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8월 10일
본문: 마태복음 7:12
설교: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담임)
제목: 악마의 소굴로부터의 해방
최근 중국정부가 과거 군국주의, 제국주의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점령했던 기간에 중국에서 저지른 만행을 매일 한 건씩 공개하고 있습니다. 생체실험 같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지만 사람들을 산 채로 불살라 죽이는 끔찍한 일들을 자행한 사실이 그 일을 저지른 일본인들 자신의 자백을 통해 또 드러났습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가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일본군 장교들이 하루에 일본군 군도로 누가 더 많은 중국인의 목을 쳐 죽이는지 내기시합을 하곤 했던 사실을 접하고 분노에 치를 떤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들을 일본 군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너무나 많이 행했습니다. 사람이 어디까지 악마가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경우입니다. 정말 악마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일본인들은 즐기며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법질서를 잘 지키고 예의바르기로 소문난 일본인들이 어떻게 그런 악마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나라 안에서 자기 국민들끼리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예의를 지키며 법질서를 잘 지키도록 철저히 교육하고 훈련시키지만 다른 나라 특히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나라와 그 국민에 대해서는 우월의식을 갖게 하고 맘대로 짓밟고 빼앗고 죽여도 상관없는 것으로 가르쳤기 때문일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자국 안에서 자국민 상대로는 맘대로 발산하지 못했던 악하고 야만적인 본성을 외국인들을 향해서는 여지없이 드러내며 즐기려 한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도 일본 안에서는 그때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한국은 2등 국가다, 3등 국가다." 소리 지르며 "한국인들은 다 죽여라, 한국 여자들은 다 강간해도 좋다." 하는 구호를 외치며 대형 피켓까지 만들어 들고 떼 지어 동경 시내 한복판에서 내놓고 시위행진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현 아베 정권이 그렇게 국민을 교육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베 정권은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고 하며 교과서를 강제로 수정하게 하기까지 하면서 각급 학생들에게 일본의 우월성을 고취시키고 군국주의 시절의 만행들을 미화 또는 축소 조작하는 조직적인 국민의식화교육을 집요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군사대국의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언제든지 어느 나라하고도 전쟁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베 정권의 이러한 국정방향을 비판하는 양심세력들과 지성적인 목소리들이 일본 안에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의 목소리가 더 크지 못하고 다수 국민이 선거에서 아베 정권에 표를 던졌다면 아베 정권은 곧 일본을 대표하는 것이고 따라서 현재의 일본은 냉정하게 말해서 악마가 지배하는 나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69년 전 이런 악마적 국가의 강제점령과 억압통치로부터 해방시켜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고 다시는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본이라는 악마적 국가의 강제점령과 억압통치로부터 해방시켜주신 이 나라가 오늘날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최근 부대 안에서 선임병들에게 맞아 죽은 한 병사의 죽음을 계기로 속속 드러나고 있는 군대 내 병영생활의 관행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물론 일부이기를 바라지만 우리 군대 안의 내무반들이 악마의 소굴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언론을 통해서 연일 보도되는 군부대 안에서의 실상을 접하며 분노가 치솟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에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은 혼자만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위협적인 북한군과의 대치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동료이며 전우를 집단으로 때려 죽이는 군대를 어찌 군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유사시에 어떻게 서로를 믿고 하나 되어 적과 싸우겠습니까? 아무리 상명하복의 군기가 생명처럼 중요한 군대라고 하지만 후임병사를 그렇게 대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후임병사라고 하지만 한 인격을 장난삼아, 재미로, 심심풀이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그렇게 철저히 파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철저히 파괴된 인간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악마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때리고, 잠 안 재우고 때리고, 기절하면 깨워서 때리고, 피멍이 든 곳엔 약을 발라가며 때리고, 수액을 주사해가면서 때리고, 입 안에 냉동식품을 잔뜩 넣게 하고 때리기도 했습니다. 개도 먹을 때는 손 안 대는 법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을 개보다도 못하게 취급한 것입니다. 개보다 못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육체적 고문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내의가 다 찌어지도록 때리고 내의가 찢어지면 벗고 새 내의를 갈아입게 하면서 계속해서 때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치심을 겪게 한 것입니다. 치약을 한 튜브 다 먹게 하는 것도 모자라 풍뎅이도 먹게 하고 바닥에 토한 음식물도 핥게 하며 선임병들이 뱉은 가래침도 핥게 하고 화장실 변기도 핥게 하며 인분을 바른 손가락도 빨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온갖 행위를 강요했습니다. 성추행을 일삼고 후임병의 예금통장까지 빼앗아 그 돈으로 선임병들이 밖에 나가 성매매까지 하고 돌아오는 후안무치, 인면수심의 행위를 아무런 가책 없이 행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후임병사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입으로 자기 부모들을 욕하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일 수 없게 만드는 일을 강요한 것입니다. 인간파괴의 막장까지 간 것입니다. 오직 악마만이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 일들이 한 부대가 아니라 군대 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타 등 온갖 가혹행위와 수치심을 참다못해 자살하는 군인들도 종종 있습니다. 얼마나 참기 힘들었으면 제대해서까지 자살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우리 군대는 악마의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 군대 안뿐이겠습니까? 교도소 안은 어떻고 학교 안은 또 어떻습니까? 군대에서의 그런 악마적 행동들은 학교에서의 악마적 행동들의 연장선상에서 보다 심한 형태로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대학교의 신입생환영회 같은 자리에서 1,2년 먼저 입학한 선배라고 해서 신입생에게 강제로 담배 피우게 하고 술 마시게 하며 남녀 학생 간에 성적 수치심을 갖게 하는 동작을 강요할 권리를 누가 준 것입니까? 그런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폭행할 권리를 어디서 받았습니까? 지성의 전당이라 하는 대학가에서 그런 현상이 용납된다면 군대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최근에는 중학생이 임신한 교사의 복부에 폭력을 가하는가 하면, 여중생들이 같은 또래 여학생을 강제로 성매매 행위를 시키는가 하면 아예 죽여 버리고 그 범행을 감추기 위해서 죽인 여학생의 얼굴에 불을 지르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각종 교육기관부터 온통 악마의 소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악마적 소굴로부터 우리 어린 학생들과 젊은 병사들을 해방시킬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이런 악마의 위협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식 가진 부모들을 해방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번 집단구타를 당하고 죽은 한 병사의 일로 육군의 최고지휘관인 참모총장이 사임했습니다. 일부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물론 군대 내 폭력을 근절하는 데 보다 더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 보고하거나 조사를 철저히 하지 않거나 책임자를 엄격하게 벌하지 않아온 것이 이번 일과 같은 사고를 부르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아 직접적인 관련자에 대해서는 철저한 문책과 징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병사 한 명이 사고를 저지를 때마다 해당부대 지휘관뿐 아니라 국방장관에까지 이르는 지휘계통상의 모든 지휘관들이 옷을 벗어야 한다면 군대는 곧 와해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다고 일선의 병사들에게서 그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인간성이 악한 병사들은 고위 지휘관들이 옷을 벗고 안 벗고 하는 데 별 관심 없습니다. 계속해서 숨어서 그 짓들을 할 것입니다. 악마에게 무슨 양심의 가책이 있으며 정신 차리는 법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교육입니다. 사람이 개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법 아무리 바꾸고 규정 아무리 많이 만들어내도 달라질 것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래도 교육입니다. 가정에서부터, 학교에서, 나아가 사회전반에 걸쳐서 바른 인성교육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인성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누가 매 맞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면 남을 때리지도 말게 해야 합니다. 누가 수치스러운 일 당하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면 그 누구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을 하도록 강요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왕따 당하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면 남을 왕따 시키는 일을 절대로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회생활의 기본입니다.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런 일을 한 자들이 자기 행위에 대하여 철저히 책임지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회질서의 또 하나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들만 잘 지켜도 이 사회는 살만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 기본들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기본들만 잘 지켜진다면 자녀들을 학교에도 안심하고 보낼 수 있고 금쪽같은 아들들이라도 군대에 마음 놓고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고, 그러기에 가장 중요하므로 그것을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성경에서 황금률이라고 여겨지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사실상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들어있는 모든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기독교인의 윤리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한 황금률과 거의 동일한 윤리적 금언은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나 여러 타종교와 윤리사상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대부분 "당신이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적인 형태로 주어져있습니다. 이에 관련해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기원전 이십년쯤에 유대교로 개종하겠다는 어떤 사람이 힐렐이라는 유명한 랍비에게 와서 자기가 한 발로 서있는 동안 율법 전부를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핵심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요약해서 알려달라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힐렐과 쌍벽을 이루던 랍비 샴마이는 그 요구에 응할 자신도 없고 응할 의사도 없었기에 그 사람을 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힐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에게 가증스러운 것은 다른 그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다. 나머지 모든 것은 그 주석일 뿐이다." 즉 율법의 모든 계명은 "너에게 가증스러운 것은 다른 그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는 계명의 설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형태로 "당신이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하든 긍정적인 형태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든 그 근본 뜻은 일치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훨씬 더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행하기가 더 힘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중에서 "살인하지 말라." 하는 여섯 번째 계명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정신에 따르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그 계명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끊지 말라는 금지명령이 아니라, 사람의 목숨뿐 아니라 사람에 따라 자기 목숨만큼이나 아끼는 모든 것 즉 인격이나 명예나 자유나 행복이나 건강이나 재산이나 순결 등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는 적극적인 실천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그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유대교의 소극적인 명령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으로 재해석하시고 바꾸어놓으심으로써 유대교의 율법과 계명보다 훨씬 더 높은 윤리기준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은 남에 대한 더 큰 관심과 배려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남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배려는 결과적으로 자기가 받고 싶은 대접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받게 하는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우쳐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본이라는 악마적 국가에 의한 강제점령과 억압통치 하에서의 온갖 수난과 치욕으로부터 해방시키신 이 나라가 다시 악마의 소굴처럼 되어버린 이 지경에 그냥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안 됩니다. 마땅히 악마의 소굴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기본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황금률을 정말 황금처럼 귀하게 여기고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절대로 남에게 행하지도 말고 강요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인격과 명예와 자유와 행복과 건강과 재산과 가치관을 존중하고 보호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신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기를 열심히 가르치는 교육이 이 땅에서 되살아나야 하겠습니다. 교회에서뿐 아니라 각 가정에서, 각 학교에서, 사회전반에서 서로 사랑하기를 가르치고 실천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악마로부터 우리의 학교와 군부대 등과 우리 사회 전체를 해방시키는 첩경일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제2의 해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