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 설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신태진 기자  tjshin@chtoday.co.kr   |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3~34)

<서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 매달려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매달려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저녁에 해가 뉘엿뉘엿 저 갈 때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죄악을 다 짊어지고 인간대신 매달려 있으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실 때 여러분과 나로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의 죄악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화할 수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죄가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에 고개를 돌려버리셨습니다. 그리고 3년 반 동안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고 함께 일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다 도망쳤습니다. 한 사람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십자가 밑에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 고함치고 몸부림을 치던 군중들은 예수님이 병 고쳐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그 군중인 것입니다. 순식간에 배신을 하고 만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보나 도울 자가 없었습니다. 하늘을 보니 하나님이 고개를 돌려버리셨지요. 주변에 있는 제자들도 도망을 쳤지요. 당신이 그렇게 용서하고 치료하고 돌보아줬던 사람들이 손을 휘두르면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고 죽이라고 했지요. 주님이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오신 그는 그 정황 속에 부딪혀서 의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탄식을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33절로 34절에 “제육시가 되매” 육시는 오늘날 시계로 말하면 낮 12시인 것입니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본론>
1. 희망을 잃어버린 무의미한 삶
희망을 잃어버린 자에게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에 꿈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했는데 희망이 없으면 목적도 방향도 없이 허랑방탕하게 살아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그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양심의 고통과 괴로움이 극에 달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자살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삶의 의미가 상실에서 더 이상 살 뜻이 없을 때 자살하는 것입니다. 사회 공동체의 버림을 당해서 아무도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이 노숙자가 되면 그의 피난처는 죽음이 피난처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죽음이 사는 것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고 죽음이 피난처가 된다고 잘못 알고서 그 피난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절망을 한 몸에 걸머지시고 청산해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는 절망이란 오늘날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 않고 인간이 어느 곳에 가도 절망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희망이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어둠의 절망에서 삶은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세상에 희망이 있을 때 살려고 발버둥치지 우리가 세상사는 동안에 희망이 없으면 살 가치도 없고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3년 동안 수감되었던 독일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이런 자기 체험을 말했습니다. 그가 갇혀있던 수용소에서 1944년 성탄절에서부터 연말까지 한 주일 동안 사망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갔습니다. 병들어서 죽는 것도 아니고 가스실에 끌려가서 가스를 마시고 죽은 것도 아닙니다. 그냥 무리가 되어서 죽어갔습니다. 왜그러냐 하면 그들 생각에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무리 흉악한 히틀러라도 죄 없는 자기들을 놓아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을 미워하더라도 죄 없는 유대인들을 갇혀놓을 수 있겠느냐. 크리스마스 전에는 놓아줄 것이라고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도 해방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죽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은 희망을 잃어버리면 죽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희망 없이 살아갈 없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리면 절망 속에서 결국 죽음이라는 피난처를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른바 ‘생계형 자살’이 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문에서도 보셨고 텔레비 뉴스 시간에도 보았을 것입니다. 지난 2월에도 세 모녀가 동반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버지가 암에 걸려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워지고, 그로 인해 두 딸은 신용불량자가 되었으며,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마저 팔을 다쳐 더 이상 생계를 지속하기 어렵게 되자, 마지막 집세를 봉투에 넣어놓고 유서만 남긴 채 두 딸이 자살하고 그 뒤를 따라 어머니도 자살하고 비참한 결과를 맺은 것입니다.(연합뉴스, 2014.2.28)
아무 곳에서도 도움을 얻지 못하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지자 결국 죽음이라는 피난처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한 사람들의 유서에서 흔히 발견되는 말이 바로 “희망이 없다”라는 말인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어버리면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직장도 없고 병들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만 절망에 처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성공한 사람, 자기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이 큰 성공을 한 사람도 성공을 해보니 아무것도 없다 말입니다. 성공하고 난 다음에 자살하는 사람이 패배하고 자살한 사람과 거의 동등한 숫자라는 것입니다. 구라파에서 이사도라 던컨이라고 말하면 그 사람만큼 발레를 잘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그가 춤을 추면 사람들은 모두 다 그를 바라보고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신을 보면 그가 무대에서 휘황찬 조명을 받고 수많은 사람의 기립박수를 받고 공연을 다하고 난 다음 호텔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자기 몸을 던져놓고 한없이 울었다. 사는 게 뭐냐. 이렇게 춤을 추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아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와 계시지 않고는 성공했다고 해서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헤밍웨이가 노벨상까지 받았으면 그렇게 기뻐하고 영광스러워하고 좋아해야 하는데 자살했습니다. 사냥총으로 그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그가 유서를 남겼습니다. 나는 전기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맨트가 끊어지고 텅 빈 전구같이 너무 인생이 허무해서 살 수가 없다. 쾅!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톨스토이라는 소련이 낳은 위대한 소설가였습니다. 그 톨스토이도 영광의 극치에 도달하고 난 다음에도 너무 허무해서 살 의미가 없다고 자살했습니다. 그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도 절망에서 자살하고 다 가진 사람도 그곳에 올라가보니 아무것도 없다고 해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숨길 수 없고 양심의 가책이 극에 달해도 자살하고 인생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때도 자살하고 죽음의 공포에 몰아칠 때도 자살하는 것입니다.

2. 희망의 횃불을 비추던 엘리야의 절망
성경에 희망의 횃불을 비춰주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보통 때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대적을 하고 있던 원수의 선지자들과 싸워서 이기고 난 다음에 극도의 영광 속에 있어야 될 사람이 그곳에서 자살을 한 것입니다. 과로해서 고독함을 느낀 엘리야는 이세벨의 협박에 좌절했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왕의 이방여자였습니다. 그가 시집올 때 그가 이방신을 가져오고 이방 선지자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 때문에 이스라엘이 전부 이방신을 섬기고 타락했을 때 엘리야 한 사람이 야훼의 선지자로서 그들을 대결해서 싸운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 2절로 4절에 보면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엘리야가 이세벨이 데리고 온 이방신 바알신 선지자 400명, 아세라신 선지자 450명을 다 죽였습니다. 그러니 복수를 그 이튿날에는 꼭 하겠다고 이세벨이 연락을 했습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야훼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이스라엘에서 엘리야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요, 그가 기도하면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오던 하늘에 먹장 구름이 덮고 비를 내리던 그 엘리야,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를 통해서 역사하는 것이 뚜렷했는데 그가 바알신과 아세라신 섬기는 사람들과 어느 신이 참신인지 갈멜산에서 경쟁하고 그가 기도하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리므로 불이 내리는 신이 참신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그들을 잡아서 기드온 시냇가에 내려가서 다 목을 쳐서 죽이고 시내로 들어와서 쉬는데 이세벨의 협박, 공갈의 전달을 받고 그렇게 낙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위대한 사람도 공격을 당하면 낙심하는데 여러분이나 내가 시련을 겪어서 낙심하는 것은 어린애 장난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되면 낙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쉽게 사람들은 낙심하면 자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과로에 고독했습니다. 그렇게 큰 성과를 거두고 난 다음에도 혼자입니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습니다. 너무 훌륭하고 위대하니까 사람들이 그를 대항해서 대화를 할 상대로 삼아주지 않습니다. 고독함을 감당하지 못해서 도망을 쳐서 죽기를 원했으나 그가 잠을 자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서 물과 떡을 먹이고 마시고 어루만져 주어서 하나님이 그래도 안 버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므로 말미암아 소망을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사랑과 행복을 나눠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아도 절망한 사람에게는 조그마한 소망, 사랑 이것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적은 위로의 말, 따뜻한 손길 하나가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 5절로 8절에 보면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낙심해서 보통 일어날 힘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누웠더니 “야훼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조그마한 위로의 말을 한다고 당장 일어나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두 번째 보내어서 또 마시고 또 먹게 하시고 그 다음 또 잠자는 사람을 깨워 일으켜서 어루만져 주고 이래서 용기와 힘을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답답하고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가서 위로하고 돌보아 주는 일은 참으로 위대한 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희망을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절망한 사람에게 위로의 말과 따뜻한 손길이 희망을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희망에는 힘이 있습니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어빈 대학의 루이스 고트샤크 교수은 말기암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희망을 품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암 환자들은 쉽게 낫기도 하겠거니와 생명이 오래 갔는데 암이 걸렸는데 희망을 품지 못하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못 보고 우울한 마음을 갖고 있는 환자들은 정신적으로 낙심해서 곧장 죽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희망이 무엇이길래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고민하고 연구했는데 그 해답은 바로 뇌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의과대학 스리니바산 필레이 교수는「두려움, 행복을 방해하는 뇌의 나쁜 습관」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품으면 뇌는 희망에 맞는 길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우리 뇌는 어떤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면 희망이 없을 때와 달리 전혀 다른 길로 방향을 잡는다”는 것입니다.(스리니바산 필레이, 두려움, 행복을 방해하는 뇌의 나쁜 습관, 2011) 하나님이 직접 안 다스려 주셔도 우리 자신의 뇌가 내가 희망이 있다고 마음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 온 몸의 기관을 죽을 준비를 하지 않고 희망이 있는 기관이 되도록 뇌가 다스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희망 찬 생각으로 뇌를 가득 채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뇌가 희망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모든 삶을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복음과 자유와 해방의 희망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담과 하와 이후로 절망에 처한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명이란 우리에게 율법을 주려고 온 것도 아니고 성자를 만들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좌절하고 절망한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로 19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압박과 서러움 속에 몸부림치는 인류를 주님이 오셔서 마귀의 정사와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모든 고통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내게 기름을 부으신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신다. 우리 이 세상 사람이 모두 다 가난하게 살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전통 받은 땅은 저주가 임하여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내야 먹고사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축복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성령충만을 주시고 병 고쳐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재림의 희망을 주시므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마음속에 가득차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죄의 포로가 되고, 질병의 포로가 되고, 절망의 포로가 되고, 죽음의 포로가 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자유와 해방을 주러 오셨다. 이사야 53장 5절로 6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여러분 가난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그 다음에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갚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사야 53장 5절로 6절을 우리라는 말을 나라고 바꿔서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나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나는 나음을 받았도다 나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나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면 이 성경하고 여러분 자신하고 오늘 비교해 보실 때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옛사람이 예수를 통해서 옛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어서 여러분은 이제 허물이 사함 받아 버렸고 죄악을 벗어버리게 되고 마음에 축복과 평화를 누리게 되고 병은 나아서 건강하게 되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도록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온전하게 알아야 돼요. 여러분 자신을 생각할 때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하고 무능력하고 아무것 들지 않은 빈 손든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마귀의 말을 착실하게 들은 사람인 것입니다. 마귀가 여러분에게 와서 자꾸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한 것을 보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완전히 자유와 해방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허물에서 놓여남을 질병에서 치료를 저주에서 축복을 죽음에서 천당을 주님이 주셨으니 여러분은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변화된 자기 셀프 이미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바라볼 때 이 변화된 모습으로 바라봐야 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그 모든 마귀가 갖다준 것을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자유와 해방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여러분은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누군지를 항상 뚜렷이 바라보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은 대적해서 물리쳐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한다고 말했는데 주님을 모시면 죽은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면 예수를 통해서 중생한 나를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는 것은 마귀는 여러분을 언제나 붙어다니면서 훼방을 하다가 여러분을 올라타서 누르고 좌절과 절망과 우울증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귀에게 눌리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온갖 병이 다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병은 거의 100%가 마귀의 눌림을 받아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면 이 마귀의 스트레스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은 마귀를 내어 쫓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에게 억압을 당할 때 그대로 참아서는 안돼요. 내어 쫓아야 돼요.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리가 사용해야지 사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마귀가 와서 스트레스를 염려, 근심, 초조, 절망으로 스트레스를 주어서 병에 들게 하는데 마귀에 눌린 모든 자를 주님은 와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그러므로 마귀가 아무리 와도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면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을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므로 우리는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라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사는 것은 율법의 시대에 살지 않고 은혜의 시대에 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할 일이 없습니다. 성경 창세기에 주님께서 엿새 만에 만물을 다 이루시고 이레만에 쉬셨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인생을 구원할 일을 혼자서 다 하시고 난 다음에 이제 주님은 지금 보좌에서 쉬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가서 물어 보십시다. 주님, 구원받기 위해서 뭘 해야 합니까? 금식을 더 할까요? 더 고행을 많이 할까요? 착한 일을 많이 할까요? 주님 더 무엇을 할까요? 주님이 할 일 없다. 할 것 없다. 그러면 무엇을 할까요? 믿고 쉬어라. 내가 다 이루어 놓았으므로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은혜라는 것은 공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어떻게 천당까지 가는데 공짜로 가는 것입니까? 너는 공짜지만 나에게는 공짜가 아니었다. 나는 너희 죄, 불의, 추악, 저주를 짊어지고 갈보리산 십자가에 매달려 무려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다 쏟고 온갖 절망을 다 청산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무서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해서 우리의 대가를 다 지불해 놓은 다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아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우리들이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내 구주로 모시고 믿기만 하면 모든 일생의 죄가 다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지워버린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종교가 우리 인생들에게 선한 일을 하고 살라고 가르칩니다. 어느 종교가 이 세계에서 도적질하고 살인하고 방탕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 좋은 일을 하고 그 대가로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데 좋은 일을 얼마나 해야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얼마나 좋은 일을 해야 여러분 구원을 베풀 것입니까? 여러분 좋은 일이 대가가 되어서 지불하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습니까? 이 가운데 좋은 일을 해서 인정받아 천당갈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천당가는 것은 예수님이 좋은 일을 해주셨기 때문에 천당가는 것입니다. 예수 이외에는 구원받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이외에는 우리에게 더 큰 희망을 주실 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그릇의 보배인 예수님을 모시고 있어야 사방을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성공했다고 그 마음속에 희망을 넘쳐나나요? 아닙니다. 패배해도 희망이 없고 성공해도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 밖에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깊이 모시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2절로 3절에 보면 “야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오늘날 예수님이 오신 것은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야훼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얼마나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여러분의 구원은 선물로 주신 것이므로 믿음으로 선물로 구원을 받고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희망이 있어야 이 세상에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희망이다. 수확할 희망이 없다면 농부가 씨를 뿌리지 아니할 것이요,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상인은 장사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습니다.”몸은 심장이 중지하면 죽습니다. 영혼은 희망을 잃어버리면 죽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결론>
마귀는 인간에게 어찌하든지 절망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을 갖다 주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인간에게 어찌하든지 희망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났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더라도 주님은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희망의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가 뭐하는 곳입니까? 교회는 희망을 주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좌절되고 절망된 사람들을 불러서 희망을 주어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태에서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채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육신의 눈을 뜨게 되었고 영적인 눈조차 밝아져서 육신으로 병 고침 받고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당시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두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주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우를 범해서 장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눈을 뜨는 것입니다. 왜냐, 영이 살아나야 눈을 뜨지 죽은 사람이 아무 것도 못 보잖아요. 예수님은 우리 영을 살리시므로 우리 영이 죽은 자에서 살아나면 예수님을 보고 구원을 받게 되고 자기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 여사는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헬렌 켈러는 말하기를 “두 눈을 뜨고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주님께서 내 육신의 눈은 안 주셨지만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셔서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모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화니 크로스비 여사도 육신의 눈으로는 앞을 보지 못했지만 영적인 눈으로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기쁜 삶을 살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를 8천 편이나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 참으로 눈을 뜬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눈뜨고 있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왜 사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눈뜨고 있으면서도 천당을 못 가고 지옥으로 스스로 찾아가지 않습니까? 예수 믿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깨달음이 눈뜬 것입니다. 깨닫고 우리는 천국을 가게 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방해합니다. 맡기면 편안할 것인데 마귀는 와서 “하나님께 맡기지 마라.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 짐을 져주시느냐? 무엇 때문에... 네 짐은 네가 져야지. 하나님은 안 도와 주신다.” 그렇게 마귀가 방해를 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짐을 짊어지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번민하고 고통하며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귀에게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해 주시기 위해서 짐을 대신 짊어주겠다고 자꾸 어깨를 내미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어릴 때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 교통리 31번지 그 시골 골짜기에서 살 때는 지금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우리는 자동차를 구경 못 했습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바깥에서 자동차 소리가 나면 트럭이나 낡은 버스가 한 대 지나가면 선생님과 우리가 전부 뛰어나가서 공부 안하고 그 차 구경한다고 정신이 빠졌습니다. 참 원시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버스가 지나가면서 연기를 품고 지나가면 가솔린 냄새가 그렇게 향기로울 수가 없어요. 그 가스냄새 맡는다고 전부...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다른데 여행을 하려면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는데 기차역이나 버스역에 내리면 지게꾼들이 줄을 쫙 서 있어요. 직업도 없고 먹고 살 길이 없는 그 시대에 지게 하나 가지고 삽니다. 그러면 짐 가지고 내려온 손님들 앞에서 짐을 서로 지려고 아주 경쟁을 합니다. 그래서 짐을 주면 어깨에 걸머지고 집까지 잘 날라주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그런 짐꾼 없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버스정류소나 기차정거장에 가면 그러한 짐을 지는 일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외람된 생각이 자꾸 생겨요. 성경을 읽으면 주님이 그 짐꾼처럼 짐 내게 줘! 네가 지지마. 내게 줘! 사정을 한다 말입니다.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너라. 괜히 네가 애쓰지 말고 내게로 오너라. 그래서 주님이 반 강제적으로 짐을 빼앗아서 당신 어깨 위에 걸머지고 우리 집까지 져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 주님께서 네 짐을 내게 맡겨라. 천지를 지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짐을 짊어지고 가시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황홀한 일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무슨 짐이 있습니까?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소설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말씀이요, 그 말씀에 짐을 맡기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책임 안 져주면 아예 주님과 같이 죽겠다고 각오를 하고 맡겨 보세요. 별 볼일 없는 자기 목숨 하나 살아보겠다고 하나님 맡기라고 하는 것 못 맡기고 늘 구경하고 따라만 다니지 말고요. 그냥 눈 딱 감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면 짐꾼도 우리 짐을 져주는데 하나님이 여러분 짐 안 져 주시겠어요? 짐 내게 가져오세요. 내가 여러분 대신해서 하나님께 맡겨 드릴 테니까. 주님께서는 마지막 끝까지라도 여러분에게 희망을 주어서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살다가 천당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천당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곳이요, 지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고 믿고 발버둥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이 생명조차도 주님이 희망을 가지고 사람답게 살다가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희망을 저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천당에 가서 잘 사는 것 물을 필요 없어요. 나는 여러분에게 안 물어봐줘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천당에 우리 집 굉장히 좋습니다. 오시면 놀러 오십시오. 천당 걱정은 지금 할 필요 없어요. 지금 오늘 살아있는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 내일, 모레, 다음달, 명년 주님이 우리가 잘 살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 헨리(O. Henry)가 쓴 『마지막 잎새』라는 소설에 보면 삶에 대한 희망을 참 깊게 잘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존시라는 여인이 살았는데 그는 병이 들어서 나날이 여위어 가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창문을 열면 저쪽 이웃 집 담벼락에 넝쿨이 걸려 있어요.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담쟁이 넝쿨이 있는데 가을이 되가니까 한 잎, 두 잎 떨어져 갑니다. 그러니 그는 침대를 창문가에다 갖다 놓고 앉아서 보면서 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내가 죽는 날이다. 그래서 하나가 떨어지면 기운이 떨어지고 두 개가 떨어지면 또 기운이 떨어집니다. 그 같은 아파트에 나이 먹은 화가가 있었어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하루 저녁에 보니까 폭풍우가 불어서 막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부는데 이 병든 여인은 내일 아침이면 내가 창문을 열고 보면 담쟁이 넝쿨에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고 없을 것이다. 그때가 내가 죽는 날이다. 그런데 이 화가는 내일 아침이면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겠구나. 큰일 났다. 그래서 밤새도록 비바람이 불어서 아침에는 조용해지는데 이 여인이 죽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그렇게 비바람이 불었는데 이 잎새 하나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야, 죽음아! 그 폭풍우가 저 넝쿨 잎새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너 내 생명 못 빼앗아간다. 나는 산다.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 여자가 순식간에 생기가 돌아오고 병이 물러가고 건강해지는데 그와 동시에 며칠 만에 그 아파트에 있던 화가가 급성폐렴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왜냐, 그의 벗어놓은 옷이 흙이 묻어있고 물에 젖었습니다. 밤새도록 밖에 나가서 마지막 잎새를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에 안 날려 가도록 그런 동안에 폐렴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는 한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끝까지 마지막 잎새를 그림으로 그려서 담쟁이 넝쿨로 벽에다 붙여놓은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읽을 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거센 비바람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마지막 잎새를 그렸던 그 화가가 우리 예수님으로 착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한 인간으로 마지막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준 그것을 생각할 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밤새도록 세찬 비바람을 맞으며 그림을 그린 베어먼이라는 그 화가와 같이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내버리고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 속에서 희망을 얻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희망을 얻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났느냐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느냐, 어떤 학위를 가지고 있느냐, 어떤 빽을 가지고 있느냐. 이런 것 주님 묻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못나고 남도 자기도 인정하지 못하는 노숙자라도 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면 품에 품고 그 대신 모든 죄와 불의, 추악, 저주를 짊어져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내가 다 맡겠다. 제발 너는 구원을 받고 잘 살아다오. 주님이 여러분 보고 사정을 하는 것입니다. 제발 잘 살아다오. 천당은 내가 준비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천당은 오케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주님이 다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지. 그렇게 살았지 않느냐. 마귀가 너희를 죄의 사슬로 묶고 허물의 사슬로 칭칭 동여매고 병들게 하고 저주받아 가난하고 헐벗게 하고 죽음의 공포 속에 떨고 있게 만들지 않느냐. 그곳에서 벗어나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삶을 살아라. 그렇게 살아다오. 주님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는 말 귀에 들리지 않느냐. 내가 다 이루어 놓았으니까 이제는 믿음으로 강하게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꿈을 꾸고 다른 꿈 꾸지 말고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전인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항상 꿈꾸고 그리고 믿고 그리고 시인하라. 너는 복 받은 사람이다. 용서받은 사람이다. 축복받은 사람이다. 너는 건강한 사람이다 너는 잘된다. 그렇게 말하고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나가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 말하기를 너희는 항상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얻기 때문인 것입니다. 소망을 얻어 여러분 마음에 꿈을 품으면 꿈이 여러분을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꿈을 이루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꿈 못 이룹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계시면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니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꿈을 마음속에 받아들여 꿈을 꾸고 살면 꿈이 여러분을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꿈이 여러분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2014년 6월 29일 주일설교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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