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 근거는 자기를 낳아주신 친아버지가 계시고 종이라도 받아주리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게 만약 아버지가 안 계시고 이 심술궂은 형만 있다면 그 집에 돌아갔겠는가, 회의가 듭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한데 이제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해 주십시오.

(이어령) 바리새인들이 왜 죄인들을 맞이했느냐? 왜 저런 죄인들 찾아온 것을 내쫓지 않고 뒀느냐? 여기 아버지가 예수죠. 본인 얘기죠. 바리새인이 묻는 상황이, 회개하고 돌아왔느냐 안 돌아왔느냐 양이나 동전이나 그때 케이스만 얘기한 게 아니고 세계의 이야기로 의지 없는 것, 있는 것들을 찾습니다. 지금 내 관계는 저들이 온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아버지가 한 일이 없는 것 같지만 이미 죄인들이 나타났으니까요. 그래서 그 말씀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찾아가는 하나님, 맞이하는 하나님이 똑같은데 이말을 그냥 보면 왜 아버지는 찾으러 가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니 양과 드라크마는 찾지 않았습니까? 찾다, 맞다가 같은 말이지요, 상대에 따라서. 아버지 역할이 없다? 노(No). 앞에서 양에게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찾아갑니다. 동전 잃으면 찾아갑니다. 그래서 세 가지 비유를 쓴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온다는 얘기만 썼더라면 아버지 역할은 별볼 일 없는 것인데 앞에 있기 때문에, 뒷 얘기만 갖고는 안 됩니다.

(이재철) 당시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아들이 아버지한테 내 몫을 주시오, 이건 이 당시로서는 허락이 안 되거든요.

(이어령) 상속법에서도 안 되는 거에요(웃음).

(이재철) 이 아들이 돈을 달라고 할 때 아버지가 거절을 안했습니다. 아버지가 주는 거죠. 신명기 27장에서 보면 아들이 둘 있을 때 큰아들에게는 두 몫, 차자에게는 한 몫. 아들은 그 율법을 알았겠죠. 살아있을 때 1/3 주시오 한 것이고 아버지는 준 것인데, 거절하지 않고 주셨단 말이죠.

이 아들이 나갈 때는 부잣집 아들로 좋은 옷 입고 통통한 상태로 나갔는데 허랑방탕하고 돈이 떨어져서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오는데 아버지가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옛날 그대로 부잣집 아버지 그대로니까 아들은 아버지를 금방 알아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를 못 알아보고, 아들은 거지가 돼서 못 알아볼 수 있는데 아버지는 보자마자 먼 거리에서 아들인 줄 알았습니다. 이 아버지는 실은 아들을 내보내고 매일 동구 밖에서 기다린 것이지요. 바꿔 말하자면 이 아들은 내가 내 재산 1/3 날리더라도, 한번 인생의 구렁텅이에 빠져봐야 되돌아올 아들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아버지를 볼 수는 없나요.

(이어령) 비유법에서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 이 대목에서는 바리새인의 물음에 대한 비유니까요. 왜 죄인을 맞이하느냐, 네가 내쫓지 않고, 죄인들 아니냐?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문맥으로 읽어야지 그냥 비유로 보면 복잡하게 읽힙니다.

이전에 무슨 비유가 있었냐 하면 예수님에 가까운 비유는 희랍 시대 탕자의 비유입니다. 한 아들은 착한 아들이고 한 아들은 밤낮 노름해서 탕진한 아들이에요. 그런데 두 아들이 여행을 갔다가 해적들에게 붙잡혀요. 인질금 가지고 오너라 하는데 집을 다 팔아도 한 아들 값밖에 구하지 못했어요. 두 아들 달라고 사정하니 한 아들만 데려가라. 둘 다 줄 수 없다. 하나는 착한 아들, 하나는 형편없는 아들인데 도저히 너는 착한 아들이니까 와라고 못 하는 거에요. 하물며 인간의 아버지도 그러는데 너는 죄인이니까 오지 말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거죠. 원래대로 썼으면 더 확실했겠죠. 그러나 그건 양치기가 아닌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다.

놀라운 것은 두 아들 중 자신을 배신한 압살롬이 죽을 때, 다윗이 내가 죽어야 되는데 네가 죽었구나 합니다. 그 죽음을 보고 내가 죽을걸, 통곡을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거에요.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독생자의 사랑. 아버지를 모르면 그 하나님을 몰라요. 막막한데 아우가 아버지, 저는 이미 병에 걸려서 절 데려가도 살지 못합니다. 나쁜 짓을 워낙 많이 했습니다. 착한 형 데려가세요. 이미 회개한 것이지요. 아버지가 아니다, 형은 선하고 너는 나쁘니 널 데려가마. 못된 동생을 데려갑니다. 죄인을 택하는 이 이야기가 더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희랍 시대에 이미 있었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조하는 것이지요.

바리새인이 안 물어봤으면 먼저 비유를 그냥 댔어도 될 것입니다. 스스로 뉘우쳐서 돌아오는 걸 맞이하는 아버지, 이미 참회하지 않았느냐. 열 사람의 의인보다 한 사람의 죄인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느니라. 너희들도 대단한데 회개한 죄인이 아버지는 더 귀한거야. 아버지 입장만 얘기한 거죠.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는 파더십(fathership)만 얘기하지 선십(sonship)은 얘기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내년엔 뉴욕 가서 올스타전 데려가겠다고. 얘가 흥분해서 뉴욕 올스타전 가서 누구 만난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아버지가 오더니 얘야 안 되겠다, 내년에 가자. 믿었어요. 여름을 기다리고 뉴욕 간다 했는데 아버지가 오더니 이번에는 장사가 너무 잘 돼서 대목인데 어디 갈 수가 없어. 내년에 가자. 3년을 기다리게 됐어요. 애들이 거짓말쟁이라 놀리고 그때마다 죽을 맛이죠. 그랬는데 딱 3년째 하는 말이 얘야, 야구 말고 다른 거 안 되겠냐? 아들이 예, 됐어요 그만 두세요. 아버지에 대한 불신을 해서, 아버지는 거짓말쟁이야. 집을 나가서 장사하는 거에요. 그런데 너무 고통스럽고. 어느날 문득 꿈을 꾸는데 아버지한테 가서, 아버지가 약속을 못 지켰지만 이제 아버지 모시러 왔습니다. 꿈에서 아버지가 너 나쁜 놈 왜 이제 돌아와서, 무릎 꿇고 이게 아니지요. 그래서 내가 잘못했구나, 아버지가 못해 주시면 내가 하면 되는데. 티켓 다 사고 해서 아버지 집에 가서 무릎 꿇고 이제 제 형편이 넉넉하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게 선십입니다. 눈물 흘리면서 아버지가 손을 얹어주면서 얘야, 나는 여름 올스타전이 보일 때마다 네 생각 했단다, 고맙다 하고 기도해 주는거야. 우리는 늘 하나님 약속 안 지켰다고 하지만 우리가 지키면 되는데. 전부 윗사람들이 해 주는 쪽만 얘기했지 우리가 하는 선십에 대해서는 전혀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아들 얘기가 안 나오는데, 이건 우리들의 몫이다. 이제 우리가 티켓을 사자. 하나님이 약속 안 지킨 것 같지만, 좀 늦은 거지 안 지킨 게 아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입니다. 생일이 되면 어릿광대, 삐에로가 마술하는 걸 보여주겠다고 하니까 학교 가서 생일날 아버지가 마술사 데려다 곡예 시켜준다고 아들이 막 얘기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술 먹고 안 들어오는 거에요. 비가 내리고 하는데도 안 와요. 애들이 너희 아버지 어디갔어? 하면서 다 도망갔어. 그때부터 아버지를 절대 믿지 않던 사람이 암으로 죽게 됐어요. 자기 아들이 아내 뱃속에 있어요. 비디오를 찍는 거에요. 얘야, 난 너희 아빠야 하면서 할아버지 얘기를 하는 거에요. 내가 너 때문에 할아버지 생각 했단다. 우리 아버지도 그랬는데 내가 너에게 약속을 못 지켰는데. 너 때문에 아버지한테 간다. 가니까 아버지가 죽기 직전인데 사과를 했어요. 여기가 눈물나는 곳인데, 너 밖에 좀 봐라. 자세히 봐. 보니까 약속한 삐에로가 매직을 하는 거에요. 아버지, 여태 이거 안 잃어버렸어요? 네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잊어본 적이 없단다. 이게 파더십입니다. 아버지는 거짓말쟁이고 우리를 안 지키는 것 같지만, 한 번도 까먹은 적 없었다. 늙어죽기 전에 돌아오니까 삐에로를 데려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페라블이지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건 파더십하고 선십. 성경에는 파더십이 나오는데 선십은 안 나옵니다. 아들은 항상 선악과 따먹고 도망가고 하지요. 회개하는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강제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입을 막는 게 아니라, 기다리고 회개하고 자유의지를 두는, 그게 사랑입니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서 맞이하는 거야. 스스로 뉘우치는 영혼을 준 거야. 그걸 믿어. 이런 파더십을 얘기하는 세 가지 패러그래프를 통해 바리새인이 묻든 남이 묻든 완벽한 페라블 만들었습니다.

이걸 또 한번 ‘더러운 손’을 갖고 얘기해 보면 또다른 페라블과 연결되고 연결되면서 양떼 이미지, 아들 이미지들이 성서에서는 되풀이해서 나오니까 어쩌다 비유로 쓴 게 아니라 전체 비유의 범주를 하나 만들 수 있다. 그걸 통해 우리는 비로소 천당을 보는 거죠. 우리가 보지 못한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독해를 기호학으로 한 구절 한 구절 읽다보면 신학적으로 해결 안 되는 의미를 철저히 읽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걸 하자는 것이지요. 그냥 사랑하신다, 믿자 하지 마시고 철저하게 지성의 궁극까지 가서, 거기서 막혔을 때 하나님이 손을 내미시는 거지 우리가 풀 수 있는 문제를 놔두고서는 성경을 읽을 수 없습니다.

한 여학생이 교수님께 그랬대요. 요즘 베스트셀러인 이 책 교수님 읽으셨어요? 이거 1백만부 나갔어요. 읽으세요. 그 교수가 이랬대요. 성경을 꺼내면서 이거 읽었어? 나온지 몇천년 됐어 빨리 읽어(웃음). 진짜 베스트셀러, 롱셀러는 성서입니다. 이걸 안 읽고, 이 화제의 책을 석 달이나 됐는데 안 읽으셨어요? 하는 것이지요. 젊은 사람들에게 읽혀야 할 책이 성서입니다. 펑크족 얘기도 나오고 별 얘기가 다 나와요. 동성연애도 나와요. 뭐하러 이런 걸 불리한 얘기를 썼을까? 그래서 읽는 거에요. 다른 경전은 깨끗한 얘기만 나오는데 성서는 민망한 얘기 많이 나와요. 그거 때문에 읽는 거지.

예수님도 실수 많이 하시거든요. 앞뒤 틀린 얘기도 많이 하시고. 그걸 안 고쳤으니 사실 아니에요. 앞뒤가 다 맞으면 읽을 필요 없어요. 합리적으로 안 풀리기 때문에 지금도 성서는 수수께끼를 주고, 우리의 능력으로 풀 수 없으니까 여러 군데서 얘기하지만 저는 성서를 읽을 때마다 달라지고 읽고 나서도 달라지고, 그래서 제가 얘기한 게 그전에 모임에서 했을 거에요. 만두를 통째로 먹어야 알지, 분석한답시고 껍데기 따로 먹고 양념 먹고 돼지고기 다진거 먹고 한다고 알겠어요?

성서는 분석하는 게 아니라 통째로 먹고 씹어라. 기호학으로 나는 하나하나 따져서 그럴듯한 것 같지만, 성서를 다 기호학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 없기 때문에, 기호학으로 안 되는 그 엉성하고 해결 안 되고 모순되는 것들이 그게 인간을 초월한 만두 맛. 그걸 먹어라. 그건 씹을 수밖에 없다. 긴 얘기 했지만 기호학으로 안 되는 씹는 것, 그게 목사님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와 신앙의 힘으로 해 줘라. 그게 아니고, 기호학으로는 감동 초월 이게 안 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철저히 밟아야 손을 내밀게 되고 목사님, 봐 주십시오. 그러면 목사님은 하나님하고 접속해 가지고 알려주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교회 나오지, 지식으로 치면 내가 왜 교회 나오겠습니까(웃음)?

(이재철) 초기 교부 터툴리안이 나는 모순되므로 믿는다고 했습니다. 100% 이성으로 이해되면 믿지 않겠지요. 모순되니 믿지 않을 수 없다. 선십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는데 여기 계신 우리 아들 여러분들이 잘 들었으리라 생각됩니다(웃음).

이제 누가복음 15장 세 비유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립니다. 헬라어 원전은 미완료형인데, 그걸 보면 여기서 한번 비난한 게 아니라 전부터 계속 비난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들에 대한 답변으로 세 비유를 드십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 그 비유는 양을 치고 경험있는 사람들에게. 드라크마는 여자와 상인에게. 탕자의 비유는 제3자를 위해. 이 세 비유를 연결해서 점진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미를 상승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 마리 잃어버린 양 이야기하실 때 팔레스타인 목자들은 밤이 되면 우리에 양을 넣고 숫자를 꼭 세지요. 만약 자기가 알고 있는 숫자에서 한두 마리 모자라면 그 양을 찾으러 나간다. 이스라엘에서는 초목지가 주로 남북을 잇는 중앙 고원지대에 있는데 해발 500m 이상입니다. 서울 남산 2배 높이에요. 따라서 양은 3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없고 그러니 먹이를 찾을 수 없고 세 번째로 방어능력이 없다. 그러니 양이 일단 없어지면 양 홀로 돌아올 능력이 없다.

▲이재철 목사.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재철 목사. ⓒ양화진문화원 제공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어느 목자가 한 마리 양을 잃으면, 하셨는데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님 이 말씀에서 잃었다는 동사로 길을 무지해서 모른다는 동사를 썼고, 마태는 고의적으로 벗어났다는 동사를 썼다. 양 주인은 이 양이 고의로 벗어났든 무지로 벗어났든 따지지 않는다는 거지요. 없어지면 찾으러 갑니다. 이 99마리 우리에 이리가 들어와서 상해도 1마리 찾으러 가는 거죠. 그러니까 목자에게, 하나님에게는 우리 한 사람의 생명이 수치로 계산되는 게 아니다. 내 한 사람의 생명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명을 합친 가치와 똑같다는 걸 보여주셨다고 생각됩니다.

두번째 드라크마로 넘어가면 중동 남성은 결혼하면 여성들에게 예물을 주는데 서민들은 드라크마 10개를 줄에 엮어줬습니다. 이 드라크마 10개는 단순하게 동전 10개가 아니고, 여자에게 있어 결혼기념물이에요. 하나 없어지면 다른 드라크마 채워도 되지 뭐, 가 아니라 다른 드라크마 채우면 이건 남편이 준 게 아닙니다. 없어진 걸 찾아야 결혼예물이지요. 요즘도 중동 사람들 결혼하는 화보 보면 여자들이 100개씩 금화 장식을 합니다. 2천년 전 서민들은 돈이 없어서 한 드라크마가 하루 임금이었어요. 열흘분 임금을 결혼예물로 준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날 줄이 터지면서 하나가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이 여자가 그 결혼예물을 온전한 걸로 만들려고 촛불을 켜고 구석구석 찾아다니는 거죠.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이 아니라 결혼예물이 다시 회복된 기쁨, 한 사람의 전체로서의 의미를 말합니다.

내 한 사람이 없어지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조화를 상실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한 사람의 가치도 절대 중요하지만 내가 아무리 보잘것 없는 하루 임금, 한 드라크마에 불과한 존재라도 내가 있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한 생명의 전체로서의 가치로 양의 비유보다 의미가 한 단계 올라가지요.

세 번째로 탕자의 비유에 가면 아까 성경 자막에서도 보셨지만 그 단락 제목을 요즘은 잃은 야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라고 한다. 이 탕자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단절된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버지에 의해서만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아무리 집에 찾아갔어도 당신이 아들이라 부르는 것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품꾼으로 여겨주십시오 했을 때, 너 참 생각 잘 했다. 넌 그거밖에 안돼. 내 종으로 살라고 하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회복이 안 되지요.

그런데 멀리 오는걸 보고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측은히 여기고 입을 맞췄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줍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옷은 명예를 뜻합니다. 요셉도 감옥살이 하다가 총리가 됨과 동시에 왕이 옷을 입혀준다. 아들의 명예 회복이지요. 가락지를 끼워준다. 권한을 다시 줍니다. 아들 권한의 회복, 신을 신겨 줍니다. 종들은 다 맨발이고 자유인만 신을 신었다. 그러니 이 아들이 나가 돼지를 치고 쥐엄열매 먹는 종살이 할 때는 맨발로 온 것. 아버지가 신을 신겼다는 것은 아들의 자유를 회복시킨 것.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지는데, 바리새인 너희들은 아니야. 너희들은 스스로 네가 의롭다 생각하고 내 나라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볼 때는 너희들이 죄인이야.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나와의 관계가 회복 안돼. 저들은 정말 죄인임을 스스로 깨닫고 더 이상 세상에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나에게 나오는데 내가 회복시켜 주겠다. 그런 의미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점점 그 의미가 상승하고 있네요.

(이어령) 참 좋은 대화가 되는데 기호학은 저렇게 읽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여태까지 저렇게 읽었어요. 그러면 한국 사람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래서 정말 신학을 하지 않으면 성서를 못 읽어요. 그냥 읽어도 통하도록 돼 있는데 말이에요. 동전 한 닢은 있어도 신부가 아닌데? 그런 뜻으로 썼더라도 미디어라는 것은 기호체계로밖에 안 됩니다. 무슨 뜻으로 썼든 기호는 기호체계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호학은 피시스로 읽는 게 아닙니다. 당시로 돌아가다 보니 엉뚱한 해석이 나와요. 예를 들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기호학은 큰 것이 작은 것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관계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증론으로 바늘귀라는 게 실제 성문 옆에 있었는데 낙타가 짐을 지면 들어오지 못했다. 또다른 사람은 그건 기원 후 얘기지 성문에 바늘귀라는 뒷구멍이 없었다. 사람들은 자꾸 의미를 붙여서 바늘귀가 실제로 있었다, 피시스가 있었다, 당나귀가 짐을 다 내려놔야 했다. 그러니 천당 가려면 다 짐 내려놔야지만 꼭 성문이 닫혀서 바늘귀로 들어가서 임시통용문으로 다니는데 그때 낙타들이 다녔다. 얼마나 그럴듯하고 멋있어요? 그런데 그 역사 속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효합니다.

기호학은 기호체계 안에 바탕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장을 씁니다. 그러면 어떻게 읽느냐? 바로 뒤를 봐라.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 티끌을 본다, 들보와 티끌이라는 과장법을 쓰니까, 낙타가 바늘귀라는 과장법도 같은 체계로 봐야죠. 낙타가 실제 바늘귀가 있었다고 실증적으로 하지 마라, 기호체계로 하라는 거죠.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래야 커뮤니케이션이 돼서 그 때 살지 않았던 사람도 읽을 수 있습니다.

열드라크마 나오고 하면 의미가 완전히 틀려져요. 완전해진다는 얘기가 아니고. 99마리까지 버려두고서라도 1마리를 찾는다는 건, 진짜 의로운 사람 99명보다, 아버지 말대로 잘 섬기는 아들보다 방탕한 아들이라도 그 아들 위해서 맞이해 준다는 말입니다. 99마리보다 잃어버린 1마리 양의 계산법이 더 중요하다는 기호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마리를 완성시키려 1마리를 찾아다닌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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