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사랑하는 친구야!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슬픈 이별의 인사를 나누지 않고 떠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너가 나에게 준 노래와 시와 언어가 아직도 그 운율을 내 영혼에 나누어 주고 있는데
나는 다시는 네 얼굴을 볼 수가 없구나. 사랑하는 친구야!

비가 내렸다. 삼월의 대지는 말할 수 없는 부드러움으로 가득 찼다. 이제 막 꽃잎을 열려는 나무들이 회색 하늘과 다정하게 어울려 마치 두 개의 현이 울리며 내는 소리처럼 조화를 이루었다. 갑자기 뿌우연 안개 속으로 어느 여행길에서 보았던 흰두의 조상이 다가왔다.

황갈색 사암으로 지어진 사원에는 무굴 제국 장인의 솜씨를 총동원해서 조각해 놓은 여러 개의 조상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미투나(?) 상이었던가. 조상은 남녀의 곡예사 같은 성애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었다. 표현의 농염함은 너무나 정교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사실적 성애의 표현은 용수철처럼 감정을 자극했다. 마치 르네상스의 조각가 도나텔로의 작품을 보는 듯 하였다.

공터에 차를 세워두고 산사로 올라가는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끊임없이 비를 빨아들이는 대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올라갔다. 산허리까지 그렇게 땅만 보고 걷다가 우산을 접어버리고 두 팔을 벌려 비를 받았다. 머리와 어깨와 얼굴에 빗물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비는 마치 함축된 언어가 전하는 관능적인 즐거움처럼 내부의 슬픔을 깨어나게 했다. 나는 다시금 충족되지 않는 감성에 사로잡히어 망각의 시간 위에 섰다. 떠나버린 친구의 모습이 젖은 흙 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작은 새들이 소나무 숲에서 짹짹 하고 울음을 토했다.

사랑하는 친구야. 나는 말을 걸었다. 그를 불러보는 순간 오랫동안 닫아놓았던 마음 문의 빗장이 열리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친구야. 우리는 그 때에 환희의 절정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사실 환희란 이상일 뿐인데 그것을 꽉 붙잡고 절정이라 생각하면서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 같다. 그 순수성과 정열이 이제는 덧없는 희망 같은 아픔이 되었구나. 그러나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비가 그치면 너와 함께 바라보았던 황혼녘의 서편 하늘이 저기 있다는 것이. 그날처럼 붉게 물들어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야. 이제 시간이 흐르면 너가 내 기억 속에서도 점점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푸루스트(Marcel Froust, 1871-1922)처럼 시간의 흐름과 망각이라는 이 파괴적인 힘과 대결할 것 같다. 너를 생각하며 기억 속에서 우리 함께한 시간들을 살려내어 4차원의 세계에서 존재하도록 만들고 싶다. 그렇게 글을 쓸 것이야.

순간 내 의식이 기쁨으로 떨렸다. 사원의 뜰에는 떨어진 어린 잎들이 빗물에 씻기며 낮은 곳으로 흘러갔다. 흐르는 빗물 속에 어두운 대지와 친구의 그림자와 형상을 갗춘 내 슬픔이 보였다. 사랑하는 친구를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쓰라린 일인가. 적막한 산사에서 더 이상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고독인가. 그러해도 나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곳을 찾아올 용기를 얻기까지 나는 슬픔을 억제하고 산뜻한 미소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충분히 자신을 추스르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친구야. 너가 슬픈 이별의 인사를 나누지 않고 떠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랬기 때문에 너는 아직도 내 속에 살아있고 너에게 생각을 집중시키며 너를 볼 수 있다. 우리가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은 영원히 유효하니까 말이야. 영혼의 지각 능력을 조금이라도 소망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이 베푼 은총인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시간이 벌떡 일어나서 이별을 초월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빗속에 서서 친구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지극히 절제된 표현으로 군더더기 감정의 수식어를 피하여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를 만났을 때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알고 있을께다. 내 언어의 행간 속에 있는 깊은 감성과 애정은 여전하다는 것을.

다시 빗줄기가 굵어졌다. 사랑하는 친구야. 언젠가 우리 피렌체로 여행을 떠나자고 했었지. 함께 손을 잡고 도나텔로의 조각상 앞에서 보고 카라라 야외 욕장에서는 아이다 공연을 보자고 했었지. 그리스의 리릭을 보고 힌두 사원의 조상들을 만져보자고 했는데… 이제 너는 내 곁을 떠나가 버렸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가 버렸구나. 너가 나에게 준 노래와 시와 언어가 아직도 그 운율을 내 영혼에 나누어 주고 있는데 나는 다시는 네 얼굴을 볼 수가 없구나. 사랑하는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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