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4월 13일
본문: 사무엘상 15:22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믿음으로 살아라!
[사무엘 상 15장 22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내가 믿지 못하므로…
홍기영 목사님의 책 [더, 더 가까이]에 아주 의미 있는 말씀 해석을 보게 됩니다. 사사 기드온이 불림을 받고 사역하기 전에 양털 실험을 하는 장면입니다. 사사기 6장 36~37절을 보세요.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참 재미있는 관점인데, 여기에서 기드온이 양털 실험을 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안 믿어져서 한 것이라는 말씀이죠. 믿어지지 않는데 믿어진다고 거짓말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기드온은 믿어지지 않으므로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이 과정이 하나님과의 신뢰를 쌓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그분을 믿기에 나에게 없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해 내 귀를 열어놓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를 하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믿음이 있는 것처럼 알았던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며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나타났던 표적 때문에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죠. 하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단지 믿음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하나님을 향해 순종의 귀를 열어놓지 않는 것이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행동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믿음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착각을 말씀드릴까요?
누군가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데 하나님께서 형제님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네요. 내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돈을 자매님에게 흘려보내라는 마음을 주시네요.”
진정한 믿음이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드러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또 다른 기적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적도 끝이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7장 7절에 보면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릿 시내가의 마실 물과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또한, 사르밧 과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엘리야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 순간을 통해 엘리야는 사역을 다시 시작하면서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가 의지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릅니다.
오대원 목사의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에 나오는 글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방법을 사용하여 자기 백성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지만, 그 어떤 방법도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어떤 방법도 다른 방법보다 더 영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지, 그분이 사용하시는 방법이나 원리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방법도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영구해 변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말씀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를 도울 만한 사람이 전혀 없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시려고, 까마귀를 통해 직접 그를 먹이셨다.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를 먹이셨다.
오대원 목사님이 글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에 나오는 글입니다.
‘믿음으로 살기’란, 매일 아침 일어났을 때, 숨 쉴 공기를 주시고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또 하루의 생명을 주셨음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려 그분의 뜻대로 쓰시도록 하며, 그분이 우리의 재정을 다스리시도록 내어 드린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나의 모습 전부와 내가 가진 전부를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쓰시도록 그분의 손에 맡겨 드린다는 뜻이다. 그것은 성령님이 다른 이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실 때 그대로 순종하여 후하게 주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것은 성령님이 돈을 저축해야 할 이유를 가르쳐 주시면 돈을 은행에 넣어 저축을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은행에서 돈을 꺼내 성령님이 택하시는 사람에게 준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놓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되,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시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게 사실 때 감사하고 겸손할 줄 안다는 뜻이다.
여기에 믿음으로 사는 데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이는 생활방식이자, 말씀을 통해 받는 매일의 훈련이다. 둘째는 후하고 관대한 정신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가난할지라도 기쁨으로 줄 수 있게 된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
사실 하나님은 제물에 관심이 없는 분이시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나님께 어떤 유익이 있겠습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나를 드린다.”라고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인가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꼭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에 관심이 없으신 분이니 헌금을 안 해도 되겠네요.”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나 같은 사람이 일을 안 해도 되겠네요.”
그런데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면,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속성을 인정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헌금으로 드리는 물질과 우리가 봉사하는 헌신에 대하여 예민하기 때문인가요?
반면에, 우리는 제사를 드리고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거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하시는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이 있습니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부족하고, 내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알지만,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마음을 받으시기에 우리는 매일 예배합니다. 하나님이 이 마음을 받으시기에 우리는 헌신의 자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의식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갑니다.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나의 인격이 하나님께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격은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실제적인 감각입니다. 그래서 인격 앞에서 우리는 절대로 무례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또 하나의 믿음 없음 ‘인정’에 굶주림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심각한 중독 증세 중의 하나는 ‘인정’에 목말라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사랑과 용납과 확인을 사람이나 관계에서 찾으려 하죠. 절대 채워지지 않는 관계는 잘못된 관계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처음 왕이었던 사울에게 인정에 대한 욕구가 생겼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사람 앞에 자신이 어떤 왕인지를 증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에게는 기다림이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죠. 그래서 전쟁에서 기다려야 할 것,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월권을 하게 됩니다.
그가 아무리 변명을 해도, 제사를 드리려고 재물을 구분해 놓았다 해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행동은 믿음이 아닌 죄일 뿐입니다.
누군가의 인정을 갈구하는 내면에는 바닥난 자존감이 존재합니다. 약해진 자존감은 누군가의 건설적인 비판도 견뎌내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인정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커지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긍정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피트 윌슨은 그의 책 [하나님인가, 세상인가]에서, 다른 사람의 사랑과 인정이 자신의 깊은 욕구를 채워 주리라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세 가지 운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1. 평범하게 될 운명.
인정에 중독된 사람들은 늘 대중을 따르기 때문에 평범한 삶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과 대중을 따르는 삶이 같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대중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려면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고 인기 없는 의견을 제시하고 흐름을 역행하고 사람들을 화나게 해야 할 때도 있죠. 다른 사람의 인정에 항상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피터 윌슨의 이야기입니다.
대학생 시절 겨우 스물한 살이었던 때 교회를 개척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그는 청년부 사역을 내려놓고 교회에 알렸습니다. 교회에서 밤늦게 일을 하던 중 우연히 교회 도서관을 지나가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두 집사님의 대화를 듣게 됩니다.
“그 애송이가 정말 자기가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설교라니 가당치도 않아요. 스물한 살짜리가 목사라고 따를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그 소리를 듣고 그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스스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눈물을 참고 기도하는데 그 날 밤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셨다. 내 인생의 목표는 모두에게서 허락과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고 느끼는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만일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면,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평범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평범함을 극복한다는 것은 ‘뛰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탈진하게 될 운명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미지 관리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들을 생각하며 쏟아 붓는 에너지는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일에 헌신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목적에 맞게 살아가느냐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착한 남자 콤플렉스’는 목회자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가만히 내면을 돌아보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받고 싶은 욕구인지 모릅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라서 라기보다는 비난받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 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후 격무에 시달립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죠.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좋은 리더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장인 이드로가 좋은 제안을 합니다.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세워 사람들을 관리하도록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인정받음으로 존재를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코 이것이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이기적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게 하지 못하는 것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일을 위탁하는 것, 누군가를 믿으며 맡길 수 있는 것이 필요하죠.
3. 실망과 거절을 경험할 운명
인정에 중독된 사람은 창조주에게서 자신의 가치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선택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어쩌면 자포자기한 상태일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은 아닐까요?
문제는 어떤 인간도 당신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만나는 인간 중 완전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으며, 나와 마찬가지인 또 하나의 불완전한 죄인을 만날 뿐입니다. 아니, 당신을 믿고 실망하게 하지 않았던 그 사람도 결국은 죽게 될 것이며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슬픔과 거절을 자초하게 될 뿐이죠.
‘권태기 부부의 일상’이라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 우리 부부는 좋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한 잔하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유대를 돈독히 합니다.
아내는 화요일에 가고, 저는 금요일 날 가죠.
우리는 또 각자 딴 침대에서 잡니다.
아내는 여기 온타리오(캐나다)에서, 자는 투산(미국 Arizona주 휴양지)에서. . .
나는 어디든지 아내를 데리고 갑니다.
그러나 아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잘도 찾아냅니다.
결혼기념일에 나는 아내에게 어디 가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아내는 “오랫동안 안 가본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부엌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죠.
우리는 항상 손을 잡고 다닙니다.
내가 그 손을 놓으면 아내는 즉시 쇼핑을 합니다.
아내가 지나가는 쓰레기차를 뒤따라 달려가며 소리쳤습니다.
“제가 너무 늦었나요?”
그러자 쓰레기차 운전기사는 말했어요.
“아뇨, 올라타세요!”
잊지 마세요. 결혼은 이혼의 첫 번째 원인입니다.
통계적으로 이혼한 사람의 100% 결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약혼할 때 끼는 반지는?
engagement ring
결혼할 때 끼는 반지는?
wedding ring
결혼하고 계속 끼는 반지는?
suffe-ring
그렇다면 어느 날 그대의 여친이 “나 힐링이 필요해!”
하고 그대에게 갑자기 울부짖는다면 그대는 어떤 액션을 취할 것인가?
즉시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그녀에게 필요한 명품 힐(heel)과 링(ring)을 사준다.
이것이 현대의 힐링이다.
해결책이 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한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를 봅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서 만족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하며 늘 쫓기는 인생을 살다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사람의 이야기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목마른 인생을 살던 한 여인의 달라진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성경에는 어떤 기록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 여인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던 시간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다는 것. 아마도 사람들을 피해 다녔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든지 경멸의 대상이었을 것 같습니다. 동네 여인들과 어울릴 수 없는.
그래서 이 여인은 더 많은 남자에게서 무언가 인정과 용납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라고 하셨을 때, 여인의 대답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7-18)
아마도 이 여인에게 무슨 상처와 사정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남자들에게서 만족을 얻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다섯 명의 전 남편이라니요. 아마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여인이 남자를 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버림받은 여인 혹은 남편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찌 되었건, 이 여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상처가 있었을 것이고, 지금의 남자에게서 같은 사랑과 용납을 찾고 있지만, 역시 목마른 상태였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인정중독에 걸린 여인의 모습.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여인의 모든 부끄러운 과거를 알고 계신 예수님이 말입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을 만난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면 될 줄 알았지만, 누군가에게서 만족을 찾으려 했지만 절대로 채워지지 않던 것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모두 알고 계신 그분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수를 주시리라는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 기쁨이 찾아온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그분의 인정으로 이 여인에게 찾아온 만족이었습니다.
어윈 맥마너스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 스스로 사랑이 서툴다는 사실, 사랑을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여러 관계를 거치게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당신 마음이 보내고 있는 신호들, 즉 당신이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놓칠지도 모른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인정할 때, 우리를 용납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채워집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확신을 줍니다.
오늘 한 가지 묵상으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 베드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반석이라 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반석처럼 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반석이 아닌 자갈 같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끊임없이 주님 앞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나서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물 위를 걸어보았지만, 곧 가라앉고 말았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마당에도 예수님의 우편에 앉아 권력을 휘두를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남들은 다 예수님을 모른다 해도 자신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떵떵 치던 사람.
그런데 그날 밤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닭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얼마나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알았습니다. 그 새벽 끌려가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를 원망하는 눈길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신하고 너무나 슬퍼하는 베드로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냥 자신을 야단쳐 주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자신을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시던 예수님의 눈길.
베드로의 삶을 바꿔놓은 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렇게 쉽게 무너진 자신을 끝까지 바라보시던 눈빛이었고, 자갈 같은 인생을 사는 자신을 끝까지 ‘반석’이라고 믿어 주셨던 그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사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아닌, 당신을 믿어주시는 주님의 믿음으로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을 믿으시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신 31:8)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렘 31:3)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