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받는 기업 되는 것이 소망”
화마(火魔)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고객 데이터 베이스도, 계약서도 불에 탔다. 소방차가 얼마나 물을 뿌려댔는지 암흑으로 뒤덮인 화재 현장에 질퍽한 물이 흘러 넘쳤다. 매캐한 그을음 냄새는 코를 찔렀다. 5년간 거의 매일 점심도 거른 채 공들여 쌓아 올린 회사가 잿더미로 변한 현장을 그는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1986년 2월 서울 창신동 새빛문화사 앞. 직원 80명에 월 매출 2억원. 잘나가던 출판사의 아성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기규경 대표의 나이는 당시 서른 넷. 그는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두니 내 능력으로 이뤄냈다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큰 성공 뒤에 찾아 온 좌절 속에서 깨달은 뉘우침이었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일 서울 신당동에서 만난 그는 힘들었던 시절들을 웃으며 담담하게 들려줬다.
그는 1981년 스물 아홉에 새빛문화사를 세웠다. 화재로 한 차례 좌절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일어났다. 잿더미에서 불에 타다 만 계약서 조각을 모아 고객들을 찾아 다니며 일일이 수금했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이후 소설 사서오경, 김대중 옥중서신 등을 출판해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봄날은 길지 않았다. 믿었던 지인에게서 당한 배신. 회사는 부도가 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강이 나빠졌다. 1990년. 6개월 간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 때가 가장 평안했어요.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으니 종일 누워서 성경 읽고 기도했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았던 때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세세하게 도우셨던 것 같아요.”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성경의 황금률. 기독교인이면서 기업인으로서 산다는 것. 기 대표는 “쉽지 않다”고 했다. “돈을 잘 벌려는 유혹이 있죠. 왜 없겠어요. 그런 유혹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양심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요.”
그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 사람들과의 신의만큼은 저버리지 않았다. 신의를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그래요.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사느냐고요. 좀 더 영악하게 살면 편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출판사가 화재로 파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는 5억 원 상당의 채무를 모두 갚았다. 1990년 부도가 난 상황에서도 직원들의 급여와 퇴직금을 챙겨주기 위해 회사의 영업용 자동차까지 모두 팔아 치웠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빚을 갚았다.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을 때였다. 그래도 그는 억척스럽게 신의를 지켰다. “그게 옳은 일이었으니까요. 좀 쉽고 편하게 살고자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어요.”
“그 때까지 눈물 한 번 안 보이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절 원망하더군요. 빚을 정리하고 직원들을 먼저 챙긴답시고 통장까지 모두 넘겨주고 나니 물리치료비 40만원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게 된 것이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에요. 전 그랬어요. ‘나를 믿고 따라와준 직원들이다. 회사를 그만 둬야 하는 직원들에게 이보다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했죠.”
다행히 기 대표는 서서히 건강을 회복했다. 6개월 후, 그는 부축을 받고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다. 통장에 잔고도 없었다. 교회 예배당의 긴 의자에 누워 예배를 드리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포기하고 싶진 않았어요. 어떻게든 다시 사업을 해볼 마음이었죠. 잿더미에서도 건져주시고 나를 다시 걷게 하신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다시 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죠.”
그러나 재기(再起)는 쉽지 않았다. 다시 출판을 시작했지만 1997년 IMF가 터졌다. 가지고 있던 10억 상당의 지형과 판권은 휴짓조각이 돼 버렸다. 이 후로 출판은 접어야 했다. 한때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결심해 신학대를 다녀봤다. 그러나 신학 공부도 쉽지 않았다.
“그 때는 신기하게 기도원에 올라가거나 산에 기도하러가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랬어요.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 못 들으셨어요? 목사님 하셔야겠네요’ 스스로 고민도 많이 하고 기도도 참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내가 목양의 사명이 있구나 싶어 신학을 공부한 거예요. 하지만 스스로 확신은 갖지 못했어요. 아내까지 반대하고 나서니 가정을 먼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1년만 공부하고 그만뒀습니다.”
출판과 신학을 포기하고 시작한 것은 제약사업이었다. 2001년 그린피어제약을 설립하고, 특허를 냈다. 잇몸질환에 치료효과가 있는 천연 분말 세치제를 개발했다. 상품명은 ‘이조타’ 치아질환의 예방 및 치료용 조성물이었다. 경희대학교 치과대학 구강생물학연구소 임상을 거쳐 식품의약품 안정청으로부터 의약외품허가를 받았다. 관련 논문이 미국의 만간요법학술지(Journal of Ethnopharmacology)에도 소개됐다.
그는 소망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 나라를 더 넓혀가는 데 쓰임받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국내선교나 해외선교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이루실 계획이 있다고 봅니다. 그 계획대로 이뤄지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함께 할 좋은 파트너와 투자자를 만나 더 나은 제품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일본과 중국 등 해외시장 진출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완벽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무척이나 애쓰며 살아왔어요. 나는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씀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힘든 시련과 연단 가운데 있을 때는 뭔가 이뤄질 때 내가 해냈다는 교만이 싹트지 않도록 더 낮추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며 감사해 합니다.”
그의 나이 올해로 예순. 서초동 산정현교회(김관선 목사) 안수집사로 섬기고 있다. 그는 장시간 인터뷰를 마치면서 아들 이야기를 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서른 살의 아들은 언제나 좋은 친구였고, 조력자였죠.” 언젠가 아들에게 물어 봤다고 했다. “이렇게 고생스럽게 사는데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니?” “아뇨, 평생 하나님 편에서 옳은 길을 걸어 오신 아버지니까 존경하죠.” 아들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