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선교 200년] (9)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①
1898년 2월 28일 가랑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켈 선교사는 박제의원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44년간 그와 같이했던 박제의원은 아침의 적막에 싸인 채 고요했다. 환자들은 아침 기도회를 끝내고 각자 병실에서 쉬고 있었다. 켈 선교사는 사람을 불러 오랫동안 정신병을 앓고 있던 환자를 등에 업게 했다. 환자의 아버지, 그리고 부인 마샤와 함께 주강 변으로 나갔다. 작은 삼판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 편 방촌부두에 도착했다. 강변 가까이에 벽돌로 된 새 건물 두 동이 서 있었다. 켈 선교사는 등에 업힌 정신병 환자를 앞세워 그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중국 최초의 정신병원인 혜애(惠爱)의원이 마침내 중국 땅에 문을 열었다.
청말 정신병 환자
19세기 중엽 중국 내에서 정신병 환자를 거두는 기구는 전무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을 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신에 사악한 기운이 들어갔다고 여겨 무속 신앙에 의지했다. 정신질환자는 가문의 수치로 여겨, 집안 은밀한 곳에 감금당한 채 쇠사슬에 묶여 짐승처럼 지내야 했다. 환자들은 폭력과 학대를 당하며 자살하는 이도 많았다. 가족들에게 버림받아 거리를 유랑하다 사고를 일으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이런 정신병 환자에 대한 문제가 켈 선교사에 의해 청말 사회의 이슈로 대두되었다. 사회적 배경을 살펴 보자. 중국 사회는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특히 광저우는 상업의 발달로 농촌에서 도시로 들어온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높아졌다. 급격한 도시화로 사람들은 삭막함과 소외감을 느꼈다. 더구나 광저우의 민가들은 대부분 1층으로 빽빽이 늘어서 있어, 주택가에는 빈 공간이 없었다. 정상인들도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갇혀 지내던 정신병 환자들의 공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경제가 힘들어지면서 지친 가족들은 정신질환자를 길에 버렸다. 박제의원에도 이런 환자들이 몇 번이나 실려 왔다.
또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1851년부터 14년에 걸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으로 2천 5백만명이 죽었다. 당시 중국 인구가 3억 5천명 정도였다. 중국 남부를 휩쓴 이 민란은 사회적 불안감을 고조시켰고, 전통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가정들이 붕괴되면서 정신질환자를 포용할 여력도 없어졌다. 사회적으로는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 우려자로 여겨 사법적으로 처리하기 일쑤였다. 왜곡된 편견으로 인해, 의학적 치료를 통해 정신병이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처방이 필요했지만, 당시 중국 사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정신병 환자들은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었다.
시대를 앞선 정신병원 설립안
박제의원에 입원했던 정신질환자들은 친척들에 의해 길에 버려진 이들이었다. 몇 번이나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켈 선교사가 힘겹게 살려냈다. 그들의 울부짖는 고통을 보면서 켈 선교사는 그 시대 ‘가장 작은 자들’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의료 사역은 종합병원에서 몸의 다양한 질병들을 치료하는 데 한정되었다. 그러나 주변은 여전히 정신질환과 만성질환 등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았다. 기독교의 사랑으로 특별한 기구를 만들어 이들을 고통 속에서 건져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일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의료선교의 연장선이라 생각했다. 켈 선교사는 정신병원 건립이 필요함을 1872년부터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일을 미국의 선교 본부가 당연히 지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켈 선교사는 새로운 방법들을 통해 정신병 치료를 실현하고자 했다. 서양에서는 18-19세기 유럽과 미국 동부 연안 쪽에 요양원들이 생겨나면서 정신병 환자들의 문제가 많이 해결되고 있는 점에 착안했다. 약물치료와 감금이 아닌, 이성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방법들이 대두되고 있었다.
켈 선교사는 중국 의료선교사회에 병원 설립위원회를 만들어 정신병 환자들을 위한 사역을 하자고 요청했다. 그리고 의학생들에게 이 방면의 치료를 할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요청은 당시 중국 정부나 어떤 선교 기구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획기적 발상이었다. 당시 선교사를 파송하는 서양에서조차 정신병에 관한 약이나 치료법들이 체계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시대를 앞서가는 일이었다. 중국인들은 정신병 환자를 돌보는 일은 당연히 가정이 하는 일이라 여겼다. 환자를 대신 맡아 치료하는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공공기관이 받아 대신해 주는 공용 공간의 출몰은 그 자체가 혁명이었다.
정신병원 설립은 중국 내 의료선교사들조차 반대했다. 그들은 서구에 비해 중국의 정신병 환자들이 적으므로 의료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켈 선교사는 만국공보(万国公报) 등에 정신병 환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알리는 글을 실어 중국인들과 선교사들의 이해를 구했다. 중국에 정신병 환자들이 적다는 것은 집안에 감금되어 드러나지 않거나 혹은 자살률이 높고 친척들에게 학대당해 평균 수명이 짧은 연유임을 알렸다.
켈 선교사는 이들을 수용할 전문병원을 세워 경험이 풍부한 의사가 정신병 환자를 맡아야 하고, 적절한 방법을 찾으면 정신질환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86년 박제의원 설립 50주년 때 정신병원 설립 안이 중국 의료선교사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2년 후 다시 좌절되었다. 정신병원을 운영할 막대한 경제적 부담과 지속적으로 많은 인력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점이 결정을 미루었다. 또 사회의 큰 치부가 보이는 정신병원 건립은 위험해서 자칫하면 의료선교사들을 오히려 위협하는 일이 될 거라는 우려도 높았다.
중국의 관리와 상인들도 정신병원 설립에는 관심과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당시 중국의 전통 사회 뿐 아니라 외국의 선교단체들도 정신병을 어떻게 볼 것인지, 그리고 어떤 상태를 정신병 환자로 판별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들이 모호했다. 마치 금기사항을 건드리는 것처럼 서로가 외면했다.
북미장로회 본부와의 충돌
1872년부터 시작된 정신병원 건립 논쟁은 16년간 지속되었다. 켈 선교사는 그의 소속인 북미장로회에 1892년 간곡한 편지를 보냈다. “중국의 인구는 미국의 5배를 넘지만, 정신병원은 한 곳도 없다. 환자의 특성상 일반 병원에서 같이 치료할 수 없다. 정신병원을 열어 전문적인 의사의 관리 하에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며 5만 달러의 지원금을 요청했다.
북미장로회 본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정신병원 건립을 반대하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정신병원 건립은 중국 의료선교회가 동의하지 않는다. 둘째는 현재 조건 하에 선교사는 마땅히 기독교 복음 전파라는 주된 업무를 준수해야 한다. 인도주의 업무를 직접적으로 하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정신병원 건립은 좋은 일이나 선교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 의료 선교사들의 목표는 의료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 수를 늘리는 것이다. 셋째,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역한 의료 선교사 입장에서 이런 제의가 이해 가지만, 이런 일들이 장점이 될지 아니면 장애가 될지 주민들의 의심이나 적대감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
본부는 학습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들을 먼저 선교 대상으로 할 것을 강조했다. 의료선교사의 책임은 육체적인 병의 치료 뿐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길을 여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선교 사역은 유한한 해외 선교 자원을 분산시킬 우려가 크며, 본부와 의견이 충돌할 때 선교사들은 교회의 의견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북미장로회는 1888년 광저우에 영남대학을 설립해 진통을 겪고 있었다. 정신병원마저 설립된다면 너무 많은 인력과 에너지가 소모될 것이라 두려워했다.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를 바라는 미국 본부와 선교 현장에 있는 선교사 간 생각의 차이는 너무 분명했다. 북미장로회는 1837년부터 중국 선교를 시작했다. 켈 선교사에 의한 의료선교의 성공으로 광둥에서 가장 왕성한 교단이 되었다. 박제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켈 선교사의 영향력과 지금까지의 일들을 고려할 때 서로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본부는 켈 선교사에게 반대 의사를 통보했을 뿐 아니라 전력을 다해 저지했다. 광저우 선교회에 편지를 보내 정신병원 설립 및 기금 모집은 북미장로회와 무관함을 못 박았다. 정신병원과 관련된 어떤 인력과 지출도 하지 말 것이며, 앞으로 북미장로회가 정신병원 프로젝트에 참여할 가능성은 전혀 없음을 강조했다. 같이 일했던 박제의원 의사 스완 선교사와 인제당 교회의 헨리 목사마저 돌아섰다.
켈 선교사의 벤처 의료선교
켈 선교사는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다. 본부는 정신병원 설립이 자선사업이라며 선교의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켈 선교사는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의료선교의 연장임을 믿었다. 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1892년 본인의 양로금(일종의 연금)을 내 방촌에 부지를 구입했다. 그리고 광저우의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는 미국 후원가의 도움으로 건물을 짓고 1898년 마침내 개원하게 되었다.
켈 선교사는 고령에다 오랫동안의 과로로 몸이 병든 상태였다. 처음에는 정신병원을 설립한 후 강을 건너다니면서 박제의원과 혜애의원 두 병원 일을 감당했다. 그러나 두 일을 하기에는 건강상의 문제도 있고 본부의 압력 또한 거셌다. 이에 1899년 1월 박제의원 원장직과 중국 의료선교사회의 회장직을 내려놓았다. 켈 선교사 부부는 방촌의 정신병원으로 이사했다. 남화의학교 남학생 30명도 따라와 그의 방에서 의학 실습을 계속했다.
북미장로회에 소속된 한 선교사가 본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독립된 기구를 세워 운영하는 일은, 교단 이사회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1901년, 그는 본부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켈 선교사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정신병원 건립을 서두른 것 같다. 그가 순교하기 3년 전의 이런 행보들은 켈 선교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해준다.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 속에 새롭고 어려운 일을 선교본부와 주변의 동료들마저 반대하는 가운데 추진하기란 쉽지 않다. 개척하고 도전하는 선구자들은 자신을 아끼지 않는 면모를 가지고 있다.
켈 선교사는 정신질환자를 돕는 일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 믿었다. 북미장로회의 후원은 끊겼지만, 켈 선교사를 돕는 손길이 있었다. 미국의 재력가 의사 셀든(Charles C. Selden)이 정신병원 원장을 맡게 되었고, 처남인 노예스 목사, 그리고 의사가 된 켈 선교사의 외손자가 할아버지의 유지를 이었다. 켈 선교사는 정신병원이 성공한 것을 알고 눈을 감았다.
켈 선교사는 1901년 8월 20일 정신병원에서 순교했다. 켈 선교사를 이어 박제의원 원장을 맡은 스완(John M. Swan) 선교사는 본부에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경건하고 다재다능했던 켈 선교사를 무척 그리워할 것입니다. 거룩한 그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그가 우리와 같이 있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얼마나 오해했는지 생각하면 매우 슬퍼집니다. 서로 간의 베일을 어떻게 걷어낼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는 그렇게 오래도록 고귀하게 섬겼던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계속>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