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1년 9월 25일
본문: 누가복음 16:13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돈을 잘 쓰는 사람
누가복음 16장 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돈을 잘 쓴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이 듣기를 원하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부자 되세요!”
“하나님은 당신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에게 “부자가 되는 것이 축복이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부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수도 있으며,
혹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부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앞에 현실적으로 펼쳐져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잘 믿어도 얼마든지 가난해 질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도 가난해 질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물질이 복인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니면, “하나님은 계신데 물질이 복이 아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돈 너무나 실제적인 문제 아닙니까?
이중에 혹시 돈을 싫어한다거나,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십시오. 사실 돈은 없어도 문제이고 많아도 문제입니다.
돈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면서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래도 설교 제목인데, “돈”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 돈! 하니까 확 와 닿는 대요!”라고 합디다.
예수님도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사용하시면서 재물을 많이 언급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가복음 10장 25절의 말씀 같은 것들이지요.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또한 예수님께서는 38개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자주 사용하셨던 주제가 재물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거지와 나사로,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 등. . .
이제 여러분들이 이 강단에서 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편해지지요?
1.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잘 사는 것의 기준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잘사는 사람”이라고 동일 시 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돈이 없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 할 수는 있지만 “못사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돈 없이 잘 살 수 있는 원리를 사도바울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도,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빌 4:12). 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님을,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자족하는 원리가 있음을 말입니다.
2.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마가복음 8장 36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우리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돈으로 만족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욕심을 내던 것을 얻으면, 잠시는 만족이 가능하지만,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3.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축복이 아니라 “은사”이다.
우리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물질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은사”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시면 감사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원리는 선물은 줄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 돈을 참 잘 쓰네. . ."
두 가지 의미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돈을 마구잡이로 잘 쓴다는 것과 필요한 적재적소에 잘 쓴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돈이 좋고 나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주변에는 돈을 천박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우아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그 돈으로 인해 우리는 많은 훈련을 받기도 합니다. 돈은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인인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돈이 없을 때와 돈이 많을 때. . .
어느 쪽이 여러분의 마음에 드시나요?
돈이 없을 때도, 돈이 많을 때도 우리들에게 동일한 시험이 옵니다. 양쪽 순간에 모두다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합니다. "누가 주인인가?"
돈이 없을 때, 우리는 비참함을 느낍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나서도 결국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에 우리의 가치를 결정할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돈에 대한 실망이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누가 우리에게서 돈을 빼앗아가는 막대한 손해를 입혔던지, 아니면 내가 기대하는 사람에게서 도움이 오지 않을 때 동일한 섭섭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그 사람 역시 단순히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요 통로일 뿐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돈 앞에서 우리는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돈의 많음은 역시 우리에게 큰 시험이 됩니다. 그렇게 의지했던 하나님이, 돈이 많아지는 순간 그렇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분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돈은 본질적으로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이 본질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결국 돈은 우리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사용하거나 즐기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든지, 돈의 지배를 받던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지요. 아주 중요한 영적인 문제라는 말입니다.
좀 더 명확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는 흔히 돈에 대한 중립적인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크리스천의 경제생활에 관한, 혹은 돈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보았습니다.
거의가 일관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돈의 중립적 가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디모데 전서 6장 10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이 나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이다! 라는 정의입니다.
또한 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돈의 사용의 측면을 보기 전에, 돈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면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돈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위험성을 우리가 간과한다면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로 접근 할 수 없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계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부정적인 접근으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돈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악한 영적 능력이 그것입니다.
영적 세력으로서의 돈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성경적인 용어로, “육체의 소욕”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 이하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그렇습니다. 물질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인 소욕을 구체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돈이 없으므로 정욕의 죄를 짓지 않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한다면, 하나님의 사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문제는, 돈을 가지고 즐기고 누리는 모든 것을 끊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결론을 이야기 한다면, 인생의 일반적인 쾌락을 절제하고 물질적인 만족을 스스로 부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기독교계에서 “청부론”과 “청빈론”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번 돈으로 얼마든지 누리면서 살수 있다는 것이 청부론입니다. 즉 깨끗한 부자가 되어라 하는 것이지요.
이 논쟁에 불을 붙인 사람이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쓴 어떤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이 책에서는 바로 여러분들이 듣기를 원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부도덕한 돈을 거부함으로 부득불 가난해 질 순 있어도, 굳이 가난함을 자랑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크리스천이 부자가 되기를 소망하되 반드시 정직한 십일조와 구제헌금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 돈과 하나님의 돈을 분별할 줄 아는 투명한 크리스천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일 것이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에게 돈을 맡기시기를 원하신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요, 우리가 그렇게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내면을 보면, 우리가 아무리 돈에 중립적인 가치를 둔다 해도 돈을 사랑하는 것을 면하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돈에 대한 유혹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상은 우리가 고고한 것에 목표를 두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항변하지만, 사실 원하는 것은 그 돈 자체인 것을 부인하기가 힘이 든다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그리고 “잘”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목적이 “열심히” “잘”에 있습니까? 아니면 축복에 있습니까?
청부론의 주장을 가만히, 그리고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목적이 올바른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부, 즉 돈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사는 것이 바로 주어질 축복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헌금을 드리는 이유도 바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구별(區別)하여 드린다, 성별(聖別)하여 드린다, 모든 것을 드린다는 신앙의 원리가 결국은 부를 정당화 하고, 내가 누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지요.
무엇을 느끼시나요? 믿음이 가장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탐욕적인 모습이 아닌가요?
“깨끗한 부자”가 되려는 욕망이 말입니다.
우리교회에도 의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술”이라는 말이 많이 쓰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과에 의사들이 지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도 두 교회를 놓고 어떤 교회로 갈까 고민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돈”은 중립적인 가치입니다 라고 말을 하면서, 실제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돈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돈을 그냥 물질로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지적한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돈”은 영적인 세력입니다.
결국은 돈을 섬기는 사람이 되든지 하나님 편에서든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깨끗하게 번 돈으로, 내가 육체의 소욕을 즐긴다. . .
혹은 깨끗하게 번 돈은 내가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 . .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우리들 속에 욕망으로, 혹은 여러분들의 삶의 목표가 되어있지 않은가를 분명하게 보아야합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 핵심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 관원의 이야기에서 언급이 됩니다.
누가복음 18장 18-23에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지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청년의 마음속에 가장 큰 관심과 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은 이 청년의 삶에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일견, 이 청년이야말로 “청부론”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부자이지만, 남을 구제하는 사람이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고, 살인과 간음의 죄를 짓지 않는 사람,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 . .
누구도 이 청년이 부를 누리는 데 있어서 무엇이라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 청년이 이렇게 깨끗하게, 모범적으로 사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 물질을 포기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은 결단의 문제요, 선택의 문제인 것입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는 예수님의 단언적인 문제입니다.
사실 제 모습을 다 드러내놓고 돈을 쓰는 모습을 다 이야기한다면 여러분들은 너무나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설교가 아마 귀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직은 제가 돈을 사용함에 있어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 과도한 지출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기도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제가 실수하는 부분들에 대하여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실수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제가 돈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용함에 있어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안도감 말입니다.
계속해서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 어느 순간에 돈의 지배를 받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잠언 30장 7-9절에 있는 지혜의 말씀이 와 닿는 순간입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열심히 살아 가난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혹시 가난한 이유 때문에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죄를 지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혹시 부자가 되어서 육체적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경계해야할 부분입니다. 우리의 죄 된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도록 불림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거룩함”을 인하여 불림을 받은 사람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돈에 대하여 청지기 의식을 갖는다?
우리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돈을 주관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사는 사람을 "청지기"라고 합니다.
자신의 돈이 아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돈을 '잘' 씁니다.
자신이 돈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또한 돈을 '잘' 씁니다.
이 둘의 의미가 확실하게 와 닿으시나요?
돈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잘' 써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실한 믿음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경험이 쌓여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이 믿음이 있어야 돈의 유혹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는 사람들 중에 돈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유혹'은 의지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나서 제일 많이 회개한 것이, 제 미래에 대하여 돈을 의지 했다는 것입니다. 군목으로 있던 시절 저에게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군을 마치면서 유학을 생각했고,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유학 자금을 모아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삶의 우선순위는 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놓고 쓰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던 때,
하나님이 제 인생을 지금까지 인도해 오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인도해 가실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그 분이 나의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고백하면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돈을 모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돈을 쓰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아서 인도하시리라는 '이상한?'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군목시절 교회의 헌금은 오로지 병사들을 위문하는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사역의 기준은 늘 교회에 헌금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니 '돈'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없으면 제가 헌금을 하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딱 한 달 만에 교회 재정이 2배가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때 철저하게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사역의 주인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은혜를 받던 때, 저에게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지금도 잊지 못하는 빨간 프라이드를 타고 전방을 누비며 다니던 때, 두 번의 사고를 당했습니다. 빙판길을 가다 다리를 받고, 전주를 받았던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정확하게 그 차를 고칠 돈을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를 방문한 교인이 도와줬던 그 돈이 정말 정확하게 차를 고치는 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죠.
요즘 저는 공급받는 것보다 '잘' 쓰는 훈련을,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얼마 전 미국에 갔을 때, 부목사님과 같이 갔습니다.
20일 정도를 다니다 보면 혼자 쓸 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조금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 보니까, 아들 웅기가 생일이라고 선물을 해 주는 겁니다.
그 돈 제가 준 돈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기쁜지, 게다가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제 아들이잖아요. 그래서 살짝 아들에게 물어 봤습니다. "그 선물이 얼마짜리니?"
며칠 있다 집사람을 시켜 3배 정도 되는 액수를 다시 주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선물을 사다주라고 말입니다.
제가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저는 요즘 목회자들을 만나거나 신학생을 만나면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정확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저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 중에 저를 큰 교회 목사로 알고 찾아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뉴욕에서 공부하고 있는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안내를 받고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학생 목사님이 저에게 밥을 사주겠다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니면서 그런 인사 많이 받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만으로도 고마워서 제가 기쁘게 밥을 삽니다.
그런데 나가면서 밥값을 내려고 카드를 냈더니 이미 계산이 끝나 있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냈습니다.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제가 그냥 꼭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 일을 저는 가슴에 새겼습니다. 당장 거기에서 밥값을 주거나,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목사님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에 제가 꼭 그 마음을 갚아줄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나왔습니다.
제가 보통 유학생들을 만나면 조금이라도 돈을 주고 오는데 그냥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주는 것보다 큰 것을 생각하고 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바로 바로 응답이 온다고 기뻐하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돈을 잘 쓰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경계해야할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를 조금 더 다루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을 보세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
돈지갑이 어디에 사용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도덕성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돈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청지기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도덕적 차원에서 나타나야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아주 쉬운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욕망을 채우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까?
여기에서 ‘원한다’라는 물음에 대하여는 어쩌면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 다면 그 대답은 조금 심각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영적인 차원의 문제는, “영적인 척”을 하면서 해결될 문제인지 모르지만, 이 도덕적인 측면에 와서는 걸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거룩한 욕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위 돈을 버는 욕망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하기 위함이라면. . .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 깊이 들여다보면 그 “거룩한 욕망”속에 어떠한 이유이든 내가 돈을 벌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욕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문제인지 모릅니다.
저는 너무 쉽게 “저는 돈에 대하여는 초연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을 하지만,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내 속에 있는 욕망은 이미 충족시켜 놓고” 초연한 모습이 있음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카네기 (Dale Carnegie)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을 이겨내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우리는 흔히 욕망에 대한 것을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남들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것,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 남들보다 편하게 살려고 하는 것 등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창 1:27)
그런데 이러한 거룩한 본성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욕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는 “죄 된 욕망은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질병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욕망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치료되어야 할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이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꼭 필요한 것들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거스틴은 “방치된 욕망은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을 거부하지 않으면 필요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욕망을 내버려두면 필요 이상의 물질을 누리는 습관이 생깁니다.
이 습관에 익숙해지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필요한 것만큼”이라는 말은 아무런 통제력을 잃게 됩니다.
이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살집이 필요합니다. 맞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떤 집을 원하십니까?
여기에서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차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차를 타기를 원하십니까?
실제적으로 갈등하는 부분들이 여기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담임목사로 취임하기 전, 호텔에서 결혼 주례를 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호텔에 가기 때문에 제 차보다는 당시 담임목사님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서 주차장에 대지 못하고 valet parking을 하고 들어갔습니다. 나올 때는 역시 편하게 돈을 주고 서비스를 샀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 속에는 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나에게는 돈보다 시간이 더 중요하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저에게 고민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필요이고, 어디까지가 원하는 것인가 말입니다.
저만 그런가요? 세월이 흐르면서 필요와 원하는 것 사이의 기준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이런 정도의 차를 타야겠다. 이런 정도의 삶을 유지해야겠다 라는 것들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생활 속에서 얼마큼의 돈이 필요한 것이며, 얼마큼의 돈을 원하고 있습니까? 이 차이를 구별하려고 고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아닙니까?
이 부분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미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돈의 필요에 따라,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성령의 사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솔직하게 돈이 좋습니다. 그러나 돈을 단순히 “돈”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저도 오늘 여러분들에게 돈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돈에 대한 고민을 드리려고 합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에 대한 고민 말입니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번다면 반드시 그릇된 길로 가게 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욕망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따라 돈을 추구하는 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
우리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충분히 누리며 살 기회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돈이라는 것은 우리의 물질적인 욕구, 육체적인 욕구를 가장 잘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을 가지려고 합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끊임없이 경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속에 끊임없이 성령의 소욕이 필요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간섭하시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이 욕망이 되지 않기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만큼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좋습니다. 그러나 돈을 경계할 줄 알아야합니다.
성령 안에서 필요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의 복을 구하기보다는, 물질의 은사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은 누리는 것이지만, 은사는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분명한 신앙은, 자족의 원리를 배우게 합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모든 물질 가운데 자유함으로
감사함으로, 자족함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