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새 희망 노래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겸 마에스트로 차인홍
이제 휠체어는 그에게 ‘날개’가 됐다.
한국 장애인 최초로 미국 음대 교수에 임용된 바이올리니스트 겸 마에스트로 차인홍 교수(54·오하이오주립대)는 6·25 전쟁 직후인 1958년 태어나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재활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적처럼 바이올린을 만난다. 이후 장애인 친구들과 ‘베데스다 4중주단’을 만들어 매일 10여시간씩 연습하면서 연주회를 다녔고, 감히 생각도 못하던 미국 유학을 함께 떠난다. 가난과 장애, 초등학교 졸업장 뿐이던 그에게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악기’를 건네신 것.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어 장애가 ‘장애물’ 되지 않는 미국에서,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노력과 주위의 도움으로 그는 미국 여러 대학에서 학사와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바이올린 교수 겸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까지 올랐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고후 12:10)”는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는 ‘노래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차마에(스트로)’는 하나님을 ‘어메이징 마에스트로’라 부른다. 차 교수의 이러한 사연은 KBS TV 등에 여러 차례 방영됐고, 최근에는 <휠체어는 나의 날개(마음과생각)>라는 책으로도 출판됐다.
“그분은 내 인생의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시어 나를 바이올리니스트로 앉히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심벌즈의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연주하면서 소리를 낼 때 서로의 소리를 돕도록 인도하셨고, 각자 그분의 지휘를 바라보며 그분과 한 마음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분과 내가, 또 우리가 한 마음이 되어 연주하다 보면 각각 가장 좋은 소리를 내면서도, 서로의 소리를 가장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완벽한 능력도 있지만 아름다운 성품도 함께 지니신 어메이징 마에스트로. 그 하나님께선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을 닮아가라 하시는 듯합니다.” 여전히 ‘날개’를 단 채, 잠시 한국에 내려온 차인홍 교수 이야기다.
-어떻게 휠체어를 ‘날개’라고 고백하실 수 있나요. 교수님의 삶에서 ‘장애’란 무엇이었나요.
“어렸을 땐 물론 아니었어요. 그야말로 ‘장애’였죠. 깊이 고민하진 않았지만, 굉장히 주눅이 들어 있었던 기억은 납니다. 아이들이 놀리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굳이 슬픔으로까지 느끼진 못했어요. 대신 사춘기 들어 좀 심각해졌죠. 하지만 성격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좌절하거나 비뚤어진 길로 가진 않았어요. 그것이 제겐 축복이었습니다. 그저 잘 받아들였다고 할까요? 장애를 가진 주위 친구들 중에선 비뚤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거든요. 물론 아픔이 많았지만 나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웃음).
청년기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 뿐이었어요. 젊음은 곧 희망인데, 전 그런 자신감같은 게 전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다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닐까’ 하는…. 연애나 결혼 같은 이성 문제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어요. 생각하는 자체가 사치였죠.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할 시기쯤 유학을 갔는데, 그때부터 ‘장애는 불편할 뿐, 무능의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나만 열심히 하면 뭐든 가능하다’는 눈을 떴다고 할까요? 미국에 가서야 제가 가진 잠재력이나 능력을 펼칠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큰 희망이 있는 건 아니었어요. 뛰어난 연주가도 아니었고, 음악가로서의 길도 사실 암담했지만, 장애 때문에 포기하거나 스스로 제 길을 막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제가 가진 장애가 ‘누구에게나 있는 아픔이나 단점, 핸디캡’일 뿐이에요.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던 모습이 굉장히 어색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건강한 사람들 많지만, 누구나 단점이 있잖아요. 오히려 저보다 긍정적이지 못한 사람도 있고, 저보다 못한 환경 가진 이들도 있고, 자신의 단점 때문에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사람도 있고…, 이런저런 약함에 비하면 걷지 못하는 것은 별 거 아니죠. 이만큼까지 온 제 삶을 보면서 더 그렇게 느낍니다.”
-장애인들의 ‘롤 모델’이 되셨습니다.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건강하고 부족함 없이 사는 듯한 젊은이들에게도요. 제 스토리를 알게 되면, 누구든 지금 각자의 상황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상상도 못한 미래가 있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돌아보면 저는 누구보다 돈이 없었지만, 누구보다 부유하고 화려하게 살아왔어요. 모두 주변의 도움과 관심 덕분이었죠.
단 한 가지 제가 스스로 자부할 게 있다면,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점입니다. 물론 후회스러운 날도 많았지만, 내일이 막막해도 오늘을 성실히 살아야겠다는 나름의 신념이 있었어요. 그것이 제겐 소중합니다. 그러한 의지가 하나님께서 주셨던 축복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랬더니 제가 알지도 못했고 만날 수도 없었던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고, 지금까지 오는 밑바탕이 됐어요.”
-그래도 살면서 힘들고 절망적인 생각이 들 때가 많았을텐데,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제가 바보는 아니었지만, 힘들고 막막한 순간마다 ‘이건 아닌데…’ 라는 마음은 있었어요. 막연하지만 뭔가 희망적인 미래가 있을 것 같은 긍정적인 마음이 있었어요. 신앙적 바탕에서 나온 생각도 아니었지만, 뭔가 좋은 일이 있을 듯한 그런 마인드 때문에 크게 좌절하진 않았어요.”
-원래 성격이신가요.
“타고난 성격도 있었겠지만, 누군가의 사랑과 보살핌이 늘 있었던 게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보살펴 주셨다고 믿어요. 사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모두 주의 크신 은혜라’고 고백할 만한 여유나 신앙의 깊이도 없었어요. 하루하루 살기에도 바빴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신앙이 부족했다고 말씀드릴 수도 있겠네요. ‘하나님께서 저를 왜 이렇게 만드셨나’ 하는 원망 비슷한 것도 많이 했지만, 신앙생활을 계속 했음에도 ‘왜 하필 나만 이렇게 됐을까’를 생각했지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장애인으로) 만드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신앙적으로 철도 들고 뭔가를 어느 정도 이루고 나니, 제가 이렇게 된 것도 하나님 뜻이 있었고 그래서 더욱 세워주셨구나 깨달았어요.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질 틈이 없었던 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 때문이었죠. 당시엔 몰랐지만, 특히 목사님들이나 교회 친구들, 믿든 믿지 않든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바이올린을 처음 접할 때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네요.
“재활원에 있던 제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신 분이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주셨죠. 열악하고 형편없는 곳에서 밑바닥 생활을 할 때 강민자 선생님이라는 분이 자원봉사를 하러 오셔서 바이올린을 소개해 주셨어요. 봉사하러 오시면 불쌍하다며 먹을 것을 주고 가시는 게 보통인데, 강 선생님은 4년간 엄청난 열정과 사랑으로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셨어요. 제가 음악을 하게 된 시작이었죠. 암담했던 밑바닥 인생에 꿈과 용기를, 막연하게나마 희망의 빛줄기를 비춰 주셨죠. 지금도 찾아뵙는 양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미국 유학을 보내주신 분은 신동옥 서울대 비올라 교수님이셨어요. 대전 재활원에서 또래 친구들과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으로 활동했는데, 하루 10시간 넘게 연습을 하면서도 막막하고 괴로웠어요. 20대가 됐는데도 가진 건 초등학교 졸업장 뿐이라 일반 음대생에 비해 위축될 수밖에 없었죠. 그러던 중 서울소아마비협회 후원으로 서울의 좋은 선생님들로부터 레슨도 받고 기숙시설도 제공받았어요. 그렇게 만난 신 교수님께서 관심을 가져 주시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주셨어요. 검정고시를 마친지 한 달만에 장학금을 받고 신시내티 음대로 갔고, 생활비는 아산재단에서 후원해 주셨어요.
집사람(조성은 씨) 도움도 컸어요.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에도 미국으로 건너와 줬죠. 한국에서부터 계속 도움을 주셨고, 베데스다 4중주단에서 경험한 하나님 은혜 때문에 목회를 시작하신 김태경 목사님도 계시고…, 제가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 이렇게 도움을 주신 분들의 사랑 덕분입니다. 부모와 가족들에게 받아야 할 이상의 사랑을 주변에서 주셨어요.”
-바이올리니스트에서 마에스트로가 되셨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지휘자가 되고 싶진 않았지만, 지휘라는 걸 하고는 싶었어요(웃음). 저와 전혀 다른 세계라 생각했지만, 막연하게나마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하지만 서서 하는 멋있는 자리라, 신체적 조건 때문에 가능성이 없어 보였죠. 자신감도 없었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공부는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박사학위를 신청할 때 지휘를 배우겠다고 했어요. 저를 데려가려는 지도 교수님이 바이올린과 지휘를 같이 가르치고 계셨거든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길을 열어주신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미국이었기 때문에 이런 도전도 가능했습니다. 신체적인 핸디캡이 있어도 위축되지 않을 수 있는 나라거든요. 저도 이제 마음이 많이 열렸지만, 한국에서 지휘하려면 저도 모르게 위축이 돼요. 한국에서 받은 상처나 열등감 같은 게 아직 남아있나 봐요. 특히 장애를 가진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는, 장애가 있어도 그와 관계없이 인정받을 수 있는 미국은 ‘기회의 나라’입니다.”
-롤 모델로 삼은 인물이 있으셨나요.
“20세기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이스라엘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Itzhak Perlman)입니다. 그 분의 음반을 많이 들었지만, 심한 소아마비가 있었던 건 한참 뒤에 알았어요. 휠체어만 타지 않을 뿐이지 보조기를 끼고, 앉아서 연주할 때는 목발을 내려놓고 하시더라고요. 실력도 뛰어나지만, 나름대로 큰 희망을 주셨어요.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까진 아니었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런 이들을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음악가’로만 인정한다는 메시지가 충격이었죠. 오로지 ‘능력’만으로 활동하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장애인이면서도 훌륭하다’고 부각시키잖아요. 미국은 그런 것 자체가 없어요.
펄만에게 공개 레슨을 여섯 차례 받았던 경험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조차 ‘너 장애인이니까 더 열심히 해라’ 이런 말씀이 없으셨어요. 비슷한 조건이라 내심 기대도 했는데… (웃음). 오로지 음악인으로 대하는 거에요. 미국에선 이번 책 제목에 ‘휠체어’를 꼭 넣어야 하냐고 해요.
저도 예전에는 장애가 부각되는 게 싫어 망설였지만, 이제는 저를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나 역할이 있기 때문에 ‘휠체어’가 부각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한 일이죠. 부끄럽게 생각하고, 동정심을 유발한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수준은 제가 넘어섰다고 봅니다. ‘이제는 휠체어가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 의미라는 건가’ 라고 물으신다면, 진짜 그래요.”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나 즐겨 연주하시는 찬양이 있으신지요.
“찬양은 물론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입니다. 의미도 좋지만 편곡해서 연주하기도 좋아요. 또 ‘오 신실하신 주’는 간단하지만 멜로디 자체에도 깊이가 있고, 삶에 신실하게 개입해 주신 하나님을 간증하는 내용이라 좋아합니다.
성경구절은 고린도후서 12장 10절,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개역한글판)’ 입니다. 영어가 더 멋있어요. 이 구절은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다들 약함이 있잖아요? 그때가 강함임을 인정한다면, 큰 위로가 되실 것입니다.”
차인홍 교수는 이제 받았던 도움을 나눠주려 한다. 비영리단체 ‘차인홍 장학재단’을 만들어 장애를 가진 국내외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후원하겠다는 것. 이번 <휠체어는 나의 날개> 인세는 여기에 쏟아부을 계획이다.
“기본적으로는 겸손하게 제가 받은 것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입니다. 돕겠다는 분들도 나타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많은 분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을까요. 이 일이 시작되면 굉장히 기쁠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보람과 힘도 생기겠지요. 이 일을 하면서는 대가나 고마움을 기대하지 않으려고 해요.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일일이 표현하지 못했거든요. 도움은 도움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얼마가 됐든 깨끗하고 투명하게 관리해야죠.”
-마지막으로,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힘들었던 때를 지금 돌아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오늘에 충실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힘들어도 지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로 위로를 받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