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이슬람국가화와 교육변혁
II. 본론
[1] 한반도의 이슬람국가화 위기
세계 선교의 전략적 측면에서 이슬람은 피해갈 수 없는 커다란 방해물이다. 이슬람은 종교적으로 유대교·기독교와 맥을 같이하면서도 철저히 그것을 거부한다. 한국에 와서 포교는 하면서도, 한국인이 그곳에 가서 기독교를 전하면 반월도로 목을 쳐서 죽이는 모순을 갖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화해의 종교라면, 상호 윈윈(win-win)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1.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다섯 명 중 하나는 이슬람 교도이다. 그 가운데 56%는 아시아에 있다. 10/40창 지역 국가의 종교들 가운데서 가장 폐쇄적인 곳을 꼽는다면 단연 이슬람교이다. 가장 폐쇄적인 이슬람교와 지구상 유일한 독재 공산주의인 북한이, 미사일 판매를 통해 음성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감이 좋지 않다. 현재 남한에도 우리투자금융과 신한굿모닝금융에 오일 달러 펀드가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수쿠크라는 이슬람 채권은 투자자에게 정기적으로 이자를 주는 대신 투자수익을 배당금 형태로 지급하는 것이고, 무라바하는 이슬람 은행이 상품 구매자와 판매자를 중재하는 형식이다.
요시다 에츠아키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수쿠크라는 말은 단순히 이슬람 채권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지만, 원래 의미를 찾아보면 ‘수쿠크=채권’이 꼭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수쿠크는 아랍어 사크의 복수형으로, 일반 증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수쿠크의 일반 기능과 상품 속성은 부채성 증권이므로, ‘채권’으로 직역할 수 있어 이슬람채권과 수쿠크를 거의 동일하게 보아도 무리는 없다. 앞으로 수쿠크가 기술적으로 발전해 부채성 증권영역을 뛰어넘는 상품이 나온다면 다른 용어를 쓰는 편이 좋겠지만, 그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덧붙여, 사크(수쿠크의 단수형)는 수표를 뜻하는 영어 단어 체크(check)의 어원이다. 어음이나 수표는 원래 이슬람 상인이 10세기경까지 사용한 것으로, 이슬람 사회가 상업을 중시했으며 상업에 편리한 구조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경제위기 가운데 건설과 무역 등 중동에 대규모 사업 경험이 있는 정부가, 경제와 이슬람을 분리하여 생각해 경계선을 넘을까 하는 걱정이다. 한국 여러 기독교 대학 캠퍼스에서도 장학금 명목으로 이슬람측의 오일 달러가 전달되고 있어, 연세대 등에서는 장학금을 사절했다는 말을 들었다. 또 2013년 한국의 재정위기를 틈타 이슬람 기업들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있다. 이슬람 자본이 들어와 벤처 기업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2013년 WCC 대회가 끝나면 더욱 영향력이 심화되리라 본다.
2. 이슬람교는 2가지 입장에서 기독교에 가장 커다란 대적 세력이 되고 있다.
첫째, 기독교 외에 선교라는 개념을 적극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문화 우월주의(ethnocentrism)에 입각한 서구 선교와 경쟁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11월 30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국과 중동간 경제협력 회의에서, 이슬람을 대표하는 이맘 가운데 하나가 분통을 터트리며 “지난 100년 동안 서방의 열강과 미국, 일본은 한반도에서 행세를 다 했는데 아직도 아랍측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문제는 이들의 종교에 구속적 유비(redemptive analogy)에 해당하는 종교의 진정성이 결여된 점이다. 거기다 북한의 김일성주의 같은 사교와 연관되어, 미사일 판매를 미끼로 중국을 매개체로 석유를 차관으로 주고받으며 계속 연결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슬람 인구를 2009년 현재 20억 이상으로 보면, 2019년경 24억이 되리라 예상한다. 미 고든콘웰신학교 1970-2020 기독교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2013년 현재 세계 종교인구의 15.6%인 이슬람은 2020년 23.9%가 될 것이다. 참고로 현재 거듭난 기독교 사역자의 숫자는 6억명 정도이다.
한국에는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 외에 인천 송도 등지에 사원을 건설하고 있다. 외국인근로자 유입과 함께 이슬람교도들에게 전도해야 한다는 각성이 198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 여기서 이슬람이란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자, 무슬림이란 복종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고 생활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이슬람교는 힘이 있고, 이슬람교의 교리는 기독교적인 동시에 가장 반기독교적이다. 땅끝이 바로 이슬람이다. 이슬람 지역에는 지하교회가 존재하지 못한다. 이는 원리주의자들의 횡포 때문이다. 서방 세계에서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았어도 국경선을 넘지 못하게 하고, 이슬람 종교지도자인 이맘들은 막대기를 가지고 그들을 쫓아낸다.
이들이 한국을 2020년까지 이슬람 국가로 만들기 위해 이슬람 대학을 세우는 등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화의 장단점을 알고 우리의 힘을 길러야 최후 승자의 반열에 들 수 있다. 세계 선교와 같이 눈에 보이는 선교에 치중하던 모습을 교정, 북한이 붕괴되는 것과 맞물려 돌아가는 이슬람의 한반도 전략을 간파하고, 기독교가 나눔의 종교이자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로 계속 모든 분야에 그 정신이 빛과 소금으로 용해되어 개혁되도록 변혁을 지속해야 한다.
무슬림과 복음적 기독교와의 차이점을 살펴 보자. 무슬림은 하나님을 거리가 먼, 변덕적인 복수, 전능자로 여긴다. 하지만 복음적인 기독교에서는 인격적인 사랑을 지닌 분으로 본다. 무슬림은 그리스도를 예언자로 보지만, 복음적인 기독교에서는 성육하신 하나님으로 본다. 무슬림에서는 삼위일체가 만일 있다면 하나님-마리아-예수라고 하지만, 이는 하나님-아들-성령으로 조화를 이루는 복음적 기독교와는 다르다. 무슬림에게서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과 무함마드 또는 이 둘이 혼합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다.
무슬림에서 죄는 부끄러움, 당혹스러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지만, 복음적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한다. 무슬림에서 구원은 믿음과 선행을 통해서이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복음적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신다는 확신이 있다. 무슬림은 초자연적 영적 세계를, 복음적 기독교는 성서의 가르침에 기초한 믿음을 각각 강조한다. 예수만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신이기에,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특히 원자탄과 관련해, 파키스탄이나 인도의 역할 등 이슬람교와 무관하지 않은 나라들이 경제 형편이 나아지면서 핵무기로 무장하려는 노력을 본능적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미 제국주의를 비롯해 그 우산 안에 있는 나라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게 하라는 것이지, 인간이 통치하고 억압하고 지배하는 제국주의적 방법이나 이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적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일에 어찌하든 협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왜 사고의 틀 전환이 필요한가? 모든(all)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분명하지만, 결국 선택받은 자들 개개인만이(every) 구원받는 것은 칼빈 500주년을 맞아 생긴 제한된 속죄론(limited atonement)에 대한 관심이다. 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세상의 멍에(yoke)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명예(honor)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로잔 운동을 창시한 영국의 존 스토트(John Stott) 박사 같은 경우도 영혼멸절설을 주장, 하나님 사랑이 매우 커서 구원받은 자는 천국으로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사라지게 되지 지옥의 형벌에서 고생하며 살지 않는다는 주장을 한 것도, 평화주의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시적으로 해석한 오류(exegetical fallacies)이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율법폐기 은혜복음’이다(갈 2:20, 5:24). 그러함에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영역이다. 예레미아의 새 언약 내용과 같이 우리가 종말론적 선교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를 넘어선 성경 외 계시를 주장하는 무슬림이나, 기독교를 비틀은 김일성교도들을 향해서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포괄적인 사랑이 크시기 때문이다(요 3:16).
3. 이슬람 선교에 있어 개인전도의 실제
현재 200만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조선족과 러시아의 비즈니스 관련자를 중심으로 한국에 출입하고 있다. 물론 중동 지역에도 우리나라의 건설기술자들이 살고 있다. 중동이나 동남아에서 온 자들이 20만명 이상 될 것이다. 그들을 자주 접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외국인근로자들의 생활 가운데 전도자가 될 수 있을까?
먼저 성경을 항상 거룩하게 다루어야 한다. 무슬림에게 돼지고기나 베이컨이 들어간 음식 혹은 알코올이 든 음료는 대접하지 말아야 한다. 왼손으로 음식을 건네거나 받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을 지칭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지칭하거나 이싸라는 용어가 예수보다 저들에게 맞는다. 예수님의 신앙과 종교행위를 질문하거나 우리의 신앙을 나눌 때도 매우 진지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열띤 논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이 변질되었다는 이슬람의 주장은 빈번한 논쟁거리이다. 코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자는 아무도 없느니라(코란 6:35)고 했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저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무슬림 전도를 위해 상징과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대화와 질문을 통해 스스로 추론하게 하면서 전도해야 한다. 이삭의 제물이 이스마엘의 제물로 바뀐 것에 대해 솔직히 의논해야 한다. 이스마엘이 여호와 이레의 양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본다면 ‘짐승 이슬람’이라는, 미국의 보수주의적 기독교인의 9·11 사태 후 이슬람에 대한 비하의 비유가 여기서 나왔음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가능한 한 담대하게 선포해야 한다. 무슬림 전도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중보기도이다.
이러한 무슬림을 전도함에 있어, WCC의 개종전도 중단(Proselyism) 선포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영적 전쟁에서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전도하는데, WCC는 개종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로잔언약의 입장을 이동주 박사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로잔언약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언약문(제4조 전도의 본질)은 선교를 개종강요가 아니라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것으로 고백한다. 오늘날 선교사들이나 전도자들은 무슬림이나 힌두들에게 큰 핍박이나 고난을 당하면서도 잃은 영혼을 사랑하는 간절함과 희생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 않던가?”
[2] 선교 교육변혁으로 가능한가?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에 필자가 참석했을 때, ‘Target 2030’이라는 결의를 하며 2030년까지 예상되는 선교사 숫자를 50만명으로 잡고, 그 가운데 세계 제2위의 선교사 파송국가인 한국이 1/5인 10만명의 선교사(목사)를 파송하려면 매년 3,200명을 파송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속도는 800명 정도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목사와 평신도 선교사로 양분된 선교사 개념을 전(全) 신자 선교사주의에 입각하여,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상 대명령(마28:19-20)을 모두 실천하는 전문인(professional)이라는 통합 개념을 가져야 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스포츠·철학·과학·서비스 등 모든 영역에서 활동하는 전문인들을 선교사로 양성하고, 발달한 인터넷 등 기술을 통해 100만명 이상을 양성하고 파송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향후 남북이 통일되는 순간 동아시아와 세계의 인재로 활용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에릭 슈미트는 저서 <새로운 디지털 시대>에서 “2025년 안에 지구촌 80억이 온라인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안에서 NGO들의 디지털을 통한 선교활동은 무궁무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양보다 질인데, 교육변혁은 제자들과 스승의 세계관(worldview) 변혁(transformation)에서 오는 것이다. 이제 개인의 변혁에 의한 구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교육·사회, 그리고 국가 변혁이 세계화 시대의 주류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세계화의 시대에서 세계화(Globalization)를 글로컬(Glocal)의 입장으로 연착륙하기 위해 로마서 12장 1-2절에 기초한 품성교육(character building)으로서의 교육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랍비 예수님의 방법으로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데까지 돌아가야 한다.
한국 교육이 신뢰성을 회복하고 국가변혁의 초석이 되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교육을 국가 중심이 아니라 시민의 자발적 움직임 아래 사립학교나 교육대학에 많이 진출, 학생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변혁적 교육’이 되어야 한다. 비전 및 리더십이 예수님의 비전, 예수님의 리더십을 제시할 수 있는 제2, 제3의 작은 예수, 직은 바울을 많이 키워야 한다. 마틴 루터나 칼빈에 가렸지만, 츠빙글리 같은 종교개혁자는 오늘날과 같은 경제위기의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의 나눔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추구했다. 그는 취리히에서 교회와 국가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정치가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을 함께 강조했다. 즉 츠빙글리는 교회개혁 뿐 아니라 시의회를 통해 복지정책을 비롯한 사회개혁을 병행했고, 경제윤리에 있어 하나님의 절대적 의를 향한 인간의 의를 끊임없이 상대화시켰다. 또 생명을 위한 복지와 섬김의 경제윤리를 강조했다.
결국 이러한 츠빙글리의 경제윤리는 오늘날 불의한 경제체제의 절대성을 거부하게 하며, 심각한 경제위기의 돌파구를 제시해 준다. 그의 경제윤리는 사회전반에서 경제개혁의 본이 되며, 성서적 생명존중과 친환경적 경제의 근거를 제시한다.
1.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의를 중시하는 십일조의 중요성에 흔들림이 없었다.
2. 하나님의 의를 사랑의 계명, 사랑의 나라로 만드는 기초석으로 이해해야 한다.
3. 수도원을 복지시설로 활용해야 한다는 말은 한국의 ‘텅 빈’ 기도원에도 해당된다.
4. 회개에 기초한 교회의 삶과 실천적이고 세부적인 개혁을 사회 전반에 실시하려 했다.
5. 피조 세계에 대한 인간의 회개를 강조했다.
6.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대차액을 가난하고 어려운 자에게 돌려주는 사고는 배울 만하다.
이 같은 선교사와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세계화 시대에 한국은 지역에 머무는 지도자상이 아니라 교육선교 지향적인 글로벌 교육 지도자상을 멘토로 제시해야 한다. 굳이 한국의 교육지도자상을 제시한다면 도산 안창호 선생을 들 수 있다. 그 분의 핵심 내용은 물론 ‘일인일기’도 있지만, ‘늘 빙그레 웃는 얼굴, 그리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동이족 혈통을 지닌 조선인, 하이-테크(high-tech) 시대에도 하이-터치(high-touch)가 가능한 도덕 교육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한인들끼리 멱살을 잡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말리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을 위한 학업을 포기한 채 한인들을 위한 훈련 공동체 ‘흥사단’을 만드는 모습이나, 어린아이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32년 4월 29일 상해 윤봉길 의사가 일본의 시라카와 대장을 죽인 의거가 발발한 인근 장소에 갔다 일경에 체포된 사건은 ‘지도자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promise keeper)’는 ‘신뢰지수’를 보여준다.
도산이 어린 시절 고향에서 시작한 작은 교육운동이 신민회 조직에 이어 평양 대성학교, 정주 오산학교로 계속 성장한 것은 세계 열강 사이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Rise Up Korea’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참고로 도산이 만든 신민회 수칙 4개조는 아래와 같다: 국민에게 민족사상과 독립사상을 일깨운다, 동지를 모아 국민운동에 힘쓴다, 학교를 세워 청소년을 교육시킨다, 여러 산업기관을 만들어 국민재산을 늘린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의 핵심 신념을 보면, 도산 안창호의 사상과 연관되는 특질을 발견할 수 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모범이요, 선생이요, 친구이자 구원자이며 주님이시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중심적 계시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에 예수 중심적인 접근을 사용할 것이다.
3. 서양문화는 서서히 크리스텐덤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4. 교회의 세상적인 지위, 부, 권력과 습관적으로 결탁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는 부적절할 뿐 아니라 증인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5. 교회란 제자도, 선교, 친교, 상호책임성,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예배를 위해 헌신된 공동체를 일컫는다.
6. 영성과 경제는 상호 연관되어 있다. 개인주의와 소비지향적 문화, 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한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단순한 삶, 창조세계를 돌보며,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삶을 추구한다.
7. 평화는 복음의 핵심이다. 이 세상에 비록 분열과 폭력이 난무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로써 개인·교회·사회, 그리고 국가 간 평화를 만들어가는 비폭력적 대안을 찾는 일에 전념한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종교개혁 당시 예수와 바울의 피의 발자취를 따라간 믿음의 선진들이다. 하지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세상을 변혁시켜야 할 대지인 세상을 등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문화 저항모델(Christ Against Culture)을 제시했다. 그리고 평화가 복음의 핵심이 되기 위해 예수의 속죄 피에 의한 구속사적 언급이 더 중요함을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는 가시적 평화가 아닌 십자가의 사랑에 기초한 화해를 이루는 자를 키울 수 있는 선교교육 변혁의 5가지 전략을 선교 세계관에 기초하여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1. 조직 및 운영(건전성, 정직성, 공평성, 투명성, 효율성, 의사소통)
2. 사회적 책임이 있는 사립학교, 대안학교, 홈스쿨링
3. 생활 가운데 빛 가운데로의 삶을 인도하는 융합식 교육
4. 상호 인간성 존엄에 기초한 제자들로서의 교제/훈련
5. 가정, 직장, 사회생활에서도 지속적인 평생교육
대학교육이 단순히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가르쳐 지키게 하는(마 28:19-20) 훈련을 포함해야 하듯, 신뢰를 회복해야 국가도 변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 웰빙(well-being)으로서 잘 훈련(well-training)하여 웰다잉(well-dying)을 이르게 하는 순례자적 교육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대학교육은 정보나 지식 전달이란 소유의 창고가 아닌 축복의 창고(the storage of blessings), 지식의 통로가 아닌, 축복의 통로(the channel of blessings) 신앙으로 나가야 한다는 당면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이 교육의 변혁이 요구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