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 설교]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에게서로다”(시 121:1~2)

<서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남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살 수 있으면 참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자기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라날 때 부모의 도움이 있고 형제의 도움이 있고 스승의 도움이 있고 사회 선배의 도움이 있고 우리는 얼기설기 얽힌 도움의 손길을 받아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 때 사람이 도와줄 수 없을 때 그때는 어떻게 하냐는 것입니다. 좌절하고 절망하고 두 손 들어버리고 말 것이냐.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냐. 그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못할 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나가야만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본론>
1. 어느 곳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첫째로, 어느 곳을 바라보느냐.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이 우리 생활 속에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네게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 다른 곳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보여준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산이라고 말하면 우리가 태산 같은 어려움을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암시합니다. 마음의 고통, 질병의 고통, 경제적 어려움, 대인관계의 고통 … 이러한 고통들이 태산준령 같이 내게 다가올 때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바라봄으로 당하는 마음의 억압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겁을 먹게 되지요. 감당할 수 없는 태산이 내게 다가오는데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곧장 나를 억압할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겁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희망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나갈 길이 없으니까. 좌절하지요. 용기가 사라지고 마음에 분별력을 잃고 삶의 목표가 상실되는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열두 정탐꾼을 모세가 미리 보내어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땅을 정탐하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열두 정탐꾼이 가서 정탐을 하고 와서 보고를 하는데 그중에 10명은 태산 같은 현실을 보고 완전히 좌절해서 절망적인 보고를 한 것입니다. 잘못 보았었습니다. 현실만 바라보지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현실을 바라보아야지 현실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면 좌절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을 바라보고 겁을 먹고 왔습니다. 도저히 그들이 쳐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못 들어간다. 희망을 잃었습니다. 보니까 그 사람들은 장대한 사람들이라. 우리와 비교해보니 우리는 메뚜기 같더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었습니다. 용기가 사라졌지요. 우리가 가면 처자가 다 포로가 될 것이라. 하나님의 백성임을 잃어버리고 가나안 가나안의 목표를 상실하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31절로 33절에 보면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환경만 바라보면 환경과 자기의 실력과 비교해 보아서 감당할 수 없을 때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창조적으로 승리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주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미리 겁을 집어먹고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염려해도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키를 한자나 크게 할 수도 없고 염려한다고 해서 환경을 변화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사실은 염려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염려를 중지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드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염려하고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고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때는 염려를 짊어져 주시는 주님을 간절히 찾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둘째로, 염려는 불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완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면 염려가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주님을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짐을 짊어지므로 염려가 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 하셔서 염려, 근심을 주께 맡길 수만 있으면 좋은데 그렇게 못하니까 주님이 맡아주겠다고 계시면서도 우리가 맡기지 아니하므로 책임을 지실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로 32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기도의 용사 조지 뮐러는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고,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믿으면 염려는 사라지고 또 염려가 오면 믿음이 사라지고 둘 중에 하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염려할 이유가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0절에 예수님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실 때 그 말에 귀를 기울여서 담대하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성령께서 친히 우리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넷째, 세상의 염려는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은 22절에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에 염려가 있으면 아무리 설교를 듣고 권면의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가시넝쿨같이 마음을 덮어서 결실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을 맡겨야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말씀이 마음에 심어지고 결실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연구 조사에 의하면 우리의 걱정, 근심 가운데 80%는 지나고 보면 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어나지 않을 것을 미리 우리가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12%는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일이며 나머지 8%만 현실문제가 되는 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 근심하는 모든 그중에 8%만 내게 실제로 영향력을 미치지 그 이외에는 다 쓸데없는 염려, 근심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고통스럽고 나쁜 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므로, 언제나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믿음으로 담대히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냥 하나님으로 바라보지 말고 좋으신 하나님으로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와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염려와 근심을 맡기면 좋은 것은 더 좋게 해주시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주시고 합동하여 유익이 되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마음의 바탕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열 두 정탐꾼 중에 두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가슴속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정탐에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안경을 끼고 봤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안경을 끼고 나는 하나님의 선민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고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안경을 끼고 가나안을 정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확신이 들어왔습니다. 가보고 땅이 아름다우니까 저들은 우리 밥이다. 우리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한 것이라고 즐거워했었습니다. 들어가자. 우리 점령할 수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는 마귀는 떠났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 가나안으로 들어가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씀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6절로 9절에 보면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강한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으니 모든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만유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하나님 품에 안겨 있으면 이 하나님을 내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으로 시인하고 나가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승리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강하고 담대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가 바라보고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환경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백성인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언약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같이하리라고 말씀하신 언약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약속의 말씀의 안경을 끼고 만물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줄 수 없고 마귀는 불안과 공포를 통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의지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바라보라
둘째로, 우리는 늘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든지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 1절로 2절에도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에게서로다”

산을 바라보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든지 둘 중에 하나를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바라볼 수 없어요. 내 염려, 근심을 바라보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든지.. 나의 고통을 바라보든지, 고통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든지, 나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를 바라보든지,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는 주님을 바라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눈을 들어서 산을 쳐다보겠느냐. 아니라. 나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인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든지 바라보면 그것에 끌려가고 그것이 우리 가슴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 남자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동물원에 갔는데 아버지가 사자 우리에 데려 갔습니다. 사자가 누워있다가 어흥~ 소리를 내고 일어나서 어린 아이에게 다가오니 어린 아이가 기겁을 하고 얼굴을 새파랗게 되어서 고함을 칩니다. 아버지가 “왜 그러느냐?” “아버지, 사자가 우리를 향해서 다가온다.”고... 아버지가 “사자만 바라보지 말라. 사자와 우리 사이에 철창이 있는 것을 보아라. 철창이 막고 있으니 사자가 고함을 쳐도 철창 때문에 우리는 까딱없이 안전하다.” 위로해 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도단성에 갔었을 때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려고 밤새도록 첩첩히 둘러쌌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종이 나가서 보니 천지에 아람군대의 마병이요, 국기가 찬란하게 비췄습니다. 그는 벌벌 떨고 들어와서 “선생이여, 이제 우리 죽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우리를 첩첩히 둘러싸서 도단성을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말하기를 “우리와 같이 계신 이가 저들보다 많다. 하나님이여 눈을 들어 보게 하소서.” 하나님이 이 종의 눈을 여니까 눈을 떠서 보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의 천사들, 불말과 불병거가 온 도단성과 적군 사이를 꽉 메웠습니다. 오늘날 그와 같이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은 돕는 자를 보내어서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원수와 우리 사이에 철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철책을 바라보는 것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으며 다가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느 곳에 가나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원수가 다가오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와 우리 사이에 하나님이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셔서 둘러 진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함이라는 말씀은 거짓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두 세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이 같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희가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내 곁에서 만인이 내 우편에서 엎드려지나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늘 바라보시고 전능한 하나님을 나의 거처로 하면 그가 사자를 보내어서 우리의 모든 길에 지켜서 보호하여 주시고 손으로 붙들어 주셔서 발에 돌이 부딪히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준비를 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바라보는 것을 올바르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연습을 늘 해야 돼요. 평소에 연습을 안 하면 어려움을 당하면 어려움에 휩싸여 들어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크고 적은 일에 하나님, 주께서 같이 계시므로 이 적은 일도 감당할 수 있고 큰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어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와 함께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뭐가 다릅니까? 안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의 수단과 방법과 능력으로 대치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일을 대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에 의지해서 우리는 대처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단지 두려운 대상을 바라보면 용기가 사라지고 분별력을 잃어 목표를 상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 가운데 서면 마음에 확신이 서고 담대하게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볼까요? 매일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리게 할 때는 여러분에게 그를 통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으라고 그렇게 한 것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서 방패가 되어 주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를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가 많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하다고 마귀가 공격하므로 힘을 잃었을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에서 용서와 의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 죄악을 다 사하시고 우리에게 용서와 의를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주님 입혀주시는 용서와 의를 옷 입고 죄악을 바라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거룩하게 살지 못하고 허물이 많고 마귀의 공격을 받아서 허물진 인생으로 용기와 힘을 잃었을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주님께서 용서와 거룩함을 옷 입혀 주시고 그를 통하여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로 7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를 구주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는 여러분 알지 못하게 또는 알게 성령으로 풍성히 부어 주셔서 성령이 여러분과 같이 계셔서 외롭지 않습니다. 고아와 같이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가 와 계시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이 와 계시고 성령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서 살기 때문에 두려워함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바라볼 뿐 아니라 병들고 괴로울 때는 건강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너는 이제 얼마 못산다. 석달밖에 못산다. 여섯달밖에 못산다. 죽을 준비를 하라고 할 때 그 말만 듣고 죽음을 상상하고 그를 바라보면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는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좌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병이 없는 것이 아니요, 죽을 병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죽을 병이 다가오지만 그 병이 다가옴과 동시에 채찍에 맞아 우리를 고치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도 계신 것입니다.

병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가면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기적을 오늘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어제의 하나님, 먼 팔레스타인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 이 자리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이 자리에 오늘 이 시간에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용서하고 의를 주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모든 허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주시고 거룩함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병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병을 바라보지 말고 치료하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실패하고 낭패를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고 가시와 엉겅퀴에서 해방시켜 아브라함의 복을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저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저희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이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가난함이 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있습니다. 실패가 있습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건져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용기와 힘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아브라함의 복도 받고 성령도 받을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다가올 때도 죽음을 바라보면 두려워하고 절망하지 않습니까? 죽는다는 것이 왜 무섭습니까? 혼자 죽어야 되기 때문에... 같이 죽을 사람이 있으면 서로 이야기 하면서 가니까 외롭지 않겠지만 같이 죽을 사람 없어요. 죽을 때 혼자 죽지... 외롭게 죽고도 죽는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안 죽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므로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혼자 죽지 않고 우리와 같이 죽음의 터널을 지나서 천국으로 데려다 주실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 반드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을 붙잡고 사망을 지나서 천국 영광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부활 영생, 천국을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을 십자가를 통하여 바라보면 예수님이 내가 이미 사망을 이겼노라.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거처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 거처와 다를 것입니다. 침대가 있고 밥상이 있고 부엌이 있고 화장실이 있고 그런 거처가 아니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이 계시는 아름다운 처소를 예비해 놓았고 그곳에 주님이 우리를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부활이요 생명인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 와 계시므로 우리는 외롭게 혼자서 죽지 않고 주님과 함께 사망을 지나서 영생으로 들어가므로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바라보는 것을 올바르게 바라보아야 돼요.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는데 죄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도 죄가 있고 죄의 유혹이 있는 것입니다. 허물이 있어요. 허물로써 우리가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도 병은 있어요. 마음의 병, 육체의 병, 우울, 염려, 근심 있어요. 어느 곳에 가도 가난과 저주와 낭패와 실망은 있고 어느 곳에 가도 죽음의 고통은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면 우리는 큰 고통과 괴로움 속에 빠지지요. 그 대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죄를 못박아 버리고 허물을 청산해 버리고 질병을 이기고 저주를 제하고 사망을 이긴 주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새 힘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성령의 능력이 와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구원이 어디소 올꼬 나의 구원이 천지를 지으신 야훼께로다. 산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태산은 어느 곳에 가도 있습니다. 산이 없는 곳이 없어요. 인생에 태산은 어느 곳에 가나 다 다가오는 것인데 태산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진실로 여러분을 건지시는 예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여러분을 돌보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몸찢고 피흘린 대가를 주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에게 갚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전인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판자촌에서 너무나 가난한 사람들이 살 때 제가 복음 전도하러 집집이 최자실 목사님과 심방을 가면 할 말이 없어요. 입이 딱 벌어집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Have no. Have no도 그런 Have no는 없어요. 먹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있을 곳도 말이 아니고 아주 처참합니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그러나 오직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항을 아시고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영혼의 죄만 담당할 뿐 아니라 범사에도 잘되게 저주를 짊어지시고 강건하도록 병을 짊어지시고 가시더니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 아무것도 없는 환경 가운데 예수님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삼박자 축복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강하게 전도했는데 그것을 받아듣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사람들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이 아닙니다. 의식과 형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살아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 주시고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주시고 눈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함을 전해 주시고 눌린 자는 자유케 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는 살아있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보고 마지막 유언을 하셨지 않습니까?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을 귀신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살아있는 능력있는 복음을 전해야지 죽은 옛 이야기를 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성령이 역사할 때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이 되지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면 이야기 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야기책을 읽어서 우리 운명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면 성령께서는 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을 부활시켜서 우리 속에 살아있는 역사를 베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는 용서와 의를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치료와 건강을 아브라함의 축복과 은총을 영생 복락을 마음속에 단호하게 받아들이고 주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라보고 주장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바라보고 믿고 주장하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본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되 넘치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께서 가져오는 변화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크나큰 변화를 가져와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성령이 운행하시자 아름다운 세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령은 변화시키기 위해서 왔는데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두움을 빛으로 무질서를 질서로 가난을 부요로 고통을 즐거움으로 더러움을 아름다움으로 변화시키는 역사를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은 그냥 와서 계신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변화의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의 역사를 어떻게 하느냐.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믿을 때 믿음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4장 6절로 7절에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은 좋은 일이 일어나게 만드는 성령이 와서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크나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생각이 달라지게 만든 것입니다. 생각이 죄의 포로에서 용서와 의의 사람으로 허물 많은 사람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병든 사람에게 치료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가난한 사람으로 나는 축복 받았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부요한 사람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시고 죽는 사람에게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으로서 감사와 찬양을 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5절로 6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여러분에게 생명과 평안의 생각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오시면 십자가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거대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생각이 늘 불안, 초조, 절망, 좌절, 원망, 시기, 분노, 질투, 못한다, 안된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생각으로 꽉 들어차면은 성령이 역사할 수가 없어요. 마음을 청소하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하고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보혈로써 우리 마음을 다 청산해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성령으로 생각이 변화되면 생각이 변화된 대로 여러분의 운명과 환경도 변화되어 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와 함께 여러분에게 꿈과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꿈과 환상이란 현재 있는 일이 아니고 내일 일인 것입니다. 현재 일을 꿈꾸는 사람 없어요. 내일 잘될 것, 내일 집으로 이사 갈 것, 내일 사업을 시작할 것, 내일 치료받을 것, 우리가 내일에 대한 꿈과 환상을 가지는 것이 희망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일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 주는 것입니다.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은 내일이 없어요. 오늘 절망해버리면 내일이 캄캄하고 절망한 것입니다. 성령은 내일을 심어줘요. 내일이 반드시 있어요. 나는 나이가 이렇게 많으니까 이제 할 일이 없다. 죽을 날만 기다린다. 천만에요. 성령이 오시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에게도 내일을 주십니다. 죽는 날까지 내일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 꿈을 심어주고 희망과 꿈을 심어주고 그것을 믿을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은 모든 사람 속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역사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충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은 믿음과 담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힘으로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성령께 의지하면 상상을 초월한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해 보자.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서 그런 담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믿음으로 모험을 할 수 없으면 기적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적은 모험이 있을 때 기적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하지 마라. 기도하고 믿어라. 꿈을 가지고 우리가 기도를 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소망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여러분, 절대로 낙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소망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있으면 기도하십시오. 이루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을 주십니다. 겨자씨 한알만큼 적은 믿음이라도 믿음을 받으면 믿음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우리 힘으로 못이기지만 세상을 이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서 우리도 이기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기는 예수님을 꿈꾸고 믿고 담대하게 입술로 시인하고 나가면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면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바라보고 감사하고 명령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으면 영혼이 잘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범사에 잘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강건하게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말고 영혼이 잘될지어다. 범사가 잘될지어다. 강건할 지어다. 창조적인 감사만 할뿐 아니라 창조적인 명령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주신 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인정하고 그 다음에는 명령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감사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고 했으므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말을 입술로 끊임없이 해야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매일같이 바라봄에 따라 살아갑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고난의 산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낙심하고 불행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또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긍정적이 되고 희망을 갖고 용기와 믿음을 갖고 담대히 말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산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행복하고 기쁨과 믿음으로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주위에 산은 변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언제나 크고 적은 산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갈보리 십자가를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거기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성령의 모든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보겠습니까? 환경을 바라보겠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겠습니까? 산을 바라보겠습니까? 야훼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사 십자가를 걸머지도록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시므로 그 사랑이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편에 서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외롭지 않습니다.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천당에 갔는데 꿈에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너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말씀대로 의롭게 살았느냐? 고개를 숙이고 의롭게 못 살았습니다.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렇겠지. 네가 세상에 살 동안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거룩하게 살았느냐? 거룩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나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 때가 많았었습니다. 너는 세상에 살 때 진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느냐. 아닙니다. 내 욕심을 따라 내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네가 이제 이 땅에 올 때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오그라들어서 말을 못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온 천지가 환해지거든요. 그래보니까 예수님이 곁에 와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사람이 의롭게 살지도 못했고 거룩하게 살지도 못했고 온전히 순종하지도 못했지만은 그러나 세상에 살 동안에 항상 내 편에 서있었습니다. 나를 인정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고 의지하고 살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번에는 천당에서 내가 이 사람 편에 설 차례인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모든 보혈의 능력이 이 사람을 위해서 내가 변호하오니 나에게 이 사람을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알았다. 너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축복을 받았다. 가라. 그렇게 말씀하시더라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면 예수님도 여러분 편에 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과 같이 계시고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십시다. 하늘에 아름다운 별들이 반짝이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희망이 반짝이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믿은 대로 될 것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 2012. 9. 2. 성찬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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