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선교 200년] (15) 140여년간 중국 땅에서…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을 최초로 전파한 언더우드 가문은 잘 알려져 있다. 중국 광둥성에도 한국의 언더우드가와 같은 선교사 가문이 있었다. 노예스(Noyes) 가문이다.
언더우드가와 마찬가지로 노예스 가문의 조상도 영국계로, 17세기 미국으로 이주했다. 두 가문에서 나온 선교사들은 모두 북미장로회 소속으로, 한국과 중국으로 각각 파송되었다. 1837년부터 해외 선교를 시작했던 북미장로회는 동아시아로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고, 유독 두 가문은 유사하게 양국과 100년 이상 장기적 인연을 맺었다.
언더우드 가문은 1대가 1885년 처음 한국에 와서 2004년 4대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약 120년 동안 한국과 인연을 이어갔는데, 이처럼 노예스 가문도 1866년 처음 중국과 인연을 맺은 후 4대에 이르러 2003년까지 약 140년 동안 관계를 유지했다.
노예스 가문 선교사 1대는 헨리 노예스 목사와 헤리어트 노예스 여사, 마샤 노예스 여사 등 세 남매이다. 이들은 미국 오하이오주 세빌(Seville)의 가난한 농가에서 목사였던 아버지 바눔 노예스와 여권 신장주의자였던 어머니 워커 사이에 태어났다. 4남 6녀 중 세 명이 중국 선교사로 온 것이다. 다섯째가 어린 나이에 죽어 9남매로 알려지기도 했다.
둘째 아들인 헨리 노예스 목사가 1866년 가장 먼저 중국에 왔고, 여섯째 헤리어트 여사가 1868년, 그리고 넷째 마샤 여사가 1873년에 연이어 입국했다. 이들은 광둥에 기독교 학교를 세워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오빠인 노예스 목사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청말 격변한 남자교육
헨리 노예스(Henry Varnum Noyes, 1836-1914) 목사는 광둥 지역에서 유명한 남자 배영(培英)학교를 설립한 선교사였다. 그는 노예스 가문의 둘째로 태어났다. 신학을 전공했던 노예스 목사는 태평천국의 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중국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에 참가하여 북부군 군목으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 1866년 소형 범선을 타고 109일 만에 홍콩에 도착하고 곧 광저우로 들어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노예스 목사가 파송된 1866년의 광저우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혹독히 치른 후였다. 선교사들은 공식적으로 중국의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위험한 기운은 여전했다. 광저우의 선교 여건은 박제의원이 부흥하면서 의료 선교는 길이 열리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다른 쪽은 여전히 답보 상태였다.
처음 노예스 목사는 광저우 뿐 아니라 광둥성 내 도시인 남해, 연주, 동관, 신회, 해남 등에 선교 거점을 만드는 일을 넣고 발로 뛰었다. 광둥성 북쪽 도시인 연주는 반기독교 정서가 특히 거세기로 유명한 곳인데, 1872년 그곳에 노예스 목사가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노예스 목사는 광둥어에도 능했다. 광둥어 성경과 주석서를 만들어 현지인들에게 배포했다. 그가 외곽을 돌며 ‘선교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중국의 사정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개혁파에 의해 양무운동(1861-1894)이 일어났다. 서양의 것을 배워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였다. 서양의 과학과 공업 기술들이 들어오고, 다량의 서양 문헌들이 수입되었다. 또 학생들을 외국에 보내 선진 문물을 배우게 했고, 중국 내에도 서양의 근대식 교육이 도입되었다.
같은 북미장로회 마틴(William Alexander Parsons Martin, 1827-1916) 선교사는 노예스 목사보다 빠른 1850년 닝보(宁波)로 들어왔다. 그는 근대교육을 통해 중국인들을 변화시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믿었다. 1863년 북경으로 옮긴 마틴 선교사는 1869년부터 경사동문관(京师同文馆)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중국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 영어와 서양 학문들을 가르쳤다. 1898년 경사동문관은 경사대학(북경대학 전신)이 되었고, 황제는 마틴 선교사를 학장에 임명했다.
광저우에도 1864년 동문관이 설립되어 14세에서 20세 사이의 남학생을 받았다. 중국 정부가 이렇게 탈바꿈하고 있을 때, 선교사들 또한 학교 설립을 시도하고 있었다. 미션스쿨 설립은 선교사들의 숙원이었다. 광저우에 먼저 와 있던 북미장로회 해퍼 목사는 1850년, 남자 학교를 열었다. 1864년에는 신도학교를 만들어 전도사를 길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예산 제약 때문에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없어, 소수를 모아 운영하고 있었다. 주로 복음 사역을 도울 전도사나 조수들을 양성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1877년 상하이에서 선교사 대표 대회가 열렸고, 학교 교육을 통한 복음 전파가 가장 효과적임을 재확인했다. 1879년 노예스 목사는 광저우성 서문 근처에 안화당(安和堂)이라는 작은 남자 학교를 만들었다. 배영학교의 시작이다.
근대 남자교육의 산실 배영학교
학교는 발전해서 1888년 방촌 청송원(听松园)으로 이사했다. 노예스 목사의 교육 사역에는 일반 교육 뿐 아니라, 후에 협화 신학교의 발단이 되는 신학 전문 코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오늘날 중산대학의 시초가 된 격치서원도 한때 배영중학에 속해 있었고, 노예스 목사가 교장을 지냈다.
학교는 성경 교육을 기본으로 하면서, 생각하고 탐구하는 근대적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주요 과목은 성경을 비롯해 영어, 수학, 과학, 체육 등이었다. 노예스 목사는 수학을 잘해 학생들에게 수학 학습을 강조했고, 물리와 화학 등 과학 실습도 중시했다. 이것은 배영의 전통이 되어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지리와 역사 및 스포츠도 중시해서 학교는 활기가 넘쳤다. 배영 출신의 유명 과학자와 스포츠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중국의 남자들은 근대식 학교가 생기기 전에는 과거시험을 위해 서원이나 학당을 다니면서 공부해야 했다. 관청에서 하는 학당도 있었지만, 광둥 지역은 주로 가문이나 마을별로 서원을 만들어 후손들을 모아 집중적으로 공부를 시켰다. 주로 사서삼경의 고전을 공부했다. 중국 남학생들은 한자를 머리에 집어넣고 그 설명을 암기하느라, 수 년 동안 단조롭게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광저우 북경로에 오래된 서원이 모여 있는 유수정(流水井)이라는 골목이 있다. 이곳은 중국에서 청나라 중기 이후 가장 많은 서원 수를 자랑하는 곳이다. 과거에 합격하면 가문의 신분 상승은 물론이요, 세금을 면제받고 노역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일구통상의 영향으로 광저우에 많은 부자들이 생기자, 그들은 자녀들의 과거시험을 적극 도왔다.
실리에 밝은 광둥 사람들은 청말 근대식 교육이 들어오자 발빠르게 자식들을 미션스쿨로 보냈다. 십여년 후 세워진 기독교 대학 격치서원도, 사실은 상하이에 세우려 했으나 광둥의 유지들이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광저우에 세울 정도였다. 1905년에는 13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과거제도가 폐지됨으로써, 근대식 학교는 더 발전하게 되었다.
배영중학교는 리더십 훈련에서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현지 목사를 배양하는 것이고, 둘째는 기독교인 자녀들에게 바른 기독교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셋째는 기독교 학교의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당시 배영학교의 학제는 3단계였다. 초등 과정 3년제와 중학 과정 3년제, 그리고 신학원 과정이었다.
노예스 목사 사후 아들 윌리엄 선교사가 아버지를 이어 6년간 배영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1919년 윌리엄(William Dean Noyes, 1876-1958) 선교사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배영과 관련된 노예스 일가의 이야기는 방촌의 청송원에서 막을 내렸다.
설립자 선교사들이 떠난 배영은 중국인들이 맡아서 관리했고, 1934년 청송원에서 좀 떨어진 백학동으로 다시 학교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속>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