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50인] 개포감리교회 안성옥 목사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한다. 정체 혹은 후퇴하고 있는 성장세, 자꾸만 들려오는 부정적 소식들, 교회에 대한 사회의 불신 팽배 등 총체적 난국은 미래 한국교회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 구석구석에서 여전히 저마다의 영성과 철학으로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지는 특별히 목회 현장 가운데에서 한국교회에 희망을 전하는 리더십 50인을 만나 그들의 사역을 소개함으로써 한국교회에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교회를 10년 넘게 섬겼다는 권사가 말했다. “절대 제게 반말 한 번 한 적 없으세요. 꼭 뒤에 ‘님’자를 빼지 않으시죠. 보통 한 교회에서 20년 넘게 담임목사를 하면 ‘누구 권사, 누구 집사’ 이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희 목사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세요. 아주 겸손하시고, 배려가 넘치시는 분이죠.”
개포감리교회 안성옥 목사(63)의 이야기다. 인터뷰를 마치고 교회 승합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담임목사님 인품이 훌륭하시더라”는 한 마디에 운전 중이던 그 권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담임목사에 대한 간증을 쏟아냈다. 말꼬리마다 “기쁘다” “행복하다”가 반복되면서 간증은 길어졌다. 차마 중간에 말을 끊을 수 없어서 목적지에 도착한 지 3분이 지나서야 기자는 겨우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안성옥 목사는 그랬다. 지난 28일 오전 10시 서울 일원동 개포감리교회를 찾은, 어림잡아도 서른 해의 세월 차가 날 기자를 안 목사는 세심하게 배려했다. 3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몸에 밴 습관인 것 같았다. 덕분에 그와의 대화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 섬김
그는 담임목사실로 들어서는 기자에게 직접 신발장의 슬리퍼를 정갈하게 내줬다. 그리고 물었다. “인터뷰는 어디서 하는 게 좋을까요?” 담임목사실의 소파와 회의용 탁자 중 어디가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동안 많은 인터뷰를 해오면서 이런 질문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기자는 얼떨결에 회의용 탁자에 앉아서 하자고 했다. 그리고선 그는 직접 의자를 빼줬다.
입고 있던 오리털 파카를 벗자, “옷걸이를 드릴까요?” 물었다. 이것도 생소했다. 그의 배려에 익숙해질 때쯤, 그는 원두커피를 직접 로스팅 해주겠다면서 물었다. “커피는 진하게 할까요, 연하게 할까요?” 배려의 연속이었다.
“섬기는 것이 재능이세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때 기쁩니다. 그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아닌가요?”
설교, 기도 등 많은 은사 중에서 그는 섬기는 것이 자신의 은사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작은 머슴’이라고 하나 보다. 머슴처럼 감리교와 한국, 그리고 세계를 섬길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했다.
◇ 자긍심
“선교하는 교회를 만듭시다.” 1985년 1월 담임목사와 성도 7명이 서울 강남의 한 건물 지하 예배당에서 모여 나눈 대화는 이랬다. 세계를 섬기는 교회를 만들자는 것.
“개척 초기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는 표어를 가지고 시작했어요. 예수를 전하고 배우며 닮는 교회가 되기 원하는 마음을 품고서 선교 지향적 목회를 하고자 했죠.”
그로부터 27년간 안 목사와 개포감리교회 교인들은 꾸준하게 해외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 결과 현재까지 네팔, 인도, 피지, 미얀마, 아이티, 루마니아, 헝가리, 말레이시아, 케냐, 탄자니아, 아르헨티나, 페루, 도니미카, 쿠바, 북한, 중국 등 27개국 37개 선교지에 선교사역을 지원하며 교회와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또한 국내에도 43개 교회 및 선교기관을 후원한다.
“저희는 교회 건축 등으로 빚이 10억원 이상 됐을 때도 선교비 지원을 끊지 않았어요. 늘렸으면 늘렸지 중단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우면 또 채워 주시더라구요. 또한 교인들도 어려운 가운데 해외 선교비에 써 달라며 몇 천만원씩 헌금을 했어요.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죠.”
개포감리교회 교인들은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평신도’에 대한 확고한 정체성이 있다. 남선교회와 여선교회 이름을 자신들이 섬기는 선교지로 지은 것은 그런 자긍심의 표출이다.
◇ 선교의 꽃, 피지
“최근에 감리교신학대학교 김홍기 총장님을 통해서 어떤 분이 피지 선교를 위해 10억 원을 헌금해 주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안 목사의 얼굴도 목소리도 감격에 차 있었다. 피지에 석·박사 과정을 밟을 수 있는 대학원을 세우는 데 헌금하고 싶다는 인물이 나타났다고 했다. “석·박사 과정을 위한 대학 건물은 현재 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해도 되고 새로 지어도 되죠. 어찌됐든 올해 안에 일사천리로 진행될 겁니다.” (웃음)
피지선교는 1993년 안 목사의 방문이 계기가 되어 현재 23동의 건물이 있는 중고등학교(나시까와 비전 컬리지)가 피지 비티레부섬 중심에 위치한 5만평의 대지에 세워질 수 있었다. 교회는 원주민 마을에 1999년 나시까와 개포교회, 2007년 현지 인도인을 위한 나임발레교회가 세워졌다.
안 목사가 처음 피지 땅을 밟았을 때만 해도 한국 감리교에선 피지는 불모의 땅이었다. “피지는 무슬림 선교의 최적지였어요.” 안 목사는 이슬람교와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피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 이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전했다.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억압 없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피지의 개방된 문화는 100여 년간 식민통치를 한 영국의 유산이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덕분에 피지의 인도인들은 거부감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개종으로 인한 테러와 살인 소식이 들려오는 중동의 이슬람권과는 사뭇 다르다.
“나시까와 비전 컬리지는 단순한 학교가 아닙니다. 이슬람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인 거죠.” 남태평양의 333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 피지는 이슬람 선교의 최적지였다. 피지는 과거 120년 동안 장기선교사만 270명이 넘게 배출된 땅이었다.
안 목사와 개포교회가 속한 강남동지방은 이곳에서 인재를 키워 이슬람권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전략으로 학교를 세웠고, 현재까지 약 1500명의 학생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2007년부터는 대학교예비과정까지 열려 명실공히 지역을 대표하는 학교로 성장했다.
◇ 협력의 산물
“비결은 협력이죠.” 한국 감리교 역사상 유례 없는 피지선교의 봄을 가져다 준 요인에 대해 안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18년 전 피지 땅을 밟은 것은 안 목사만이 아니었다. 감리교 서울남연회 강남동지방 임원이었던 조정구 감리사, 강흥복 목사, 김충식 목사가 함께 했다. 이들은 피지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현지 선교사로 섬기던 김주성 선교사와 협력의 뜻을 모았다.
이후 피지선교는 강남동지방 소속 교회들(개포, 서울연합, 안디옥, 성은교회 등)의 협력으로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강남동지방은 지난 18년간 지방회 예산의 30~40퍼센트를 매년 피지선교에 투자했다. 선교사 생활비 지원까지 합하면 매년 평균 4,500~5000만원의 재정이 투입된 것이다. 피지선교를 위해서 지방회 연례행사인 체육대회도 고사했을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 “체육대회 때마다 들어가는 비용을 해외선교로 돌린 거죠. 그리고 관행에 따른 사례비도 없앴어요. 전부 선교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 명예
섬김과 자긍심, 피지선교에 대한 이야기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쯤 퍼뜩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감독이나 감독회장에 대한 욕심은 없으신가요?” 안 목사의 동료들은 감리교의 감독 내지 감독회장 후보 아니면 감신, 목원, 협성대의 총장 또는 대학원장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주변에서 감독 출마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하지만 전 아닙니다. 제 능력 밖의 일이고, 또 제 은사가 아닙니다. 선의의 정치는 꼭 필요하나, 정치는 괴물과 같아서 불의와 타협하는 등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명예는 잠시 잠깐입니다.” 그는 교단 정치를 하게 될 경우 불의와 타협해야 함을 경계했다. 그런 상황이 난처해, 그동안 감독 출마 제의를 거절해왔다고.
그에게 명예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 그가 웃으며 말했다. “잔이 비었는데 한 잔 더 드릴까요?” 원두커피를 담았던 잔이 둥그런 갈색 테만 남긴 채 비어 있었다. 인터뷰 도중 커피를 두 번 권하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