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선교 200년] (5) ‘메스’로 열린 중국 복음의 문①
우리나라 안과 의사들이 중국의 백내장 환자들에게 시력을 찾아준 영상을 보았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간시에(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비슷한 이야기가 180년 전 광저우 성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13행에 안과 의원을 열어, 중국인과 서구 전역에 의료선교의 중요성을 알렸던 이가 있다. 미국인 피터 파커(Peter Parker, 1804~1888) 목사이다. 그는 1834년 광저우로 파송된, 중국 최초의 기독교 의료 선교사였다.
서양 의학의 전래
중국은 오래 전부터 천주교 선교사를 통해 서양 의술이 황실에 전해졌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중국과 천주교 사이에 금이 가면서 서양 의술은 이어지지 못했다. 19세기 중국에 온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 의학은 다시 체계화되었다. 선교사들은 중국 근대 의학 및 의학교육 발전의 선구자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한 선교와 자선 활동을 했다.
19세기 초 근대 서양 의술을 전한 이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의해 파견된 알렉산더 피어슨(A. Pearson, 1780~1874) 의사였다. 1805년 무렵에는 광둥 지역에 천연두가 유행했다. 피어슨은 1805년 광저우에 들어와 우두법 기술을 소개했다. 13행 상인들이 발 벗고 나서 천연두 접종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황실부터 평민까지 떨던 천연두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의료선교 단체, 중국 의료선교사회
대외 무역을 전담한 13행 상인은 서양 문물에 익숙했다. 13행 상관에는 일찍부터 외국 상인들을 위한 서양 의사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소수의 중국인들을 치료해 주곤 했다. 그래서 13행 주변은 서양 의술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13행 상인들은 실용적인 서양 의술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1817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토마스 칼리지(Thomas R. College, 1897~1879) 의사를 중국에 보냈다. 그는 1819년 마카오에서 안과를 개설했다가 1828년부터 광저우 13행으로 옮겼다. 13행 내에 진료소를 열어 맹인들의 시력을 찾아 주고 다른 질병들도 치료해 줬다. 칼리지는 상관의 다른 의사들의 협조를 받아 1828년부터 1832년까지 약 4,000명의 가난한 환자를 무료로 치료했다.
크리스천이었던 칼리지는 많은 중국인 환자들을 보면서 선교에 있어 의료선교가 가장 필요한 영역임을 깨달았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서양의 기독교를 믿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유용성이다. 중국인들이 기독교의 위대하고 숭고한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진 신체적 고통을 없애주는 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는 제안을 서구 기독교 선교 단체에 했다. 칼리지는 정식으로 파송된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중국 의료선교사회를 만들 것을 제창해 1838년 2월 마침내 정식으로 출범했다. 칼리지는 1879년 죽기 전까지 의료선교사회 회장을 맡았고, 파커 목사에게 물려주었다.
중국의료선교사회(The Medical Missionary Society of China)는 세계 최초의 의료선교단체였다. 파커 목사를 비롯하여 브리즈먼 선교사와 오병감 등이 참여한, 초교파적이고 초국가적인 연합 의료 모임이었다. 13행 상관에 있던 중국 상인들과 외국 상인들이 기부와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의학과 선교와 비즈니스의 결합이었다. 이는 후일 안과의원을 이어 받은 박제의원(博济医院)의 재정 원조로 이어졌다. 19세기 박제의원의 놀라운 발전 뒤에 이런 협력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독립된 전문 의료 선교 기구로 중국의료선교사회가 결성되면서, 의료선교가 동인도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종래는 동인도 회사에 소속된 의사가 간헐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13행 주변의 중국인 환자들을 치료했다. 의료선교사회에 의한 체계적인 의료 선교 방식은 1930년 박제의원이 영남대학 이사회로 들어갈 때까지 중국 의료선교를 이끌었다.
이 의료선교사회는 선교사들의 조수 역할을 할 현지인을 소개해 주고, 중국어 배우기 등에 도움을 주었다. 의료선교사들이 중국 각지로 가서 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중국 내 정보도 제공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의 선교단체에 중국의 상황에 적합하도록 의료 선교를 할 수 있는 의사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의료선교사회는 중국 뿐 아니라 서양의 각국과 긴밀히 협조했다.
이 단체는 영국의 런던, 에든버러 및 스코틀랜드,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에 분소를 두었다. 영미 각계 인사들은 중국에 파견되는 의료 선교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회에 알렸다. 막대한 재정적 지원과 기부가 있었고, 젊은 의사의 선교 자원도 줄을 이었다. 의료선교 열풍이 불면서 의료선교는 19세기 서양의 새로운 대세가 되었다. 이런 과정에 중국 현대 의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박제의원 설립자 존 켈(John G. Kerr) 선교사도 오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자.
언어 장벽보다 더 높았던 문화 장벽
1819년 성경이 중국어로 번역되자, 중국에 온 선교사들은 고무되었다. 중영사전 편찬으로 가장 장벽이던 중국어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청 왕조가 잠갔던 자물쇠는 서서히 풀리고 있었지만 생각지 못한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서양의 문화 충돌은 여전했다.
1830년대 초 수십 명의 선교사들은 광저우와 마카오에 거점을 마련했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인쇄되어 확산되었다. 학교들이 몇 곳 설립되었고, 작은 병원도 문을 열었다. 선교사들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기독교 개종자는 100명을 넘지 못했고, 그것도 대부분 서양인에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서양에서 온 초기 선교사들은 타문화 선교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런 준비가 되었을 리도 만무했다. 1830년대 전후에는 중국만 서구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구인들도 중국과 중국인을 잘 몰랐다. 당시 웹스터 사전에서조차 인종주의이니 비교문화니 하는 용어 자체가 없었다. 선교학, 문화인류학, 비교문화 등도 아직 창조되지 않았다. 문화라는 유일한 정의는 경작의 의미에 불과했다. 집에서 가족끼리만 살다, 이웃과 접촉하는 방식을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중국인이나 서구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북미장로회가 1837년 11월 중국 선교를 해야 한다고 결정했을 때, 네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중국은 세계 인구 4분의 1에 달하는 인구를 가진 나라이면서 둘째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 셋째 놀랍게도 그렇게 큰 나라가 단일한 문자를 사용하므로 번역된 성경을 배포하기만 하면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넷째 중국은 개방적이며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등이었다.
중국 선교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이 엿보인다. 특히 네 번째는 당시 중국 현실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카오 외에는 선교사의 안정적 거주가 불가능했고,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전통 신앙을 버리고 서구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청나라 정부는 여전히 제한된 무역 외에 어떤 종교적·정치적·문화적 교류도 원치 않았다. 그리고 번역된 성경이 배포되고 있었지만, 진정으로 복음을 기다리는 중국인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이교도인 중국인과 구미 선교사간 문화적 접촉점을 찾아야 했다. 그 접촉의 물꼬를 튼 곳이 서양식 병원이었다.
13행의 안과의원
파커 목사는 1835년 13행에 안과의원을 열었다. 안과의원을 세울 때 칼리지 의사가 적극 도왔고, 13행의 대표 상인인 오병감(1769~1843)이 지원했다. 오병감은 신두란(新豆栏) 거리에 있는 3층 건물을 무료로 빌려주었다.
파커 목사의 안과의원은 번창했다. 당시 광둥 지역에는 안과 질환이 널리 퍼져 있었다. 19세기 광저우 거리에는 유난히 맹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후천적으로 맹인이 되었다. 어렸을 때 부모의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간단한 눈병조차 방치되어 서서히 눈이 먼 경우가 많았다. 또 천연두나 장티푸스 등을 앓은 후 영양 부족으로 눈이 실명되는 안타가운 사례도 다반사였다. 빈곤층으로 갈수록 맹인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병을 치료할 처방이 중국에는 없었다.
눈은 치료하면 환자들의 만족도가 다른 질병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볼 수 없던 사물을 보게 된 환자들은 기뻐서 온 거리를 뛰며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맹인인 채 거리에서 구걸하던 이가, 눈이 밝아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성경에 나오는 눈뜬 소경의 기쁨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안과라고 눈병만 치료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병들도 서양 의술로 치료했다. 파커 목사는 특히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에 능했다. 파커 목사는 환자들을 수술하기 전 양해를 구해 화가들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기이한 종양 환자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은 미국 등지로 건너가 서양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또 동서양고매월통기전 등을 통해 파커 목사의 시술 이야기가 중국 사회에도 알려졌다. 중국 고위층의 관심은 지대했다. 관리들의 신뢰를 얻게 되자 일반인들의 마음은 저절로 열렸다. 파커 목사는 바쁜 중에도 환자들의 상태를 차트에 상세히 적었다. 안과는 문을 연지 1년만에 2,152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여성 환자가 3분의 1 정도 되었다. 이 통계는 주목할 만하다. 당시 남녀를 엄격히 구별하는 봉건사상이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여자 환자들이 어떻게 서양남자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까. 동서양 간 문화충돌이 서양 병원을 통해 어떻게 완화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 여자들은 서양 남자들만 사는 13행 상관에 들어오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법으로 허용되지도 않았고 관습상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위중한 여자 환자들이 생겼다. 해결책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서약이었다. 건널 수 없는 동서양의 문화 간격이 있었지만 막상 촌각을 다투는 환자와의 만남까지 거부할 수 없었다. 오히려 급했던 중국인들이 방법을 찾았고, 정부 관리들도 방안을 제시했다. 의사와 환자간의 문화적인 충돌은 사라지고, 인간적인 유대가 생겼다.
환자들은 주로 안과 질환과 귓병, 그리고 종양 계통의 병이 많았다. 파커 목사는 매주 목요일을 수술일로 정해 13행에 있던 다른 서양 의사들과 같이 수술했다. 백내장 수술과 종양 제거술, 암수술 등을 행했다. 새벽 2, 3시부터 병원 앞에서 불을 밝히고 기다리는 환자들을 비롯해 내지에서 두 달을 걸어 도착한 환자도 있었다. 매일 1천여 명 정도의 환자가 몰려들었는데 그 중 병이 심각한 환자들부터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대나무로 만든 번호표를 만들어 대기 순서를 정했을 정도였다.
시력을 찾은 환자의 일화가 전해온다. 1835년 11월에 광저우 지방 관리의 비서가 찾아왔다. 그는 백내장을 앓아 이미 7년 전 왼쪽 눈과 3년 전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친구로부터 안과를 소개받아 입원했다. 처음 약을 복용하고 3일 후 왼쪽 눈을 수술하고 붕대를 감았다. 5일 후 눈에 빛이 보였고, 10일 후 완전히 볼 수 있게 됐다. 다시 오른쪽 눈도 수술해서 한 달 후 양쪽 눈의 시력을 되찾았다.
시력을 되찾게 된 관리는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라고 물었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어디에도 저의 공로는 없습니다.” 파커 목사의 간단한 대답에 그 관리는 목이 메였다. 그동안 눈을 치료하기 위해 만났던 수많은 명의와 비교할 때,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파커 목사의 인품은 남달랐다. 그리고 마음 속에 “나를 고통 중에 건진 하늘의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일까?”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관리는 파커 목사의 허락을 받아 화가를 불러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 그 관리는 매일 아침 파커의 초상화 앞에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 관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인이 서양인에 가졌던 편견이 깨진 것은 분명하다. 중국인들 눈에 비친 서양 의술은 신기였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