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2): 존 밀턴의 <실락원>을 중심으로
생명의 ‘운(韻)’과 ‘율(律)’로 시작한다
흔히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읽으려 할 때 우리 보통 사람들이 직면하게 되는 곤혹스러움(?)이 있다. 위대한 작품들은 전문적인 문학가들이나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우리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겐 거리가 먼 것 같은 느낌이다. 특히 신과 인간을 기본 과제로 삼아 시의 무대를 우주 그 자체로 삼은 밀턴 작품과 같은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비록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존재일지라도 신이나 인간이나 우주 같은 주제들은 언제나 버거운 심리적 부담감으로 온다.
우리들이 보통 추구하는 가치를 진(眞), 선(善), 미(美)로 요약한다면 진은 인간의 지성이 추구하는 가치이며, 선은 인간의 의지가 지향하는 가치이다. 그러나 심오한 학문이나 종교와 관계를 깊이 맺지 않은 사람에게 진은 다소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고, 선은 의지가 그다지 굳세지 못한 사람에게는 실현하기에 부담스런 이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미는 어느 누구에게나 나름의 미적 감동으로 충실하게 체험되며, 그 계기를 일상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어떤 가치보다 미는 더 보편성을 띄기 때문이다. 이를 금도우신(今道友信)은 그의 <미론(美論)>에서 ‘미적 감동의 보편성’이라 했고, 존재의 가장 큰 축복이라 예찬했다. 어쨌거나 진과 선과 미는 인간의 문화활동을 보증하며 자극하는 가치 이념이다.
내가 처음 <실락원(Paradise Lost)>을 공부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 대작을 어떻게 하면 ‘미적 감동의 보편성’ 안에서 즐길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문학을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는 현실성 위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실락원>은 구약성서를 소재로 인류의 시조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중심 사건으로 취급한 작품이다. 신과 인간을 기본 과제로 다뤘기 때문에, 주인공은 인류 그 자체이고 시의 무대는 우주 그 자체이다. 이것은 신학과 철학의 영역에서의 이해를 기본으로 하는 문학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를 즐거움으로 읽는다…, 이러한 희망은 어쩌면 무모한 바램 이었을 런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왜 몰랐을까. 문학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삶처럼 자연스럽고 삶처럼 즐겁게 향유할수 있다는 사실을. 다양하게 그어진 경계선인 문학 사조나 문학관조차도, 문학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피어난다는 것을. 생명의 유기체로 존재하는 삶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듯이, 문학의 정의 역시 역사적으로 항상 개념적·이론적 규정의 틈과 문학론이라는 제도적 울타리를 부수면서 새로운 영토를 창출해 왔다. 삶처럼 변하고 움직이는 것이 문학의 속성이라는 것을.
이처럼 제도와 이론의 틀을 부수고 그 나름의 영토를 창출하는 문학의 속성 때문에 문학을 학문으로 접근 하려고 하면 어려워진다. 보통 사람들의 곁에 머물기를 거부고 우리의 즐거움은 사라진다. 뭐랄까. 등산처럼…, 산은 전문적인 알피니스트도 오르지만, 우리는 그저 한가하게 소일하기 위하여서도 산을 찾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냥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
그러하니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청교도문학의 정수라 하는 <실락원>…, 이 높고 장엄한 산을… 너무 위대하여 바라보기조차 버거울지라도 이미 우리 곁에 있으니, 한 번 즐거운 맘으로 올라가보자. 우리 역시 밀턴처럼 사탄의 세력을 격멸하고 하나님의 섭리의 정당성을 찬양하고 있음이다. 우리 속에 장엄한 필치를 펼칠 능력은 없지만, 생명의 운율이 있기 때문이다. 낙원은 생명의 운율로 춤추며 반응하는 바로 그 자리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