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선교 200년] (10)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②
은혜와 사랑의 병원
중국 최초의 정신병원인 혜애의원은 민영 개인병원으로 문을 열었다. 또한 혜애(惠爱)라는 이름 그대로, 은혜와 사랑이 흐르는 기독교 병원이었다. 개원 목적은 “예수님이 주신 사랑과 은혜로 정신병 환자들을 섬기며, 중국인들에게 본을 보여 그 사랑을 전한다”였다. 혜애의원은 단순한 자선단체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기구임을 분명히 했다. 병원 직원들은 신앙이 깊은 신도들로 성심성의껏 환자들을 대했다.
처음 정신병원은 건물 두 개 동, 24개 방과 침대 30개로 출발했다. 환자는 여자 1명, 남자 1명이었다. 여 환자는 쇠사슬에 묶여 작은 움막에서 몇 년간 유폐되어 있었는데, 정신병원에서 서서히 정상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 1층에는 환자들이, 2층에는 켈 선교사 부부가 살았다. 병원 직원들이 정신병 환자들과 같은 동에 생활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얘기했지만, 켈 선교사는 평생 정신병으로 소외당한 그들을 더 격리할 수 없다며 같은 건물에 살 것을 고집했다.
정신병원은 정신병 환자를 단순히 격리 수용하는 곳이 아니라, 이성적 수단으로 병을 치료하는 곳이다. 정신병 환자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 방법은 쇠사슬에 묶어 구금하거나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토사제 약물을 투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켈 선교사는 가능한 한 정신병 환자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효과는 곧 나타났다. 쇠사슬에 묶여온 어떤 환자는 쇠사슬을 푼 것만으로도 회복되기도 했다.
병원을 열 때 켈 선교사는 원칙을 몇 개 정했다. “입원하는 이들은 모두 환자이며,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병원은 감옥이 아니므로 구금은 최소화하고 환자들을 자유롭게 한다. 정신이 이상해도 환자는 인간이지 짐승이 아니므로, 억압보다는 단호한 말로 제어하고 약물 치료는 가능한 적게 한다. 그리고 편안한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고, 따뜻한 물에 자주 들어가게 해 환자들의 긴장을 풀어준다.” 그는 환자들을 화초 키우기, 청소하기, 체조 등의 활동에 참여시켰다.
혜애의원은 가정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병원은 환자들이 몰려들자 부근의 땅을 사서 작은 집을 한 동씩 지어 독립적으로 생활하게 했다. 1898-1903년 입원환자가 287명이었다. 이 중 완치되고 개선된 환자가 60% 정도였다. 사망률이 21%에 달했으나, 그들은 이미 입원하기 전부터 건강이 심각한 상태였다. 혜애의원은 중국인들에게 정신병도 치료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게 되었다. 정신병원은 여러 반대자들의 우려와 달리, 단기간 내에 성공한 벤처 사역이 되었다.
중국 정부의 인정
환자들은 다양했다. 정부 관리를 비롯해 거리에서 데리고 온 이들도 있었고, 천진과 상하이, 동북 등 중국 각지에서 왔다. 1909년이 되면서 국제적으로 명성이 알려져, 싱가포르를 비롯하여 영국과 독일, 미국에서도 환자가 왔다. 대부분 화교들이었다. 한 달 입원비는 5달러로 저렴했다. 소문이 나자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부유한 환자에게는 많이 받고 가난한 환자에게는 적게 받는 기준을 정해,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이가 없도록 배려했다. 켈 선교사는 병원의 모든 일들을 공개했다. 관리들과 환자 가족들이 언제든 병원을 방문할 수 있도록 했다.
1904년 광둥성 경찰국은 거리에서 잡은 정신질환자 1명을 혜애병원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한 달에 5달러로 치료할 수 있는지 물었다. 병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1927년까지 이런 관계가 지속되었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중국 정부가 복음단체가 행하는 자선사업을 정당한 사회적 자원으로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 선교사가 만든 민간기구가 중국의 공적 기관과 연계된 것이다. 선교 역사상 전례 없던 일이다.
켈 선교사는 원래 민간 정신병원을 설립해 환자를 치료하면 정부가 주목할 것이고, 이를 모방해 중국 전역에 정신병원이 연이어 설립될 것으로 예상했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의 정신병원 보고서에는 환자 174명 중 96명이 광둥성 관리가 요청한 환자라고 밝히고 있다. 96명중 절반은 홍콩에서 데려온 환자이며, 나머지는 광둥성 경찰이 잡아온 환자였다. 급속한 환자 증가로 병원은 인프라가 부족했고, 경찰국에 기부를 요청했다. 중국 정부는 5200달러에 상당하는 돈을 기부했다.
정신병원은 선교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개인의 민영병원으로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선교단체에서 지원하는 것보다 나았다. 개인에 의한 운영이 오히려 정신병원의 관리를 더 탄력적으로 하게 했고, 현장의 필요가 바로 반영되었다.
켈 선교사를 보호하라
1900년 일어난 의화단 사건은 광저우에도 영향을 미쳤다. 어떤 사람이 선교사의 머리 가격을 두(頭)당 얼마라고 내세우며 시내에서 사람들을 선동했다. 모여든 광저우 관리들과 일반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정신병원과 켈 선교사는 안 된다. 그곳은 중국 유일의 정신병원이며 켈 선교사만이 정신병 환자를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다. 타격을 주면 안 된다. 우리가 그를 보호해야 한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이렇게 소리를 질러, 험악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광저우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의화단을 피해 마카오 등지로 피했지만, 정신병원과 켈 선교사는 광저우 사람들에게 큰 지지를 얻어 무사했다. 사람들은 켈 선교사가 순교한 후 병원 이름을 존 켈 정신병원이라 바꿀 정도로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켈 선교사 밑에서 공부했던 당시 학생은 “켈 선교사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병이 깊음에도 정신병 환자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불쌍히 여겼다”고 회고했다. 켈 선교사는 어떤 이도 주목하지 않던 정신병 환자의 고통을 알고 불쌍히 여겼다. 그들도 같은 인간임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켰고 정신병도 치료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50년 만의 결실, 선교회를 움직이다
켈 선교사는 정신병원을 설립하고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정신병원을 실질적으로 운영해서 정착시킨 이는 부인 마샤(Martha Noyes, 1840~1925) 여사였다. 마샤는 켈 선교사의 세 번째 부인이다. 그녀는 배영학교 설립자 노예스 목사의 여동생이고, 진광학교 설립자 헤리엇 여사의 언니이다. 광둥의 언더우드가인 노예스 형제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소개하겠다.
마샤 여사는 남편과 함께 개척한 정신병원에서 23년간 헌신했다. 그녀는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사역이 의료 선교의 정당한 분야라는 켈 선교사의 비전을 실행하는 데 완전하게 헌신했다. 마샤 여사는 병원 내 모든 종교활동을 맡았다. 병원의 모든 활동은 복음 전파라는 축을 따라 움직였고,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병원 내 복음당교회를 열어 매일 아침 앉아 있을 수 있는 환자들과 직원들이 모여 기도회를 했다.
직원들은 대부분 신도들이었고, 그들의 신앙적 열정은 강했다. 직원들에게 병원의 복음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날마다 상세한 자료를 만들어 제공했다. 주일예배 때는 모두 모여 예배를 드렸고, 수요일은 남녀가 나뉘어 성경공부를 했다. 찬양과 기도를 통해 치유가 일어났다. 전도 활동은 환자의 가족과 친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20부터 2년간 11,781명의 외래 환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 방문했다. 절반 이상이 회복되고 세례를 받았다.
마샤는 헌신적인 성격이었으며, 깊은 기도 생활로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줬다. 광둥 사람을 잘 이해하는 너그러운 성격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이끌었다. 정신병원 근처에 사는 주민들에게 무료로 의료 봉사를 하고 약을 보내 복음을 전파했다. 마샤 여사는 북미장로회에 상세한 보고서를 보내 남편의 뜻을 본부가 받아들이기를 오랫동안 조율했다.
1922년 북미장로회는 셀든 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신병원을 자신의 관할 내로 포함시켰다. 켈 선교사가 정신병원의 필요성을 건의한 지 50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본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했던 정신병원 사역은, 결과적으로 북미장로회가 중국에서 이룬 많은 열매 중 최대의 성과로 평가되는 곳이다. 정신병원은 역사의 파란을 지나 1927년 3월 광저우시 정부에 접수되었다.
부부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혜애병원은 현재 방촌뇌과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옛 자리에 남아 있다. 현재도 정신병원으로 환자들이 입원해 있다. 병원 건물은 대부분 새로 지은 것으로, 이전 건물은 없어졌다. 다만 후문 쪽에 혜애의원이 시작된 건물 한 동이 보존되고 있다. 혜애동으로 불리는 건물인데, 현재 병원 행정동으로 사용되고 있다. 1990년대 외벽을 붉은 색 벽돌로 보수해 건물은 비교적 깨끗했다. 혜애동 입구에는 광저우시의 보호 문물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이 병원의 유래를 알려주는 안내판도 설치돼 선교사님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2층에는 원사관(院史馆)이 있어 처음 병원을 지었을 때의 모습과, 켈 선교사와 환자들이 같이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시아 최초의 정신병원이기도 해 기독교 뿐 아니라 의료와 복지 분야에서 관심을 끌고 있었다. 심심찮게 홍콩과 미국 등에서 이 병원을 둘러보러 오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정신병원 설립은 근대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이 방면의 연구들이 해외 화교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혜애의원을 세운 방촌(芳村)은 박제의원과 주강을 사이에 두고 서남쪽에 있는 곳이다. 청말 방촌은 인가가 드문 나무와 화원들이 많은 휴양지였다. 13행 상인들이 주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방촌의 화원에서 쉬다 가곤 했다.
켈 선교사는 방촌에 정신병원 자리를 정한 후 무척 기뻐했다. 방촌은 박제의원에서 배를 타고 금방 갈 수 있는 곳이고, 13행이 불탄 후 새로 조성된 조계지 사면도 지척에 있었다. 또 변두리라 광저우성의 시끄러운 소문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정신병 환자들이 요양하기에 이상적인 곳이라 여겼다.
혜애의원이 있던 방촌 둑방에 서면, 백어담(白鹅潭)의 수려한 풍경이 펼쳐진다. 백어담은 주강이 세 갈래 물줄기로 만나 소용돌이치는 곳이다. 물줄기들이 만나 용솟음치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도 두근거리게 한다. 광저우시는 최근 풍경이 아름다운 이곳을 카페가 있는 미술과 문화의 거리로 만들고 있다. 1923년에는 병원 건물이 50채가 넘었다고 하니, 주변의 오래된 벽돌 건물들이 아마도 정신병원의 흔적들이 아닌가 싶다.
방촌은 ‘향기 나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방촌에는 유명한 차 도매시장이 있어 그윽한 차향을 느낄 수 있고, 화훼단지가 있어서 남국의 꽃향기를 풍긴다. 여기에 켈 선교사 부부의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자아내는 것처럼 다가온다.
켈 선교사는 광저우 북쪽 백운산 묘지에 묻혔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회색 화강암이 덮인 묘지에는 중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청말 암울한 시기 정신병 환자는 가장 작은 자였다. 그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겼던 켈 선교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념도 편견도 무색할 뿐이다. 중국인들은 그의 묘비에 이렇게 새겼다.
“존 켈 선교사는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의사였다. 환자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켈 선교사는 끝까지 주님을 따랐으며 복음을 전하는 의사로 수많은 질병 속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구원했다.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장 40절).”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