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의 지형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
WCC 선교와 전도에 대한 새로운 확언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WME)는 2006년 포르토알레그레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이후 새로운 에큐메니칼 선교확언을 채택하기 위해 수고하며 공헌하였다. 이 새로운 성명서는 2013년 한국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10차 WCC총회에 제출될 것이다. 1961년 뉴델리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와 WCC가 통합된 이후 선교와 전도에 대해 WCC가 발표한 공식성명서는 1982년에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 확언”(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이 유일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선교성명서는 2012년 9월 5일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열린 WCC중앙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이 성명서는 변화하는 지형 속에서 선교와 전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비전과 개념과 방향을 찾는 에큐메니칼 통찰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 성명서는 WCC회원교회들과 그 협력선교기구들을 너머 더 광범위하게 호소한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만물을 위한 생명의 풍요를 향해 함께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 주제 소개
1. 우리는 모든 생명의 창조자, 구속자, 양육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oikoumene)을 당신의 형상 안에서 창조하셨고, 세상에서 계속 일하면서 생명을 유지시키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생명이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육신(요 3:16)으로 믿는다.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관심이며 선교이다(요 10:10). 우리는 생명의 시여자(施與者)이신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그 분은 생명을 지탱시키고, 생명에 힘을 주시며, 온 피조물을 새롭게 하신다(창 2:7, 요 3:8). 생명을 부정하는 것은 생명의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선교로 초대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물이 충만하게 생명을 누리는 비전을 증거하도록 권능을 주셨다. 오늘날 하나님 선교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선교를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분별할 수 있을까?
2.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되고, 거룩한 삼위를 하나로 묶는 그 사랑은 온 인류와 피조물에게로 넘쳐흐른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선교사이신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요 20:21) 소망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을 주신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생명을 축하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항하고 그것을 변혁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의 산 증인이 되기 위해 “성령을 받는 것”(요 20:22)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성령의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우리는 오늘날 변화하는 다양한 세계 안에서 하나님 선교를 어떻게 다시 계획할 수 있을까?
3. 성령 속에 있는 생명은 선교의 본질이며, 우리가 무엇을 왜하는가 어떻게 우리 삶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의 핵심이다. 영성은 우리 삶에 가장 깊은 의미를 제공하며 우리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그것은 창조주로부터 오는 거룩한 선물이며 생명을 긍정하고 보살피는 에너지이다. 이러한 선교적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람들의 영적 헌신을 통하여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변혁의 역동성이다. 우리는 어떻게 생명을 긍정하는 변혁적 영성으로서 선교를 회복할 수 있을까?
4.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만을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부분적 구원을 주신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피조물의 모든 영역과 우리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에 좋은 소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선교를 우주적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과 온 생명, 온 세상(oikoumene)이 하나님의 생명의 그물망 안에서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확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구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명백한 이때에 우리가 하나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5. 기독교 선교역사는 선교의 한 중심지로부터 “미전도 지역”, 혹은 땅 끝까지 이르는 지리적 확장의 개념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인의 다수가 남반구와 동양에 살고 있거나 그 곳에서 태생한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라고 표현되는 급속한 교회의 지형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이민은 전 세계적인, 다 방향적인 현상이 되었고 기독교의 지형을 재형성하고 있다. 강력한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이 다양한 지역에서 출현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가장 주목할 만한 세계 기독교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무게 중심의 변화”가 선교와 전도의 신학과 의제와 실천에 어떤 통찰을 주고 있는가?
6. 선교는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사회특권층으로부터 소외계층으로 발생하는 운동이라고 이해되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주변부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선교의 주된 역할을 하는 대리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선교는 변혁적임을 확언하고 있다. 선교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이러한 역할의 반전은 강한 성경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들을 택하셔서(고전 1:18-31)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선교를 진전시키시고, 생명이 번성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주변부를 향한 선교”에서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로 개념의 전환이 일어났다면, 그 주변부 출신 사람들의 독특한 공헌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날 선교와 전도를 재 구상 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경험과 비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7. 우리는 돈에 대한 숭배가 복음의 신뢰성을 위협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시장 이념은 글로벌 시장이 무한대로 성장하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선전을 퍼트리고 있다. 이러한 신화는 사람들의 경제적인 삶만이 아니라 영적인 삶까지, 인간성만이 아니라 온 피조세계까지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글로벌 시장 안에서 어떻게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하고, 시장의 영을 이길 수 있을까? 전 지구적 차원의 경제적, 생태적 부정의와 위기 속에서 교회는 어떠한 선교적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8. 모든 기독교인들, 교회들, 그리고 회중들은 구원의 좋은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로 부름 받았다. 전도는 우리의 신앙과 확신을 담대하지만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러한 나눔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선물이다. 그것은 당연한 참된 신앙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모든 세대 안에서 교회는 전도에 대해 새롭게 헌신해야 한다. 전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방법 가운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세계 안에서 살고 있는 세대를 향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을까?
9. 교회는 다종교, 다문화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새로운 통신기술의 발달도 세계인들이 서로의 정체성과 일상을 더 잘 이해하도록 이끌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지역적으로 또한 세계적으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랑, 평화, 정의가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종사한다. 다원성은 교회가 만나는 도전이며 종교 간의 대화와 문화 간의 소통에 대한 진지한 참여는 피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있는 세계 안에서 생명 살리기 선교를 공동으로 증언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에큐메니칼 신념들을 가져야 하는가?
10. 교회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혁하기 위해 세상에 주신 선물이다. 교회가 맡은 선교는 세상 속에서 새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고, 세상 속에 사랑의 하나님의 현존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믿고 하나가 되기 위해(요 17:21) 우리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일치 가운데서 하나님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세상에 치유와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교회는 선교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갱신하여 충만한 생명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을까?
11. 이 선교성명서는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선교(mission Dei) 안에 성령의 선교를 이해함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성명서의 본문은 네 가지 제목으로 내용을 다루었다.
● 선교의 영: 생명의 숨결
● 해방의 영: 주변부로부터의 선교
● 공동체의 영: 살아 움직이는 교회
● 오순절의 영: 만유를 위한 복음
이러한 관점들을 성찰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변화하는 기독교 지형 속에서 역동성(dynamism), 정의, 다양성, 변혁을 선교의 중심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다. 우리는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오늘날 선교와 전도에 대한 10가지 확언을 응답으로 제시하면서 마칠 것이다.
Ⅰ. 선교의 영: 생명의 숨결
1. 성령의 선교
12. 하나님의 영(ru’ach)은 태초에 수면 위를 운행하셨고(창 1:2) 생명과 인간 숨결의 근원이 되셨다(창 2:7). 히브리어 성경에서 그 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였다. 지혜(잠 8)와 예언의 능력을 주시고(사 61:1), 마른 뼈에서 생명을 일으키시고(겔 47), 꿈꾸게 하시고(욜 2), 성전에서 주님의 영광으로 개혁을 일으키셨다(대하 7:1).
13. 창조 때에 수면 위를 운행하던 영과 동일한 하나님의 영은 마리아에게 임하여(눅 1:35) 예수를 낳으셨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권능을 부으시고(막1:10), 선교하도록 파송하신(눅 4:14, 18) 분은 성령이셨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분은 영혼을 버리셨다(요 19:30). 그분은 죽음 속에서, 무덤의 냉기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나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되셨다(롬 8:11).
14. 부활 후,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동체에 나타나셨고, 그의 제자들을 선교로 파송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22). “위로부터 오는 능력” 성령의 은사에 의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해 증거 하는 새 공동체를 형성했다(눅 24:49, 행 1:8). 초대교회는 일치의 영 안에 함께 살면서 성도들 사이에 소유를 나누었다(행 2:44-45).
15. 피조물 가운데 성령의 경륜의 보편성과 성령의 구속 사역의 특수성은 둘 다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서 만유의 주”가 되실 때(고전 15:24-28)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성령의 선교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령은 종종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세상에서 일하신다(눅 1:34-35, 요 3:8, 행 2:16-21).
16. 성경은 성령의 선교적 역할에 대해 다양한 이해가 있음을 증언한다. 어떤 견해는 성령이 그리스도에 완전히 의존적이고, 보혜사이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신 이후에 위로자와 변호자로서 오실 분이라고 강조한다. 성령은 선교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대리자로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현존이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는 파송과 확장을 강조하는 선교학을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교에 대해 성령론적으로 집중하면 선교는 본질적으로 기독론에 근거하며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관련된다고 인정하게 된다.
17. 또 다른 견해는 성령은 우리를 “온전한 진리”(요 16:13)로 인도하는 “진리의 영”이며 온 우주를 끌어안고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가시는(요 3:8) 것을 강조하면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근원(source)으로 교회를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종말론적 모임(synaxis)으로 선포한다. 이러한 두 번째 견해는 성도들이 성만찬 모임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나라를 감지하고 미리 맛보는 체험을 한 후에 평화롭게 (선교로) 나아가는 것을 이론화 했다. 이처럼 파송으로서 선교는 교회의 기원이라기보다는 결과이며 “예배 후에 예배”라고 부른다.
18.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성령에 의해 삼위일체의 삶의 중심에 있는 사랑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중단 없이 선포하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온 피조세계 안에 역동적으로 참여하심을 지속적으로 확증하는 신앙 증언이 일어난다.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모든 사람은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다.
2. 선교와 피조물의 번성
19.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흘러넘침이다. 하나님 선교는 창조행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피조세계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은 서로 얽혀있다. 하나님의 영의 선교는 항상 은혜를 주시는 활동 속에 우리 모두를 포함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협소한 인간 중심적인 접근을 넘어서 모든 피조생명체와 우리들과의 화해된 관계성을 표현하는 선교 유형을 채택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처럼 땅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며 우리는 처음부터 땅이 인간의 부정의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창 4:10).
20. 창조와 함께 시작된 선교는 사실상 생태정의,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 그리고 피조세계를 존중하는 영성의 발전 등의 캠페인들을 통해 사실상 우리 교회 안에서 이미 긍정적인 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온 피조물이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인 화해된 일치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있다(고후 5:18-19). 우리는 피조물은 버림받고 오직 영혼만 구원을 받는다고 믿지 않는다. 피조세계와 우리의 몸은 둘 다 성령의 은혜로 변화될 것이 틀림없다. 이사야의 비전과 요한 계시록이 증언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은 새로워질 것이다(사 11:1-9; 25:6-10; 66:22; 계 21:1-4).
21. 우리가 선교에 참여하는 것, 우리 존재가 창조세계 안에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삶을 사는 것은 상호 변혁적이기에 하나로 엮여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둘 없는 하나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면, 이웃에 소속 됨 없이도 하나님께 속할 수 있다고 잘못 믿는 개인주의적 영성으로 일탈하고, 다른 피조물들이 아파하고 호소하는 동안 단지 자기 기분을 달래주는 영성에 빠지게 된다.
22. 우리는 우리의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의 선교와 관련하여 새로운 겸손을 요구하는 새로운 회개(metanoia)가 필요하다. 우리는 선교에 대해 인간이 다른 대상을 향해 행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들은 창조주의 사역을 찬양하는 가운데 모든 피조물과 친교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연은 인간을 향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자연 세계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지혜문서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찬양한다고 확언한다(시 19:1-4, 66:1, 96:11-13, 98:4, 100:1, 150:6). 피조세계 안에서 창조주의 기쁨과 경이는 우리의 영성의 근거들 중에 하나가 된다(욥 38-39장).
23.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영적인 관계를 확언하고 싶지만, 지구는 오염되고 있으며 착취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소비주의는 무한성장 대신 끝없는 자원 착취의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탐욕은 지구온난화와 다른 형태의 기후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만일 이런 추세가 계속되고 땅이 치명적으로 손상되면, 우리는 구원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상상할 것인가? 다른 피조세계가 멸망하는데 인간만 구원받을 수는 없다. 생태정의는 구원과 분리될 수 없고 땅위의 모든 생명의 필요를 존중하는 새로운 인간성 없이 구원은 올 수 없다.
3. 영적 은사와 영분별
24. 성령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고전 12:7; 14:26)과 온 피조물의 화해(롬 8:19-23)를 위해 나누어야 하는 은사를 값없이 공평하게 주신다(고전 12:8-10; 롬 12:6-8; 엡 4:11).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는 영분별이다(고전 12:10). 우리는 억압된 사람들이 해방되고, 깨어진 공동체에 치유와 화해가 나타나고, 피조물의 회복을 포함하여 모든 차원에서 생명의 충만함이 긍정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있음을 분별한다. 우리는 또한 죽음의 세력과 생명파괴가 만연한 곳에서 악령들이 있음을 분별한다.
25. 초대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처럼 많은 영들이 있는 세계를 경험했다. 신약성경은 악령들, “섬기는 영들”(천사들, 히 1:14), “통치자들”과 “권세들”(엡 6:12), 짐승(계 13:1-7), 그리고 선하고 악한 다른 권세들을 포함한 다양한 영들에 대해 증언한다. 사도바울은 또한 일부 영적투쟁(엡 6:10-18, 고후 10:4-6)에 대해 진술하며 악을 대적하라(약 4:7, 벧전 5:8)고 명령한다. 교회들은 세상에 파송되어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사역을 분별하고,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를 실현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행 1:6-8).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분별할 때, 종종 하나님의 성령은 질서를 뒤흔들고, 우리를 한계 밖으로 이끌어내시고,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응답하도록 요청받는다.
26.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은 내적이고, 개인적, 공동체적이지만, 또한 밖으로는 선교적인 노력으로 인도한다. 성령에 대한 전통적 상징과 명칭(가령 불, 빛, 이슬, 샘, 기름부음, 치료, 녹임, 따뜻함, 위로, 위안, 힘, 휴식, 씻김, 빛냄)들은 성령이 우리의 삶과 친숙하며, 또 선교가 관심 갖는 관계성, 생명, 자연의 모든 측면과 성령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어 다양한 상항과 순간들,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점들, 만남의 공간, 그리고 중요한 투쟁 장소로 인도함을 받는다.
27. 성령은 지혜의 영(사 11:3, 엡 1:17)이며, 모든 진리로 인도한다(요 16:13). 성령은 인간의 문화와 창의성을 고취시킨다. 그래서 모든 문화와 상황(context) 안에 생명을 살리는 지혜가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것과 협력하는 것이 우리 선교의 부분이 된다. 우리는 식민지 건설과 연결된 선교활동이 종종 지역 주민의 문화를 폄하하고 그들의 지혜를 인정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생명을 긍정하는 지역의 지혜와 문화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우리는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멸시와 조롱을 받아온 전통들 속에 살아 온 사람들의 진술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의 지혜가 피조물 안에서 성령의 생명과 우리를 다시 연결할 수 있고,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되는 방법을 사고하도록 돕는 긴요하고 새로운 정위력(定位力)을 제공하기도 한다.
28.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주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포함하는 성령의 열매(갈 5:23)를 맺으라고 교회를 격려하면서 이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성령의 사랑과 능력이 활동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4. 변혁적 영성
29. 기독교인의 참된 증언은 우리가 선교에서 행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선교적으로 사는 방식에도 해당된다. 선교하는 교회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친교 안에 깊게 뿌리내린 영성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영성은 우리의 삶에 가장 깊은 의미를 제공한다. 그것은 자극과 동기가 되고, 삶의 여정에 동력을 준다. 그것은 충만한 삶의 에너지이며 생명을 거부하고, 해치고, 축소하는 모든 세력, 권력 그리고 제도에 저항하는 헌신을 요구한다.
30. 선교 영성은 늘 변혁적이다. 선교영성은 경제와 정치 안에 심지어 우리의 교회 안에 생명을 파괴시키는 가치와 제도가 있다면 그 모든 것에 저항하고 변혁을 추구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값없는 생명의 선물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우상숭배 수준의 거만함, 불공평한 제도, 독재정치, 현 세계경제질서 속에 있는 착취와 대결하게 한다. 경제와 경제적 정의는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뜻의 핵심에 해당하기 때문에 늘 신앙의 문제가 된다.” 선교 영성은 하나님의 생명의 경제에 기여하고, 개인의 탐욕을 만족시키기보다 하나님의 식탁에서 생명을 나누고, 현상 유지를 원하는 권력자들의 자기 이익에 도전하면서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를 추구하도록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해준다.
31. 예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하고 말씀하셨다. 무한성장정책은 세계 자유 시장을 통해 가난한 사람과 자연으로부터 끝없는 희생을 요구하면서 대안은 없다고 주장하는 이념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고,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완전한 충성을 요구하면서, 부와 번영을 창출해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거짓 약속을 한다.” 그것은 끝없는 착취를 통해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의 부(富)가 무제한 성장하도록 보호하는 돈의 세계적인 제도이다. 이러한 탐욕의 탑은 하나님의 온 가족을 위협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돈의 제국에 직접적으로 대립된다.
32. 변혁은 파스카 신비의 빛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 2:11-12). 억압과 차별과 고통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된다(고전 1:18). 우리 시대에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우리에게 제자도가 치러야 하는 모든 희생을 깨닫게 하면서 신앙적 증언을 위해 생명을 희생했다. 성령은 기독교인들이 박해와 순교에 직면해서도 신념에 따라 살도록 용기를 준다.
33. 십자가는 선교와 교회 안에서 힘의 오용과 부당한 권력남용에 대해 대해 회개를 요청한다. “교회와 세계 안에서 우리를 분열시키고 괴롭히는 힘의 불균형과 불안정으로 인해 혼란을 겪으면서, 우리는 회개하며, 권력 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권력 구조를 책임 있게 사용할 것을 요청 받고 있다.” 성령은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약한 사람을 돕기 위하여 강한 자가 스스로 자기의 특권을 버리도록 도전하신다.
34. 성령 안에서 생명을 경험하는 것은 생명을 충만히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존재하도록 지속시키는 만물을 축하하며, 절망과 염려(시 23편, 사 43:1-5)의 강을 건너기 위해 함께 행진하면서, 생명을 향한 운동을 증거 하도록 부름 받았다. 선교는 성령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삶의 모든 차원에서 도전하시며, 우리의 사적이고 집단적인 여정의 장소와 시간에 새로움과 변화를 주신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우리 안에 자극한다.
35.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반자이지만 결코 길들여지거나 “다룰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변부로 보이는 장소에서 배척당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방법은 성령의 놀라운 활동들 가운데 하나이다.
Ⅱ. 해방의 영성: 주변부로부터의 선교
36.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과 지혜로 창조하신 것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임하신 것은 억압된 자를 해방시키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하나님의 통치의 임재를 선포하기 위함(눅 4:16-18)이라고 선언하시며 사역을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시대에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시기로 선택하시고 그의 선교를 완수하시려 두루 다니셨는데, 그것은 온정주의적 자선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이 세상의 죄악을 증명했고, 그들의 삶에 대한 갈망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37.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거부하는 모든 것에 대결하시고 변혁하기 위해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을 맞이하셨다. 그것은 빈곤, 차별, 비인간화를 낳고 유지시키며 사람과 땅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문화와 제도를 포함한다.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권력의 역학, 세계적인 제도와 구조, 그리고 지역의 구체적인 현실이 지닌 복합성을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기독교 선교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주변부로 계속 밀려나는 사람들과 연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해되고 실행되었다. 그러므로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만물이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사명으로서 선교를 재구상하도록 교회를 초대한다.
1. 왜 주변부 사람이며 주변화인가?
38.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삶과 교회와 선교 안의 부당함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오직 힘 있는 자가 약한 자에게,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특권 있는 자가 소외된 자에게 선교할 수 있다는 인식에 반대하며 대안적인 선교운동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접근은 억압과 주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주류가 되는 것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와 개성이 확인되고 존중되는 체제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주변부에 사는 것은 정의와 존엄에서 배제되는 것을 의미함을 인식한다. 그러나 주변부에 사는 것은 스스로 교훈을 만들어 낸다. 주변부 사람들은 대리권이 있고 주류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연약하지만 배제시키는 세력이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과 그들의 투쟁의 절박성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특권층 사람들은 주변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의 투쟁에서 배울 것이 많다.
39. 주변부 사람들은 능력부여의 박탈, 기회와 정의에 대한 거절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한다. 주변부 사람들은 삶 속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겪으면서 활발한 희망과 집단적 저항, 그리고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는 인내의 담지자들이 된다.
40. 선교활동의 현장(context)은 선교의 범위와 성격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모든 선교사역자들은 사회적 위치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선교적 관점들을 형성하는 다양한 가치정향(value-orientation)을 인정하는 선교학적 성찰을 해야 한다. 선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주변부에서 힘의 중심지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고, 주변부에 남아 있게 함으로써 중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과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는 오히려 힘의 구조를 변혁하도록 요구받는다.
41. 과거와 현재에서 선교에 사용된 유력한 표현들은 주로 사회의 주변부 사람들을 향해서 사용되었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주변부 사람들을 선교 활동의 적극적 행위자가 아니라 수혜자로 보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표현된 선교는 종종 억압적이고 생명을 부정하는 제도들과 연루되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특권층 주류와 제휴되어 있었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제도들에 도전하는데 실패했다. 주류에서 출발하는 선교는 온정주의적 태도와 우월의식이 동기로 작용했다. 역사적으로 이런 선교는 기독교와 서양문화를 동일시했고, 그러한 주변화로 희생된 사람들의 온전한 인간성을 부정하는 등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42. 주변부 사람들의 공동의 주요 관심은 사회, 문화, 문명, 국가, 심지어 교회까지도 모든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변화와 억압을 가져오는 불평등의 근거에는 부정의가 있다.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은 하나님의 본성과 주권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7-18). 그러므로 모든 선교행동은 모든 인간과 땅의 신성한 가치를 보호해야 한다(참조 사 58).
2. 투쟁과 저항으로서 선교
43. 하나님 선교(missio Dei)를 확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와 자연 및 시간과 현장의 구체적 현실 안에서 활동하시며, 정의, 평화, 화해를 통해 온 세상에 생명을 충만하게 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해 진행되는 하나님의 해방과 화해에 참여하는 것은 착취하고 노예로 만드는 악령을 분별하고 정체를 폭로하는 것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가부장적 이념을 해체하고, 원주민들의 자결권을 옹호하며, 인종차별과 카스트제도의 사회적 정착에 도전하는 것을 수반한다.
44. 교회의 희망은 약속된 하나님 통치가 성취되는 것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올바른 관계회복을 수반한다. 이러한 비전은 비록 종말론적 실재를 말하고 있지만,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참여하도록 우리에게 깊은 활력과 정보를 준다.
45.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고(막 10:45),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눅 1:46-55), 상호의존적이고, 호혜적인 사랑의 특징을 가진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만물을 위한 하나님의 뜻인 생명의 충만함을 방해하는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또한 정의, 인간존엄, 생명의 대의를 지키는 운동과 솔선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흔쾌히 함께 일할 것을 요구한다.
3. 정의와 포용성을 추구하는 선교
46. 하나님의 통치를 알리는 좋은 소식은 정의롭고 포용적인 세계가 실현된다는 약속에 관한 것이다. 포용성은 인간과 피조물의 공동체 안에서 인간과 피조물이 서로를 인정하고, 각각의 신성한 가치를 서로 존중하고 유지하는 정당한 관계를 촉진시킨다. 그것은 또한 각 개체가 공동체의 삶 속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돕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같은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장벽을 극복함으로써 소망의 이유를 설명하는 일평생의 임무를 부여 받는 것이다(갈 3:27-28). 그러므로 인간을 해치는 어떤 종류의 차별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다.
47. 예수님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마 20:16). 교회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철저한 호의를 베푸는 만큼, 교회는 하나님 통치의 가치를 구현하는데 헌신하는 것이다(사 58:6). 교회가 자기중심주의를 삶의 방식으로 택하는 것을 비판하는 만큼, 하나님 통치가 인간실존에 스며드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교회가 사적인 상호작용은 물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 안에서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표명을 할 때 폭력을 포기하는 만큼,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는 것이다.
48. 그러나 현실에서 선교, 돈, 정치권력은 전략적 동반자들이다. 비록 우리의 신학적, 선교학적 대화는 교회의 선교가 가난한 사람과 연대하는 것이라고 많은 말을 하지만, 때로는 실천적인 면에서 부자들과 함께 밥을 먹고, 교회의 관료제 유지를 위한 재정확보를 위해 로비 하면서 권력의 중심부에 거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특권과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복음은 어떤 것인지 성찰하도록 특별히 도전한다.
49.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생명을 긍정하는 계획을 나타내도록 부름 받았다. 그것은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가치와 관습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형태의 차별이 지닌 죄성을 인정하고 부정의한 구조를 변혁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러한 소명으로 인해 교회에 대한 기대가 생겨난다. 교회는 그 서열 안에 억압적인 힘이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 대신 반지배문화공동체(counter-cultural community)로서 활동해야 한다. 신구약성경 안에서 언약공동체를 향한 명령은 “너희 중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마 20:16)는 언명으로 특징 지워진다.
4. 치유 및 온전성으로서의 선교
50.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치유와 온전성을 추구하는 행동은 선교의 중요한 표현이다. 치유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적 특징일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 사역을 지속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의 특징이기도 하다(마 10:1). 치유는 또한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이다(고전 12:9, 행 3). 성령은 생명을 양육하는 선교를 하라고 교회에게 권능을 주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기도, 목회적 보살핌, 전문적 의료 활동을, 다른 한편으로는 고난의 근원에 대한 예언자적 경고, 부정의한 구조의 변혁 그리고 과학적 연구를 포함한다.
51. 건강은 육체적, 정신적 복지 이상의 것이고, 치유는 본래 의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건강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교회의 성경적, 신학적 전통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인간을 다차원적 통일체로 보고 몸·혼·정신을 서로 관계된 것, 서로 의존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개인의 사회적, 정치적, 생태학적 차원 및 온전성을 확언한다. 건강은 온전성이라는 의미에서 현재에 실질적 가능성이고, 종말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조건이 된다. 온전성은 정(靜)적인 조화의 균형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이 함께 공동체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개인주의와 부정의는 공동체 건설에 방해물이며 그래서 온전성에도 방해물이다. 에이즈와 면역결핍증을 포함하여 의학적 조건이나 장애를 근거로 한 차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거역하는 것이다. 방치되었던 우리의 개인적, 집단적 삶의 모든 부분들이 포용될 때 그리고 차별받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사랑으로 함께 모이는 곳마다 그러한 온전성이 경험될 수 있고 우리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 통치의 징표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52. 사회는 장애와 질병을 죄의 결과로 혹은 해결되어야 할 의학적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의학적 모델은 개인의 “결함”으로 여겨지는 것을 교정하거나 치료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주변화 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결함이 있다”거나 “병든” 존재로 보지 않는다. 성경은 많은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다양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평등하고 중요한 존재로 여기며 치유하셨고, 공동체 구조 안에 그들의 자리를 회복시켜 주셨다. 치유는 결함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을 고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온전성을 회복하는 것에 해당한다. 물론 온전해지기 위해서 손상된 부분들은 개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치료를 고착화시키는 것은 성경적 관점을 진척시키기 위해서 극복되어야 한다. 선교는 장애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와 사회의 삶 속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촉진시켜야 한다.
53. 기독교 의료선교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질 높은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만인 건강의 성취라는 목적이 있다. 종합적인 의미에서 볼 때, 교회는 건강과 치유에 참여할 수 있고 현재에도 참여하고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교회는 진료소와 선교병원들을 세우고 지원하며, 상담과 보살피는 단체 및 건강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지역 교회들은 병든 교우들을 방문하기 위한 모임을 조직할 수 있다. 치유과정에는 병자와 함께하는 기도 혹은 병자를 위한 기도, 고백과 용서, 안수, 기름 바르기, 카리스마적인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것(고전 12장)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용하여 치유자가 영광을 누리거나 거짓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승리주의적 치유집회 등, 부적절한 예배형태는 사람들에게 깊은 해악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경우처럼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일어나는 치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54. 기독교 공동체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고통 속에 신음하며 구속을 바라는 피조물의 일부분이지만 희망의 징표가 될 수 있고, 이곳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한 표현이 될 수 있다(롬 8:22-24). 성령은 여러 방법으로 정의와 치유를 위해 일하시며 그리스도의 선교를 구현하기 위해 부름 받은 특별한 공동체 안에 거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Ⅲ. 공동체의 영: 살아 움직이는 교회
1. 하나님 선교와 교회의 생명
55. 교회의 생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 4:8). 선교는 창조와 구속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Caritas Christi urget nos). 이러한 친교(koinonia)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운동에 함께 참여하는 형제와 자매들을 향해 우리의 마음과 삶을 열게 한다(고후 5:18-21).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이 되도록 부름 받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넘쳐흐르는 사랑의 나눔은 모든 선교와 전도의 근원이다.
56. 성령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모든 문화와 상황을 위하여 온 인류에게 주시는 영감 있는 선물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령의 강력한 임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내주(內住) 하시면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시고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능을 주시어 그러한 목적들이 실현되도록 참여하게 하신다.
57. 교회는 역사 안에서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신학적, 경험적으로, 선교를 위해 탄생되었다. 교회와 선교는 그 기원과 목적에 있어서 서로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교회와 선교의 관계는 매우 친숙한데 그것은 교회에게 선교하도록 권능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또한 교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상에 파송 하시는 것과 동시에 교회 안에 성령을 불어넣으셨다(요 20:19-23). 그러므로 마치 불이 타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 만일 교회가 선교하지 않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58. 하나님 선교에서 출발하면 것은 “아래로부터”(from below)의 교회론적 접근으로 인도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선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가 교회를 소유하는 것이다. 선교는 교회 확장 계획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현하는 교회의 계획이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교회의 사도성에 대해 역동적인 이해가 나온다. 사도성은 시대를 통해 교회의 신앙을 보호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사도직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교회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하나님 선교와 교회 일치
59.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믿음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은 선교에 참여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속해 있는 형제와 자매가 된다(히 10:25). 교회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 받았다. 교회는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리고 그 존재 안에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의 비전을 미리 맛보고 증언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함께 모임(coming together)이고 평화 가운데 흩어짐(going forth)이다.
60. 선교와 일치는 실천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서로에게 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1961년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통합된 것은 중요한 발판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경험은 선교와 교회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격려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이 아직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진정으로 선교적이 되도록 새롭게 시도하면서 우리의 세기(世紀)에 이 여정을 지속해 가야 한다.
61. 오늘날 교회는 여러 면에서 아직도 하나님 선교의 적절한 구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때때로 선교와 교회 분열의식은 여전히 팽배하다. 선교에서 온전하고 진실한 일치가 부족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 선교의 성취에 대한 진정성과 신뢰성이 손상되고 있다. 주님은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기도하셨다(요 17:21). 이처럼 선교와 일치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교회와 일치에 대한 성찰을 더 광범위한 일치이해로, 즉 인류의 일치 및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전체의 우주적 일치로 개방할 필요가 있다.
62. 자유시장경제의 지나치게 경쟁적인 환경은 불행하게도 일부 교회들과 파라처치(para-church) 운동들이 남을 이기고 “승리자”가 되기를 추구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런 환경은 심지어 기존교회 교인들에게 소속교파를 바꾸라고 설득하는 공격적인 전술을 채택하게 할 수도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양적 성장을 이루겠다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필요한 타인 존중의 태도와 양립될 수 없다. 예수님은 권력과 돈이 아니라 자기 비움(kenosis)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겸손한 이해는 우리의 선교 방법을 형성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며 진수가 된다. 교회는 하나님 선교의 종이지 주인이 아니다. 선교적 교회는 자기 비움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63. 기독교 공동체는 다양성 속에서, 서로 존중하고 책임지는 전도형태를 포함하여, 동반자 관계와 협력 정신을 가지고 공동 증언하는 방법을 확인하고 실천하도록 요구 받는다. 공동 증언이란 “비록 분열되었지만, 교회들이 공동의 노력을 통해, 그들이 어떤 진리와 생명의 거룩한 은총을 함께 나누고 경험하였는지 표명함으로써 함께 전달” 하는 것이다.
64. 또한 교회의 선교적 본성은 교회와 파라처지 조직이 더 친밀하게 관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IMC와 WCC의 통합은 교회일치와 선교에 대해 사고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했다. 일치에 대한 논의는 주로 제도적인 문제에 관계되지만 선교 단체들은 선교에 유연성이 있고 자체 결정구조를 갖는다. 파라처치 운동은 교회의 중심 진리를 통해서 책임성과 방향성을 찾을 수 있는 반면, 파라처치 조직은 교회가 그들의 역동적인 사도적 특성을 잊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65. 협력과 일치에 솔선을 보였던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의 직접적인 계승자인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WME)는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선교 안에 일치(unity in mission)를 표현하고 강화시키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구조이다. WCC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 이후, CWME는 세계도처의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복음주의, 오순절, 토착교회들로부터 나오는 선교와 일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과 만날 수 있었다. 특별히 WCC의 상황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가까운 실무관계를 촉진시켰다. 복음주의자들과의 협력증진은, 특히 로잔 세계복음화운동(LMWE)과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의 관계는 일치 안에 선교(mission in unity)라는 주제에 대해 에큐메니칼 신학적 성찰을 풍요롭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는 전 교회가 전 복음을 전 세계에 증거 해야 한다는 공동의 관심을 함께 가지고 있다.
66. 일치의 영이신 성령은 또한 다양성 속에 일치를 알리기 위해 주도적이고 건설적으로 사람들과 교회들을 연합시키신다. 성령은 포용적이고 상호책임적인 공동체를 성장시키도록 하기 위해 안전하고 적극적인 육성환경(nurturing environment)에서 서로의 차이를 탐구하도록, 사람들에게 필요한 역동적 상황과 자원을 제공하신다.
3. 교회에 선교하는 권능을 주시는 하나님
67.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내주하시며 성도들에게 권능을 주신다. 그래서 선교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의 요구에 근거한 절박한 내적 충동이 되고(고전 9:16),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 진실한 삶을 평가하는 시험이며 척도가 되기에, 예수께서 주신 생명의 충만함을 나누기 위해 이웃을 초대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는 일은 특별한 개인들이나 전문단체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68. 인류와 모든 피조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풍부한 사랑을 전하는 기독교 메시지를 신뢰성 있게 하는 것은 가능한 곳에서 일치된 소리를 내고, 공동으로 증언하고, 우리 안에 있는 소망(벧전 3:15)을 공동으로 증언하고 설명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그래서 교회는 풍부한 공동선언을 발표해왔는데, 그 선언들의 일부는 연합교회(uniting) 혹은 연합된 교회(united)들로부터, 또한 일부는 교회 간 대화 모임들을 통해 생산되었는데 하나의 살아있는 치유와 화해의 유기체 안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일치 회복을 추구하였다. 성령의 사역을 치유와 화해 안에서 재발견하는 일은 오늘날 선교신학의 중심이 되었으며 중요한 에큐메니칼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69. 교회들 사이에 “가시적” 일치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 구조 차원에서만 일치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선교의 대의에 도움이 되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선교 안에 일치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위한 근거가 되며 교회 직제를 위해서도 의미가 있다. 일치를 성취하려는 시도는 정의를 찾으라는 성경적 요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우리의 소명은 때로는 침묵을 강요하고 억압하는 거짓된 일치를 타파하는데 관련된다. 진실한 일치는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포용성과 존경을 수반한다.
70. 오늘날 광범위한 규모의 세계적인 이민 현상은 교회가 아주 실천적인 방법으로 일치에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는 말씀을 듣고 있다. 교회는 이민 공동체를 위한 피난처가 될 수 있고, 또한 문화 간의 교류를 위해 의도적인 중심지가 될 수도 있다. 교회는 인종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 하나님 선교를 섬기는 존재가 되도록 부름 받았고, 다양성 속에서 구체적으로 공동 증언을 하는 다문화 목회와 선교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이민정책에 대해 정의를 옹호하고, 외국인혐오증과 인종차별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포함한다. 여성, 어린이, 미등록노동자는 모든 상황의 이주민들 사이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다. 유감스럽게도 여성들은 또한 자주 새로운 이민정책의 첨단에 서게 된다.
71. 하나님의 환대는 문화적으로 유력한 집단을 주인으로 이주민과 소수자를 손님으로 보는 우리의 이원적 개념을 극복할 것을 요청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환대 안에서 하나님은 주인이고 우리는 모두 겸손하게 우애를 가지고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도록 성령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다.
4. 지역교회: 새로운 주도자
72. 하나의 교회(the one Church) 안에서 성령의 일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만, 각 지역교회가 자신들의 구체적인 정황에 응답하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방법들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날 변화된 세계는 지역교회가 새로운 주도권을 발휘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세속화되고 있는 북반구에서 “신수도원주의”(new monasticism),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 “프레쉬 익스프레션”(fresh expression)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상황적 선교(contextual mission)가 교회를 재정의하고 재활성화 하고 있다. 상황에 알맞게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특별히 젊은 사람들에게 적절하다. 북반구에 있는 일부 교회들은 대중술집(pubs), 커피숍, 개조된 영화관에서 모이고 있다. 온라인을 교회의 삶에 끌어들이는 것은 비선형적(non-linear), 시각적, 실험적 방식으로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이 되고 있다.
73.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같이 지역교회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공동체를 조직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인되기를 수용하거나 거절 하는 것은 지역교회에 대한 그들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경험과 연관이 있다. 그러한 경험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변혁의 동인(動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가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선교의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지역교회는 선교의 전선이며 주요 대리자이다.
74. 예배와 성례전은 변혁적 영성과 선교를 교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상황적 성경읽기는 지역교회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와 증인이 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우리가 공동체 안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 선교를 삶으로 실천할 때에 만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온전한 정직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편안한 자리를 벗어나야하고 경계선을 넘어가야 한다.
75. 오늘날 지역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문화와 인종의 경계를 넘도록 강조하고, 문화적 차이를 성령의 선물로 확신시키는데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는 이민을 문제로 인식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새롭게 재발견하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민은 지역 차원에서 문화간 교회와 다문화교회를 설립하는 기회를 창조하기 위한 기회를 준다. 모든 교회는 다양한 문화공동체들이 함께 모이는 공간을 제공하고, 우리 시대에 상황에 알맞게 문화간 선교를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76. 지역교회는 또한 과거에는 결코 불가능했던 세계적 연결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매우 다른 상황에 거하는 교회들 사이에 영감(靈感) 있고 변혁적인 연결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위험이 없지는 않지만 혁신적인 가능성을 제공한다. 점점 대중화 되는 단기 “선교여행”은 전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들 사이에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일부의 경우에 가난한 지역교회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거나 현지 교회들을 전부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여행은 위험과 염려가 있기만 다양한 문화적, 사회경제적 정황에 노출되는 기회는 그 여행자가 자국 공동체로 돌아갔을 때 장기 사역을 결정하도록 인도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각 지체 안에 전 교회(the whole church)를 건설하는 영적 은사들을 행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고전 12-14).
77. 정의를 옹호하는 일은 국회나 중앙 관청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지역교회가 참여해야 하는 증언의 한 형태이다. 예를 들면, WCC의 폭력극복 10년(WCC Decade to Overcome Violence, 2001-2011)은 국제 에큐메니칼 평화회담(International Ecumenical Peace Convocation)에서 “교회는 인권, 젠더 정의, 기후 정의, 그리고 일치와 평화를 악용할 수도 있고 진척시킬 수도 있는 일상의 선택을 분별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탄원으로 결론을 맺었다.
일상생활에서 교회가 제공하는 기초 원리들은 지역교회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데 명분과 동기를 제공한다.
78. 교회는 각 지역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정황 가운데서 봉사(diakonia)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을 증언하면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지닌 신앙과 소망을 삶으로 사는 것이다. 교회는 종 되신 주님의 길을 따르면서 봉사를 통해 하나님 선교에 참여한다. 교회는 봉사의 힘이 지배의 힘보다 우월함을 나타내고, 생명 가능성을 육성하며, 하나님 통치의 약속을 설명하는 봉사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변혁하는 은총을 증언하는 봉사공동체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79.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선교적 공동체로서 더 깊게 발견할 때, 자신의 외적인 특성이 전도 안에 나타나게 된다.
Ⅳ. 오순절의 성령: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
1. 전도의 소명
80. 증언(martyria)은 전 세계 안에 있는 전 인류에게 전 복음을 전한다는 구체적인 전도의 모양을 갖는다. 그 목적은 세계구원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 그리고 부활의 중심성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하는 선교활동이다. 전도는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누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의 삶을 경험 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81.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흘러넘치는 것이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역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행 2:4, 4:20). 전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과 제자도를 향해 개인적 회심으로 초대” 하는 것을 포함해서 선교의 다른 차원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명백하고 의도적으로 복음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성령은 어떤 사람들을 전도자로 부르시지만(엡 4:11),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설명하도록 부름 받았다(벧전 3:15). 개인들뿐만이 아니라 전 교회가 함께 전도하도록 부름 받았다(막 16:15, 벧전 2:9).
82. 오늘날 세계는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과 신념에 대해 과도한 확신을 가진 단체들이 공동체를 치유하고 양육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괴하고 잔인하게 대하는 특징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개종(proselytism)은 전도를 실행하는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성령은 사람들의 설교와 복음의 증언과 동역하시기를 선택하시지만(참조. 롬10:14-15, 고후 4: 2-6), 새 삶을 창조하고 거듭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 하신다(요 3:5-8, 살전 1:4-6). 우리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폭력적 수단이나 권력의 남용으로 개종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때때로 전도가 왜곡되고 그 신뢰성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상황에서, 정체성이 억압된 비인간적 조건에서 살아가는 약자들을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지배 집단의 의도에 따라 강제 개종에 대한 고발이 일어나기도 한다.
83. 전도는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며,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 전통을 고수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들을 제자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은 신뢰와 겸손으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표현으로서 발생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그들과 복음을 나누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 혹은 사람에 대한 사랑의 정직성에 대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대해 나누고 소개하는 것보다 우리가 줄 수 있는 더 큰 선물은 없다.
84. 전도는 회개와 믿음과 세례로 인도한다. 죄와 악에 직면하여 진리를 듣는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을 요구한다(요 4:28-29, 참조. 막 10:22). 전도는 회심을 일으키며 태도와 우선권과 목적에 변화를 수반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의 구원, 병든 자의 치료, 억압된 자와 온 피조물의 해방을 가져온다.
85. “전도”는 선교의 다른 차원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과 제자도를 향한 개인적 회심으로 초대”하는 것을 포함해서 명백하고 의도적으로 복음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서로 다른 교회들 안에는 성령께서 우리의 상황에서 전도하도록 우리는 부르시는 방법에 대해 다양한 이해가 있다. 일부 사람들에게 전도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개인적 회심으로 이끄는 것에 관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는 억압받는 사람과 연대하고, 그들과 함께 함으로 기독교적 증언을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전도란 하나님 선교의 한 구성요소로 생각한다. 서로 다른 기독교 전통들은 선교와 전도의 양상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leitourgia)가 증언(martyria), 봉사(diakonia), 친교(koinonia)와 엉켜있는 지역교회의 삶 속에 근거를 둔 전도에 대해 이해하도록 성령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2.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전도하기
86. 전도는 말과 행동으로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언어적 선포 혹은 복음설교(kerygma)를 통한 전도는 완전한 성경적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