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인민들이 ‘하오펑요우(좋은 친구)’라 부르던 켈 선교사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광저우 선교 200년] (8)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②

▲아편은 청말 서양약으로 취급되어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거리의 구걸하는 이들도 아편을 피웠고, 아편을 피우는 아편관은 사교 장소였다. 아편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피울 때 쓰는 도구마저 유행했다.
▲아편은 청말 서양약으로 취급되어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거리의 구걸하는 이들도 아편을 피웠고, 아편을 피우는 아편관은 사교 장소였다. 아편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피울 때 쓰는 도구마저 유행했다.

아편 중독자 치료

박제의원을 가장 많이 찾은 이들은 매독과 아편중독 환자였다. 청말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질병이다. 2차 아편전쟁 후 광저우에서 아편은 정식 수입 상품이 되어, 13행 부근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서양 약으로 취급되었다. 1860년대 매월 광저우에 수입되는 아편은 35톤이 넘었다. 아편을 피우는 아편관은 번창했다. 우리가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듯, 청말 중국인들은 아편관에서 아편을 피우면서 비즈니스를 논하고 아이들의 혼사를 정했다.

아편은 도시 뿐 아니라 농촌으로 번져갔다. 빈곤층의 아편 중독은 가난한 생활과도 직결되었다. 일은 힘들었고 영양도 부족한 탓에 병마가 그들을 따라다녔다. 그들은 아편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며 남용했다. 사람들의 정신은 혼미해지고 사회는 활기를 잃었다.

광저우는 원래 상업이 번성한 도시였으나 청말 과열 현상이 심했다. 상인들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사대부들조차 상업의 길을 모색했다. 농촌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일자리를 찾아 광저우로 몰려왔다. 1909년 광저우에 등록된 호구가 96,614호였다. 점포수가 27,524호로 호구 수 3분의 1을 차지한다.

상인들은 새롭고 실용적인 것들을 좋아했고, 그런 사조들이 사회를 이끌었다. 전통 문화나 사상들은 경시되고 도덕 기강이 해이해졌다. 상인들은 호화 결혼과 사치품으로 자신들의 부를 과시했다. 농촌에서 대책 없이 올라온 사람들은 빈곤에 허덕였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탕주의가 유행하게 되고 도박이 만연했다. 광저우는 장사를 하러 온 남자들이 많아 여관과 식당들이 즐비했다. 이들을 상대로 하는 매춘업 또한 극성을 부렸다. 매독 환자가 급증했다.

켈 선교사는 1865년 계아편설(戒鸦片说)이라는 글을 써서 아편의 위험과 피해를 알렸다. 박제의원은 아편 중독자들의 치료를 위해 입원 시설을 더 늘렸으며, 1868년까지 117명의 아편 중독자를 치료했다. 켈 선교사는 환자 스스로 절제와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1875년 병원 내에 아편을 금지하는 단체인 양성권제아편공회(羊城劝除鸦片公会)를 각 교회들과 연합해서 만들었다. 아편을 금지하는 운동을 펼치고, 아편의 무서운 병폐에 대해 자세히 알렸다. 금연환을 만들어 중독자들에게 배포하고 중독자들의 상황을 조사 분석했으며, 아편을 파는 서양 상인들을 규탄했다. 서구의 침략으로 중국인들 마음에 뿌려진 증오는 한순간의 선의로 화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박제의원이었던 중산 제2의원 병원 정문.
▲박제의원이었던 중산 제2의원 병원 정문.

예수님의 사랑으로

박제(博济)의원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박애 정신으로 아픈 이들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병원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희망이 없는 환자나, 도와줄 이 없는 가난한 이들이었다. 의료 선교사들은 헌신과 사랑으로 환자들을 대했다. 당시 교회 병원들의 이름은 대부분 보애(普爱) 박애(博爱) 혜애(惠爱) 혜제(惠济) 등으로, 이런 정신을 반영하는 이름이다. 전통적인 중국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의사와 환자의 새로운 관계가 생겼다. 의사들은 세밀히 증세를 물었고 친절했다. 그리고 환자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 주었다. 환자들이 오랫동안 겪은 고통과 우울에 공감하면서 그들을 위로했다.

박제의원에는 북미장로회의 인제당(仁济堂) 교회도 같이 있었다. 박제의원은 1층을 병원으로 쓰고 2층에는 인제당 교회가 있었다. 인제당은 의료 사역 성공으로 광저우에서 가장 부흥했던 예배당이었으며, 1920년에는 이미 성도 수가 1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현재 인제당은 교회의 통폐합 과정 중 없어졌다. 켈 선교사 뿐 아니라 인제당 교회 목사 등 전문 사역자들이 환자들과 예배하고 자주 상담했다.

켈 선교사는 걸을 수 있는 환자, 그리고 보호자들을 아침기도회에 전부 참석시켰다. 목사의 따뜻한 설교와 켈 선교사의 자상한 진료는 잘 융합되어 환자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켈 선교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환자들을 대했다. 주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임을 이야기하고,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는 병원 내 모든 일을 기도로 연결했다. 회복된 환자들이 그에게 고마움을 표할 때 같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아침에 회진할 때도 환자들과 같이 기도했다.

▲남화의학원의 맥을 이은 중산대 의학원 현재 모습.
▲남화의학원의 맥을 이은 중산대 의학원 현재 모습.

육신의 고통은 차차 복음의 기쁨으로 바뀌어갔다. 글을 아는 환자들은 병동에서 성경을 소리내 읽고 다른 환자들은 들었다. 켈 선교사와 재혼한 마샤 노예스 여사는 병원 내 성경학교를 열어 젊은 환자들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쳐 그들을 사역자로 양성했다. 박제의원에서 시작된 이런 박애주의 정신은 켈 선교사의 동역자들에 의해 그 시대 약자였던 부녀, 아동들과 나병환자들, 맹인들과 정신병 환자들에게 골고루 미쳤다.

켈 선교사는 의사로서 부여받았던 천재적인 의술과 지식, 그리고 온화하고 유머러스한 성품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했다. 그는 병원에서 뿐 아니라 내륙으로 장기 진료 여행을 갈 때, 선상에서 혹은 길에서 도시나 농촌 어디든 만나는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의 중심에는 늘 예수님이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켈 선교사를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은, 사심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중국 인민의 하오펑요우(좋은 친구)”. 그에 붙는 애칭이다. 이 말은 중국인들이 자신의 애정을 전할 때 아껴서 쓰는 표현이다.

▲박제의원 부설로 있었던 중국 최초의 의대 남화의학원.
▲박제의원 부설로 있었던 중국 최초의 의대 남화의학원.

남화의학교와 의서 번역

켈 선교사가 중국인들에게 광범위한 존경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당대 많은 사람들을 치료한 것도 있지만, 의학교를 세워 서양 의술을 가진 중국인 의사들을 길러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인들 스스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의학 교육은 처음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박제의원이 부흥할수록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1866년 박제의원은 부설로 박제의학교를 세웠다. 중국 최초의 서양 의학교였다. 1868년 12명, 1897년에는 103명, 1912년에는 150명으로 늘었다. 1879년에는 정식으로 의과를 설립했고, 이름도 남화의학원이라 지었다. 그리고 그해 처음 여학생들도 받았다. 그 여학생들은 박제의원 옆에 있던 진광학교 학생들이었다.

켈 선교사는 기초의학과 임상을 같이하는 전면적인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학생들에게 인체 구조를 직관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인체를 해부하기도 했다. 켈 선교사는 의학교육 개요를 만들어 서양 의학교육의 목적을 밝혔다. 첫째, 일반 백성을 위해 실력을 갖춘 중국인 의사를 양성한다. 둘째, 교회 병원의 부족한 의사를 보충한다. 셋째, 의과대학 교수들을 확보한다. 처음 출발할 때 의학교의 학제는 3-4년이었으나, 후에 5년으로 연장했다.

수업은 생리, 해부, 화학, 외과 등에 집중했고, 실용성 위주로 했다. 학생과 의사의 구두 수업 방식으로 했으며, 영어를 주로 하고 광둥어도 사용했다. 남화의학교에서 진행된 의학교육은 동시대 서구의 의학교육 수준과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의학생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로, 졸업 후에도 환자와의 접촉을 통해 의료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1887년 창간된 중국 의료선교저널. 19세기 중국의 질병 분포도를 알 수 있는 문헌이다.
▲1887년 창간된 중국 의료선교저널. 19세기 중국의 질병 분포도를 알 수 있는 문헌이다.

켈 선교사는 또 1859년부터 의서 번역을 시작해 총 34종을 완성했다. 약물학을 비롯해 화학초급, 안과론 등을 펴냈다. 이는 의대 학생들에게 임상 의술을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중국에서 서양 의학의 교육 체계를 잡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영문의학 잡지인 중국의료선교 저널(Chinese Medical Missionary Journal)을 1887년 창간하기도 했다. 이 잡지는 중국에 있는 의료 선교사와 중국인 의사들, 중국에서 의료 경험이 있는 서양 의사들과 학자들이 참여했다. 서양의학 학술 간행물로 19세기 중국의 질병 분포 및 의료 선교사들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간행물이다. 켈 선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이 의학계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남화의학원 사람들

▲박제의원의 중국인 의사 황관은 중국의 1호 영국 유학생이며, 해부학 박사로 켈 선교사의 좋은 동역자였다.
▲박제의원의 중국인 의사 황관은 중국의 1호 영국 유학생이며, 해부학 박사로 켈 선교사의 좋은 동역자였다.

1866년 처음 병원의 의학교를 열었을 때, 켈 선교사를 도운 중국인 의사가 있었다. 그는 황관(黄宽, 1828-1878)으로, 해부 및 생리학, 외과학을 가르쳤다. 그는 광둥성 중산 출신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그는 1841년 12살의 나이로 모리슨 선교사가 세운 마카오의 모리슨 학당에서 공부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다 다시 영국으로 가서, 당시 가장 명문인 에딘버러 의대에서 해부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858년 영국의 런던회 의료선교사로 광저우로 파송된다. 황관은 중국 최초의 영국 유학생으로, 에딘버러 의대를 졸업할 때 3등으로 졸업할 만큼 인재였다.

1867년 황관은 박제의원 의학교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시체를 준비해 해부학을 가르쳤다. 당시 중국의 풍습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온전히 남겨 매장해야 했다. 수업을 위해 시체를 해체한다는 것은 당시 분위기상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병원은 연고 없이 죽은 자를 찾아 해부용으로 사용했다. 학생들은 해부 실습을 통해 인체의 기능을 이해하고 병을 치료하는 직관력을 높였다. 켈 선교사가 의서를 번역하면서 생기는 문제 및 적절한 용어 등은 황관의 도움을 받았다. 1867년 켈 선교사가 잠깐 미국으로 간 사이, 박제의원 원장 대리를 맡았다. 켈 선교사의 사역은 황관을 만나 더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 시대 귀한 중국인 유학생 의사가 예비되어 바쁜 켈 선교사와 보조를 맞춘 것 또한 절묘하다.

현재 박제의원에서 이름을 바꾼 중산 제2의원 앞뜰에 기념비가 서 있다. 남화의학원에서 의학 공부를 한 손중산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다. 신해혁명을 일으킨 기독교 혁명가 손중산(孙中山, 1866-1925) 선생은 1886년 그의 또다른 이름인 일선이라는 이름으로 남화의학교에 입학했다. 그래서 병원 이름을 손일선(孙逸仙) 기념병원이라고도 한다. 이때 그와 같이 공부한 남화의학교 학생들 중 혁명 동지가 된 이들이 많았다.

▲손중산(손일선) 기념비가 있는 현재 중산 제2의원 전경.
▲손중산(손일선) 기념비가 있는 현재 중산 제2의원 전경.

진몽남(陈梦南, 1841-1882)은 1874년 남침례회 화교 신도들과 함께 중국인 최초의 자립교회인 선도당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손중산의 측근 혁명 동지였던 진소백(陈小白)의 삼촌이다. 의술을 비롯해 계몽사상과 과학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카 진소백에게 서양의 책들을 많이 권해 그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켈 선교사를 무척 존경해서 사제 간의 정은 유명했다.

변법자강운동을 이끈 강유위(康有爲)의 친동생 강광인(康广仁, 1867-1898)도 켈 선교사 밑에서 서양의학을 배웠다. 강광인도 형의 영향을 받아 대량의 서양 서적을 읽었고, 서양에 일찍부터 관심이 많았다. 특히 의학교 해부학 생리학 등의 실습시간 때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형이 주도하는 변법자강운동을 돕다 무술정변 때 서태후에 의해 살해당했다. 새로운 서양식 병원과 의술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심었다. 초기의 의학교 학생들 중 사회를 계몽하고 이끄는 선각자의 삶을 살다 간 이들이 많았다.
 
박제의원 원사관

광저우 장제대마로의 방죽길을 걸어 1930년대 화남 지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애군(爱群)호텔에 다다랐다. 그 빌딩이 있는 삼거리에 중후한 고딕식 문이 눈길을 끈다. 이곳이 중국 최초의 서양 종합병원이었던 박제의원이다. 이 병원은 현재 중산대 부속 제2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중국의 수많은 병원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롭다.

▲병원 입구 벽에 박제의원과 남화의학원의 옛터라고 표시된 안내판.
▲병원 입구 벽에 박제의원과 남화의학원의 옛터라고 표시된 안내판.

병원 정문 벽에 안내판이 있었다. 안내판에는 이곳이 박제의원과 남화의학교의 옛터라고 적혀 있다. 원래는 이곳도 다른 기독교 역사 관련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옛 박제의원이었다는 어떠한 표시도 없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전, 시 정부가 부랴부랴 안내판을 설치했다. 이름이 붙은 새 안내판을 보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같이 넘기는 생생한 감동을 받았다.

병원 중심에 자리잡은 박제동은 여섯 개의 고딕식 기둥이 받치고 있었다. 그 위에 영남의학원이라고 적힌 글자가 보였다. 남화의학원은 1930년 기독교 대학인 영남대학 의학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후 영남대학은 중산대학과 합병되고 의학원도 같이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 병원은 박제동 1층에 원사관(院史馆)을 만들었다. 원사관 안에는 180여년 된 박제의원에 관한 사진들과 기록뿐 아니라, 서양 의학이 중국에 전래되기까지의 여러 과정이 소개되고 있었다. 한 병원의 역사관이 아니라, 중국의 서양의학 전래 박물관이라 해야 할 정도로 초창기 자료들이 모여 있다. 바깥벽에는 병원 연대표를 비롯, 역대 원장들의 사진과 함께 병원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었다. 자료관은 문이 닫혀 있으므로 미리 예약을 한 후 관람할 수 있다.

▲병원의 원사관 내부 모습. 중국의 서양의학 전래 박물관이다.
▲병원의 원사관 내부 모습. 중국의 서양의학 전래 박물관이다.

켈 선교사는 47년을 중국에서 사역했다. 박제의원과 44년을 같이 했고, 나머지 3년은 강 건너 방촌에 정신병원을 설립한 후 그의 생을 마무리했다. 그는 평생 3번의 결혼을 했고, 3명의 자식을 잃었다.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선교사 묘원 편에서 소개하기로 하자. 하늘나라를 향한 한 사람의 지칠 줄 몰랐던 열정은 큰 숲이 되었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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