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선교 200년] (19) 남중국 대표 협화신학원
광저우 협화신학원 옛터는 백학동 배영학교 후문 근처에 있었다. 빈 공장 건물들이 모여 있는 동네를 들어서서 몇 개의 식당을 지났다. 그러자 옛 협화신학원 건물이 나타났다.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협화신학원이 불쑥 들어왔다.
광저우 협화신학원(Canton Union Theological College, 协和神学院)은 1914년 문을 열었다. 1913년 봄, 세계기독교청년회 회장이었던 미국인 존 모트(John R. Mott) 박사가 광저우를 방문했다. 1913년 모트 회의가 열렸고, 그는 각 교단들이 협력하여 전문 중국인 사역자를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트 박사가 이런 제창을 하기 전에도 광저우에는 사역자 양성 프로그램과 중국인 전문 사역자들이 있었다.
신학훈련의 업그레이드
1823년 양발은 중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당시 중국에서 신학 공부를 할 수 없어, 말라카에 있는 영화서원에서 사역자 과정을 밟아 목사가 되었다.
배영학교를 설립한 노예스 목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들은 1884년 1월 중국인 3명을 목사로 임명했다. 이들은 북미장로회 선교회 소속이었으며 배영학교에서 키운 이들이었다. 배영중학교에서는 일반 과정을 졸업하면 신학원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신학원은 갑과 을 두 과정으로 나뉘었다. 갑은 신학 전문과로 중학교 졸업 후 진학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교사나 목사로 임명받아 사회로 나갔다. 을은 전도반으로 초·중학교를 거치지 않고 진학할 수 있는 ‘성경학교’였다. 을의 연령은 30-40세 성인 남자들이었고, 2년 과정이었다. 대부분 교회 직원들이었다.
배영학교 뿐 아니라 각 미션스쿨들은 자체 양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 교파의 산발적 훈련 시스템으로는 시대의 필요를 따라 갈 수 없었다. 모트가 연합신학원을 설립하자고 한 1913년은 중국 기독교 역사상 중흥기에 해당한다. 의화단 사건 이후 선교 사역은 안정화되고 부흥의 불길은 더 타올랐다. 1914년 광둥성 987개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목회자 수는 2,541명, 신도는 48,347명이었다. 잘 훈련된 전문적인 목사와 사역자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양도 부족했지만, 질적 향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대부분 각 미션학교에서 열었던 신학반은 전도사를 양성하는 성경학교 중심이어서, 엄격한 규정도 없었고 임시적인 성격이 강했다. 신학 훈련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했고, 전문적인 사역자 양성을 위해 힘을 집중해야 했다.
‘따로 또 같이’ 연합신학원
모트 박사는 각 교단 대표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했다. 광저우에 있는 각 교파들이 연합해서 전문화된 고급 신학원을 설립하기로 했다. 배영학교 신학원은 이미 캐나다장로회, 네덜란드장로회, 미국동인회들과 연합해 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을 비롯해 성공회, 순도회, 런던회 신학반 등 8개 서양 기독교 교단이 먼저 뜻을 모았고, 후에 중화 기독교 화남 3개 자치연합이 참가했다.
우선 교단들은 각자 하고 있던 성경학교와 신학반을 정지했다. 신학원 설립 경비는 교단과 교회들이 각자 분담하기로 했다. 1914년 풀턴 목사 등 13명이 이사를 구성하고 영남대학 종영광 교수도 참여했다. 광저우성 서문 쪽 런던회 교회 본당에 임시로 신학원 교실을 마련했다. 이름은 ‘광저우 기독교고등협화 신도학교’로 했다. 교수들은 서양 선교사들과 일부 중국인 사역자들이 맡았다.
처음 학생들은 60여명 정도 모였으며, 대부분 각 교단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었다. 연합해서 학생들을 모으다 보니 연령도 40, 50대부터 천차만별이고 학생들의 수준도 높지 않았다. 게다가 개교를 한 곳이 번화한 시내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1915년 주강 건너 변두리인 백학동에 부지를 사서 새 학교를 짓기로 했다. 여러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1916년 6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백학동의 새 캠퍼스
백학동의 새 캠퍼스는 공동의 건물은 같이, 학생들 기숙사는 각 교파가 분담해서 지었다. 1916년 선교사 풀턴이 출자해 교실과 사무실을 지었다. 1918년 풀턴당이 완공되어 전교생은 백학동으로 옮겼다. 풀턴 목사가 백학동 신학원의 새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학교 이름도 ‘광저우협화신학원’으로 바뀌었다. 수업은 대부분 중국어로 하고, 영어반 희랍어 반을 따로 만들었다. 학생들 기숙사인 성안드레당, 양발당, 모리슨당이 차례로 완공되었다. 학교는 신학대학으로 기초를 다져갔다.
백학동으로 옮긴 후 학생들의 교육 환경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교육 성과는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1916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점차 학생들의 입학 인원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신입생을 두 종류로 나누어 선발했다. 하나는 교회 직원들을 훈련시키는 성경학교 과정이고, 또 하나는 신도학교 과정으로 목사들을 배양하는 신학전문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정착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신학전문 과정의 학생보다 성경학교 과정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성경학교 과정을 폐지시키자는 의견도 계속 나왔지만 1931년에 가서야 비로소 교과 과정이 신학 전문과로 통일되었다.
협화신학원은 개교한지 십여 년이 지나면서 일반 대학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 신학원 입학은 처음에는 쉬웠으나 정규반인 신학 전문과의 입학을 엄격하게 제한해 관리했고, 졸업 조건도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은 고급 수준의 전문 사역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신학생들 수업은 엄격했을 뿐 아니라, 실습 시간 또한 중시했다. 매주 18-22시간의 수업 이외에 별도 실습 과정인 10시간을 필수로 했다. 학생들은 일반인 전도나 주일학교 활동 등으로 실습을 했다. 4학년이 끝나면 1년의 견습 기간을 거친 후 졸업장이 주어졌다.
그리고 1925년 무렵부터 여학생들을 받았다. 여학생들은 광저우의 진광학교를 비롯해서 동남아시아, 그리고 홍콩 등지에서 왔다. 이첨애(李添媛, 1907-1992)는 협화신학원 졸업 후 성공회 교단에 의해 중국인 최초의 여자 목사가 되었다. 이 임명은 1944년 홍콩 마카오 총감 허명화가 했는데, 1948년 성공회주교회의에서 잘못된 임명이라 문제를 제기하고, 허명화와 이첨원의 사임을 압박했다. 거의 50년간 끌어왔던 이 논의는 1984년에 이르러 문제 없음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여자 목사에 대한 자결권을 존중하는 기류가 만들어졌다.
신학원에서 개설했던 과목들은 서양의 학문인 신학, 구약, 신약, 종교사, 종교교육, 종교철학, 전도학, 심리학, 성시학, 영어, 희랍어 등이 있었고, 중국 전통 과목으로는 중국 철학, 중국 문학, 중국 역사, 중국 종교 등이 있었다.
협화신학원과 기독교 영남대학
1938년 중일전쟁으로 광저우가 일본에 함락된 후, 신학원은 잠시 홍콩으로 옮겼다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중국 서남쪽 운남성에서 학교를 열기도 했다. 1942년에는 다시 광둥성 북쪽으로 옮겼다. 전쟁 후 1946년 협화신학원은 광저우로 돌아와 기독교 대학인 영남대학과 합병되었다. 영남대학의 공학부, 농학부, 문학부, 의학부에 뒤이은 신학부로 편입된 것이다.
영남대는 임시로 4개 교실을 협화신학원에 제공하고 1948년에 대학 동남쪽 빈터에 신학원 전문 건물을 지었다. 신학원 건물 안에는 예배당을 비롯하여 도서관 교실 행정실 등이 있었고 남녀 기숙사를 별도로 지어 명실상부한 영남대학의 일부가 되었다.
학제는 4년제와 5년제 두 종류가 있었다. 4년제는 신학원 시험 합격자에 한해 입학할 수 있었고, 졸업 학점을 딴 후 나머지 1년의 실습 기간을 거쳐 신학 학사증(L. TH.)을 주었다. 5년제는 영남대학의 일반 과정 학생들이 치르는 입학시험을 봐야 했다. 1-2학년 때는 일반 과목을 듣고, 3학년부터 신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학점을 다 이수하고 졸업 시험에 합격하면 영남대학 문학사( B.A.)와 신학원의 학사증(B.TH.)을 같이 주었다.
영남대학은 협화신학원과 합치면서 기독교 대학이라는 취지를 더 살릴 수 있었고, 합병된 후 공식 명칭이 ‘영남대학 협화신학원’으로 바뀌어 신학대학 칭호를 누렸다. 기독교 대학이었던 영남대학과 협화신학원의 관계는 긴밀했다. 영남대학은 협화신학원의 커리큘럼과 학생들의 성적을 관리하는 기준들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 영남대 도서관을 같이 쓴다든지 각종 학술에 관련된 일들을 협의했다. 영남대학 교수들 중 협화신학원 교수를 겸임하는 이들도 있었다. 두 학교는 1920년대 말부터 꾸준히 합병설이 나왔지만 영남대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협화신학원이 좀 더 안정되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영남대학은 미국 교단의 사역이었고, 협화신학원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 각국과 중국의 다국적 연합 사역이었다. 그래서 협화신학원은 영남대와 합병된 후에도 독립성을 유지해야 했다. 두 학교는 행정과 재정을 분리해 관리했다. 협화신학원은 광둥성 각 교회에 졸업생을 보냈고, 광서성 운남성 그리고 미국 등에도 전문 사역자들을 파송했다. 협화신학원은 점점 알려져 남중국에서 유명한 신학대학이 되었다. 1951년 협화신학원은 영남대학과 중산대학의 통합 과정에서 다시 분리되어 나왔다. 그리고 1959년 학교는 정지되었다가 1962년 다른 기구들과 함께 문을 닫았다.
협화신학원 옛터
협화신학원은 백학동에서 1918년부터 1938년까지 20년간 있었다. 중일전쟁이 끝나자 협화는 부지를 인근 배영학교에 넘겼다. 배영학교는 화지 청송원에 있다가 1934년 학생 수가 늘어 백학동 협화신학원 근처로 옮겨왔던 것이다. 1960년대 문화혁명을 거쳐, 1970년대 백학동 신학원 건물은 제약공장으로 이용되었다. 현재 제약공장은 철수하고 건물은 비어 있다.
백학동 협화신학원 옛터를 찾게 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협화신학원 옛터를 찾아다녔지만 발견되지 않아 철거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배영학교에서 진달권 선생으로부터 협화신학원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노인이 한 명 죽는 것은 도서관이 불타는 것과 같다’는 격언처럼, 진 선생은 배영의 역사에 대해서만 인터뷰했으나 근대 중국 선교 역사를 많이 알고 계시는 분이다. 시간상 몇 번밖에 만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노인들이 살아계실 때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도 우리의 할 일 같다.
배영학교에서 취재를 풍성히 하고 돌아가는데, 한 군데만 더 가보자고 했다. 쉬에허(협화)라는데, 무슨 말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피곤하면 중국어가 잘 들리지 않는다. 종일 취재를 해서 피곤하기도 하고, 해가 저물어 시내가 막히기 시작하면 언제 집에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취재를 도와준 진달권 선생이 “김 선생이 가 보면 정말 좋아할 것”이라는데, 나는 되레 다음 기회로 하면 안 되냐고 슬그머니 빼고 있었다. 선생이 부탁을 하고 내가 주저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도대체 어디를 가자고 하는 것이지? 머뭇거리다 멀리 있느냐고 물었다. 걸어서 금방 갈 수 있는 거리라고는 했지만, 약간 걱정도 되었다. 왜냐하면 중국 사람들은 금방 닿는다 해도 때론 30분이고 한 시간이다. 말하는 습관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인터뷰하느라 하루종일 귀한 시간을 내주신 고마운 선생님이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정말 금방 도착했다. 배영에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협화신학원이 있었다.
입구에 협화신학원이라는 표지판을 보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찾고 또 찾아다녔던 협화신학원, 안 보여서 철거된 줄 알았는데 여기 이렇게 숨어있었다. 진 선생도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셨다. 서로 통한다는 것만큼 행복한 교류가 있을까.
이미와 아직 사이
신학원은 교학동을 비롯한 3개 동이 빈 건물인 채로 남아 있었다. 교학동은 아마도 제일 먼저 세운 풀턴당 같았다. 자료사진을 보면 이 건물은 기와지붕에 벽돌 건물의 단아한 2층 건물이고, 중앙 문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와지붕도 없어지고 십자가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앞에 나무가 우거진 작은 연못이 있는 정원도 있었는데 현재 시멘트 바닥 뿐이다.
주인이 떠난 빈 건물을 둘러볼 때면, 부모 잃은 고아를 보는 듯 마음이 시려온다. 붉은 벽돌로 된 벽은 세월의 묵은 때가 쌓여 거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교학동 앞에 협화신학원 옛터가 광저우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1986년 협화신학원은 다시 복구되고 동산당 교회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 사면의 성공회 건물로 옮겼다.
그리고 2001년 11월 백운산 자락에 새 건물을 지어 정착했다. 이름도 신학원의 역사와 전통을 감안해서 광둥협화신학원(Guangdong Union Theological Seminary)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광저우에서 일하시는 한국 선교사들과 함께 다시 협화신학원 옛터를 찾았다. 마침 우리가 간 2013년은 협화신학원이 설립된지 1백년째 되는 해였다. 신학원 앞뜰에서 올린 우리의 기도는 특별했다. ‘이미’ 지나간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일 속에서, 모두 마음이 숙연해졌다. 어느 시인의 시가 스쳐간다.
“…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