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5~8)
<서론>
오늘 저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바라보든지, 나와 하나님을 동시에 바라보든지, 그렇지 않으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든지 선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단호한 결단이 없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항상 불안하고 불행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은 아무것이나 바라보고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현실이 위협적이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죽을 각오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희망과 꿈과 믿음을 선언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위대한 헌신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을 하나님은 존경하고 사랑하고 의롭다하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본론>
1. 나를 바라보는 삶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첫째로, 나를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면 나라는 사람이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제한이 있어 한정된 시계밖에 열리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의지하고 산다면 나의 능력은 한계가 있고 나의 힘은 제한된 힘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빌립은 자기가 처한 입장에서 예수님의 부탁을 계산해 보고 불가능을 선언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부탁을 시행하려고 해보니 도저히 안되기 때문에 주님 앞에 못한다고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1절로 7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면서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주님께서 빌립을 보고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먹일꼬 하면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면 좋겠는데 자기가 당장 계산해 보았습니다. 남자만 5천명 부녀자 기만명 조금씩 떡을 줄지라도 2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이 필요한데 돈도 없고 떡 살 곳도 없고 먹일 수가 없다. 주님, 먹일 수가 없습니다. 왜, 자기의 능력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를 바라보면 환경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10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12명중에 10명은 자기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보았었어요.
민수기 13장 31절로 33절에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높은 성벽, 거대한 거인들이 사는 것을 보니까 자기들의 제한된 눈으로 보니까 자기들은 메뚜기 같았습니다. 메뚜기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 땅을 점령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자기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환경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보고 세상을 바라보면 내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를 곧 계산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산하면 안되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계산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계산을 맡겨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계산기를 주님께 드리고 난 다음에 주님이 계산해서 알아서 주십시오. 나는 믿고 순종만 합니다. 그렇게 나가서 주님이 계산해서 해야지 내가 계산하면 주님이 시키는 일도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면 자기 한정된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경험을 가지고 계산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한정적으로 계산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게 된 것입니다.
2. 나와 하나님을 번갈아 바라보는 삶
그러면 둘째로, 나와 하나님을 번갈아 바라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또 하나님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볼 때는 못하는데 하나님 바라보면 할 것 같고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믿었다가 의심했다가 갈등 속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의심의 갈등 속에 몸부림칩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이 이러한 신자들인 것입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저도 아직까지도 많이는 안그렇지만 조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고 믿어볼까 말까 할 때가 대단히 종종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큰소리 할 사람 별로 없을 거예요. 하나님을 믿었다가 나를 믿었다가 낙심했다가 다시 믿음을 가졌다가 갈등을 하고 갈피를 못 잡는 그런 신앙을 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갈 때 체험한 현상인 것입니다. 밤 사경에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주님이면 나로 물 위로 걸어오게 해 주시옵소서. 부탁을 하니 주님이 나니 물 위로 걸어오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의 말씀을 믿고 난 다음에 믿음이 강해져서 물 위로 걸어가다가 바람이 불고 물보라가 얼굴을 때리니까 바람과 물결을 바라보고 그만 주님을 안 바라보니까 의심이 들어와서 두려워하니까 믿음이 날라가 버리고 물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또 주님이여 나 물에 빠져 죽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고함을 치니까 주님이 와서 건져주셨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았다가. 바람과 바다를 바라보았다가 이것저것 아무것도 안 되는 그러한 현상에 처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과 환경의 위협에서 의심과 두려움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8절로 32절에 그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바람을 보지 말아야지요. 한번 예수님 봤으면 끝까지 예수님을 봐야 되겠는데 눈을 들어 바람을 바라 보았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주님을 바라보면 의심이 안 생깁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봤다가 환경을 바라봤다가 하면 의심이 들어왔다가 믿음이 들어왔다가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복잡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이상적이지 실제로 의심 안하는 사람 있느냐. 그렇게 물을 질문이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오직 믿음에 서서 살아갈 수 있느냐. 우리가 누구 편에 섰는가를 마음에 결정을 단호하게 내려야 되겠는데 주님 편에 서든지 환경 편에 서든지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되겠는데 주님 편에 섰다가 환경 편에 섰다가 자꾸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호한 편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까요? 큰 시련과 실패를 통하여 내가 깨어져서 헌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피를 흘리고 난 다음에 나중에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이제는 믿을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 길이 있다고 생각하면 꼭 자기 살길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지 않으면 말씀을 열심히 읽어서 말씀이 마음에 꽉 들어차서 의심이 들어올 여지가 없고 은혜가 넘쳐나면 그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서 굳건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49절로 50절에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말씀이 고난 중에 위로가 되어서 말씀이 여러분 마음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많이 외워 놓고 어려움을 당할 때 말씀을 외워서 말씀이 마음을 점령하고 지켜주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대단히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님의 힘을 얻어서 성령께서 여러분을 붙들어 주도록 기도를 많이 하고 방언기도를 많이 해서 성령이 여러분을 점령하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성령님께 의지하고 환경을 바라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내가 망하더라도 하나님 바라보고 망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감리교 창설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에게 한 교우가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나는 지금의 이 고통의 문제로 말미암아 살 힘이 없어 쩔쩔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건져남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내 앞길이 캄캄합니다.” 그러자 웨슬리 목사님이 가만히 밖을 내다보더니만 소 한 마리가 담장에 가려서 앞이 안보이니까 고개를 쭉~ 뽑아가지고 음마~ 하면서 돌담장 너머로 바라보고 있거든요. 돌담장 너머에는 풀밭도 있고 물도 있고 하니까 바라보고 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그 사람을 보고 저 소를 바라보십시오. 소를 바라보고... 왜 소가 목을 쭉 빼들고 담장 건너편을 보고 있지요?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간단하잖아요. 담장을 통해서는 안보이기 때문에 담장보다 키가 커야 되기 때문에 목을 뽑아서 담장 위에 내놓고 푸른 풀밭과 흐르는 물을 바라볼 수 있지 않습니까?
형제분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형제는 지금 염려, 근심, 걱정, 초조, 절망이 담장이 되어서 앞에 가리워 놓았는데 그것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지금 죽을 지경이고 앞길이 캄캄하지요. 담장 너머로 목을 쭉 뻗어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면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녹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웨슬 리가 말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담장에 가려서 도저히 멀리 못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야훼께로다. 산이 가려서 산 건너편에 아무것도 안보이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산 건너편을 바라보면 그곳에 산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처럼 우리는 담장에 가려서 담장만 바라보면 안보이기 때문에 목을 쭉 뽑아서 담장 위를 바라보듯이 염려와 근심과 불안과 초조와 절망을 기도를 통해서 뛰어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담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같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환경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의 언덕만 바라보고 절망하지 말고, 그 뒤에 있는 넓고 푸른 초원을 보아야겠고, 비구름만 보지 말고 그 뒤에 있는 햇볕을 보아야 하겠고 자기의 소망을 피조물이나 인간에게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되겠는데 마귀는 하나님 못 보게끔 자꾸 앞에 담장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염려를 바라보라. 이 근심을 바라보라. 이 절망을 바라보라. 이 문제를 바라보라. 이것 자꾸 바라보면 이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바라보면 자꾸 커지는 것입니다. 적은 문제가 커지고 커져서 앞날이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기도가 필요하고 철야기도가 필요하고 기도원 기도가 필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서 문제보다 하나님 계신 곳을 목을 뽑아서 볼 수가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문제가 내 앞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
셋째로, 우리의 참 신앙생활이란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봐야 돼요.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만 바라보자. 모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애굽을 떠나 나오는데 바로왕이 대군대를 동원해서 습격해서 따라오므로 피할 곳이 없습니다. 군대도 없고 무기도 없는데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모세야, 어디 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데려와서 죽게 하느냐. 항복하고 돌아가자. 그러나 모세는 오직 그 담장 너무 계신 하나님만 바라본 것입니다. 애굽의 병거와 군대들을 뛰어 넘어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들을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출애굽기 14장 13절로 14절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너희는 동요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애굽 군대도 바라보지 말고 병거도 바라보지 말고 환경도 바라보지 말고 너를 구원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건져 주신다. 이 믿음이 참 믿음인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면 모든 일에 내가 한계가 있어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해요. 나와 환경을 동시에 바라보면 의심이 생겨서 불안해서 살아갈 도리가 없어요. 나도 바라보지 말고 나와 환경을 번갈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보고 생각하고 말씀에만 서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할 때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우리가 잘 깨달아 알고 말씀을 알고 하나님 안에서 꿈과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환경에서 꿈과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꿈과 희망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도저히 의지할 곳 없는데 하나님 앞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고 담대하게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우리가 외쳐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23편 1절로 2절에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야훼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종이 주인의 손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것 바라보면 목이 날라가요. 주인이 무엇을 시킬지 모르니까 여종이 주모의 손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 종이 주인의 손도 바라보고 친구들과 게임할 것도 바라보고 이것도 바라보고 저것도 바라볼 때 주인이 이리 오라고 할 때 예? 게임에 젖어서 정신을 못 차리다가 주인을 섬기지 못하면 주인이 너는 파멸이라고 말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취해서 있다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세상에 취해 있고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할 때 귀를 기울여 들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꿈과 환상과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담대한 신앙을 갖고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외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하나님 안에서 내 꿈과 환상을 갖고 믿음을 갖고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입으로 시인하면서 모시고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 가슴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경에서부터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가슴속에서부터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가슴이 텅 비었으면 환경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가슴속에 와서 여러분 마음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 그곳에서 여러분 환경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슴속에 하나님을 꽉 모시고 하나님 뜻을 따라서 생각하고 꿈꾸고 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노먼 빈센트 필 목사님은 “낙심과 불안 가운데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면 반드시 인생의 성공을 경험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낙심과 소망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서 하나님이 마음을 점령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라봄의 법칙의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 밖에 안보여요. 내가 뭘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뭘 할 수 있어요?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이 하나님처럼 탁월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보다 큰 것은 감당을 못하지요. 하나님과 환경은 이것보고 저것 보고 저것 보고 이것 보고 저것 보면 나중에 눈이 어지러워지고 집중된 믿음을 못가지지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다. 환경을 바라보지 않는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하나님만 바라본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마음속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든지 바라보는 것이 우리 마음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컴퓨터가 마음을 꽉 채우게 되고 게임을 늘 바라보고 있으면 게임이 마음속에 꽉 채우게 되고 잡지에 스토리만 자꾸 생각하면 잡지가 내 마음을 꽉 점령하게 되고 하나님 말씀을 늘 생각하고 바라보면 말씀이 마음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무엇이 점령하는가가 여러분의 환경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점령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안 생기는 것도 하나님을 바라보면 마음이 하나님께 점령되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로 8절에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부활 이후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옛날이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같이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들어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진리가 우리 마음을 점령하면 그것이 우리 생활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4.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힘차게 바라보고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마음이 점령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속에 되새겨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고 무슨 꿈을 꾸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 마음속에 용서의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거룩하고 성령충만의 꿈을 꾸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치료받고 건강하게 되는 꿈을 꾸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저주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는 꿈을 꾸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사망과 음부를 극복하고 영생복락을 얻는 꿈을 마음속에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슴속에 그림을 그리는 붓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의미를 생각하면 여러분 마음속에 확실히 변화된 생각이 마음을 점령하게 되고 변화된 꿈이 마음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여러분은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기시기를 바랍니다. 용서받은 의인의 꿈을 꾸면 그대로 용서받은 의인이 됩니다.
거룩하게 된 꿈을 꾸게 되면 거룩하게 되고 성령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가 건강하게 되고 치료받은 나를 상상하고 꿈꾸게 되면 내 믿음대로 꿈꾼 대로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축복을 받는 꿈을 늘 꾸게 되면 축복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꿈꾸면 영생을 꿈꾼 대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마음속에 꿈꾼 것을 가지고서 환경을 다스리고 여러분을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꿈을 십자가를 통해서 그려 놓으면 틀림없이 그것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혈을 통해서 여러분이 체험해야 될 것을 십자가에 다 이루어 놓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용서와 의를 바라보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바라보고 치료와 건강을 바라보고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을 바라보고 부활과 영생과 천국을 바라보면 여러분의 생활 속에 오중복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보고 마음의 꿈이 분명하면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담대하게 말하십시오. 말이 바로 믿음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용서받은 의인이다. 아이구 아직까지 죄지으면서 무슨 소리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아요. 주님은 변화무쌍한 시몬을 보고 너는 베드로라고 말한 것입니다. 반석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른 베드로를 변화한 베드로를 사람들은 다 시몬 갈대라고 불렀는데 갈대가 반석이 되었었습니다. 주님이 잘못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시몬은 베드로, 반석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바울은 사울이 바울로 하나님이 이름을 변하였는데 사울은 내가 제일 잘났다. 교만하고 오만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이 바울로 변화시켰는데 바울은 겸손하고 제일 못난 자라는 것입니다. 낮아진 자, 바울은 겸손하고 못났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사용하는 아름다운 그릇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입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씩씩하다. 나는 평안하다. 나는 기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용서한다. 나는 사랑한다.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꿈꾼 바를 입술로 말하면 능력이 되어서 그것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속으로는 안돼요. 저런 죽일 놈, 벼락을 맞아라. 자꾸 그런 생각이 나거든. 그러나 내가 저를 사랑한다. 용서하고 사랑한다 그러면 마음속에 사랑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꿈을 꾸게 만들어서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면 그것이 마음속에 이루어지고 마음속에 이루어진 것이 실제 생활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시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지금 벌써 일어난 것처럼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는데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많은 민족의 조상이다. 너의 아내는 사래가 아니라 사라다. 여주가 되었다. 많은 자식의 어머니가 되었다. 자식이 없는데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현재에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온 동리 사람들이 다 치매에 걸렸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니까 나중에 없는 것이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제게 기도 받으러 왔는데 결혼한 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자식이 없어서 굉장히 고민을 하고 남편도 실망을 하고 있고 자기도 고민을 하고 있는데 나 애기 좀 낳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아기를 낳으려거든 남편하고 여행을 같이 하라. 남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져라. 그뿐 아니라 말을 바꿔라. 나는 아기가 없다고 하지 말고 나는 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아기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거든 안 미쳤습니다. 나는 성경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십니다. 나는 아기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꿈꾸고 믿고 말하면 반드시 아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사업을 하게 됩니다. 너 무슨 사업을 하느냐?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업을 하게 되고 돈을 벌게 되고 넉넉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을 하게 되면 사람들 웃습니다. 저것 교회 왔다갔다더니 좀 돌았다. 그러나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을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것을 꿈꾸고 있으면 그러한 기회가 생겨서 사업을 하게 되고 돈을 벌게 되고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믿고 말하면 여러분 그것이 여러분 운명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하세요. 바라보고 믿고 말하면 없는 것이 있게 되고 기적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마음에 내가 변화를 가져오면 마음의 변화는 환경에 위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제일 간단하게 마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범사에 감사하면 감사하는 것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옷을 입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서 새 옷을 입을 때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새 옷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있는 자에게는 더 준다고 에라 가져라. 더 좋은 옷을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판자집에 있으면서 하나님 그래도 비를 가리우고 바람을 가리우고 살 수 있는 판자집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더 좋은데 집을 주면 더 좋겠지만 이것도 감사합니다. 그러면 좋은 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가 수입이 한달에 3백만원이면 3백만원도 참 감사합니다. 5백만원쯤 되면 더 좋겠지만 3백만원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그것이 자라서 5백만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가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좋을 때만 감사하지 말고 안 좋을 때 감사해야 안 좋은 것이 좋게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감사하면 거짓 아니냐. 거짓이 아니라 이것이 치료제요 처방제인 것입니다. 약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건강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만해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그 감사한 대로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한데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기와 똑같은 것을 이루는 하나님의 축복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축복을 싣고 오는 하나님의 열쇠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선언하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골로새서 2장 6절로 7절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 다음 시편 146편 2절로 5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나의 생전에 야훼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야훼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생전에 야훼를 찬양하고 한평생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기적의 역사를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 주는 것입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고 아무리 좋은 노래를 가슴에 간직하고 있어도 불러야 되지요. 안 부르면 안돼요. 포항에 가서 부흥회를 여는데 오늘 비디오에서 봤지만 제가 첫날 설교를 하고 다음날 김장환 목사님이 하고 셋째 날에 김삼환 목사님이 했는데 나는 찬송을 한곡조도 안 불렀는데 김삼환 목사님은 무려 찬송을 7곡조나 불렀다고 합니다. 한번 설교에... 그래서 교인들이 찬송을 듣고 좋아했다고 나에게 보고를 하는데 찬송이 아무리 가슴속에 있어도 불러야 찬송이지 안 부르면 자기 혼자 속으로만 알았지 다른 사람 찬송인지 모르잖아요. 그와 같이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고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며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고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축복은 감사를 해야 축복으로 나타나요. 축복 안 하면 감사 안 하면 축복이 안 나타나요.
사랑도 아무리 사랑합니다 해도 표현을 해야 사랑이지 사랑도 되지 표현도 안하고서 속으로만 사랑하면 그 무슨 소용 있는 것입니까? 떡 조각 하나라도 가지고 가서 나눠주면서 사랑합니다. 하면은 너 떡 조각만큼 사랑하는구나.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증명이 안 되면 사랑이 아니지요. 우리가 성인이 되면 평균 2만 6천 개의 단어를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사용하는 우리 한국어 단어가 2만 6천 개를 평균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다른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하는 최고의 단어가 뭐냐. 뭐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인간의 언어도 무엇이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며 행복으로 가는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매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면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도 감사의 힘에 의해서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마음속에 꽉 들어차고 하나님을 감사할 때에, 탄식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재 대신에 화관을 쓰게 되는 놀라운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인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최남단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영국 연방의 자치령으로서 오랫동안 백인들이 정권을 쥐고 경제권을 독점하며 백인들만 잘 살았지 흑인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고 노예생활을 한 것입니다. 흑인들이 전체 인구의 70%가 넘지만, 그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흑인인권 운동을 하다가 백인 정부에 의하여 26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한 넬슨 만델라는 젊은 시절 감옥에 들어가서, 백발이 희끗희끗해서야 풀려나왔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젊은 시절 인권운동을 하다가 26년간 감옥살이 했으니까 살아남은 것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넬슨 만델라가 갇혀 있던 감옥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겨우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방에 겨우 누우면 꽉 들어찹니다. 그런 방에서 26년간을 있었는데 건강을 유지하고 살았다 말입니다. 거의 대다수의 갇힌 죄수들이 병들어 죽었어요. 그런데 넬슨 만델라는 살아서 나중에 남아공의 대통령까지 되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건강하게 되었느냐. 그 비법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감옥에서 중노동을 하러 나갈 때, 사람들은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질질 끌려갔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중노동을 하러 매일 끌려 나갈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옥 좁은 곳에 드러앉아 있는 것보다도 끌려 나가서 중노동을 하더라도 저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나무를 바라보고 대기에 숨을 쉴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된 일인 것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옥에서 지내지 않고 중노동하러 바깥에 나온 것을 감사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기쁜 마음으로 일한 것이 건강의 비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프레스(depress)가 안 되고 마음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하여 건강하고 병을 이기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감방에서 좌절과 분노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 분노로 말미암아 병들어 죽어 가고 있을 때, 나는 감방 뒤뜰의 채소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채소를 세상에 주신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서 순전히 마음에 감사로 말미암아 마음의 건강도 육체의 건강도 생활의 희망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중에는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었어요. 대통령이 되어서 자기 주변에 있는 흑인 참모들이 백인들에게 복수를 하라고 원수를 갚으라고 다 그럴 때 그는 우리 남아공은 무지개 나라다. 적, 주황, 황, 녹, 청 등 일곱가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사는 나라로써 우리는 백인과 흑인과 구분을 해서는 안 된다. 다 한 동포로써 함께 살자고 함께 끌어안는 사랑을 가진 것도 그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남아공은 잘 사는 나라입니다. 제가 남아공에 집회 가서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였는데 남아공이 잘사는 나라가 된 것은 넬슨 만델라의 감사하는 마음 때문에 그 나라가 복수하지 않고 그렇게 화해하고 사랑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우리는 감사로 하나가 되자.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마음이 바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에서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면 나 같은 인간이 되어요. 환경을 바라보면 환경과 같은 인간이 되어요.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과 같은 사람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무엇을 바라보는가가 그 마음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하지요. 자기만 바라보면 자기 같은 인간 이외에는 안되지요. 그러므로 아무런 위대한 일을 이룰 수가 없지요. 환경을 바라보면 나쁜 환경에 사는 사람은 거의 나쁜 환경으로 물들어가는 것입니다. 애들이 빈민촌에서 살면 도박하는 것 술 취하는 것, 갱단 싸우는 것만 바라보게 되면 자라나면서 도박을 하게 되고 갱단이 되고 술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찬미하면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그 인격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같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보배를 갖게 되어 변화 받게 되는 것입니다.
뉴욕의 할렘가에 아주 열악한 환경에 전부 도박하고 싸우고 술 취한 가운데 한 여전도사가 들어가서 그들 자식들을 끌어 모아 가지고서 성경을 가르치고 사랑해주고 찬송을 가르치고 도와주었습니다. 한 30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 대학교수가 나가서 조사를 해보았는데 그 여전도사가 기른 애들은 나가서 다 좋은 시민이 되고 사장이 되고 교수가 되고 군인이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 여전도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애들은 부모들과 똑같이 도박꾼이 되고 싸움꾼이 되고 술주정뱅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여전도사 한 사람의 감화력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그렇게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바라봄의 법칙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르켜 준 것이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네 진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것 그 땅을 바라보고 가라. 가나안 땅을 보고 가라고 말했고 가나안 땅을 줄 때도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바라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하리라고 말했었으며 이삭을 주기 전에도 별들을 바라보라. 별들을 바라보면 네 자손이 그만큼 많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이시간부터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늘 바라보십시오. 환경을 바라보면 절대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환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환경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용서와 의를 꿈꾸면 그대로 되고 거룩하고 성령충만을 꿈꾸면 그대로 되고 치료받고 건강을 꿈꾸면 치료와 건강을 얻게 되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꿈꾸면 아브라함의 형통의 축복이 다가오게 되고 부활 영생 천국을 꿈꾸면 천국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시인하십시오. 그러면 새로운 변화가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나와 세상을 바라보면 계산적이고 타산적이며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고 믿음으로 살게 되고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되고 우리의 생활 속에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모두 다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2012. 11. 25.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