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으로서 생을 마감하기 원했던 손중산(쑨원)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광저우 선교 200년] (14) “손중산 선생이 기독교인이었다고요?”

▲광둥성 중산시에 있는, 손중산 선생의 생가.
▲광둥성 중산시에 있는, 손중산 선생의 생가.

송경령과 결혼

기독교 성도들 중 부유한 상인들은 개인적으로 혁명 사업을 도왔다. 홍콩의 유력한 기업가들은 총기, 탄약 외에도 대규모 자금 지원을 했다. 손중산 선생은 1894년 여름 상하이에서 육호동의 소개로 송가수(宋嘉树, 1864-1918)를 만났다. 송가수는 광둥 출신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감리교 목사였으나, 후에 직업을 바꾸어 상하이의 부유한 사업가가 되었다. 송가수는 선교를 하면서 성경 등 작은 책자들의 인쇄 사업을 하였다. 중화민국 성립 후 손중산 선생과 같이 일본으로 피하기도 했다. 혁명 사업의 든든한 재정 후원자가 생겼다.

이 만남은 손중산 선생에게 개인적인 큰 변화도 가져왔다. 송가수에게 세 딸이 있었는데, 첫째 딸 송애령은 국민당의 재무부장을 지낸 재력가 공상희와 결혼했고, 송경령은 둘째 딸로서 1914년 손중산과 결혼했다. 송가수는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손중산과의 결혼을 반대해, 송경령을 가두기까지 했으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셋째 딸 송미령은 그 시대 또 다른 영웅인 장개석의 부인이 되었다.

▲송씨 가문의 세 자매는 근현대 중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송씨 가문의 세 자매는 근현대 중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이렇게 송씨 가문의 세 자매는 한 시대 중국 대륙을 풍미했다. 손중산 만큼 그의 부인인 송경령(宋庆龄, 1892-1981)은 중국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미국 웨슬리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 1912년 난징(南京) 임시정부 대총통이 된 손중산의 비서가 되었다. 1913년 제2혁명 실패 후 손중산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 후 1914년 일본에서 결혼하였다. 손중산 선생이 죽은 뒤 국공 합작에 노력하다, 국공이 분열하자 1927년 모스크바·베를린 등에서 머물렀다.

손중산 사후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은 송경령은 국가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그녀는 서거하기 2주 전인 1981년 5월 명예주석 칭호를 받았다. 이 직위를 받은 사람은 중국에서 그녀가 유일하다.

▲신해혁명 후 중화민국 임시대통령 취임식.
▲신해혁명 후 중화민국 임시대통령 취임식.

기독교인으로 서거한 손중산

손중산 선생은 1894년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크고 작은 아홉 번의 의거를 시도한 끝에, 마침내 1911년 10월 10일 청나라를 무너뜨렸다. 1912년 1월 1일, 손중산 선생은 중화민국 임시총통이 되었다. 그해 광저우로 내려와 박제의원과 해켓 여자의대 등의 졸업식에도 참석해 학생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당시 기독교 대학이었던 영남대학에도 들러 강연했다.

그러나 원세개를 비롯한 군벌들의 반혁명 세력에 의해 1년 만에 사임하였다. 손중산 선생은 호법운동, 국민당 창당 등 혁명의 성과를 지키려는 숱한 정치활동을 하였으나,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서거했다. 청국을 무너뜨려 만주족으로부터 한족을 구한 모세 역할을 하였으나, 한족을 이끌고 가나안까지 가는 여호수아의 역할을 완수하지는 못했다. 임종 시 그는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기독교도이고 하나님의 명을 받아 죄악의 악마와 싸웠다. 나는 죽을 것이고, 사람들이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아들 손과에게도 죽기 하루 전 자신이 기독교인이고, 악마와 40년 싸웠으며 너희들도 역시 이처럼 하나님을 믿으며 분투해야 한다고 유언했다. 손중산 선생은 죽는 순간까지 변함없이 주님의 길을 증거하며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주었다. 1925년 3월 19일 장례는 먼저 북경 협화의과대학 근처 교회에서 기독교 가족장으로 치른 후, 다시 국장으로 치렀다.

기독교, 의학, 혁명

▲손중산은 재정적 후원자였던 송가수의 둘째 딸 송경령과 결혼했다.
▲손중산은 재정적 후원자였던 송가수의 둘째 딸 송경령과 결혼했다.

손중산 선생에게는 여러 가지 호칭이 있다. 쑨원(孙文)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고, 손일선은 1883년 홍콩에서 미션학교를 다닐 때 받은 별호이다. 그는 서구인들과 잦은 교류를 하면서 손일선의 광둥어 발음인 ‘Sun Yat-sen’을 사용했다. 손일신(孙日新)은 미국 회중파 교회 하거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받은 세례명이다. 손중산이라는 이름은 정치가로서 혁명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얻은 이름이다. 일본 망명 시절 신분 노출이 되지 않기 위해 우연히 숙박업소에서 이름을 쓴 것이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쑨원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지만, 중국어권 전체로 보면 가장 흔하게 부르는 이름이 손중산이다. 기독교도보다는 정치가로서 더 알려졌기 때문에, 세례명 손일신보다 손중산이 널리 불리고 있다.

다양한 이름만 보아도 손중산 선생의 이력을 알 수 있다. 그는 중국 본토 태생이지만 하와이, 홍콩, 광저우, 일본, 유럽 등을 넘나들던 글로벌 인재였고, 해외의 성공한 화교들과 서양 선교사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다. 직업적으로도 혁명가, 의사, 정치가로 살았지만 그를 사로잡은 정신적인 지주는 기독교 신앙이었다. 홍콩, 대만과 해외 중화권 기독교계에서는 손중산 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손중산 선생은 기독교 신앙으로 의학을 배웠고, 의학을 배움으로 혁명을 했다. 기독교, 의학, 혁명, 이 세 가지가 그의 생애와 변화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늘 마음에 품은 채 서양 의학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잃지 않았고, 혁명이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는 간절한 당부 또한 멈추지 않았다. 이런 상호 관계의 표현이 바로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서술이다.”

혁명 활동지였던 교회

광저우에는 손중산 선생이 주로 활동했던 고향으로, 중산 기념당을 비롯해 곳곳에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중산로라는 길 이름과 중산대학, 황포군관학교, 대원사부 등 그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손중산 선생의 수많은 혁명 활동은 예배당에서 이루어졌다. 방촌의 신의회 독일 교회가 그 대표적이다.

이 교회는 손중산 선생의 혁명 단체인 흥중회 1차 의거 비밀 거점지였다. 독일교회와 부근의 비료회사는 비밀리에 무기와 식량 등 군용 물자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1903년 의거 계획이 탄로나 비밀 기관은 파괴되고 20여명의 혁명지사가 청정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의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혁명 정신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기독교 대학인 영남대학 교직원들과 찍은 사진.
▲기독교 대학인 영남대학 교직원들과 찍은 사진.

1807년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에게서 시작된 중국 선교가, 광저우에서 최정점을 이룬 때는 1926년경이었다. 당시 광둥성에는 영국, 미국, 독일 등에서 29개 교파가 선교 사역을 펼치고 있었고, 교회 1천여곳에 약 8만명의 신도가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말 민족주의 운동, 1930년대 이후 일본 침략과 내전을 거치면서 선교 여건이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양 선교사들은 추방되었고, 문화혁명 직전 교회는 51곳에 불과해 부흥기였던 1920년대의 1/20 수준으로 줄었다.

1960년대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교회들은 삼자교회로 통폐합되어 9개로 축소되었다. 서구 교단이 세운 교회는 거의 대부분 통폐합되어 기록에만 남아 있을 뿐, 옛 교회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조계지 안에 있어 보호되었던 사면당교회 외에 남아 있는 교회는 독일교회가 유일하다. 이 교회는 1882년에 독일신의회가 세운 것으로 허물어진 모습이긴 하지만 현존하고 있다.

2004년 광저우는 도시를 새로 건설하면서 독일교회 밑으로 터널을 만들어야 할 상황이었다. 오래 전 예배가 멈춘 독일교회는 많이 훼손되었으나, 역사적 가치 때문에 2005년에 광저우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광저우시는 허물 것이냐 보존할 것이냐를 놓고 무려 4년간 토론을 벌였다. 최종적으로는 보존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2008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터널 위 교회와 목사관 건물을 통째로 옆으로 이동한 다음, 터널 공사가 끝나면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기로 했다.

필자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공사가 시작된 2008년이었다. 손중산 선생의 혁명 유적지로 활용된 이유 때문에, 서구 기독교회에서 세운 교회 단지가 120년간 유지된 것이다. 독일교회 일대는 6동의 건물과 1동의 시계탑 예배당이 있는 독일신의회 본부이자 선교타운이었다. 교회 앞에는 주강이 흐르고 작은 부두가 있었다. 3,500평의 부지에 본당을 비롯해서 신학교, 전도사동, 행정동. 목사관 등이 주강을 본 채 일자로 늘어서 있었으나 본당과 목사관 행정동, 신학교 외에는 부속 건물들이 철거되고 있었다.

▲광저우 독일교회당. 손중산 선생의 혁명거점지이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아직까지 남아 있다.
▲광저우 독일교회당. 손중산 선생의 혁명거점지이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외장은 붉은 벽돌과 녹색 기와로 당시의 위용을 자랑했다. 예배당과 시계탑이 같이 있던 본당 건물은 이 타운의 중심동인데, 아쉽게도 고딕식의 뾰쪽한 시계탑은 문화혁명 때 훼손되었다. 독일교회 부근에는 존 켈 선교사가 세운 혜애정신병원과 메리 나일스 선교사가 만든 명심서원 등도 같이 있어 20세기 초 대단지 선교 타운을 이루고 있다.

기독교인 손중산을 통해 서구 기독교의 중국 선교는 이정표를 맞았다. 1세기 남짓한 시간 속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혁명 지도자를 키워냈다. 기독교의 중국 선교는 처음 27년 동안 겨우 10명만 개종시켰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반 세기 동안 기독교는 홍수전의 태평천국, 비록 사이비 기독교 반란 세력이었지만 청 왕조를 거의 뒤엎을 뻔했고, 또 다른 반세기를 거치면서 충실한 기독교인 혁명 지도자까지 배출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정직하고 신실했던 지도자 손중산 선생에 대해 지속적인 열망과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러워 한다. “정말 그가 크리스천이었어요?”라는 질문 속에서, 우리는 중국 복음화의 많은 희망을 읽을 수 있다. 참! 그분은 오묘하게 일하신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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