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갱신을 위하여
I. 서론
최근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한 상황화를 연구하며 어떻게 한국이 신앙도 초일류 기독교로 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던 중, 도스토예프스키가 진정으로 십자가에서 구원을 받은 후 마지막에 쓴 <까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의 백미인 ‘대심문관’ 부분에서 우리에게 한국 기독교 문화의 현 주소를 상징적으로 시사해 주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추기경, 유혹을 거부한 예수를 심문하다
대심문관은 16세기 스페인 세비아에서 일어난, 무서운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500년 만에 군중 속에 갑자기 나타난 예수를 군중들은 금방 알아본다.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는 심문을 마치고 나오는 90세의 대심문관 추기경의 눈에 금방 띄고, 대심문관은 즉시 예수를 체포하여 종교재판소에 딸린 낡은 건물에 있는 비좁고 음침한 아치형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그날 저녁, 늙은 대심문관은 손에 등불을 들고 예수가 있는 감방으로 간다. 철문은 굳게 닫혔다. 그리고 심문이 시작된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를 방해하러 온 거요?” 대심문관이 던진 첫 마디이다. “모든 것을 당신 스스로 교황에게 인수했으니, 이제는 모든 것이 교황의 소유이다. 이제는 제발 이곳에 찾아오지도 말고 방해하지도 말라.” 이어서 대심문관은 예수님을 향하여 말한다. “영혼의 자유보다 빵이 더 중요하며, 지상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면 권력과 기적에 복종해야 한다.” 대심문관은 예수님이 세 가지 시험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예수가 지상 낙원을 만들기를 소망한다.
“오늘날 인간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성이 깊고 자유에 충만해 있으며 그들 스스로 자기들의 자유를 우리한테 가져와 우리 앞에 공손히 바쳤소.” 대심문관은 예수가 이루려는 사업을, 1500년 당시 가톨릭이 구축한 종교 체제가 예수의 이름으로 마침내 완성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1500년대는 가톨릭이 천하 만물을 다스리던 시대였고, 마치 예수님이 거절했던 3가지를 다 이룬 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그토록 추구하는 세 가지를 단호히 거부했다. “왜 당신은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았소? 왜 당신은 땅에 뛰어내리더라도 살 수 있었는데 뛰어내리지 않았소? 그러나 당신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소? 당신은 그와 같은 시험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라 생각했소?” 대심문관의 말처럼 인간들은 기적과 빵과 권력을 너무 좋아한다. 그것을 거부할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대심문관’은 예수님의 세 가지 시험을 거부한 데 대한 추기경의 항의로 일관한다. “당신이 했던 일(세 가지 시험을 거절한 일)들을 인간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소? 당신은 인간을 너무 존중했기 때문에 인간을 동정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소.” 대심문관처럼, 오늘의 기독교는 예수님이 원하지 않았던 기독교가 되었다. 오히려 예수님이 거절한 것들을 묘약으로 생각하고 온 몸으로 찾으려 하고 있다. 너무도 아이러니하다.
대심문관은 “우리들은 당신의 유혹을 손질해 기적과 신비와 권력을 반석으로 삼았소. 그러자 사람들이 몹시 기뻐했고, 그렇게 가르치고 행하는 우리들이 옳은 것 아니요? 어서 나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시오. 앞으로 절대 찾아와서는 아니되오. 절대로 절대로.” 이렇게 말하고 모든 심문을 끝낸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처럼, 그들이 예수님이 거절했던 일들을 기꺼히 다 했노라고 기고만장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 대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말미암은 영적인 테러요 영적인 간음이요 사상의 간음 시대다. 테러는 증오를 먹고 자라는 문명의 사생아이며, 이러한 증오를 낳게 하는 근본에는 포스트모던 사회 속 미국의 제국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를 양대 축으로 하는 블록간 갈등이 있다.
신앙이 가장 좋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는, 40대 대통령 레이건이 니카라과의 반정부군 테러집단을 두고 한 말은 테러리즘의 본질을 압축한다. “누군가의 테러리스트는 동시에 또다른 이에게는 자유의 투사이다(One man’s terrorist is another man’s freedom fighter).” 이 말은 약자와 강자 사이의 균열된 마음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평화가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화해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테러리즘이 시대에 따라 발 빠르게 변신하며 위세를 떨쳐오는 데 대한 명쾌한 해답이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대신하여 평화의 촉진자 역할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테러는 증오를 먹고 자라난다. 지구상에 갈등과 증오가 사라지지 않는 한, 테러 역시 지속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그래서 가능하다. 평화의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개인적인 평화를 주시고, 이제는 사회적인 평화, 나아가 국제적 평화를 실천하자는 운동이 2008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Global Zero Peace Movement’로 발족되었다. 미카엘 고르바초프, 지미 카터와 함께 한국에서 정근모 박사(한국전력 상임고문) 등이 참여한다. 그린에너지 시대를 열며 향후 5-10년 뒤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를 살리기 위해 동북아 시대와 한민족의 미래를 보며 ‘우리에게 화해가 가능한가?’라고 용기 있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국내외적으로 증오의 정치학인 테러가 21세기 인류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이가 단지 그들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PLO 난민지역을 공격하는 모습을 통하여 이를 볼 수 있다. 단지 9·11 사태에 대한 앙갚음이라는 것 때문에 모두가 보고만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 세계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기독교인들이 지킬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탕자의 부끄러움이다.
김상복 목사는 “성삼위일체, 유일하신 참 인간이요 참 신으로 오신 예수에 대한 고백만 일치하면 같이 교류할 수 있다는 운동이 미국에서 ‘www.wcf.com’이라는 운동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향후 한국에도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며 모든 기독교인들이 화해할 수 있는 기독교 평화운동을 지지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세계관까지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들의 모임은 다 헛되고 헛되다는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보았듯,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의 위협은 마치 노아 방주 시대의 홍수와 같은 바이러스를 가지고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것이란 경고 앞에, 우리가 율법 폐기와 은혜 복음이라는 예수 사역, 진정한 화해운동에 기초한 선교를 시도함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사명자의 나라인 한민족이 바로 서고 이 지구를 불로 심판하리라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경고로 받아, 결국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에 이슬람에 대한 이해와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한 이해, 그리고 북한이 막힌 현 상황에서의 방안을 중심으로 교육과 선교의 중요성을 논하고, 결론으로 2010년 로잔 세계대회(케이프타운, 남아공)와 중국의 가정교회 목사들이 대거 참여한 2013년 아시아 리더스 포럼을 통해, 어떻게 한국이 주체적으로 글로벌 리더가 되어 화해의 선교가 가능할지를 점검하기로 한다.
일찍이 조나단 차오는 이렇게 중국교회를 진단했다. “그들은 고난의 단련을 견뎌낸 중국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스스로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시고 부활하심을 통하여 인격체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무엇인가 비범한 것이 있다는 것과, 그 생명은 개인들에게 소망을 일으킬 뿐 아니라, 또한 장차 올, 보다 나은 사회와 세계에 대한 기초를 놓는 생명이라는 것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요컨대, 중국 인민들은 150년의 고난을 겪은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시진핑은 중국의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를 융합하는 공산당 정책을 쓰면서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 바탕에는 중국 사회주의 1.0-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과, 2.0-덩샤오핑의 시장 혁명을 거쳐, 3.0-소비 혁명으로 가는 여정이 있다. 절대 다수의 국민들에게는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므로, 시진핑 주석은 공공재와 공공서비스 분야에 대한 실질적 투자를 확대하고 사회복지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일 것으로 본다. 기독교를 축복과 건강의 신학으로 오해하여 한국교회를 그 일환으로 중국 사회주의 복지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계속>
/김태연 원장(한국전문인선교원, 한국 로잔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