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행 인쇄공에서 중국 최초의 목사로 살다 간 양발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광저우 선교 200년] (3) “나는 바울처럼 살고 싶다”

▲중국 최초의 목회자 양발(왼쪽)과 최초의 세례자 채고.
▲중국 최초의 목회자 양발(왼쪽)과 최초의 세례자 채고.

19세기 초 중국에서 성경을 번역해서 출판하기까지 여러 사람의 헌신이 있었다.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의 주도로 번역이 진행되었지만, 중국인들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성경 출판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전도되었다. 중국 최초의 목사인 양발과 최초의 세례자인 채고는 몰래 성경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만난 이들이었다.

청나라 유일의 대외 통상지였던 13행에는 외국 상관 구역과 중국 상점 거리가 같이 있었다. 외국 상관구에는 중국인들이 들어오지 못했지만, 중국 상점가에는 중국인과 외국인이 같이 활보했다. 중국 상점가로 유명했던 거리는 정원가(靖远街)와 동문가(同文街)였다. 이 거리에는 사설 은행을 비롯해 화실, 모자가게, 포목점, 잡화점, 약국 등 소매점과 수입 외제 일용품 가게와 선원들의 술집이 있어 늘 사람들로 붐볐다. 외국 상관구는 한 데 모여 있었지만, 중국 상점가는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다.

1810년 중국 상점가에 있는 인쇄소에서 귀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모리슨 선교사가 채고의 형이 운영하던 인쇄소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쇄술을 배우고 있던 21살의 양발과 만난 것이다.

양발(梁发, 1789~1855)은 모리슨 선교사의 오랜 동역자였다. 그는 광둥성 조경부 고명현의 농촌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학당에서 글을 배웠다. 15세 때인 1804년, 일을 찾아 광저우로 왔다가 13행 인쇄소에 일하게 되었다. 그는 붓글씨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양발은 모리슨 선교사의 번역물을 수정해 다시 목판에 옮겨 쓴 다음 글자를 새겨 인쇄했다. 1810년 사도행전, 1812년 누가복음 및 바울 서신 등의 초기 조판과 인쇄는 모두 양발의 손을 거쳤다.

모리슨 선교사에게서 중국인 최초로 기독교를 접한 사람은 채고(蔡高, 1788~1818)였다. 채고는 성경 역본을 인쇄했던 13행 인쇄소 사장의 동생이었다. 채고는 형의 인쇄소에서 일하며 모리슨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 교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모리슨 선교사의 중국어가 서툴러, 이해하지 못했다. 3년 후 모리슨 선교사가 번역한 신약 원고를 수정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에 대한 공로를 깨달았다. 그는 모리슨 선교사에게서 2년간 훈련받은 후 1814년 마카오 산기슭에 있는 동굴에서 중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밀네 목사와 함께 말라카 선교기지 건립과 구약 번역을 도왔다. 그곳에 인쇄소를 설립해 양발을 인쇄공으로 데려갔다. 그 후 양발이 세례를 받도록 도와주고 1818년에 사망했다.

▲13행의 중국 상점 거리인 정원가. 각종 상점들이 밀집해 있어서 외국인·중국인들로 늘 붐볐다.
▲13행의 중국 상점 거리인 정원가. 각종 상점들이 밀집해 있어서 외국인·중국인들로 늘 붐볐다.

성경번역 출판은 고난의 연속

모리슨 선교사가 시작한 성경 번역과 출판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신약 출간을 1년 앞둔 1812년, 중국 정부는 “지금부터 서양인이 비밀리에 서적을 인쇄하거나, 선교 기관을 설립하거나, 선교를 빙자하여 일반 백성을 미혹시키는 행위를 하거나, 중국인이 서양인들에게 종교 전도를 위탁받거나, 세례로 이름을 바꾸는 등 치안을 교란케 하는 자는 엄중히 다스려 극형에 처한다. 서양 종교를 신고하지 않거나 반대하지 않는 자는 추방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기독교 선교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 명령은 암암리에 진행되던 성경 번역 일을 더 위축시켰다. 광저우에서 성경 인쇄는 어렵게 됐다. 마카오에서도 천주교도의 감시로 용이치 않았다.

▲밀네 목사는 1813년에 중국에 와서 구약 번역과 말라카 기지 설립을 도왔다.
▲밀네 목사는 1813년에 중국에 와서 구약 번역과 말라카 기지 설립을 도왔다.

1813년 런던회는 모리슨의 일을 돕기 위해 밀네(William Milne, 1785~1822) 목사를 파송했다. 밀네 목사는 마카오에 도착하자마자 천주교도의 신고로 추방 명령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모리슨 선교사는 밀네 목사와 함께 새로운 사역 기지를 찾아야 했다. 이는 인도 갠지스강 동쪽 동남아시아를 선교기지로 삼는, 이른바 울트라 갠지스 미션(Ultra Ganges Mission) 정책을 런던선교회와 협의해서 진행했다. 광저우와 마카오가 중국 선교 거점으로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선교 활동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밀네 목사의 답사를 거쳐 선교기지를 말레이시아 말라카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1823년 성경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뿐만 아니라 1815년 영화서원(英华书院)을 세워, 중국인을 상대로 정규 성경교육을 실시했다. 영국 통치 지역에서 중국인을 상대로 정규 성경 교육을 실시하는 곳은 영화서원이 유일했다. 이 학교는 1차 아편전쟁 후인 1843년 홍콩으로 이전했다. 또 초국적·초교파적으로 선교사들이 중국어 학습과 중국 선교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1815년 말라카 선교기지 설립시 양발은 채고의 권유에 의해 인쇄공으로 따라갔으며, 27세 때인 1816년 11월 밀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양발은 밀네 목사와 같이 일하면서 그의 언행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본래 그는 불교 신자였다. 이후 7년간 양발은 밀네 목사를 도와, 최초의 중문 정기간행물인 <찰세속매월통기전(察世俗每月统记传)>을 출판해 책으로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 1819년 4월 양발은 고향으로 돌아와 리씨(黎氏)와 결혼했으나, 전도용 책을 배포하다 체포돼 죽도록 매를 맞고 투옥되었다. 그는 모리슨 선교사의 도움으로 석방된 후 말라카로 갔다. 다음 해에 부인에게 직접 세례를 주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말라카 영화서원에서 2년간 정식 교육을 받았다.

1822년 밀네 목사가 결핵으로 순교하자 다시 광저우로 와서 모리슨 선교사를 도왔다. 1823년 그는 모리슨 선교사와 밀네 목사가 번역한 최초 중문 완역 성경을 출판했다. 그해 마카오에서 양발은 모리슨 선교사로부터 중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에 소속되었다.

▲말라카에 세운 영화서원은 초교파 초국적 중국어 교육과 선교 준비를 도왔다.
▲말라카에 세운 영화서원은 초교파 초국적 중국어 교육과 선교 준비를 도왔다.

학선자, ‘선을 배우는 사람’

13행에서 인쇄공으로 일했던 양발은 성경 번역본을 직접 필사하는 과정에서 회심하고, 전문적인 훈련과 전도 활동 등을 통해 사역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양발은 1828년 친구와 함께 고향으로 가서 최초로 중국 내지에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자기 집을 기독교인 모임 장소로 만들었다. 그의 고향집은 광저우에서 멀리 떨어진 조경부에 있었다. 당시 선교가 금지되고 모든 기독교 관련 일들이 엄중한 감시를 받는 상황 속에, 양발의 이런 시도는 과감한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기독교 신앙·중문·영문·과학·문화 지식 등을 가르쳤으나, 청나라 정부에 의해 곧 폐쇄되었다. 현재 그곳은 양발의 증손녀와 지방정부가 협력해 양발기념관으로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그는 12종에 달하는 소책자 전도서도 저술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기독교 문답서도 있었고, 비기독교인 친구들이 질문하는 문제들에 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양발은 학식이 풍부하진 않았지만, 성도가 된 후 책을 쓰는 은사를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스스로를 ‘선을 배우는 사람(学善者)’이라 칭하고, 이를 자신이 만든 모든 책의 저자 이름으로 사용했다.

▲1832년 양발이 쓴 은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1832년 양발이 쓴 은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1832년에 출간한 <권세양언>이다. 37쪽으로 된 이 소책자는 중국인이 최초로 쓴 중문 전도서였다. 당시 광저우에 과거시험을 보러오는 선비들을 대상으로 쓰였으며, 200권을 인쇄해 배포했다. 당시에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식자층이 모이는 곳을 찾았을 것이고, 과거시험장이 가장 적절한 전도 장소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발은 수감돼 30대의 매를 맞았다. 그의 노력으로 몇몇 선비들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동역자가 되었다. 과거에 몇 차례 낙방했던 홍수전은 이 <권세양언>을 읽고 배상제회(拜上帝会)을 창립해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의 난은 전국을 뒤흔들어 청 왕조가 무너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권세양언>은 중국 근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책이 되었다. 후에도 양발은 수많은 성경 요약본과 기독교 신앙서적 및 소책자를 편찬했다.

19세기 초 선교가 금지된 중국에서 기독교인이 되는 일은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중국인이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기독교 서적을 인쇄하고 배포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1834년 당국에 의해 양발 주변의 동료들이 체포돼 그 중 한 사람은 흠씬 두들겨 맞았고, 다른 한 사람은 살해되었다. 양발은 다시 말라카와 싱가포르까지 도망을 갔다. 그는 합법적인 선교의 문이 열리기 전까지 늘 관청의 리스트에 올라있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투옥되고 매를 맞고 풀려나 외국으로 추방당해야 했고, 다시 돌아오면 다른 일로 투옥당하는 시련이 반복됐지만, 시련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은 밀네와 양발이 만든 최초의 중문 정기 간행물이었다.
▲은 밀네와 양발이 만든 최초의 중문 정기 간행물이었다.

그의 본성은 원래 온순했다고 한다. 여러 박해를 받았음에도, 양발은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바울, 욥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들을 본받고 싶다”고 고백했다. 모리슨 선교사의 주선으로 1830년 중국에 온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 브리즈먼(E. C. Bridgman, 1801~1861)은 양발을 만난 뒤 “양발은 예수님과 같았다. 그의 기도문은 형식적이지 않고 일반 지식인들과 말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듣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생각하도록 했다”고 전했다. 브리즈먼은 후에 양발의 아들 양진덕의 멘토가 되었다.
 
말년을 보낸 광저우의 용도미

아편전쟁 이후 1855년 죽기 전까지 양발은 용도미(龙导尾)에서 말년을 보냈다. 용도미는 광저우 하남(河南)에 있는 동네이다. 하남은 주강을 사이에 두고 13행과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13행에서 수출되는 차와 도자기 등을 가공하는 공장들이 모여 있던 곳이며,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광저우의 다른 지역에 비해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살았지만, 차차 13행에서 돈을 번 거상 오병감(吳秉鑒) 등이 그들의 호화저택을 하남에 지으면서 주변도 변해갔다. 현재 광저우 지도에서 용도미를 찾으면 없다. 행정구역상 이미 사라진 이름이다. 지금의 해주구 보강로(宝岗路) 일대를 말한다.

▲양발이 말년을 보낸 광저우의 용도미 골목에는 옛 광둥성의 정취가 남아 있다.
▲양발이 말년을 보낸 광저우의 용도미 골목에는 옛 광둥성의 정취가 남아 있다.

그동안 많은 변모를 한 다른 곳에 비해, 용도미는 시간이 더디게 간 듯 옛 서민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좁고 꼬불거리는 골목을 따라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여자들이 동네 우물에서 물을 퍼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곳 어딘가에서 아들 내외와 같이 말년을 보냈을 양발 목사를 떠올려 본다. 아편전쟁 후 합법적인 선교는 가능해졌지만, 광저우 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더 반감을 가지게 됐고 하남은 그 저항이 더욱 거셌던 곳이다. 선교가 개방되면서 광저우 다른 지역에는 교회가 세워지고 미션 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하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양발은 그런 사람들 한가운데 살면서 복음을 전하다 갔다.

1855년 양발은 66세로 이곳 용도미에서 순교했고, 하남 인근 봉황구(凤凰冈)에 묻혔다. 그러다 기독교 대학인 영남대학이 1900년대 초 하남으로 옮겨오면서 대학 내 기독교 묘지가 생겼다. 이 기독교 공동묘원 이름이 교회산이며, 양발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했다. 영남대 중국인 초대 학장이었던 종영광 교수는 직접 양발의 묘를 이장한 후 “나는 죽어 양발 목사와 매일 같이 있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종 교수는 죽은 후 그의 뜻대로 양발의 옆에 묻혀 ‘교회산의 쌍묘’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묘원은 현재 대학 내에 남아있지만, 양발의 묘는 문화혁명 때 훼손되고 말았다. 다만 남아 있던 양발의 묘비는 영남대학과 합병된 중산대학 도서관 입구로 옮겨와 근대 인쇄술을 중국에 퍼뜨린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었다.

▲광동성 조경시에 있는 양발의 생가는 현재 기념관으로 조성되었다.
▲광동성 조경시에 있는 양발의 생가는 현재 기념관으로 조성되었다.

용도미 골목을 걷노라면, 마치 미궁 속을 걷는 듯 돌고 돌아 원래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만다. 골목이 이름처럼 용의 꼬리처럼 생겼다. 역사도 용도미의 골목처럼 돌고 도는 것 같다. 맴돌며 들려주는 과거의 많은 이야기들에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김현숙 집사
2003-2013년 광저우 거주
2011년 광동 선교 이야기 <시님의 빛> 출간
2011년부터 광저우 선교 유적지 홍보 및 안내
2013년 에세이문학 등단
(현)한국 수필문학진흥회 이사
(현)한중 우호교류협회 여성교육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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