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공주와 세상 구한 건, ‘에로스’ 아닌 ‘아가페’였네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리뷰] <겨울왕국> 엘사와 <라이온 킹> 심바의 ‘평행이론’

▲ 포스터.
▲ 포스터.

설 연휴, 간만에 찾아온 여유를 즐기며 영화를 보기로 했다. 바쁜 일상에 쫓기느라 영화관에 1년에 한두 번 갈 수 있을까 말까한 필자로서는, <레 미제라블>과 <광해>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내린 ‘중대한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영화를 봐야 이 고귀한(!) 시간이 헛되지 않을까. 천만을 넘겼다는 화제작 ‘변호인’과 디즈니 역대 최고의 흥행작이자 기독교적 작품이라는 ‘겨울왕국’ 사이에서 오래 고민한 끝에 필자는 후자를 선택했다. 기독교 신문에 리뷰를 쓰기에 보다 더 적합할 것 같다는, 일종의 ‘직업병’적 계산 때문이었지만, 다행히 <겨울왕국>은 조금도 후회가 없을 만큼 재미있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심바가 죄책감에 도망가자, 정글엔 평화가 사라졌다

이 글은 <겨울왕국>에 대한 리뷰이지만, 먼저 같은 디즈니 사의 애니메이션 영화인 <라이온 킹> 이야기를 하고 싶다. 두 영화가 비슷한 서사 구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온 킹>의 주인공은 정글의 왕 사자, 그 중에서도 ‘왕 중 왕’이 될 어린 사자 ‘심바’다. 평화와 사랑 속에 행복하게 자라가던 심바는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 ‘무파사’를 잃고, 그 사건에 대한 ‘죄책감’에 빠져 자신이 다스려야 할 정글을 떠나 멀리 도망친다.

세월이 흘러 심바는 겉으로는 위풍당당한 어른 사자가 됐으나, 속으로는 사자의 형상(위엄)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새롭게 만난 친구 미어캣 티몬과 멧돼지 품바와 어울리고, 그들처럼 벌레를 잡아먹으며 살아간다. “하쿠나 마타타(걱정할 것 없어)”를 입버릇처럼 되뇌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한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영화 에서 사자의 위엄을 잃고 &lsquo;품바가 된&rsquo; 심바의 모습. &ldquo;사자는 배가 고파도 풀을 뜯지 않는다&rdquo;지만, 심바는 품바들과 어울리며 벌레를 잡아먹고 산다. 그는 &ldquo;하쿠나 마타타&rdquo;라는 &lsquo;값싼 은혜&rsquo;로 죄책에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그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디즈니
▲영화 에서 사자의 위엄을 잃고 ‘품바가 된’ 심바의 모습. “사자는 배가 고파도 풀을 뜯지 않는다”지만, 심바는 품바들과 어울리며 벌레를 잡아먹고 산다. 그는 “하쿠나 마타타”라는 ‘값싼 은혜’로 죄책에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그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디즈니

왕 중 왕이 되어야 할 심바가 죄책감 때문에 자기 형상을 잃고 사명의 자리에서 도망치자, 정글은 평화를 잃어 버린다. 그러나 심바는 마침내 내면에 있던 아버지와 만난 뒤 죄책감을 떨쳐내고 사자의 형상을 회복해, 자기 사명과 정글의 평화를 되찾는다.

엘사는 상처를 주지 않으려 세상과 단절했지만,
이는 결국 자신과 세상에게 더 큰 상처만 남겼다

다음엔 <겨울왕국> 이야기다(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도 포함돼 있으니, 원치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뒤로가기를 누르시라!). <겨울왕국>의 두 주인공이자 공주인 언니 엘사와 동생 안나는 어린 시절 매우 다정한 사이였다. 그런데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던 엘사는 실수로 안나에게 큰 상처를 입히게 되고, 이후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킨다. 다쳤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안나는 여전히 엘사에게 살갑게 굴지만, 엘사는 동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오히려 더 매정하게 안나를 멀리한다.

▲어릴 적엔 다정했던 엘사와 안나. 엘사는 실수로 동생을 다치게 한 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디즈니
▲어릴 적엔 다정했던 엘사와 안나. 엘사는 실수로 동생을 다치게 한 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디즈니

그나마 엘사에게 버팀목이 되던 왕과 왕비, 즉 그녀의 부모도 얼마 뒤 사고로 목숨을 잃고, 엘사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그런데 여왕 즉위식 날, 엘사가 또 한 번 자신의 능력을 통제하지 못해 사고가 터지고, 그녀는 더 큰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가 그곳에 얼음궁전을 짓고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킨다.

▲의 주인공 엘사. ⓒ디즈니
▲의 주인공 엘사. ⓒ디즈니

엘사는 이제야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게 됐다는 안도감에 “렛 잇 고(let it go; 그대로 내버려 둬)”를 외치지만, 그녀가 떠나버린 왕국은 차갑게 얼어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이에 동생 안나는 언니를 찾아나서고, 두 자매는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목숨을 구하며 얼어붙었던 왕국도 녹인다.

자, 그럼 이제 <라이온 킹>의 심바와 <겨울왕국>의 엘사의 이야기에 우리를 대입시켜 보자(그대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관계 없다. 이 긴 글을 여기까지 읽은 김에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 그냥 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의 귀한 형상을 담아 창조하셨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그런데 우리는, 심바의 삼촌 스카나 엘사의 이웃나라 열두번째 왕자 한스와 같은 사탄의 음성 때문에, 죄에 대한 자책으로 사명자의 자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치지는 않는가.

그렇게 직무를 유기하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킨 채 “하쿠나 마타타”나 “렛 잇 고” 같은 ‘긍정적 사고방식’을 노래하면, 몸과 마음이 당장은 편할지 모른다. 그것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값싼 은혜’로는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가 절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면, 세상은 ‘무법천지’ ‘하이에나의 세상’ ‘얼음왕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실제 우리는 현실 속에서 그러한 범지구적 재앙(테러, 전쟁, 양극화 등)을 매순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택한 고립과 단절은, 결국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더 큰 상처와 피해만 남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고, 크리스천이 사랑을 품지 않으면 온 세상과 사람들이 꽁꽁 얼어버린다. ⓒ디즈니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고, 크리스천이 사랑을 품지 않으면 온 세상과 사람들이 꽁꽁 얼어버린다. ⓒ디즈니

세상을 얼어붙게 한 책임은 군중들에게도 있다

자기 안에 엘사와 같은 모습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 안에 엘사를 향해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던 군중들과 같은 모습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조금 다르거나, 부족하거나, 허물이 있는 이들을 보고, 너무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지는 않는가. 마치 예수님 앞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 하던 군중들처럼 말이다.

엘사는 능력을 통제하지 못해 다른 이들의 몸에 상처를 줬지만, 군중들은 정죄를 해서 엘사의 마음에 상처를 줬다. 왕국을 얼려버린 것은 엘사의 능력이었지만, 사실 그 능력이 발현된 이유는 그녀의 주변인들이 얼음처럼 차갑고 가시처럼 날카로운 말과 행동으로 그녀의 죄책감과 두려움을 증폭시켰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삶 속에서 다른 이들 때문에 상처 입는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책임이 내게도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언니 엘사를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안나. 멀찍이 보이는 엘사의 모습이, &ldquo;제발 나를 찾아와서 구해줘&rdquo;라고 부르짖는 듯하지 않은가? ⓒ디즈니
▲언니 엘사를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안나. 멀찍이 보이는 엘사의 모습이, “제발 나를 찾아와서 구해줘”라고 부르짖는 듯하지 않은가? ⓒ디즈니

상대방이 엘사처럼 얼음궁전을 짓고 그 속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엘사가 정말 아무도 자기를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면 왜 얼음다리와 계단을 없애지 않고 그냥 뒀을까? 엘사가 안나의 호소를 뿌리치고 갈 때 얼음벽에 비친 뒷모습이 ‘날 붙잡아 달라’고 호소하는 듯하지 않던가?

안나는 엘사를 구했고, 엘사는 안나를 구했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의 수많은 상처 입은 ‘엘사’들을, 우리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진부하지만 근본적이고도 유일한 답, 그렇다. ‘사랑’이다. 그런데 매우 주목할 점은, 이 <겨울왕국>은 ‘에로스(육체적 사랑)’와 ‘아가페(절대적·헌신적 사랑)’를 혼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자가 생전 처음 보는 공주에게 홀딱 반해 상대방의 동의도 없이 키스를 퍼붓고는 공주와 왕국을 구한다거나, 이성에 대한 사랑으로 갑자기 각성해 인류를 구원한다거나 하는 뻔한 동화나 히어로물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점이다(이성교제는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깨알같은 교훈은 덤이다).

<겨울왕국>에서는 이 아가페적 사랑을 ‘진정한 사랑의 행동’이라고 표현하고, 구체적으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사족이지만 ‘진정한 사랑’이라고만 해도 될 텐데, 굳이 ‘행동’을 덧붙인 이유는 사랑에 있어 ‘말’ 뿐이고 ‘행함’이 없는 이들을 꼬집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엘사의 얼음궁전에 찾아갔다가 심장에 치명적 상처를 입은 안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의 행동’이 필요하다는 ‘용한 트롤 의원(?)’의 진단에, 당사자들도, 주변 인물들도, 관객들도, 곧 ‘남주(남주인공)의 키스’ 장면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충격적(!) 반전이 벌어졌다. 안나가 위기에 처한 엘사를 보고는, 남주의 키스도 마다한 채 자기 목숨을 내던져 언니 엘사를 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나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 할 수 있다. 그러자 언니도 ‘진정한 사랑의 행동’을 깨닫고, 이에 동생도 왕국도 되살아나게 된다(그렇다! 이 영화에서 남주는 세상의 평화와는 전혀 무관한 ‘쩌리’였던 것이었던 것이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안나 공주, 눈사람 올라프, 마지막까지 남자주인공인지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크리스토프, 올라프의 소중한 콧대를 위해 사랑하는 당근을 양보한 스벤. ⓒ디즈니
▲(왼쪽부터 순서대로) 안나 공주, 눈사람 올라프, 마지막까지 남자주인공인지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크리스토프, 올라프의 소중한 콧대를 위해 사랑하는 당근을 양보한 스벤. ⓒ디즈니

나와 너와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사랑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안나가 엘사를 향해 보여준 사랑보다 훨씬 더 크고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끔찍한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한, ‘진정한 사랑의 행동’이요 아가페(에로스가 아닌!)다. 그것이 나와 너와 우리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다.

▲여름을 사랑하는 눈사람(?) 올라프.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들 속에서, 역설적으로 눈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다. ⓒ디즈니
▲여름을 사랑하는 눈사람(?) 올라프.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들 속에서, 역설적으로 눈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다. ⓒ디즈니

이제 우리가 그 사랑에 화답하여, 그 사랑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 사랑에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사랑의 빛과 온기로 서로를 비추고 녹여줘야만이, 어둡고 얼어붙은 세상이 밝아지고 녹아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상대 뿐 아니라 나까지 진정으로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고 침묵하면, 하나님께서는 돌들이라도 소리 지르게 하실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돌(트롤)들이, 심지어 눈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설파하지 않던가!

<겨울왕국>의 용한 의원 왈, “머리가 얼면 그나마 치유할 수 있지만, 심장이 얼면 치유하기 어렵다”. 지금 내 머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지 않은가?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지금 내 심장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겁지 않은가? 이는 더더욱 심각한 문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사랑의 행동’만 있다면 거뜬히 치유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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