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적이고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것
최근 들어 포비아(phobia)란 단어가 종종 눈에 띈다. 포비아란 헬라어 포보스(φοβοσ:공포, 두려움)를 임상심리학에서 차용하여 주로 ‘염려장애(anxiety disorder)’를 규정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면 거미나 쥐, 바퀴벌레 등을 무서워한다든지, 높은데 올라가는 것 혹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 등을 두려워하는 여러 가지 종류의 포비아가 있다. 이들 포비아 현상들의 특징은 실제로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일종의 비현실적 정신적 장애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슬람포비아’라는 단어는 포비아가 잘못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지금도 매일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정말 끔찍한 일들이 이슬람이라는 이름으로 실제 자행되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슬람 인구가 적은 우리나라에서는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이슬람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지역에 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이나 북부 나이지리아 혹은 수단 등지에서는 거의 매일 무슬림 폭도들에 의해 무고한 생명들이 오직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비(非)이슬람권에서도 9·11테러나 영국의 지하철 폭파 혹은 마드리드의 열차 폭파 테러 등을 보면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필자가 이슬람을 이렇게 혹평하는 것에 대해 “무슬림들이 얼마나 착한 사람들인데 일부 몰지각한 광신자들을 기준으로 이슬람 전체를 평가한다”고 억울해 하거나 혹은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착한 무슬림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우리 사회의 유명한 정치인이나 저명 인사들이 매스컴을 통해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면서 우리의 싸움은 이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이라 선언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왜곡된 이슬람이라고 부른다.
정치인들은 세계 인구의 20%에 육박하는 무슬림들을 적으로 만들어놓고는 정상적 정치활동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무슬림들은 착한 사람들이 많지만, 착한 무슬림들은 꾸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나 꾸란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고 있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영어권에서 이슬람의 율법에 대해 궁금해 질문하는 무슬림들에게 답변한 샤리아 학자들의 유권해석(Fatwa)을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http://islamqa.info)가 있다. 거기 들어가 보면, 비무슬림들의 생일잔치나 송별회식 자리에도 참석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친구로 사귀면 안 된다고 꾸란 구절과 무함마드의 언행록(Hadith)를 인용하여 유권해석을 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어떤 경우에라도 비무슬림들을 돕거나 존경해서는 안 되며, 철저히 미워해야 한다’는 알왈라 왈바라(Al Walaa, Wal Baraa)라는 이슬람 율법의 기본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유럽의 무슬림들이 과격하게 변해가는 이유는 일부 성질 고약한 이슬람 학자들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의 경전(Quran) 꾸란과 무함마드의 지침인 하디스(Hadith)’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캐머런 총리가 “영국에 들어온 무슬림들을 우리가 보호해 주는 동안 그들은 우리 가운데서 원리주의를 키워하고 있었다”고 한 말은 영국의 이슬람화 과정에서 겪은 뼈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로 깊이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슬림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그들의 경전과 율법은 타종교인들과의 평화 공존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헌신된 테러범들이 끊임없이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테러범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스스로 참무슬림들이라고 자처하며 무든 무슬림들이 자신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꾸란에 의하면 생명과 재산을 바쳐 알라와 무함마드를 위해 싸우면서 절대 의심하지 않는 자들만이 진정한 무슬림이라 규정하고 있다(꾸란 49:15).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들은 지하드(Jihad·알라를 위해서 싸우는 전쟁)를 영적 전쟁이며 불의 및 타락과 싸우는 내면의 투쟁(inner struggle)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꾸란의 어떤 구절도 그런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무슬림들은 어디서 발견되든 죽이라(꾸란 9:5)고 명령하는 구절들은 여러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꾸란 4:89, 4:91 등).
이런 꾸란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하여 불특정 다수의 비무슬림들을 죽이려는 헌신된 무슬림들이 전체 무슬림들 16억 중에 1%만 있어도 1600만명이나 된다. 그들 중 한두 사람 정도만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해도 2005년 7월 7일 런던에서 했던 것처럼 서울의 지하철역 몇 군데서 폭발물을 터뜨리는 지하드를 행할 가능성은 언제라도 상존한다.
대한민국보다 훨씬 인권보장이 잘 되어 있는 유럽이 왜 이슬람에 등을 돌리고 그들과 싸우게 되었는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선진화된 인격의 상징처럼 홍보되던 다문화정책은 21세기를 맞이하는 첫 해인 2001년 무슬림들에 의해 9·11 테러가 일어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슬림들은 민주 사회의 자유와 평등과 관용을 역이용하여 인권법 혹은 종교차별 금지법 등을 만들어놓고, 그 법을 무기삼아 자신들을 도와주고 보호해준 사회의 뿌리를 흔들어가면서 다출산 정책을 통해 인구를 늘려가고 있어 이제 유럽의 이슬람화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불신자들을 친구로 삼는 위선자들은 지옥의 맨 하층에 간다(꾸란 4:144-45)
무함마드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불신자들에게는 잔인하지만 무슬림들끼리는 인정이 많더라(꾸란 48:29)
불신자들 및 위선자들과 싸우고 그들을 잔인하게 대하라(꾸란 9:73)
이웃에 있는 불신자들과 싸워 너희가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알게 하라(꾸란 9:123)
종교가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라(꾸란 8:39)
너희가 알라를 믿을 때까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영원한 증오가 있다.(꾸란 60:4)
너희에게 다른 종교를 권하는 자들은 … 어디서 발견하든지 죽여라(꾸란 4:89)
이슬람에 헌신된 사람들은 위의 꾸란 구절들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9·11 테러로 온 세계가 통곡할 때, 이슬람권에서 거리에 나와 축포를 쏘며 춤을 추는 무슬림들의 모습을 TV를 통해서 확인했을 것이다. 필자는 무슬림 출신 지인들로부터 꾸란의 그런 구절들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이를 과감하게 실천한 용감한 무슬림들에게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입장을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이슬람권에서는 공영방송과 매스컴 혹은 이슬람 사원의 설교를 통해 공개적으로 테러를 부추기고 서양 문화의 파괴를 명령하고 있다. 심지어 쿠웨이트의 ‘압둘라 나피씨’ 라는 대학교수는 아랍어 TV설교를 통해 “용감하고 헌신된 무슬림 청년 한 사람이 1시간 동안 최소한 미국인 33만명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성공하면 그들의 통곡의 외침이 우리의 진정한 축제가 될 것이라 했고, “미국 미시간호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폭파시키려는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다.
이는 인터넷 동영상 싸이트인 유튜브(youtube.com)에서 ‘kwaiti professor anthrax'를 검색하면 제일 처음 나오는 9분05초짜리 동영상으로, 누구나 언제든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아랍권 22개 국가에 동시에 방영되며 54%의 평균 시청률을 자랑하는 알자지라 방송에서 방영된 것을 보면 이슬람의 테러는 동굴 속에 숨어있는 일부 몰지각하고 무식한 광신자들만의 생각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이슬람 성직자들의 이런 종류의 설교들을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꾸란의 구절들과 이슬람 성직자들의 설교를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알라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문화권에 가서 이웃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는지를 생각하면, 과연 그들을 보호해 주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품는 것이 옳은 일인지 다시 한 번 따져봐야 한다.
이슬람은 우리가 알고 있듯 단순한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개인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는 총체적인 시스템이며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잠시라도 그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충격적인 것은 빈 라덴을 키워낸 원리주의 이슬람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싸이드 꾸틉의 마일스톤스(Milestones·진리를 향한 이정표: 서정민 역, 평사리, 2011)가 한국어로 출판되어 누구라도 사서 볼 수 있도록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싸이드 꾸틉은 이집트 대통령 암살기도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으나 그가 쓴 이 책이 테러의 원리를 제공했다는 죄로 사형을 당했으며, 판매가 금지되었던 위험한 책이다. 한국 무슬림들은 이런 책을 읽어도 테러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슬람에 대한 공포는 비현실적이 아니라, 실제 우리 곁을 파고들어와 우리 문화와 삶의 방식과 문화를 파괴시키고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공포이다. ‘이슬람포비아’라는 단어는 도처에서 일어나는 테러 덕분에 자신들을 두려워하거나 혐오하는 자들을 정신병 환자로 몰아붙이기 위하여 이슬람 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제작해 놓은 테러범들의 보호 장치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생각 없이 이런 단어를 사용하여 본의 아니게 테러범들의 정신적 지원 세력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