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2년 3월 4일
본문: 갈라디아서 2:20
설교: 김동호 목사
제목: 십자가와 나
우리 기독교의 핵심 복음과 가치는 십자가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뺀다면 우리 기독교는 그날로 무너지게 되고 말겁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핵심이 십자가가 아니라면, 우리의 삶이 십자가와 무관한 삶이라면 우리는 명목상의 크리스천은 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실제적인 크리스천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부족하지만 십자가가 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십자가와 그 십자가의 정신이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가져왔으며, 어떤 영향을 끼치고 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간증하려고 합니다.
제가 십자가를 처음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 일본의 여류소설작가 미우라 아야꼬가 쓴 ‘양치는 언덕’이라는 소설을 읽다가였습니다. 소설의 여주인공은 나오미라고 하는 목사의 딸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료오이찌라고 하는 바람둥이와 연애를 하게 되어 가출을 하여 몇 년인가를 료오이찌와 동거를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당연히 점점 생활과 삶이 힘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어느 날 료오이찌가 폐병이 걸려서 나오미를 찾아 옵니다. 나오미는 맞아들일 마음이 없었지만 부모님들의 권유로 료오이찌를 받아드립니다. 처가 집에서 요양생활을 하다가 처가 집 식구들의 믿음의 감동을 받아 료오이찌도 예수를 영접하고 크리스천이 됩니다.
료오이찌는 요양생활을 하면서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크리스마스에 아내 나오미에게 줄 선물이라고 하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나오미에게 조차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료오이찌는 그림을 언제나 하얀 천으로 덮어 놓곤 했습니다.
그림이 다 완성된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전에 사귀던 여자에게서 전화를 받습니다. 료오이찌는 만난 그 여자는 료오이찌를 유혹하지만 료오이찌는 그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여자가 술잔에 수면제를 타고는 이 술 한 잔만 마시고 가라는 말에 료오이찌는 그 술을 마십니다. 잠이 왔지만 그곳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길을 나섰다가 길에서 잠이 들어 동사합니다.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료오이찌를 장사하고 료오이찌의 그림에서 하얀 천을 벗겨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피 흘리시는 십자가의 예수님 발 아래 청년 하나가 얼굴도 들지 못한 채 손으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의 손 등으로 예수님의 피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바로 료오이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 마음 속에서 다음과 같은 외침들이 있었습니다.
‘료오이찌는 깨끗하다.’ ‘료오이찌는 구원 받았다.’ ‘주의 보혈은 능력 있다.’ 저는 그 소설을 통하여 료오이찌가 구원 얻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료오이찌의 모든 죄가 사하여 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간 소설의 료오이찌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격적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의 모든 죄를 흰 눈과 같이 양털과 같이 깨끗케 하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이 확신이 제 모든 삶과 신앙 그리고 목회의 골격이 되었습니다. 제 신앙과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은 속죄와 구원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저의 간증 두 번 째입니다.
목회를 하다가 정말 거의 죽을 뻔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표를 내고, 사택을 비우고 은행융자를 얻어 이사를 하고, 한 달 가까이를 집에만 정말 처박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조차도 힘이 되어 줄 수 없는 자리에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그 때 어느 날 자리 누었는데 갑자기 십자가가 생각났습니다. 그 십자가가 저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아니 그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제게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난 너 죽는 꼴 못 봐.>
<난 너를 구원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어. 사람도 될 수 있고, 십자가도 질 수 있어.>
딱 두 마디셨습니다.
그 두 마디 말씀이 저를 살렸습니다.
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런 일 때문에 죽고 망할 사람이었다면 우리 예수님 나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지도 않으셨다.>
그리고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도 그와 비슷한 힘든 일들은 계속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 이전과 이후는 달랐습니다. 그와 깨달음 이전에는 그와 같은 상황이 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그 이후론 그와 똑같은 상황이 닥쳐와도 전과 같이 죽음의 자리에 빠지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제게 언제나 소망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라고 하는 철학자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면, 소망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세 번째 간증을 하려고 합니다.
힘든 상황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너무 힘들어 혼자 속으로 ‘저런 인간도 하나님이 사랑하실까?’ 물었습니다. 그냥 생각없이 한 마음의 질문이었는데 그 질문에 예수님이 즉시 제게 대답하시었습니다. <물론이지>
힘들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시 보였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그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을 내가 내 마음대로 미워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 이후로 그가 죽을 만큼 힘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주 힘들어지지 않은 것은 아닌데 더 이상 미워지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이후로 저는 사람을 힘들어는 해도 미워하지는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저에게 큰 능력이 되었고 축복이 되었습니다.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하여 제가 기껏 하는 말은 ‘사람이 그렇지 뭐’ 정도가 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을 보니 아무리 미운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통하여 저 자신을 보니 저도 그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보였습니다. 그날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제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가 힘들어하는 그 사람의 그 일 때문에 네가 그를 힘들어 하고 미워한다면 나도 너를 그 비슷한 이유 때문에 미워하고 힘들어 할 수 밖에 없어. 나는 그의 죄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었지만, 너의 죄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었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저 자신은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게 보물 같은 깨달음입니다. 아직 그 은혜와 깨달음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끝까지 이 은혜를 보물처럼 지키는데 성공한다면 제 삶은 큰 실수 없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감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십자가에 대한 마지막 간증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24)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라보고 힘을 얻는 십자가를 넘어 예수님과 함께 지고 가는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의 마태복음 16장 24절의 말씀과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을 서로 연결하여 내가져야 할 십자가가 곧 나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2008년 9월 7일 주일 설교를 준비하다가 하나님의 뜻이 교회를 분립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위 친구들이 말렸습니다. 그러다가 ‘뒷방 늙은이’가 된다고.
그 때 하나님이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럼 너는 안방 마님 되려고 이제까지 목회를 하였니?’ 두 말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뒷 방 늙은이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랬더니 마음에 은혜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분립 된 교회 중에 하나로 수요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미리 간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조금 늦게 갔습니다. 미리 이야기하고 가지 않아도 일찍 가면 설교하라고 할까봐 일부러 그렇게 하였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이 제가 온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광고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뒤를 보십시오. 반가운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목사님이 저를 손님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예리한 칼로 비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순식간에 받았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애, 손님이 되어야 끝까지 반갑게 되는거란다.> 순간 마음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손님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이 아주 계획적으로 우리 목사님을 통하여 제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즉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분립된 교회에 철저히 손님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작지만 이게 제 실생활에서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는 자기 부인입니다. 원로목사, 공로목사 하지 않고, 뒷 방 늙은이로 반가운 손님으로 사는 것으로 늘 설교하였던 느보산의 모세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쉽게 이 과정이 넘어갔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한지 잘 모르실겁니다. 가끔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섭섭하지 않느냐구요. 힘들지 않느냐구요. 제가 대답합니다. ‘힘들면 못하지요.’ 사실은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힘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행복합니다. 감당 못하게 행복합니다.
열매나눔재단에서 열매나눔 인터내셔널이라는 법인을 세우고 아프리카 말라위 구물리라 라는 마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유엔과 협력하여 하는 프로잭트로 5년 동안 최소 300만 불에서 500만 불 정도를 지원해야 하는 사업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유엔이 하는 프로잭트에 우리가 스폰서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스폰서라고는 해도 돈을 주는 입장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힘이 있습니다. 권리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유엔과 줄다리기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모든 권리를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의 권리를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협상을 포기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에 든 생각이 ‘죽 쒀서 남 주자.’ ‘죽 쒀서 유엔 주자’였습니다.
돈도 대고, 최선을 다하여 일도 하지만 모든 권한과 공을 다 유엔에 돌리고 주라는 것이 제 결정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바보짓처럼 보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쓸데 없이 권리 주장과 다툼에 신경을 쓰다가 진을 다 쏟아 정작 말라위 구물리라 사람들을 돕고 섬길 마음과 힘을 빼앗긴다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권리와 몫과 주장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자고 생각하였습니다.
재단을 시작할 때도 직원들에게 당부한 말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다른 재단과 경쟁하지 말아라. 우리 재단의 목적은 탈북자들과 사회적 취약계층민들인데 다른 재단과 경쟁을 하느라고 마음을 빼앗기면 재단이 목적이 되고, 우리 재단의 목적인 탈북자들과 사회적취약계층민들은 그 목적을 이용당하는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재단의 목적에 집중하고 재단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하였습니다.
어제 저녁 재단 사무총장으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반가운 소식들로 가득찬 메일이었습니다. 노동부가 공모한 프로잭트가 있었습니다. ‘청년 사회적 기업 양성 프로잭트’라는 것인데 10억원 정도의 사업비가 지원되는 프로잭트입니다. 아주 경쟁이 치열한 프로잭트였는데 우리 재단이 결국 그것을 땄습니다.
서울시에서 이번에 새롭게 마이크로 파이낸스 사업을 기획하고 사업 위탁재단 공모를 하였는데 역시 우리 재단이 선정되어 13억 원 정도의 예산을 배정 받게 되었습니다.
미소금융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대출 사업은 이미 전부터 저희 재단도 선정되어 함께 일하고 있었는데 올해도 20억 원의 예산을 지원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재단들이 미소금융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작년에 저희 재단이 일등을 하여 대통령 표창을 받았었습니다. 올해는 예산 배정 일 순위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욕심 부리지 않고 끝까지 재단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에만 충성하고 충실하려고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식이고 그게 바로 높은 뜻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하지만 십자가는 저와 제 목회의 상징이 아니라 실존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실존이 되니 부활의 영광도 실존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과 간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모든 구체적인 삶에서 십자가가 상관이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