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사역자들 ③] 길동무교회 정순희 목사
서울 외곽 개포동 주공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길동무교회는 지난달 새롭게 문을 열었다. 교회 설립자는 여성이자, 40대이고, 탈북민이다. 남성도 하기 힘든 교회 개척에 탈북 여성이 성도 3명과 함께 뛰어든 것이다.
길동무교회를 설립한 정순희 목사는 여러모로 안정된 부목사 생활을 박차고 ‘광야’로 나섰고, 여러 기적들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정 목사는 남한에 온 이후 같은 처지의 탈북민들보다 남한 사람들과 함께하려 노력했고, 굳이 가명을 쓰지도 않고 있다.
-왜 길동무교회입니까. 교회 이름에 ‘동무’가 들어있네요.
“개척할 때 주신 말씀이 아가서 2장 10절이에요. 길이요 생명 되신 주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라는 뜻에서입니다. 그 주님 안에서 성도들 서로도 길동무, 목표와 목적이 같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 아닙니까. 하나가 넘어지면 일으켜 주는, 우리 서로 길동무가 되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길만을 따라가자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북한 냄새 난다는 사람이 있어 고칠까 많이 생각했어요(웃음).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이름이라 사람들 말 때문에 바꿀 순 없었습니다.”
-자유를 찾아 오셨는데, 신학을 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2001년에 한국으로 와서 2003년에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시작했습니다. 중국에서 ‘남한엘 가면 신학교 가서 공부하고 평생 북한 복음화를 위해 살겠습니다’ 서원했어요. 탈북자 출신으론 첫 학부생이었어요. 전에 신대원 졸업생은 2명 있었어요. 처음이었고, 여성이었고, 혼자였어요. 문화 차이를 비롯해 어려움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돌아봐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니’ 라고 말씀하셨어요. 돌아보니 기도한 대로 지혜를 주셨고, 북한과 중국 감옥의 어려움 속에서 보여 주시고 말씀해 주셨던 것들도 생각나게 하시고, 너를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학부 4년간, 떳떳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탈북자에 여성이었고, 나이 많은 학생이었지만 갈수록 공부를 잘 했거든요(웃음). 교수님들께서 격려를 많이 해 주셨어요. 그래서 졸업도 잘 하고 신대원 3년 동안 논문도 통과했습니다. 제 졸업논문이 국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다는 게 되게 자랑스러워요. 신학교 시절 7년을 돌아보면 하루같이 주님께서 주셨고 보호하셨고 한결같이 붙들어 주심이 느껴져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몰라요. 그 길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제가 있다고 봅니다. 학교에서 아무렇게나 했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거에요. 알차게 한 걸음씩 열매가 있는 길로 인도해 주셨어요. 공부를 해 보니, 사람들이 열심히 애써서 공부하진 않던데요(웃음).”
-같은 탈북민들과 어울리기보다 남한 사람들과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신학교에서 학부와 신대원 생활을 하다 보니… 탈북자 모임엔 잘 못 나갔어요. 자연스럽게 남한 사람들과 쭉 생활해 왔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남한 사람들을 더 많이 상대하게 됐고, 친구들도 남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확실했던 건, 탈북자는 탈북자끼리… 전 이게 아니었어요. 저는 탈북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남한 사람과 남한의 교회들을 더 잘 알아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사회와 교회에 잘 정착해서 이 사람들에게 북한의 존재를 알리고, 또 제가 이들과 남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달라져서… 남과 북 없이 하나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꿈꿨어요.
교회는 차별이 없어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신데, 통일된 하나의 조국과 교회, 이런 것들을 지금 여기서부터 해 나가야 한다는 거죠. 그런 부분들을 말씀해 주시고 적응하게 하시고… 그런 경험들 갖고 앞으로 통일이 되고 북한에 가면 교회를 함께 세울 수 있으리라는 마음을 느낍니다.
탈북자 모임엘 가 보면 탈북자들은 탈북자끼리, 이런 부분들을 많이 느낍니다. 신학교에도 북한 동아리가 있었는데, 탈북자 후배들이 북한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든지, 남한 사람들을 이겨야 한다든지 그런 말을 자주 하더라고요. 저는 그게 싫었어요. 여기까지 와서 우리끼리 왜 이렇게 해야 하나, 그게 너무 싫어서 왔는데…. 이런 말씀 드려도 잘 받아들여지진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동아리도 잘 안 나가게 됐어요. 탈북 목회자들 모임도 따로 있는 걸로 아는데, 편협됐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같은 탈북자이지만 사람마다 다른 마음을 주시고 다르게 사용하시는구나, 내게 주신 것은 확실히 그것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탈북민들이 왜 ‘우리끼리 모이자’ 같은 생각을 하게 될까요.
“제가 볼때는 우선 남한 사람에게 다가가기가 두려워지기 때문이에요. 생소한 곳에 가면 누구나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듯이 말입니다. 두번째는 그럼에도 다가갔을 때, 남한 사람들에게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발견하기 때문일 겁니다. 똑같은 사람으로, 같은 동포로 봐 주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자존심이 상하거나 열등감을 느끼게 돼죠. 대신 북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일단 편안하지 않겠어요.”
-남한 사람들이 탈북자들을 대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처음엔 무조건 불쌍한 사람으로 봐요. 저는 ‘난 불쌍한 사람 아닌데’ 하고 생각하는데, 자꾸 그렇게 보니 ‘정말 내가 불쌍한 사람인가?’ 하거나 자존심이 상합니다. 사실 남한 분들은 별 의미 없이 북한에서 왔으니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이시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게 싫은 거죠. 우리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에요. 이 땅에 왔으니 똑같이 생활할 수 있어요. 똑같은 신학생, 똑같은 사람으로 봐 줬으면 했어요. 특유의 그 눈초리가 싫었어요.
한 번은 학부 때 한 언니가 자꾸 ‘불쌍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쉬는 시간에 음료수를 마시다가도 저에게 그걸 주셨어요. 처음엔 고맙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다른 사람이 오면 새 것을 뽑아주는 거에요. 그때 너무 기분이 나빴어요. 다른 한 번은 성적이 나왔는데, 친구들이 점수를 묻길래 다 얘기해 줬어요. 그런데 남한 애들은 물어봐도 이야기를 잘 안 한다면서요? 전 그저 묻길래 얘기한 건데…. 어쨌든 그런데 제게 돌아온 말은 ‘쟤네들(남한 신학생들)이 다 놀아서 네가 점수 잘 받았다’는 거에요. 정말….
제가 살아보니, 남한 사람이어서, 북한 사람이어서 이게 아니더라고요. 그 사람 인격이 중요해요. 어느 세계나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는 거잖아요. 사람 관계는 어느 나라나 다 똑같이 사람 나름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구나 또 한번 느꼈죠(웃음). 북한 남한 금을 그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부교역자 생활을 시작하셨죠.
“규모가 250-300명 정도의 교회였는데,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저를 강철같이 연단시키셨어요. 목회가, 교회가 무엇인지 절실히 느끼게 하셨습니다. 목회는 제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목회지 생활환경이 열악한 곳이었고, 지금 이곳도 그렇죠. 육체적으로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혼의 배부름을 줘야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처음 가자마자 간증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다음 주일에 한 성도님께서 제가 있는데 대놓고 ‘저렇게 고생하고 불쌍하게 산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돌봐주고 이해하겠나’ 라고 하셨어요. 면전에서 얘기하셔서 깜짝 놀랐지요. 저는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저들을 더 잘 이해하고 보살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분들 생각은 그게 아니셨어요.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면서 막 울었어요.
하지만 프로그램이나 방법이 아닌, 오직 말씀대로 하자고 마음먹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도 인정해 주시더라고요. 그런 이야기 하시던 분들이 제 생일날 댁으로 초청하셔서 생일상도 차려 주셨어요. 또 감동받아서 울었죠(웃음). 정말 행복했어요. 탈북 목회자로서 남한 분들에게 이러한 사랑을 받는 게,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게 감사하고 힘이 됐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심방하고 세워주고 위로하면서 사역했어요. 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개척이 어떤지 아시면서 따라와 주신 분도 있어서 힘이 됐습니다.”
-개척을 시작하신 동기도 궁금합니다.
“올해 4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개척을 하라는 마음을 계속 주셨어요. 그래도 저는 언젠간 하겠지 하고 애써 거부했는데 점점 급한 마음을 주시는 거에요. 빨리 그만둬야지, 아니야 좀더 해야지 하는 두 마음 가운데 갈등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부분은 잘못됐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저도 모르게 따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외아들이 올해 고3이라 제 사례비로 운영되는 가정도 생각해야 했고… 그런데 계속 광야로 나가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 참혹했던 북한과 중국 생활을 지나 남한의 문화적 갈등 같은 광야길을 걸어왔는데 또 광야로 가라 하시냐고요. 그때 말씀을 주셨어요. ‘광야로 가면 내가 있지 않니’. 그래서 확신을 갖고 교회에 사임하겠다고 보고했습니다. 건물 얻으면서도 참 힘들어서 ‘번제단에서 제물을 모두 태워드리듯, 저를 태워서 드리겠다’는 기도까지 나왔어요.
사람들은 ‘보이는 기적’을 보고싶어 하죠. 하지만 그게 기적이 아니에요. 오늘 제가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고, 하나님께서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이뤄주신 것들, 이 모든 것들이 기적이잖아요. ‘저를 태워서라도…’ 이런 기도를 해 보긴 처음이었어요. 돌아보면 모두 훈련이었죠.”
-사역 방향은 어떻게 됩니까.
“성경공부 위주로 하려 합니다. 오직 성경 말씀으로, 이것이 모토에요. 교리는 다들 아세요. 하지만 말씀을 직접 읽으면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북한 선교에도 힘쓸 겁니다.”
-통일 후 계획은 있으신가요.
“지정학적 통일은 아직 안 됐지만, 탈북자들이 남한에 들어온 이상 이미 통일이 시작됐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부터 통일을 맛보게 해 주시는 거죠. 완전한 통일이 올 때까지 연습을 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문화 충격이나 충돌 상황을 미리 보완하라고요. 알아야 보완할 수 있잖아요?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에 통일을 주실 겁니다. 사실 이곳에 탈북자들이 2만 5천명이나 내려올 줄 누가 알았나요. 그렇듯 통일도 불시에 올 것입니다. 다만 언제 통일이 되든 우리는 준비를 해 나가야죠.
그래서 제게 남한 사람들을 더 많이 접하게 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들고 갈 때, 저를 통해 북한 사람을 알게 된 남한 사람들도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들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런 마음 갖고, 교회도 탈북자만의 교회가 아니라 남북한이 함께하는 교회로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