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5-27)
<등단 후 멘트>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좌우에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인사하겠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주인으로 오셔서 이 시간 부활의 기쁨이, 은혜가, 부활의 생명이 충만하게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요, 기쁨이요, 모든 것이 되십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나아가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건 절망밖에는 없지만 예수님을 바라볼 때 꿈과 희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찬양하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복음성가 121장)
오늘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에 진도 해상에서 발생한 여객선 침몰 사건을 위하여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도록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사건현장에서 끝까지 한 생명이라도 더 구조 되도록 기도해주시고 특별히 사고로 인하여 충격에 빠져있을 가족들이 마음에 위로를 받고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조된 학생들이, 그리고 승선자들이 마음의 안정과 육체적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주님을 찬양하오니 주님을 경배하오니 왕이신 예수여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감사 찬송 존귀 영광을 우리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의 아침에 저희들이 마음을 모아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립니다. 이 시간의 주인은 우리 주님 한분뿐이십니다. 주님 한분께서 영광 받으시고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채워주옵소서. 우리는 이렇게 기쁨과 감격 속에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며칠째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고통가운데 자녀들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이 시간 위로하여 주시고 그 마음에 평안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속히 구조하는 모든 일들이 마무리되게 하여 주셔서 갇혀 있는 모든 승선자들을 구출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안정을 찾고 주님이여 다시금 꿈과 희망을 갖고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주님 은혜 내려 주옵소서. 수많은 모든 분들에게 주님 함께하시고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설교말씀>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7절을 중심으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기적이요, 은혜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약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것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닌 것을 증명해보려고 노력하고 또 여러 가지 자료를 찾고 했지만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께서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생명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세 번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한 번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한 번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또 한 번은 오늘 기록된 말씀인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를 주님이 살리셨습니다. 오늘 이 나사로의 죽음에서 살아난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인생에게 다가오는 죽음
첫째로 인생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에 예루살렘 그 남동쪽에 위치한 베다니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 베다니에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던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그 집의 가장으로 그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있었고 그 다음 그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가실 때면 꼭 이 집에 들러서 머무시고 쉬시면서 말씀도 전하시고 식사도 함께 나누셨어요. 예수님께서 며칠 후에 오신다하면 온 가족이 흥분해서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안팎을 청소하고 또 음식 솜씨가 좋은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내고,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면 마리아는 말씀듣기를 사모해서 늘 맨 앞자리에 앉아서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예수님이 혼자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왔기 때문에 한번 예수님이 다녀가시면 큰 잔치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또 많은 수고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수고를 조금도 수고라 생각하지 않고 큰 기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오라버니 나사로가 몸에 병이 들었습니다. 약을 먹어도, 의사가 와서 진찰해도 병에 차도가 없이 점점 병이 깊어져 갔습니다. 사람들이 죽을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가 사람들을 수소문해서 사람을 보냅니다. “빨리 예수님 오셔서 우리 오라버니를 좀 살려 주세요. 다 죽게 됐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예수님이 그 소식을 듣고도 금방 오시지 아니하시고 좀 지체하시다 오셨어요. 와보니 이미 그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여러분, 죽음이라는 것은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게 태어나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제가 잘 아는 성도님의 아버님은 굉장히 건강하세요. 감기도 별로 앓으신 적이 없고 어디 몸이 아픈 데가 없이 늘 건강하시고 활동을 많이 하신 분인데 어느 날 아침에 방에 기척이 없어서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보니 주무시던 채로 심장마비로 천국 가신 거예요. 온 집안이 크게 놀라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아버님이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나. 물론 천국에 가셨지만 갑자기 아버님이 돌아가시니까 그 가정에 슬픔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전도서 3장 1절로 2절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는 곳에 죽음도 늘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우리에게 죽음이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루를 살면서 나의 마지막 날처럼 최선을 다하고 의미 있고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돌보며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학생들이 수학여행 간다고 들떠서 배를 탔는데 그 배가 침몰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배가 침몰할 줄 알았으면 아무도 안 탔겠죠. 사람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의의 사고를 당하든 또 어떠한 내게 병이 다가와서 세상을 떠나든 또 장수의 복을 누려서 오래 살고 세상을 떠나든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예외 없이 다가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사로의 집에 왔을 때 나흘이 지났다고 성경은 말씀하는데요, 요한복음 11장 17절에,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장례를 치루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음 앞에 절망을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보고 슬픔에 잠겨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1절에,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병자를 살리신다는 것을 믿었지만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믿음이 없었어요.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살았을 터인데.”여러분,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보면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으면 끝이라 생각하고 목숨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우리가 목숨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왜?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루를 살아도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게, 그리고 우리가 받은 이 사랑을 우리 소외된 이웃을 향해서 나눠주고 베풀어 주는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가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버드대학교의 신경외과 의사로써 또 세계적인 뇌의학 권위자이자 신경외과 전문의의 이븐 알레산더 교수가 있습니다. 이분이 박테리아성 뇌막염. 보통 바이러스성 뇌막염인데 특별한 희귀질환입니다. 박테리아성 뇌막염으로 뇌사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조절하는 뇌 한 부분이 완전히 죽었어요. 그래서 의학적으로 뇌사상태의 판단을 내리고 호흡기에 의존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들이 모여서 가족과 함께 이걸 언제 뗄 것인가 떼는 순간 장례식을 치러야 하니까 이렇게 두어도 이미 뇌사상태이기 때문에 의학적으로는 이미 사망판정이 내린 것입니다. 결정만 하면 이걸 호흡기를 떼어서 장례식을 치룰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의논하고 있는데 이분이 갑자기 눈을 뜨고 깨어났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의학계에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가 깨어나서 말하기를 “뇌가 꺼져도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그가 흑암 가운데 빛을 발견하고 천국에 가서 천국을 보고 천사를 만난 경험을 그가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으로 출간되어서 출간되자마다 아마존 종합 1위, 뉴욕타임즈 1위, 퍼블리셔스위클리 20주 연속 1위를 차지한 책이 되었고 전 세계 30개국 이상에서 책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있었다. 삶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사후세계가 있다. 천국을 보기 전에는 천국, 하나님, 영혼에 관한 그 어떤 이야기도 의학적인 지식과 양립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영혼이 실재하며 죽음이란 다만 다른 상태로의 전이 과정에 불과하다고 믿게 되었다. 영성과 과학은 함께 갈 수밖에 없다”그렇습니다. 분명히 죽음 이후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가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오늘이라고 하는 이때에 정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생명의 근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둘째로 생명의 근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할렐루야. 믿기만 하면 우리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 요절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나왔다가 할지라도 믿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되고 우리가 지금 우리의 호흡이 멈춰도 우리는 저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 21절은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아담으로부터 왔지요)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도다 할렐루야. 이 부활의 아침에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부활절이 그저 매년 다가오는 교회 절기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부활절은 예수님의 실제로 살아나신 날이고 그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부활의 생명과 은혜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시는 날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1년 365일 날마다 부활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연구한 필립 샤프(Philip Schaff) 교수는 예수님의 위대함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나사렛 예수는 돈 한 푼 없이 무기 하나 없이 저 알렉산더나 시저, 모하메드, 그리고 나폴레옹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정복했다. 학문이나 지식 없이 그 어떤 철인이나 학자들을 총동원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빛을 땅과 하늘에 비추었다. 그 어떤 학파로부터 배운 바 유창한 언변 없이도 전무후무한 생명의 언어를 말씀하셨으며, 그 어떤 웅변가나 시인도 감히 끼칠 수 없는 지대한 영향력을 남기셨다. 단 한 줄의 글도 쓰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오게 하셨고, 고대와 현대를 통틀어 그 어떤 위인들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설교와 연설과 토론과 학술 연구와 예술 작품과 찬양 음악을 위한 다양한 주제들을 제공하셨다.”
할렐루야. 이 시간 이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과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이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우리 삶 가운데 죽음이 변하여 영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숨어있었습니다. 그들이 숨어 있다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고 그 후에 오순절 날 성령 충만을 받고 난 후에 부활의 예수님을 세상 만방에 전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의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의 그 귀한 은혜를 전하다가 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도 나는 다시 살아서 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 가운데 있습니까? 어떤 절망 가운데 있습니까? 이 시간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외로움과 슬픔과 좌절과 낙심 속에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주님을 만나시고 새로운 꿈과 희망을 얻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라버니를 잃고 슬피 울고 있는 마르다, 마리아를 보면서 예수님 마음도 슬프셨어요. 요한복음 11장 33절을 보니까,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은요, 우리가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있을 때 우리 옆에 와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시고 우리가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하시고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같이 눈물을 흘려주시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삶 가운데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복음성가 24장)
내 눈물 씻어 주시는 예수 복된 예수 할렐루야. 내 눈물을 씻어주시는 예수 복된 예수. 얼마나 주님 은혜에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경험을 당하셨습니다. 배고플 때에 그 굶주림을 체험하셔서 우리와 똑같이 굶주림의 고통을 아시고 또 슬픔 때 같이 슬퍼하심으로 우리의 슬픔을 아시고 외로울 때 우리와 똑같이 외로움을 체험하셔서 우리의 외로움을 이해하시고 위로하시고 돌보신 우리 주님이 되십니다. 우리 아픔을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에 그 옆에 와 우리를 품으시고 위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발걸음을 옮겨 무덤 앞에 서신 후에 명령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 보니까 돌을 옮겨 놓으라“돌을 옮겨 놓으라”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나사로의 시체가 있는데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굴에 시체를 넣고 그 무덤을 돌로 막았는데 때로는 바위를 파내서 그 안에 시체를 넣고 돌을 막아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을 듣자 마르다가 말합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에,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 이미 죽었어요. 사흘이 지났어요. 시체가 썩어가고 있어요. 냄새가 나요. 이 돌을 옮기면 썩은 냄새밖에 나지 않을 터인데 왜 돌을 옮기라 하십니까?” 아직 그 마음에 믿음이 없어요. 부활에 대한 꿈과 희망이 없습니다. 눈으로 보는 현실만 바라봅니다. 사람들이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에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다가는 늘 우리는 절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고 우리를 모든 절망에서 건져내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0절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왜 나를 믿지 아니하고 절망의 현실만 이야기 하냐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3.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오늘 크게 셋째로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왜 내말을 믿고 너는 그대로 행하지 않느냐?”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기적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데이브 브라우닝(Dave Browning) 목사님은 그의 책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에서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보여 드리는 마음과 태도다. 하나님은 하나님 뜻에 따라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한다.”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르다가 책망을 들은 후에 마리아와 함께 돌을 옮겨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1절을 보면, 돌을 옮겨 놓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려면 믿음과 순종으로 돌을 옮겨야 합니다.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이기 때문에 이 돌을 옮기는데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아마 두 자매가 있는 힘을 다해 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돌을 미는 순간 무엇을 미는 것이냐? 자기 마음에 닫혀있는 그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무엇이 닫혀 있느냐? 불신앙으로 닫혀 있어요.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불신앙의 돌을 밀어내야 되는 것입니다. 의심의 돌을 그것이 자기의 마음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의 돌을 밀어내야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고 ‘할 수 없다’, ‘안 된다’, ‘못 한다’, ‘이미 끝냈다’고 하는 부정적인 사고의 돌을 굴려 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판단만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남의 이야기를 절대 듣지 않는 이 고집불통의 돌을 옮겨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돌을 옮겨 놓지 않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마 마리아가, 마르다가 “예수님 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까? 죽어있는데요. 시체 냄새밖에 날게 없는데요. 돌을 옮겨 놓아도 할 일도 없는데 왜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까? 무슨 명령을 하시는 거예요?”라고 했더라면 아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들은 이 예수님의 돌을 옮겨놓으라는 명령을 듣고 주님이 옮겨 놓으라고 하시니 무조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믿음으로 옮깁니다. 할렐루야.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믿음이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돌을 옮겨 놨을 때, 하나님의 기적이 그들에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서 아이를 얻었는데 칠십 오세 때 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십 오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서 ‘난 할 수 없다. 이제 끝났다.’하고 할 그때에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자식을 주셨는데 그가 마음의 불신앙의 돌을 굴려냈기 때문에, 믿음으로 할 수 없다는 돌을 굴려냈기 때문에 그에게 백세에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9절로 21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할렐루야! 돌을 옮겨놓고 나니까 그 예수님이 명령하십니다. 11장 43절에,
나사로야 나오라 여러분, 예수님의 이 절대 희망의 명령이, 이 음성이 죽은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오늘 그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절망은 물러갈지어다! 염려, 근심, 걱정은 떠나갈지어다! 부정적인 생각은 물러가라!” 주님이 명령하실 때 우리가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처럼 우리 삶 가운데 놀라운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명령하실 때에 죽은 나사로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4절을 보세요. 죽은 자가(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나사로가 베를 감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주춤거리고 나오니까 “이제 저 베를 풀어서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이 광경입니까? 얼마나 축복받은 장면입니까? 아마 마르다 마리아가 막 기절을 하기 직전일 거예요. “이야, 우리 오라버니가 살았네.” 주님이 지금도 그와 같은 기적을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살아났는데 온 몸을 베로 칭칭 감고 있어서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풀어놓아 자유롭게 하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아직 몸에 무언가를 두르고 살아요. 왜? 오랫동안 세상에서 살던 습관이 있다 보니까 나사로의 몸을 베로 감은 것처럼 그 온 마음이 과거의 상처로 칭칭 감겨있어요. 과거의 상처로. 늘 그 상처 때문에 좌절하고 낙심하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상처로 인해서 자기가 이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늘 상처에 묶여 있어요. 상처에서 자유함을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은 다음 그 상처로 동인 베를 풀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과 저주에 칭칭 감겨있어요. 늘 물질의 어려움이 있어서 되는 일이 없고 그래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베를 풀어버리고 근면과 성실로 세상에 나아가 최선을 다하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로 감겨서 좌절하고 나니까 자포자기 하는 거예요.
제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으로 섬길 때 전국홈리스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는데요, 그 당시 그 홈리스라고 하는 것은 노숙자하고 좀 다릅니다. 노숙자는 아예 역 근처에 나와서 그냥 거기서 사는 분들이고, 홈리스는 집을 나와서 일용직을 얻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 이분들은 어떻게 사느냐? 매일 밤, 쪽방이라고 하는 데서 잠을 자는데 하룻밤에 5천원입니다. 요즘 캡슐방이란게 나왔어요. 요렇게 몸만 들어가서 자는데 하룻밤에 3000원입니다. 나이 많은 분이 장기투숙하면 2000원에 해줍니다. 여러분, 우리 서울에 그렇게 어렵게 사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가 사랑으로 그들을 돌봐야 됩니다. 이렇게 집을 나와서 하루하루 일용직으로 살아가는 사람 숫자가 50만 명이 넘는다. 그런데 최근에 제가 그 사역을 하는 사람하고 다시 만나서 물어보니까 “목사님, 지금 100만 가까이 봅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정부에서도 제대로 통계를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전국의 이제 홈리스를 돕기 위한 그 센터가 그 단체가 백 두 곳 단체가 있는데 지금 우리 사회가 잘 사는 사람은 너무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너무 못 살아서 이제 큰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우리가 받은 축복을 먼저 나누어야 합니다.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작년에 서울시와 함께 18,000 가정을 이렇게 Boxing Day로 나눠서 도움을 줬던 일을 기억하는데 이것이 일 년 내내 계속 되어져야 되고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이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매여 있는 이 저주와 가난의 이 홈리스의 베에서 풀려 놓아 자유케 되는 은혜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여, 그들을 묶고 있는 자포자기, 절망, 가난과 저주를 이 시간 풀어주시옵소서.” 근데 진짜로 문제는 뭐냐 하면 중독에 감겨 있는 사람입니다. 알코올중독, 도박중독, 지금 더 심각한 문제가 또 하나 나왔어요. 인터넷 게임 중독, 최근에 그 게임 중독에 빠진 아빠가 두 살 난 애를 죽여 버렸잖아요. 완전히 정신이 그 흑암의 세력에 잡혀버린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이 시간 풀어놔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묶고 있는 이와 같은 모든 결박에서 이 시간 자유함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을 묶고 있는 모든 결박을 풀어놓으십시오. 상처의 결박을 풀어놓으십시오. 미움과 원망과 불평과 분노의 결박을 풀어놓으십시오. 왜 그렇게 우리가 미워하고 다투며 살아야 됩니까?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기도 너무 바쁘고 짧은 인생을 사는데 우리가 미워하고 다투고 물어뜯고. 하여간 저는 국회 청문회를 이렇게 볼 때마다 ‘또 시작했구나.’ 그저 물어뜯고 그 사람의 잘못된 것만 얘기하니까 능력도 평가하지 못하고 중도하차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하나님 아버지. 물론 우리가 그런 흠을 잡히지 않도록 살아야 되는데 우리가 너무나 남의 약점만 들춰내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줄로 압니다. 제가 한 분의 간증으로 오늘 말씀 마칩니다. 최무진이라고 하는 청년인데요, 게임 중독에 빠져서 완전히 폐인이 됐다가 벗어난 사람이에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 이혼하시구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니까 본인이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을까 생각을 하다가 게임에 몰입하면서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거예요. 학교도 빠지고 PC 방에서 게임만 하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얼마나 게임 중독에 빠졌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이제 아버지가 나 게임하는 거 막지 않고 귀찮게 안 할 거니까 괜찮다.’고 생각까지 했어요.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그러고 나중에 폭력성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이 게임에 깊이 빠지면 사람이 과격해져요. 폭력적이 돼요.
외할아버님이 “너 자야 되지 않니?” 그랬는데 막 분노해서 그 말 듣자마자 모든 연필을 다 부서뜨려버리고, 외할머니가 “밥 먹어라.” 그 말 밖에 안했는데 막 분노가 치밀어 올라갖고 부엌에 들어가서 칼을 꺼내들려고 하고. 중학생, 고등학생 때까지 이런 폐인된 생활을 하고 삽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어요.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아서 쓰러져버렸습니다. 왜? 게임에 중독이 되어서. 그때에 그가 알던 형이 그를 우리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부활의 영이 임했습니다. 중독으로 칭칭 감겼던 베가 다 풀어졌습니다. 전국 꼴찌였던 이 학생이 전교 12등까지 오르고 1등급이 되어서 2년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입학하고 청소년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다음 지금은 각 학교를 다니면서 게임 중독에 처한 애들을 치료하는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당시 저에게 게임을 끊는다는 것은 생명을 끊는 것과 같았습니다. 죽음이 두렵다기보다는 게임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게임을 단번에 끊을 수 있었던 기적은 바로 ‘부활의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부활의 복음의 능력만이 이 시대 중독자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치유의 은혜가 일어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이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히브리서 13장 8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 예수님이 여러분을 죽음에서 살려줄 것입니다. 여러분을 매고 있는 모든 결박에서 여러분을 풀어놓아 자유케 하시며 주님 안에서 위대한 승리자로 살아가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큰 은혜를 체험하고 우리 주위의 소외된 이웃을 돌보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부활의 날에 “나사로야 나오라. 풀어놓아 자유케 하라. 다니게 하라.”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면 우리 마음을 닫고 있는 돌이 어떠한 돌인지, 이 시간 돌을 굴려내고 묶여있는 것을 풀어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주님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2014년 4월 20일 주일설교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