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의 언더우드가’ 노예스 가문 헤리어트 선교사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광저우 선교 200년] (17) 딸들에게 희망 주러 온 서양의 반고(盘古)

▲헤리어트 노예스 선교사는 중국 광저우 일대에서 55년간 헌신했다.
▲헤리어트 노예스 선교사는 중국 광저우 일대에서 55년간 헌신했다.

노예스 목사에 이어 중국에 온 노예스 가 사람은 헤리어트 노예스(Harriet Newell Noyes, 1844-1924) 선교사였다. 그녀는 노예스가 자녀들 중 여섯째로, 중국 근대 여성 교육의 대모라 불리는 인물이다.

이미 13세 때부터,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중국·인도 등에 가서 사역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인도로 가려 했으나, 오빠인 노예스 목사가 올케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어 이를 돕기 위해 광저우로 오게 되었다. 24살인 1868년 광저우에 도착해 1923년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55년간 중국의 여성들을 위해 일했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헤리어트 여사는 영민하고 부지런해 광둥어를 빠른 시간에 습득했지만, 현지 여성 전도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외국인 선교사에 의한 직접 전도보다 현지 여성들을 교육시켜 간접적으로 전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여성 전문 기숙학교를 생각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수천 년간 남성 중심 교육만 있었고, 여성들을 위한 교육은 무시되었다. 광저우에 온 지 3년 만에 미국 선교본부에 건의해 1872년 진광 여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북미장로회 여성선교단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다. 미국 종교계에서도 여성 권익 향상의 일환으로 ‘여성을 위한 여성 선교’가 강조되던 시점이었다.

중국 여성들에게 참 빛을 전한 진광학교

“참 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라는 말씀에서 따온 진광(真光)이라는 이름은, 암흑과 같던 근대 중국 여성들의 삶에 생명의 빛을 던진 것이 분명하다. 그 빛은 은빛별로서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베들레헴의 빛이며, 학교 배지에 새겨져 있다. 진광학교는 6명의 학생으로 시작했다. 초기에는 초등학교 수준의 여자 아동 및 성인반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사범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광둥성 여성 교육을 위한 교사 육성을 주도했다. 진광학교는 헤리어트 여사가 교장으로 봉직했던 45년(1872-1917) 동안 약 3,700명의 여학생(70%)과 성인반(30%)을 교육시켰다. 이들 중 1천명 이상의 여성 사역자, 3백여명의 교사, 150여명의 의료 인력을 길러냈다고 헤리어트 여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진광학교는 기독교 신자들만 교사로 뽑았다.
▲진광학교는 기독교 신자들만 교사로 뽑았다.

진광은 중국이 근대 국가를 만들어가는 시대에 여성 지도층을 길러냈다. 학교는 다녔지만 취직을 하지 않았던 나머지 약 2천명의 진광 졸업생들은 어머니와 아내가 되어, 중국 근대화를 이끈 남성들의 가정 교육을 도맡았다. 여성을 통한 여성의 전도가 진광학교의 당초 목표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여성을 통한 남편이나 아들의 전도도 훌륭한 성과였다.

중국의 근대 여성 교육의 효시는 영국인 선교사 알더시(Miss Mary Aldersey)가 1844년 닝보에 여자 학당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학자들은 한결같이 진광학교를 근대 중국여성 교육의 모범적 모델이라 평가하고 있다.

중국 여성 개혁의 중심에 선 진광학교

헤리어트 선교사는 미국 버밀리언 대학에서 보수적인 종교와 도덕적 훈련을 받았다. 진광학교를 운영할 때, 이 영향을 받아 엄격하게 여학생들을 지도했다. 헤리어트 선교사는 대학 졸업 후 남북전쟁에도 참전해 1,200명 이상을 수용하는 병원 관리 일을 맡았다. 이 또한 장차 진광학교를 관리하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진광 출신 학생들은 헤리어트 선교사의 엄격한 교육 방식으로, 졸업과 동시에 각 분야의 경쟁적 스카우트 대상이 되었다.

초기 학비가 무료에서 유료가 되었지만, 부모들은 자녀를 미션학교에 보내려 했다. 1898년 변법자강운동 등으로 서양식 근대 교육에 대한 열기가 사회 전반에 걸쳐 고조되고 있었다.

진광학교의 커리큘럼은 3년 과정으로, 교과 과정은 종교교육 위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의 전통적인 교육을 도입했다. 오전에는 주로 성경을 읽고 신앙 서적을 읽었다. 오후에는 공자, 맹자 등 중국 고전을 해설하지 않고 암송했다. 성경 교육 역시 중국의 전통 방식을 채용했다. 이해보다는 암송을 중시했다. 학생들은 기독교 문답 107개를 모두 유창하게 암송했다. 심지어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외우는 학생들도 많았다.

진광학교가 있던 광저우의 장제는 13행 지척에 있었으며, 같은 북미장로회 켈 선교사가 운영하던 박제의원과도 가까워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다. 진광은 학교에서 조를 짜 박제의원 부녀 병동의 환자들을 도와주고 그들을 위로하며 복음을 전했다. 박제의원은 초기에 의사들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봉건사상으로 여자 병동에 남자 의사들이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여성 의료진이 필요했다.

▲진광 학생들은 근처 박제의원 여병동에서 복음을 전했다.
▲진광 학생들은 근처 박제의원 여병동에서 복음을 전했다.

1879년부터 진광 여학생들이 처음으로 박제의원 의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많은 학부모들이 봉건사상 때문에 딸들이 의학 공부하는 것을 꺼렸지만, 진광학교는 이들을 설득했다. 의학생들은 낮에는 박제의학교에서 의학을 배우고, 밤에는 진광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박제의원 부설 교회였던 인제당도 진광학교와 연합했다. 진광 여학생들은 인제당 부흥에 큰 역할을 했다. 인제당은 주일이면 일반 성도, 병원의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진광학교 학생들로 자리가 꽉 찼다. 의료 사역의 부흥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제당에 와서 세례를 받았다. 훈련받은 진광 여학생들은 성가대를 했고, 주일학교를 맡아 아이들을 가르쳤다. 농촌에서 여자 성도들이 인제당 예배에 참석하러 오면 진광은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성경반을 열어 무료 강습회를 하기도 했다.

2차 아편전쟁 전후 중국의 사회상은 가난과 고통으로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다. 광저우 분위기는 우울하고 어둠이 깔려 있었다. 여성들의 삶은 더 고단했다. 가난한 집 여아들은 태어나자마자 강물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 혹은 첩으로 물건처럼 팔려 다녔다. 여자 아이들을 매매하는 가게나 중개상들이 공공연하게 거리를 활보했다. 불편한 전족 제도로 몸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장제 진광학교 내에 남아있는 피아노. 헤리어트 선교사는 일찍부터 학교에 피아노를 준비해 찬양을 직접 가르쳤다. 당시 진광 여학생들이 부르는 성가는 유명했다.
▲장제 진광학교 내에 남아있는 피아노. 헤리어트 선교사는 일찍부터 학교에 피아노를 준비해 찬양을 직접 가르쳤다. 당시 진광 여학생들이 부르는 성가는 유명했다.

헤리어트 선교사는 어렸지만, 진취적이고 대범했다. 학생들 교육에는 엄격했지만, 조혼과 정혼을 강제로 시키려는 봉건적 생각을 갖고 있는 사회와 부모들에 맞서 학생들을 보호했다. 보호자 없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키워 조수로 취직시켰다. 기억력이 좋았던 헤리어트 선교사는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워 그들을 세심하게 챙겼다. 학생들에게 엄했지만, 학생들은 그런 헤리어트 선교사를 잘 따르고 존경했다. 그 시대 누구도 자신들을 위해 그렇게 발 벗고 나서주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헤리어트 선교사의 좌우명은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그러나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였다. 그래서 그녀는 학생들에게 행하는 믿음을 늘 강조했다. 학교 교과 과정에서도 기독교 품성을 기르는 데 역점을 두었다. 학생들은 가난했지만 생활을 검소하게 하면서 봉사와 섬김의 정신을 배워, 주변 친척과 이웃들에게 행했다. 방학에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숙제는 전도를 하는 일이었다. 매일 믿지 않는 부모님과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하기 등의 숙제가 주어졌다. 용돈을 아껴 신앙 서적을 사서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헤리어트 선교사가 직접 설계했다는 장제 진광학교 건물은 현재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부속 건물이었던 조주 회관과 위장 서원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백학동 진광학교

오늘날 광저우에는 장제와 백학동에 두 개의 진광학교가 있다. 백학동 진광학교는 1917년 설립되어 고등과정과 사범반을 전문적으로 운영했다. 학교가 설립될 때 만든 진광당과 연덕당 건물이 남아 당시 모습들을 그려 보게 했다. 백학동 진광학교 안 곳곳에 설립자인 헤리어트 선교사를 사모하는 마음들이 느껴졌다. 제자들이 헤리어트 선교사의 얼굴을 본떠 만든 조각과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학교 기념일에 이미 할머니가 된 제자들이 학교를 찾아와 헤리어트 선교사의 조각상에 자신의 볼을 부비며 웃는 모습들은 사제 지간의 정을 흠뻑 느끼게 했다.

장제에 이어 백학동에 새로운 학교를 설립한 1917년, 헤리어트 선교사는 중국인 양녀 유심자를 교장으로 임명한 뒤 학교를 퇴직했다. 사실상 헤리어트 선교사의 학교 사역도 오빠 노예스 목사처럼 백학동으로 옮겨오기 전 장제에서 이미 마무리되었다. 유심자(刘心慈, 1871-1946)는 장제 진광학교 부근에 있던 인제당 교회의 유흥현 장로 딸이었다. 이미 6살에 성경의 많은 부분을 암송했다고 한다. 7살에 진광 학생으로 들어와 헤리어트 선교사 밑에서 공부했다. 13살 때부터 바쁜 헤리어트 선교사를 도와 기독교 교리를 가르쳤다. 헤리어트 선교사는 유심자를 양녀로 삼았다. 유심자는 헤리어트 선교사 퇴임 후 중국인 최초 교장을 역임한, 진광의 산 증인이다.

▲현재 진광학교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위장서원.
▲현재 진광학교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위장서원.

백학동 진광학교 후문과 백학동 배영 학교 후문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노예스 가문의 형제들은 각자의 사역 영역이 있었지만 서로 도왔다. 진광이 제일 먼저 설립되자, 노예스 목사는 다른 지역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하면서도 여동생의 진광학교 일을 안팎으로 도왔다. 그리고 장제 진광학교가 설립된 다음 해에 광저우에 온 언니 마샤도 헤리어트 선교사의 평생 동역자였다. 형제들 사역을 편의상 구별해서 소개할 뿐이지, 함께 이루어 낸 연합 사역이라 볼 수 있다.

광저우 주민들은 사이 좋은 남매들이라 학교도 나란히 세웠다고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은 헤리어트 선교사도 오빠인 노예스 목사도 알지 못했던 일이다. 배영이 이곳 백학동으로 옮겨올 때는 이미 헤리어트 선교사와 그 형제들이 죽은 후였다. 진광과 배영은 현재 아무런 관계 없는 독립적 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가르친 대로 살았던 여성교육가

홍콩에도 4개의 진광 계열 학교가 있다. 홍콩 진광학교는 1930년대 시작됐다. 일본이 광저우를 침략하자, 부득이 학교가 폐쇄되어 홍콩으로 학교를 이전했던 것이다. 일본의 철수로 다시 광저우로 돌아왔지만, 홍콩에 일부가 그대로 존속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은퇴 무렵 헤리어트 여사가 쓴 진광학교 45년사. 1919년 발간된 책을 2009년 재발간했다. 책 제목에서 중국을 ‘시님 땅’이라 표현하고 있다.
▲은퇴 무렵 헤리어트 여사가 쓴 진광학교 45년사. 1919년 발간된 책을 2009년 재발간했다. 책 제목에서 중국을 ‘시님 땅’이라 표현하고 있다.

1923년 5월, 몸이 쇠약해진 헤리어트 선교사는 55년간의 중국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근검절약한 태도로 학생들의 모범이 되었던 헤리어트 선교사는 평생 저축한 돈 3,500위안마저 학교에 기증하고 빈 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4년 1월 16일, 하나님 곁으로 갔다.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대로 행한 헤리어트 선교사의 삶은, 진광 출신 뿐 아니라 여러 중국인들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헤리어트 노예스 선교사는 그녀의 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바다를 건너 중국에 온 서양의 반고(盘古)였다”고 말한다. 반고는 중국 전설에서 여성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했던 훌륭한 여자를 말한다.

비가 며칠째 왔다. 날씨가 개이고 나무들이 기지개를 켰다. 광저우 시화(市花)인 목면화도 그 요염한 붉은색 꽃잎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색시 볼처럼 아리따운 자형화는 봄이 왔음을 알까? 눈치 없이 만개한 채 흐드러져 있다. 광저우는 꽃이 사시사철 지지 않는다고 해서 화성(花城)이라고도 한다. 환한 봄빛이 손에 내려왔다. 그 손끝에 분홍 꽃잎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꽃잎을 닮은 헤리어트 선교사의 사랑이 중국 여인들의 마음에 살아 있었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

123 신앙과 삶

CT YouTube

더보기

에디터 추천기사

정우성

“나경원 의원, 정우성 혼외자 논란에 생활동반자법 주장?”

동성 간 결합 문호만 열어줄 것 아이에겐 ‘결혼한 가정’ 필요해 시류 영합 치고 빠지기 식 입법 배우 정우성 씨 혼외자 출산 논란에 대해 저출산고령화사회부위원장을 지낸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이 비혼 출산 아이 보호 차원의 ‘등록동거혼제’ 도입을 주장…

정년이

<정년이>: 한국형 페미니즘과 폐쇄적 여성우위, 그리고 동덕여대 사태

는 웹툰 원작의 tvN 12부작 드라마로 1950년대 한국전쟁 후 유행했던 여성들만의 창극인 ‘국극’ 배우에 도전하는 ‘타고난 천재 소리꾼’ 정년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윤정년(김태리)을 비롯해 허영서(신예은), 강소복(라미란), 문옥경(정은채)…

개혁신학포럼

개혁교회, 성경적 이주민 선교 어떻게 할 것인가

개혁신학포럼 제25차 정기세미나가 11월 30일 서울 동대문구 서울은혜교회 교육관에서 개최됐다. ‘개혁교회와 다문화사회’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는 개회예배 후 최더함 박사(마스터스세미너리 책임교수)가 ‘다문화사회와 개혁교회의 사명과 역할’, 김은홍 …

한가협

2023년 신규 에이즈 감염 1,005명… 전년보다 5.7% 감소

남성이 89.9%, 20-30대 64.1% 감염 경로 99.6% ‘성적 접촉’ 男 56.7%가 ‘동성 간 성접촉’ 마약 주사기 공동사용 0.4% 2023년 신규 에이즈 감염자가 1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사)한국가족보건협회(대표 김지연 약사, 이하 한가협)가 질병관리청이 발…

샬롬나비

“한미 동맹 인정하면서, 그 산파 ‘이승만·기독교’ 부정하는 건 문제”

제29회 샬롬나비 학술대회가 ‘한미동맹 70주년과 한국 기독교’라는 주제로 11월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온누리교회 화평홀에서 개최됐다. 2부 주제발표회에서는 김영한 상임대표(기독교학술원 원장)가 ‘이승만의 기독교 정신과 건국, 한미동맹’을 주제로 강연…

통일비전캠프

“물 들어와야 노 젓는다? 통일과 북한선교, 미리 준비합시다”

북한 열리지 않는다 손 놓지 말고 복음통일 믿고 깨어 기도 필요해 주어진 시대적 부르심 반응해야 통일, 예기치 않은 때 오게 될 것 다음 세대, 통일 대한민국 살 것 이번 캠프, 새로운 역사 ‘트리거’ 비전캠프, 하나의 꿈 갖는 과정 치유, 평화, 하나 됨 사…

이 기사는 논쟁중

인물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