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서론>
오늘 새해 첫 성찬예배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겠다고 발버둥칠 때는 쉽게 끌어줄 수 있어도 절망에 처한 사람은 어떠한 힘으로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썩고 부패한 성품을 가진 인간이며 자기를 보고 죄책감을 느끼고 절망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보니 지은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 죄를 다 어떻게 청산하며 살아갈까 마음에 절망적인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가 없어요. 왜 사느냐. 또 한 해를 사는데 왜 사느냐 분명한 의미가 있느냐. 대답을 못합니다. 또 사람은 속절없이 죽음의 파도에 휩쓸려 가버리는 것입니다. 암담한 절망적인 존재로 밖에 자기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살펴보면 암담한 절망적인 존재이므로 웃을 수도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바로 “절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 가지 병이 많지요. 요사이는 패혈병, 황수관 박사님이 세상을 뜨신 그 병은 패혈병입니다. 피가 썩어져가는 병입니다. 그것은 걸리면 죽습니다. 그같이 죽음에 이르는 병도 절망이 그 영혼의 패혈병입니다. 절망이 영혼 속에 들어오면 살릴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절망에 이르느냐.
무한에 대하여 유한한 인간인 것을 생각할 때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절대적인 것에 대하여 불확실한 인간, 영원에 대하여 덧없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자신의 근본적인 한계를 인식하는 순간 절망합니다. 나는 한계점에 도달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때 절망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보려 해도 ‘절망’이라는 문제에 부딪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절망 속에 살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이후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되고 늘 불안, 공포, 염려, 근심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괜찮은 것으로 치장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마음 깊숙이 언제나 외롭고 슬프고 고독하고 절망이 가득 차 있습니다. 삶의 허무와 무의미 속에 방황하는 절망적인 존재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발견되어 절대절망을 벗어버리고 절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빛이 되어 주셔서 나는 빛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이요 생명의 능력이 되신다고 말씀하실 때 이 예수님을 깨닫게 되면 절망의 어두움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물리치려고 빗자루로 때리고 고함을 치고 발을 동동 굴러도 어둠은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한자루에 불만 붙이면 어두움은 싹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두움은 인간의 힘과 능으로는 안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순식간에 어두움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빛이 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 전도서 1장 2절로 11절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의 허무를 다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참으로 허무를 노래하는 극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알아볼 것은 이렇게 허무한 인간이 도대체 누구냐. 나라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본론>
1. 겉사람
성경은 나라는 사람이 겉사람과 속사람이 합쳐서 된 사람이요 이중적인 인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아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느끼고 하나님처럼 보고 하나님처럼 듣고 살았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탐욕이 들어오고 자존심이 들어오고 오만과 교만이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인간이 갈라졌어요. 선을 행하고 싶은데 악이 있고 잘살고 싶은데 못살게 하는 것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미움이 있고 이중적인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겉사람에 대한 탄식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겉사람은 낡아지고 속사람은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겉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육신의 사람인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4절로 25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가 느낀 바를 사도바울 선생이 성령의 능력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 다 있지요? 다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서운 깡패라도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또 악으로 끌고가는 강력한 인력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행하고 보면 악을 행하고 마는 것입니다. 선악이 우리 마음속에 동시에 존재하는데 선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이 늘 이기는 것입니다. 올해는 거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칭찬받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난 다음에 작심 사흘입니다. 사흘이 못가서 거짓말 하고 도적질하고 방탕하고 세속적이고 가슴을 칩니다.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인간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수양과 도덕으로 사람이 나아질 수 있으면 벌써 우리가 나아졌지요.
어떠한 종교인은 10년 동안 앉아서 자고 좋은 음식을 먹지 않고 고행을 통해서 수양과 도덕을 닦고 난 다음 뜰 때 하는 말이 나는 지옥으로 직행으로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10년 금욕을 하고 도덕을 닦아도 죄에서 놓여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10년, 20년, 30년 오래 예수 믿었다고 해서 내 스스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면 미혹에 빠진 것입니다. 나는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심한데 어느 흑인집 아들이 온몸을 상처를 입어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엄마에게 왔습니다. 엄마가 왜 온 몸을 비벼서 가죽에 피가 흐르게 하느냐. 엄마 백인 애들이 날 보고 자꾸 흑인이라고 놀리기 때문에 내가 수세미와 비누를 가지고 검은 것을 씻어내려고 아무리 씻어도 가죽만 터지고 피만 흘렀지 왜 나는 까만 피부가 희게 안되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는데 원래 유전 인자가 검은데 어떻게 인간으로 씻어서 희게 되는 것입니까? 인간의 힘으로 희게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겉사람과 속사람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겉사람이 죄악의 사람, 육신의 사람으로 내게 붙어 있으니 이것 아무리 금욕을 하고 욕심을 내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고 애써도 안떨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돼요.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돼요.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애써도 못하네. 안 되는 것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지 구원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한 사람이요, 낡아지는 사람이요 겉사람의 행위를 갈라디아서 5장 19절로 21절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은 이런 것이고 하늘나라의 일은 완전히 상극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을 하면 하늘나라를 얻지 못한다고 하니 하늘나라 들어갈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겉사람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어림도 없습니다. 겉사람, 육신의 사람, 육체의 사람이란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사람이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고 인본주의적 인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부정과 부패의 노예가 되어있고 온갖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는 부정하고 부패하고 가증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겉사람은 물로써 닦을 것도 아니요 수양과 도덕으로 닦을 것도 아니요 겉사람은 죽여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이상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그러면 다 죽어버리면 구원받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직접 죽을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을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이 날 위해 일해주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겉사람을 거룩하게 만들겠다고 일을 해 봤자 실수하고 못합니다. 그것 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창조주 예수님이 오셔서 여러분과 나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산 것는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그저 예수님 믿습니다. 나는 못하니까 믿습니다. 주님 책임져 주시옵소서. 주님은 기쁘게 당신이 우리 할 일을 맡아서 해주셔서 겉사람을 죽이고 속사람을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겉사람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얼마나 중요한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속사람
속사람이 살아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드려서 거듭나면 속사람이 되는데 어떻게 거듭나느냐. 한번은 니고데모라는 유대인이 굉장한 율법학자였습니다. 밤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하나님이 당신과 같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이런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없는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 당장 하시는 말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 없다.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물은 회개를 말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내 힘으로 올바른 의로운 생활, 거룩한 삶, 깨끗한 삶을 살 수가 없고 나는 죄를 짓는 사람이니 도와주시옵소서. 자기 연약함을 고백하고 나오면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5절로 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육으로 태어난 사람은 천 번 태어나고 육이요 영으로 태어나야 하나님 백성이 되는데 영으로 어떻게 태어나느냐. 내 힘으로 못 태어나잖아요. 영으로 태어나게 하는 중매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사람의 형상으로 왔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겉사람, 속사람으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없이 태어나서 아담의 타락한 유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되 죄가 없고 불의가 없고 추악이 없고 저주가 없고 절망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등이 없었어요.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의 겉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속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보배인데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고 거룩하신 예수님, 치료자 예수님, 축복의 근원되신 예수님, 영생천국인 예수님, 예수님을 모셔드리면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변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홀로 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의로운 예수님을 우리가 모셔드리면 우리 속에 와서 성령의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거룩하게 만들고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오면 치료가 다가오고 예수님이 오시면 저주가 사라지고 축복이 다가오고 예수님이 영생이기 때문에 예수님 모시고 있으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영생의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므로 우리가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0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따라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 끌어안으면 예수 죽음 내 죽음, 그 다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되어서 내 죽음은 예수님을 통해서 청산되어 버리고 부활의 생명은 내 속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에 가장 위대한 점은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어요.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이 뭐냐. 예수님이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예수님이 나를 끌어안고 부활하셔서 예수님 부활하신 그 예수님께 의지해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치료받게 되고 축복받게 되고 영생복락을 얻은 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 알고 이렇게 된 모습을 내가 바라보고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더불어 의롭게 되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부활 영생 천국을 얻었다. 깨달아 알고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고 바라보고 확실히 그리 된 것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되고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 영생 내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지 내가 노력하고 애써서 예수님을 닮아간다. 어림없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우리 힘으로 못 닮아가요.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것은 개미가 여러분 따라오려는 것과 한가지인 것입니다. 방향은 좋지만 실력이 없어요.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버리면 예수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예수님이 있어서 예수님이 나를 안고 가시기 때문에 어디든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믿음을 갖고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신앙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옛사람이 깨어지고 주님께 의지하면 주님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므로 그것 우리라고 하지 말고 나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 주세요. 저가 찔림은 나의 허물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한 고난은 전부 나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초 당하사 죄를 청산하고 허물을 청산하고 질병을 청산하고 저주를 청산하고 죽음을 청산하고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할 때 죄를 다 청산했다. 허물을 다 청산했다. 병을 다 갚았다. 저주를 다 청산했다. 사망과 음부를 다 이겼다. 다 이겼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깨달아 알고 예수님의 모습에 내가 닮은 것을 마음속에 그려보고 상상하고 그렇게 된 것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의가 되시고 나의 거룩함이 되시고 나의 치료가 되시고 나의 축복이 되시고 나의 영생복락이 되신다고 입술로 고백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이요 예수님과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예수의 생명이 들어와서 내가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수양을 닦고 도덕을 닦아서 공로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예수님의 생명의 더 넘치게 흘러날수록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받는 것이 우리 신앙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로 19절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안기고 하나님께 안기면 그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여러분에게 넘치도록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이냐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품에 안겨서 위로받고 격려받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에서 가장 탁월한 토크쇼 진행자 중 하나로 2004년 UN이 선정한 ‘올해의 세계 지도자상’을 받은 흑인 여자인 것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비참하게 보냈습니다.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있었는데, 그녀는 부모의 이혼으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남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를 돌아보며 그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나를 안아 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또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어요.” 그것이 상처가 되어 그녀는 지금도 부모를 생각하면 가슴에서 찬바람이 인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안아준 기억, 어머니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한마디만 들었어도 인생이 얼마나 따뜻해졌겠는가 그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기거나 엄마에게 안기는 경험이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좋은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몇 년 전에 미국의 정신신체학회에서 이런 발표를 했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안아주면 건강해진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어린아이를 자꾸 안아주세요. 그리고 남자 동지 여러분 부인을 자꾸 안아주세요. 버텨내도 안아주세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치료와 위로가 포옹을 통해서 통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어찌 육신에만 해당되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건강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안아주심을 실제로 느끼고 체험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이 넘쳐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부르면 하나님 사랑과 은혜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쁨이 넘쳐나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외부 환경이 아무리 편안하고 좋아도, 겉사람으로 겉으로 많은 친구가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같아도 외롭습니다. 목마르고 배고픕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오직 예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생명의 능력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긍휼과 사랑으로 안아주실 때에 진정으로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행복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누리는 사랑과 행복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나는 누구인가?
그러면 나는 누구냐. 우리가 이 질문을 하고 오늘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다시 한번 따라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세상에도 여러분 자기가 누군지를 자기만 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당신은 누굽니까? 나는 교회 왔다 하지만 누군지 잘 몰라요. 그러면 아주 안되지요. 내가 누군지 알고 하나님도 내가 누군지 알고 마귀도 내가 누군지 알아야 확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성경에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 나는 택하신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것을 찬찬히 알아보면 의미가 깊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속사람의 정체성이 확실한 사람은 신앙이 탄탄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로 7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언제부터 예수 믿습니까? 한 10년 되네요.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친구의 전도로 되었습니다. 그것은 겉에서 일어난 역사고 안 보이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보면 하나님이 창세 전에 하늘과 땅을 만들기 전에 우리를 사랑 안에서 택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실지 안 좋아하실지 모른다.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좋았기 때문에 택한 것입니다. 싫은 사람 택하지 않아요. 하나님 마음에 좋은 사람 택해요.
어떤 분이 신앙상담 와서 자기가 교제를 하는 남자가 있는데 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택할지 알 수가 없다고 기도를 해달라고 그래서 내가 기도를 해 줄테니까 누구를 택할까요,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 택해라. 좋아하는 사람도 얼마 안 있으면 미워지는데 밍밍한 사람 택해 놓으면 며칠 안 있으면 미워진다. 그러므로 제일 좋은 사람 택해라. 여러분 이 세상에 물건도 제일 좋은 것 사지 않습니까? 요사이는 춥고 그러니까 백화점에 가면 따뜻하고 그러니까 쇼핑하러 가는 사람 많아요. 저녁 먹고 쇼핑하러 가서 쭉 돌아보고 물건 몇 개 사서 가져오는데 무슨 물건을 가져옵니까? 좋은 것 사오지요. 싫은 것 사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쇼핑을 하는데 이 세상 60억 인구 가운데 쇼핑 중에서 좋은 사람을 택했는데 바로 여러분인 것입니다. 창세 전에 택했어요. 보통 택한 것이 아니에요. 계산이 안돼요.
너무나 옛날 옛날 그 옛날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의 깊으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했습니다. 미리 쟤는 내 것이다. 쟤는 손대지 말라. 쟤는 지금 내가 택했지만 몇 천 년 후에 나의 품안에 들어올 애다. 주님 앞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 전에 벌써 우리를 보고 예정하시고 택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예정한 사람이다. 그러니 보통 사람 아니지요. 택함을 받고 예정 받은 사람이니까 여러분 신분이 얼마나 탄탄합니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하면 뺨 맞을 소리인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거저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하신 족속이고 그 다음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왕 같은 제사장은 왕이란 뭐냐 다스리는 것이 왕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왕이에요. 그것 무슨 왕이냐. 이 세상에서 죄를 다스리는 것이 왕입니다. 옛날에는 죄가 오면 꼼짝도 못했는데 이제는 죄가 오면 죄야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허물이 오면 거짓말하고 싶은 생각, 욕하고 싶은 생각, 흉보고 싶은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올 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나쁜 생각은 물러가라! 떠나가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몸이 오싹오싹하고 감기기가 나고 병이 들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감기기는 물러갈지어다. 감기는 물러가라! 병은 물러가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마음이 낙심되고 좌절되고 절망되고 희망이 없다 생각할 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좌절감과 부정적인 생각은 물러갈지어다.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세력도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고 예수님의 빛을 따라 천국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왕 같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죄의 종이요 허물의 종이요 병의 종이요 죽음의 종이 되어서 질질 끌려 다녔는데 이제는 여러분은 왕이요 자기 위치를 알고 명령을 하고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왕 같은 제사장, 제사장은 뭐냐.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 제사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찬양의 제사를 드리고 영광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제사장으로 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의 제사를 기쁘게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베드로전서 2장 5절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 50:2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고 찬송 드릴 수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옛날에는 제사장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요. 안 믿는 사람들 아무리 감사하고 찬양해도 하나님 안 받아요. 제사 직분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여러분은 제사 직분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하면 하나님이 기쁘게 흠양하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른 사람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은 감사 찬송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통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통과해서 부탁하면 대속기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 다음에는 나는 누구냐. 거룩한 나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더러움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더러움으로 꽉 들어찬 세상 속에 거룩함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성령이 임재하여 계셔서 거룩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에게는 성령이 와서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거룩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더러움과 분리된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성령이 들어오면 더러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다 제켜 주시고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도다. 하나님이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주셔서 성령이 우리에게 거룩함을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로 24절에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자, 새해가 되었으니 이제는 참 거룩하게 살아야 되겠다. 더러운 생각, 더러운 말, 더러운 행동, 더러운 곳에 가지도 않고 보지도 않아야 되겠다.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며칠만 지나면 더러운 생각이 들어오고 더러운 처소가 들어오고 더러운 곳에 가자고 친구들이 끌고 가면 한번만 새해들 들어와서 한번만 너 한번 죄지었지 않느냐. 그러면 두 번만... 세 번만... 에휴 안 된다. 올해도 별 볼일 있느냐. 맘대로 세상을 따라 사는 거야. 그렇게 되는 것이 사람들의 각오요 결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의 힘으로 안 되고 내 힘으로 된다. 나를 바라보라. 너가 유혹을 받고 더러운 생각이 날 때 나를 생각하라. 성령을 생각하고 성령을 바라보고 성령을 믿고 성령께 의지하면 성령이 손잡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물 가운데 이끌어 주시고 불 가운데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은 성령이 와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주는 나라가 여러분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백성이고 여러분은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거룩하게 사는 것은 여러분의 일이 아니고 성령이 하는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뭘 하느냐.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붙잡아서 거룩하게 살게 만들어 주신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해주신다. 성령님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성령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인 것입니다. 사람의 힘과 능으로 안 되고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그의 소유된 백성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아무도 관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소유된 것이 우리이고 미국 사람은 미국에 소유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소유된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피로 값 주고 사고 성령으로 내 것이라고 인을 딱 쳤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로 7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으십시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인 것입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자녀들이 유업을 받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유업을 받을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 동안에 하나님을 그냥 하나님이라고만 부르지 마십시오. 성경에는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아빠 아버지. 이 얼마나 듣기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지요. 그러나 아빠 아버지라고 못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빠 아버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아빠 아버지 들어 주십시오. 얼마나 다정하고 가까이 계신 느낌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디도서 2장 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우리는 아버지의 백성, 예수님의 백성, 성령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속된 곳이 있습니다. 아버지에 속해 있고 예수님께 속해 있고 성령께 속해 있고 하늘나라에 속해 있고 천사들이 우리를 둘러 진 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 보이는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삼차원의 세계 눈에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느끼는 세계 뿐 아니라 우리는 안 보이는 세계인 생각 속에 꿈속에 믿음 속에 입술의 고백 속에 하늘나라가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있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아버지가 원하고 아들이 원하고 성령이 여러분을 원해서 여러분과 함께 교제하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주시기를 원하며 장차 하늘나라에 와서 아버지의 모든 상속을 여러분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여러분은 특권이 있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소망’을 모든 인간의 행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힘(divine force)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이 바로 소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힘이 임하면 소망이 들어온다. 소망이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한다고 그는 말한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성공의 비결은 소망을 잃지 않는데 있다”고 말했고, 헬렌 켈러는 “참된 소망은 모든 일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느냐.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으므로 우리 마음속에 아무리 소망을 꺼버리려고 해도 소망을 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고 천국의 영광이 계시니 어떻게 소망을 버릴 수가 있습니까?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좋아진다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엿새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보실 때마다 좋았더라 좋았더라 마지막에는 심히 좋았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므로 좋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루에 2만 5천 마디 말을 하고 여자는 3만 마디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 말 속에 소망의 말을 사용하면 할수록 소망이 여러분에게 끌려오는 것입니다. “참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참 잘 하시네요. 멋있습니다. 좋네요. 훌륭합니다. 예쁘군요. 잘 될 것입니다. 최고입니다. 자랑스럽습니다. 부지런하네요. 기발한 착상입니다. 힘내세요. 동감입니다. 믿습니다. 뛰어나네요...” 이 얼마나 소망의 말입니까? 여러분 이런 말을 쓴 적이 있습니까? 남편보고 이제 늙어가니까 옷도 스타일이 안 난다. 보기 싫어라. 왜 저렇게 얼굴이 쭈글쭈글 하노? 얼굴 마사지나 좀 해라. 이것은 소망이 다 가라앉고 늙은 것 살아서 뭐하겠노. 야~ 당신 나이는 먹었어도 몸은 곳곳하고 얼굴은 아직까지도 볼만한데? 옷 입어도 반듯하게 보여 멋있어. 그러면 뭘 그래~ 그러면서도 소망이 생겨나기 때문에 부인이 없을 때 거울 옆에 가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우리 마음속에 생명의 능력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왕 하는 말인데 소망의 말을 많이 쓰십시다. 참 좋은 아이디어 아닙니까? 잘하시네요. 멋있습니다. 좋네요. 훌륭합니다. 예쁘군요. 잘될 것입니다. 최고입니다. 자랑스럽습니다. 부지런하시네요. 기발한 착상입니다. 힘내세요. 동감입니다. 믿습니다. 뛰어나네요. 저는 올해 나이가 77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봐줄만하지 않아요? 그 말 듣는 것이 얼마나 좋아서 억지로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말해주면 안 좋아할 사람 없습니다. 부형님 여러분 부인에게 잘 보이려면 이쁘다고 해 주십시오. 나이가 60이 넘으면 이쁜지 안 이쁜지 몰라요. 그러나 믿음으로 당신 참 이쁘다. 몸매도 나이에 비교하면 날씬한 편이다. 거짓말 하는 것 같으면서도 듣기가 좋다구요. 긍정적으로 말하는 우리들이 되면 희망이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생명이 넘쳐나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인자로 몰려 40년간 광야에서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를 찾아가 소망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겠다. 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할 것이다.” 다 버렸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겠다. 나의 사자로 만들겠다. 소망을 주니까 80세 노인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인도자가 된 것입니다. 엄청난 곤경에 처해있는 예레미야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내가 보여줄 것이니 기도하라고 하나님이 소망을 주셨고, 장차 다가올 죽음과 같은 환난을 슬퍼하던 다니엘에게 천사를 보내어 소망의 말씀을 전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님이 여러분 찾아 오셨으니 얼마나 소망찬 일인 것입니까? 하나님은 창조하시던 첫날 “빛이 있으라” 하신 것과 같이, 어둠 가운데 있던 우리를 부르셔서“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창조 안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소망의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체가 소망의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신분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는 이제는 나이에 상관없습니다.
단테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지옥의 문 위에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여, 모든 소망을 포기하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지옥이란 무엇이냐. 소망이 없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삶은 지옥과 같은 삶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어둠 속에서도 새벽을 기다리고 낙엽이 흩어지는 늦가을 끝에서도 봄으로 다시 살아나는 새순을 볼 수 있습니다. 희망은 늦은 때가 없습니다. 희망은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타티안은 98세에 그의 위대한 작품인 “르판트의 전쟁”이라는 그림을 그렸으며 미켈란젤로는 80세가 넘어서 그의 대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80세에 소명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사라는 90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왜 웃으세요? 여러분도 소망이 있다구요. 갈렙은 85세에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며 평안히 안주하지 아니하고 아낙 자손이 진을 치고 있는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성령이 같이 계셔서 꿈과 환상을 주셔서 나이와 상관없이 오늘날도 여러분은 음악가도 될 수 있고 화가도 될 수 있고 예술가도 될 수 있고 사업가도 될 수 있고 나이를 보지 말고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사람은 태어날 때 다 천재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왜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 것입니까? 하나님처럼 태어났었습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때 천재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죽을 때는 999명은 바보로 죽고 한 사람만 천재로 살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왜냐, 이 땅에 살면서 땅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고 자기 감각적으로 좌절하고 부정적이 되고 마음속에 있는 천재를 다 죽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하고 희망찬 꿈을 갖고 믿습니다를 외치고 긍정적인 말을 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주신 천재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천재성을 살리면서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을 패배자로 살지 말고 챔피언으로 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챔피언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택해 주셨으니까 하나님 택함 받은 사람이 보통 사람입니까?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으니 여러분은 챔피언으로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시기는 로마의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잔악하게 핍박하던 때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극심한 핍박을 받으며 자칫 소망을 잃고 좌절할 수 있는 성도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의 값을 치루고 사신 언약의 백성인 것을 깨닫고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죽을 수밖에 없던 존재였던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 종노릇하던 우리들을 하나님이 긍휼을 내어 빛 가운데 구원하는 존재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중생을 얻은 우리는 새로운 신분이 되었습니다. 사람 앞에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보여주는 자랑하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 겉사람은 절대 절망의 사람, 절대 절망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서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속사람 즉 영의 사람이 거듭나 살아나서 예수님과 하나가 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더불어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따라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원더풀 할렐루야!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 2013. 1. 6. 성찬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