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선교, 망하조약에 ‘예배당’이라는 단어를 넣게 하다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광저우 선교 200년] (6) ‘메스’로 열린 중국 복음의 문②

▲중국 상인들과 서양 상인들이 13행 내에서 거래하는 모습. 이들은 안과의원의 조력자였다.
▲중국 상인들과 서양 상인들이 13행 내에서 거래하는 모습. 이들은 안과의원의 조력자였다.

아편전쟁 후의 안과 의원

아편전쟁으로 안과 의원을 잠깐 정지시키고 미국으로 갔던 피터 파커 목사는, 1842년 결혼해 신부 헤리어트(Harriet Webster)와 함께 광저우로 돌아왔다. 그의 부인은 최초로 중국에 거주한 서양 여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동안 서양 여자들은 중국 경내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안과의원을 열었다.

그동안 중국의료선교사회의 활발한 활동 덕에 중국 여러 곳에 의료선교사들이 들어와 진료소와 병원을 열었다. 그러나 중국인, 특히 관리들은 아편전쟁 후 서양에 대한 저항감이 강해져 19세기 중반 의료선교는 이전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파커 목사는 안과의원에서 벗어나 종합병원으로의 변신을 도모하고 있었다. 1844년 팔 종양절제술, 결석제거수술, 1847년에는 처음으로 진통제를 사용해서 치료했다.

1848년에는 마취제를 이용해 수술을 했다. 마취제 사용은 미국에서 발명된 지 1년이 채 안 돼 중국에서 시행되었다. 출중한 의사들에 의해 서양의 선진 의술이 시차 없이 그대로 중국에 적용되고 있었다.

의료 사역이 성공하면서, 서양 선교사를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분노와 적대의 감정이 감사와 선량, 그리고 우정의 이미지로 변화됐다. 기독교에 대한 저항 심리도 반감되었다. 의료와 선교는 별개의 두 영역이 아니었다. 병의 고통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넘쳤고 자연스레 복음이 들어갔다. 13행의 안과의원은 새로운 선교방식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병원이 선교기구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또 접촉하기 어려웠던 중국인들을 새로운 모양으로 만나 소통하게 되었다. 대포로도 열지 못했던 견고한 중국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선교사와 외교관을 겸한 피터 파커

▲서양 의사가 제왕절개하는 수술 그림. 당시에는 이런 새로운 풍물을 그리는 그림이 유행했다.
▲서양 의사가 제왕절개하는 수술 그림. 당시에는 이런 새로운 풍물을 그리는 그림이 유행했다.

피터 파커 목사는 미국 메사추세츠 프라밍햄에서 태어났다. 1834년 예일신학교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필라델피아에서 회중파교회 목사 안수를 받고 1834년 미국해외선교회(ABCFM)에 의해 중국으로 파송됐다. 1년 동안 싱가포르 등에서 중국어 공부를 한 뒤 1835년 광저우에 안과 의원을 설립했다. 그는 유능한 외과 의사이자 안과 의사였다. 또 사교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파커 목사는 미국과 영국 선교사 및 사업가, 중국인 사업가도 포함한 다국적의 사람들과 협력망을 만들어 의료 사역의 이념을 발전시켰다.

서양의 각 단체와 중국의료선교사회 지원을 받은 안과 의원은 놀라운 성공을 했고, 파커는 동서양에서 유명 인물이 되었다. 파커 목사는 1844년부터 미국 대사의 파트타임 비서이자 통역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에는 대리공사로 임명됐다. 그러나 이 일로 해외선교회와는 긴장 관계가 되었다. 미국 해외선교회는 파커 목사가 복음 전파에 더 집중해주기를 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의료와 외교 업무에 많은 시간을 보낸 반면, 목회에는 그러지 못했다. 선교회는 몇 차례 경고 후 1847년 파커 목사의 선교사 직위를 해제했다. 그는 선교사를 그만두고도 계속해서 병원 일과 대리공사 업무를 같이 했다. 안과의원을 통해 그는 20년 동안 5만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했다.

그는 1855년에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곧 중국 대사로 임명되어 다시 중국으로 왔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 정세와 역사에 정통한 몇 안 되는 미국인 중국통이었다. 하지만 제2차 아편전쟁 수습 과정에서 그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중국에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1857년까지 일하다 은퇴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워싱턴 D.C.에 정착해 스미소니안 연구소의 운영자로 일했고 새로 만든 복음연맹에서 활동했다. 1880년부터는 중국의료선교사회 회장을 맡으면서, 개척한 중국 의료선교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양발과의 만남

파커 목사는 환자 진료와 후에 맡은 외교 업무 때문에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기 어려웠다.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바쁜 파커 목사를 도와주는 이가 있었다. 앞서 소개했던 양발 목사이다. 그도 박해를 받아 동남아 등지에서 전도하다 1839년 광저우로 돌아와 정착했다. 양발은 병에 걸려 안과 의원을 찾았고, 파커 목사와 중국인 전도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커 목사는 1845년 무렵 양발의 도움을 받아 병원 대기실에서 예배를 드렸다. 중국인들은 1백여명 정도 참여했다. 당시 양발은 런던선교회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의 집에서도 예배 모임을 갖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안과 의원에 나와 병원 일을 도우면서 복음을 전했다. 양발은 병원 대기실에 걸린 그림을 보면서 병의 증세와 치료법, 수술하는 법을 자세히 환자들에게 설명하며 안심시켰다.

양발도 병이 깊었고, 중국인 의사가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았다는 간증을 하자, 환자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양발은 거리 혹은 고향에 가서 예수님의 진리를 전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웃기만 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환자들을 만나 예수님을 전하면, 고통 중에 있던 심령들은 잘 받아들였다. 양발은 1849년까지 안과 의원 일을 도왔다. 만남은 또 새로운 만남을 예고했다. 1839년 또다른 사람이 광저우로 내려왔다.

아편 근절 특사 임칙서와의 인연

▲임칙서는 아편 근절 특사로 내려와 안과 의원을 찾았다.
▲임칙서는 아편 근절 특사로 내려와 안과 의원을 찾았다.

그는 임칙서(林则徐, 1785~1850)이다. 1839년 1월 황제의 명을 받고 아편을 근절하기 위해 특사 자격으로 광저우에 왔다. 그리고 그해 7월 밤, 임칙서는 안과의원을 찾았다. 그는 탈장을 앓고 있었다. 당시 광둥 관리들이 안과 의원을 찾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었다. 그 만남의 통역을 양발이 맡았다. 임칙서는 서양에 아편을 끊을 수 있는 특효약이 있는지 여부와 함께, 탈장 치료를 원했다. 파커 목사가 만든 탈장대를 차고 몸이 좋아진 임칙서는 과일을 보내 감사의 답례를 했다.

이 만남으로 양발의 아들 양진덕은 임칙서의 통역을 맡게 된다. 양발은 아들 양진덕을 어렸을 때부터 브리즈먼 선교사에게 소개해, 성경과 영어공부를 철저히 시켰다. 양진덕은 임칙서의 지시로 사주지(四洲志)를 번역했다. 사주지는 영국의 지리백과사전(An Encyclopaedia of Geography)을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은 세계 4대륙과 30여 개 나라의 지리, 역사, 정치 상황들을 소개해 당시 서방 세계를 중국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후에 임칙서의 친구인 위원이 사주지를 보완 수정하여 해국도지(海國圖志)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당시 동양이 서양을 알 수 있는 귀한 책이다. 우리나라의 흥선대원군도 이 책을 보고 서양을 알게 되었다.

아편전쟁 패배로 좌천됐던 임칙서는 1850년 태펑천국의 난을 제압하라는 명을 받고 광서성으로 가던 중, 병으로 사망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죽기 직전 성두남(星头南)이라는 세 글자를 외쳤다고 한다. 성두남은 신도란(新豆栏)의 복건성 사투리 발음이라고 한다. 임칙서는 복건성 사람으로 복건성 발음을 썼다. 신도란은 광저우 13행의 안과 의원이 있던 거리 이름이다. 임칙서는 죽음이 임박하자 자신의 병을 고치려면 신도란에 가야 한다는 절실함이 생겼던 것이다. 임칙서의 마음 깊숙이 서양의학에 대한 믿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사성이 도운 망하조약 17항

▲반사성은 부모가 파커 목사에 의해 치료되자, 보은의 의미로 망하조약에 ‘예배당’을 추가하자고 제의했다. 미국인 선교사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반사성은 부모가 파커 목사에 의해 치료되자, 보은의 의미로 망하조약에 ‘예배당’을 추가하자고 제의했다. 미국인 선교사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1842년 체결된 난징조약에서는 선교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1844년 망하조약(望厦条约)에서 비로소 선교 관련 구절이 들어갔다. 망하조약은 1844년 마카오 망하촌(望厦村)에서 체결된, 청나라와 미국 간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에서 선교 관련 조항이 들어간 것에 대해, 역사가들은 브리즈먼과 파커 목사의 지속적인 요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선교의 자유를 원했던 선교사였으며, 당시 미국측 통역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추론이다. 그러나 파커 목사는 훗날 예일대 강연에서 의외의 재미있는 사실을 공개했다.

선교에 대한 내용을 추가하자고 한 이는 자신들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 대표들이었다. 조약 내용 중 17번째 조항에 “미국 국민은 5개 항구에서 무역하거나 영주하거나 잠시 머물 때 민간인 집을 임대하거나 임대 건물을 지을 수 있다. 그리고 병원, 예배당, 묘지를 세울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이 항목으로 선교사는 두 가지 특권을 가졌다. 개방된 항구에 거주하면서 전도할 권리와 합법적인 보호였다. 이 예배당이라는 글자를 추가로 넣자고 제안한 이가 반사성이라는 중국인이었다.

반사성(潘仕成, 1804~1873)의 부모는 파커 목사의 환자였다. 반사성은 13행의 거상이었다. 선조들이 하던 소금 사업을 물려받은, 탄탄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상인으로서 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골동품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고, 별장 화원인 해산선관은 영남정원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그의 예술품이 전시된 해산선관은 서양 상인과 고위 관리들이 모이는 사교 장소였다. 그는 종두법 보급에도 앞장서는 등 많은 자선사업을 벌였다. 서양을 잘 이해하는 상인이면서도 학자의 소양을 가지고 있어, 관상(官商)으로 많이 활동했다. 반사성은 미국 상인들과도 교분이 두터워 양광총독 기영(耆英)은 그에게 서양인 전담부서를 맡겼다. 반사성은 부모를 잘 치료해 준 파커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의료선교사였던 파커를 위해 예배당을 넣자고 제의를 했던 것이다.

▲1844년 중미 망하조약 체결 장면. 불평등조약이었으며, 처음으로 예배당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1844년 중미 망하조약 체결 장면. 불평등조약이었으며, 처음으로 예배당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반사성은 지위가 낮은 수행원이었지만, 그의 제의는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 인물은 양광 총독인 기영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이 조항을 반대하지 않고 수락했을까? 원래 기영 총독도 파커의 환자였다. 기록에 의하면 기영은 피부병으로 고생이 많았고, 모리슨 선교사의 아들이 파커를 소개해 치료를 받았다. 파커 목사가 정성껏 치료한 덕분에 회복되었다. 기영이 여러 번 서양 의학을 칭찬했을 정도다. 그는 직접 “妙手回春, 寿世济人(오묘한 손이 건강을 돌아오게 해서 사람들을 오래 살게 하도다)”이라는 글씨를 써 파커 목사에게 선물했다. 그만큼 서양의술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과 의원이 있던 18포 거리의 오늘

13행 안과 의원이 있던 신두란(新豆栏) 거리는 오병감 상인 관할이었다. 외국 상인들은 이 거리를 오병감의 거리라 부를 정도였다. 오병감의 고향인 복건성 사람들이 주로 이 거리에 모여 장사를 했다. 1856년 2차 아편전쟁 후 일어난 방화로 병원 뿐 아니라 일대 13행 상관 건물이 전소됐다. 그래서 안과 의원이 있던 정확한 자리를 알기는 어렵지만, 지금의 18포(十八甫) 부근이다. 18포 거리는 옛 전통을 물려받아 시민들의 거주지와 상업가로 유명하다. 각종 도매시장이 몰려 있어서 늘 사람들로 복잡하고 차도 막혔다. 신문업이 융성했던 곳으로 신문지 거리로도 불리고 있다.

신두란가에 있던 안과의원은 주강에서 좀 떨어져 있어 병원에서 필요한 물을 공급받기가 불편했다. 또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좁아 관료들과 환자들이 타고 온 가마와 하인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매일 1천명 넘는 환자들이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습을 상상하니 지금의 교통체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다급한 환자들은 파커 목사가 병원에 들어가고 나오는 시간에 맞춰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거리에서조차 진료를 받으려 했다.

파커 목사는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의사로서도 탁월했고, 동서양을 막론한 두터운 인맥으로 외교관으로도 활약했다. 1858년 미국으로 돌아간 파커 목사의 후반기 삶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전반에 남긴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 이 거리를 떠돌고 있지만, 비판적인 중국인들은 중국에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외교관 파커에 주목한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의료 선교사였던 파커는 작은 메스용 칼날로 완고한 제국의 문을 열었고, 그의 사명은 거기서 멈췄다. 그가 완성하지 못한 일은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피터 파커의 안과 의원이 있었던 신두란가의 현재 모습. ‘18포 거리’는 여전한 상업가이다.
▲피터 파커의 안과 의원이 있었던 신두란가의 현재 모습. ‘18포 거리’는 여전한 상업가이다.

번화한 옛 신두란 거리에 홍등이 켜지고, 과일가게에 노란 요우즈(柚子)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둥그스런 질펀한 요우즈는 질그릇을 닮았다. 우리는 그분께 매달린 질그릇일 뿐, 그분이 채워 가신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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