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선교 200년] (7)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①
지난 2006년 인민일보는 1840년 이래 중국에 큰 영향을 준 외국인 50명을 선정했다. 이 명단에 네 명의 선교사가 있다. 중국 의료 현대화에 기여한 미국 존 켈(John Glasgow Kerr, 1824-1901) 선교사가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파커 목사의 뒤를 이어 의료선교를 성숙시켰다. 1855년 안과의원을 이어받아 종합병원인 박제의원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리고 병원 내 의학교를 설립해 중국인 제1세대 의사들을 길러냈으며, 중국 최초의 정신병원을 설립한 후 광저우에서 순교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다음과 같다. 영국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 1845-1919) 선교사는 산서대학 설립자이며 변법자강운동을 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 윌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 1827-1916) 선교사는 북경대학의 전신인 경사(京师)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근대 교육의 시스템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아더 스미스(Arthur H. Smith, 1845-1932) 선교사는 미국의 지원 자금을 유도해 미국 내 중국 유학생들을 도왔다. 청화대학 전신인 청화유미(留美) 예비학교와 북경협화의학교를 설립한 인물이다. 네 명 모두 19세기 중·후반에 파송된 선교사들이다.
서양 의술의 부화기
1856년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선교사들은 마카오로 피신했고, 켈 선교사도 미국으로 돌아갔다. 켈 선교사는 다시 제퍼슨 의대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가 떠난 사이 미국의 의학 및 의료 기술은 더욱 발전하고 있었다. 공부를 하면서 광저우에 병원을 다시 세우기 위해 후원금을 모으고 새로운 의료기기를 구입했다. 2년 후 그는 새로 결혼한 모슬리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왔다. 1859년 증사가(增沙街)에 건물을 빌려 병원을 개업했다. 이것이 바로 박제의원의 시작이다. 그리고 1865년 부지를 사서 지금의 중산 제2의원이 있는 곳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켈 선교사는 다방면 진료를 할 수 있는 종합병원을 만들어 나갔다. 1861년에는 최초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다. 1875년에는 난소 절제수술에 성공했다. 1870년대 산부인과의 복잡한 수술들이 잇달아 성공했다. 그 밖에 박제의원은 각종 종양 절제수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수술 중 미리 감염을 예방해 성공률을 높였다. 이런 고난도의 복강 수술들은 구미에서도 1850년대 말에서야 시작됐다.
켈 선교사의 집도 하에 1874년까지 이 병원에서는 368번의 결석수술을 했다. 그 중 301번은 방광결석이고, 67번은 결석을 부수는 수술 방식을 채용했다. 1892년에는 제왕 절개수술이 성공하고, 1897년에는 맹장염 수술이 이뤄졌다. 켈 선교사는 불철주야 열심히 일했다. 병원 관리 뿐 아니라 진찰과 수술도 신속하면서도 정확하게 했다.
1875년 7월 1일 박제의원 병원 기록을 보면, 켈 선교사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백내장 적출수술 2건, 방광 절제수술 1건, 눈 종양수술 1건, 치질 수술 1건, 포경 수술 1건 그리고 백내장 치료 1건, 대퇴부골 괴사 이식 수술 1건 등이다.
그는 또 왕진을 나가 중국인들을 치료하였고, 주강변의 가난한 난민들을 찾아다니며 무료 치료를 했다. 그리고 평생 농촌 4천여곳에 진료를 나가 아픈 이들을 치료했다. 당시 박제의원은 뉴욕 병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와 시설을 자랑했다. 켈 선교사의 의술 또한 외과든 내과든 탁월해 북경에 가서 급한 환자들을 수술하기도 했다.
박제의원은 중국 의료선교사회의 중심 병원이 되어 각 교파 선교사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각 지역에 지방 진료소를 두고, 정기적으로 의사들과 의약품을 보내 의료봉사를 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교회를 연다고 하면 집을 빌려주지 않았지만, 진료소를 연다고 하면 집을 내주었다. 기독교는 서양 의술을 통해 중국 사회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의료 선교사들은 중국으로 들어오면 박제의원에서 일정 기간 일하면서 중국의 문화와 언어를 익혔다. 그리고 내지로 가 각 지역에 병원을 설립했다. 중국인들은 박제의원을 서양의술의 알을 낳는 ‘부화기’라 불렀다.
광저우의 반외세 정서
의료선교는 부흥하고 있었지만 모든 일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반 광저우의 분위기를 살펴보자. 중국은 한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역별로 강한 지역주의 정서가 있다. 광둥인, 복건인, 호남인 등처럼 같은 지역인과의 강한 연대 의식이 있다. 그런데 광둥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훨씬 더 문화적·역사적 정체감이 강한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광저우를 통한 개방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아편 무역으로부터였다. 초기 선교사들은 광저우 입국 자체가 안 되었기 때문에 무역회사의 통역관 자격으로 광저우에 들어와 선교를 시도했다.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선교사와 상인들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바로 이런 점이 선교의 대의를 크게 훼손시켰다.
광저우인들은 자연스럽게 불법적인 아편 판매와 전쟁으로 서양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광저우가 가장 혹독하게 겪었기 때문에, 광둥 사람들은 중국 어떤 지역보다 서양인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2차 아편전쟁 후 서양인들이 몰려 있는 13행에 군중들이 몰려가 불을 지른 것도 이 같은 분노의 표현이었다. 광저우가 서구의 영향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받았지만, 반서구·반기독교 감정도 아울러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도시에서는 선교사들의 메시지가 무관심에 그쳤지만, 광저우에서는 공공연하게 부딪혔다. 그만큼 서양인이 가져온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높았다. 선교사들에게는 고난의 지역이었다.
일구통상 정책으로 광저우로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가 금지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아편을 실어 나르는 배에 성경을 같이 운반했다. 아편을 거래하는 회사의 통역관이 되기도 했다. 불평등 조약 현장에서 통역관으로도 활약했다. 의료선교를 열었던 파커 목사 또한 2차 아편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불복종할 것이다. 그들을 섬멸해야 한다. 미국은 출병해야 한다”며 중국에 적대적인 말을 남겼다. 이로써 서양 의술은 유용했지만, 선교사들의 진의가 의심받았다
귀신 집
광둥에서는 서양인을 번귀(番鬼)라 불렀다. 서양 귀신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서양식 병원을 귀신 집(鬼屋)이라 불렀다. 중국인들은 우리의 성황당과 비슷한 분위기로 서양 병원을 생각했다. 박제의원은 새 건물을 지었지만, 진료소나 작은 의원들은 대부분 허름한 민가를 빌려 병원을 열었다. 미신으로 가득 찬 듯 엽기적으로 여겨지는 귀신 집은 온갖 추측과 해괴한 소문의 온상이 되었다. 파란 눈의 서양 의사가 섬뜩한 칼과 날이 선 가위를 가지고 사람 몸을 수술하는 그림과 해부 그림들이 떠돌면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서양 의술의 혜택을 누린 이들은 감사해하며 그런 오해가 없었지만, 그 치료를 받는 이들은 한정돼 있었다.
여기에 중국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중의학이 있었다. 중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중의를 국의(国医)라 여기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중의와 양의의 만남은 의술의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동서의 또 다른 만남이었다. 특히 광둥은 일찍부터 중의 약재를 재배하고 수출하는 중요 기지였다. 현재 중국이 자랑하는 중약 브랜드인 진리제(陈李济)는 광저우에 뿌리를 둔 제약회사이다. 진리제는 1600년에 만들어져 유명한 북경의 동인당(同仁堂)보다 69년이 빠르다. 이런 유명 중약 브랜드가 탄생될 만큼 광저우는 일찍부터 중의학과 중의약품 제조가 융성하던 곳이다.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광저우 중의 약재상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일반인들은 아프면 중의에서 처방한 약을 여전히 먹었지만, 효과가 빠른 양의를 따라갈 수 없었다. 간혹 서양 의사들의 오진이 생기면 중의 쪽의 반격이 거세었다. 박제의원을 이끄는 켈 선교사는 명성이 점점 알려졌지만 자랑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았다. 의학교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광둥 지역에서 유행하는 질병 중 중의로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 위주로 임상 수업을 진행했다. 피부병, 안과질환, 소아과, 결석 등이었다. 켈 선교사는 중국인들의 뿌리 깊은 자존감을 이해했고 서로를 존중하는 속에서 믿음이 자라는 것임을 알았다.
무료로 가난한 이들에게 의술을 베풀자 저의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은 계속되었다. 의료선교는 성장했지만, 중국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반외세 감정은 잠복되어 있었다. 1905년 연주 교안 사건이 발생했다. 연주는 광둥성 서북쪽에 있는 도시로 기독교 배척 사상이 심하던 곳이다. 20세기 들어 중국과 미국 간에 터진 첫 교안 사건이었다.
연주 사건은 처음 선교사와 주민들의 토지 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중국인들이 병원에서 포르말린 병 안에 든 아기 표본을 보고 질겁했던 것에서 비롯됐다. 의사가 아이들을 죽여 병 안에 보관하고 있다고 오해를 했다. 오래 전부터 서양의사들이 어린 아이들을 죽여 그 몸을 약품으로 쓴다는 흉흉한 소문이 전국적으로 돌고 있었다. 분노에 찬 주민들은 병원을 불태우고 선교사 가족들을 살해했다.
서양인에 대한 중국의 민심은 늘 일촉즉발이었다. 광저우에서도 1870년 천진 교안 사건 후 기다렸다는 듯 신선분(神仙粉) 사건이 터졌다. 1871년 7월 광둥성 각 지역에 선동적인 방이 붙었다. 외국인들이 고용한 중국인들이 신선분을 도처 우물에 살포해 수천 명이 죽었다는 내용이다. 신선분은 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으로 알려졌는데, 실은 만성 독약으로 이를 먹은 사람은 한 달 안에 죽었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공포감이 극에 달해 폭동을 일으켰다. 민중들은 교회를 공격하고 선교사들을 위협했다. 각 지역 선교사들은 피신했다. 양광총독부가 나서서 용의자를 검거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이 일로 박제의원은 환자들이 거의 병원을 떠났고 각지의 진료소 등은 문을 닫아야 했다.
1870년대 박제의원은 안정기였다. 그럼에도 민감한 일들이 생기면 그 여파가 바로 병원에 미쳤다. 크고 작은 소동으로 의원들과 진료소들은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의료선교의 중심지였던 박제의원은 직접적 공격이나 밀고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환자들이 떠나버렸다. 켈 선교사는 텅 빈 병실을 둘러보며 낙담하지 않았다. 배를 타고 환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진료를 계속했다.
서양 의술로 중국의 문은 열렸지만, 중국인들의 분노와 의심을 가라앉히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진입에 어려움이 있었다면, 19세기 중반에 온 선교사들에게는 또다른 과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춧돌은 세웠지만 초기 선교사들이 부득이하게 준 불신과 증오를 거둬내고 신뢰를 얻어야 하는 일이었다.
푯대를 향하여
켈 선교사는 1824년 미국 오하이오주의 던킹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버지니아 숙부 집에서 자랐다. 1847년 필라델피아 제퍼슨 의대를 졸업한 후 오하이오주에 돌아와 7년간 의사 생활을 하였다. 당시 파커 목사가 시작한 중국 의료선교는 서양 세계에 알려져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켈 선교사는 교회 선교 모임에 참석했다. 그 모임에서 중국의 낙후된 의료 실상을 전해들었다.
‘중국인들은 해부를 알지 못하고 생리학이나 물리·화학의 개념도 가르치지 않는다. 병이 나면 단순히 약을 이용해 치료한다. 수술을 통해 충분히 치료될 수 있는 환자들이 죽거나 장애인이 된다. 중국에서 병으로 죽는 이가 전체 유럽의 살아있는 수를 능가한다. 현대 의술을 갖춘 사람이 가서 그들을 구해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강연을 들은 켈 선교사의 마음에 불을 댕겼다.
1853년 11월, 29살의 켈 선교사는 아내 킹스베리와 같이 뉴욕을 출발해 1854년 광저우에 도착했다. 켈 선교사 부인은 선상에서 몸이 쇠약해져 1년여 만에 사망했다. 켈 선교사는 박제의원을 세워 일생 동안 74만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5만회 이상의 수술을 했다. 또 의학교를 세워 150여 명의 중국인 의사를 길러냈으며, 34권의 의서를 번역했다. 또 중국 최초로 정신병원을 설립하여 의료선교의 지평을 넓혔다.
이런 기록적인 수치들이 그의 이름에 따라다니지만, 그보다 더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 것은 온전히 그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다는 점이다. 켈 선교사는 1853년 북미 장로회에 의해 광저우로 파송돼 47년간 중국의 아픈 이들과 같이했다. 그의 천재적인 의술과 열정적인 헌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구했다.
그가 1901년 광저우에서 순교했을 때, 북미장로회 선교회 연간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전 중국의 어떤 사람도, 그리고 아마 어떤 선교 영역의 의료선교사도 켈 선교사처럼 그렇게 위대하게 전문적 사역을 성취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확실히 복음주의적인 사람이었고 시종일관 힘을 다해 사역을 하였다. 그는 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많은 기회를 가졌다.” <계속>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