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삼 목사 설교] 영국의 선구적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날짜: 2014년 9월 21일
본문: 디모데후서 3:16-17
설교: 김병삼(만나교회 담임)
제목: 영국의 선구적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개혁 속으로…
종교개혁의 현장들을 돌면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루터의 생가에 새겨진 글이었습니다.
“시대를 거스르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다.”
이 시대에는 두 개의 흐름이 있는 듯합니다. 개혁을 시도하는 세력과 개혁을 거스르는 사람들이죠.
개혁 앞에서 개혁의 대상의 되는 단체나 개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개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습니까?
위클리프가 로마교회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돌렸을 때, 문제는 그 개혁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려고 했다는 것이죠.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오히려 상대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죠.
그렇게 역사는 흘러왔고 그래서 개혁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혁자인가? 아니면 개혁의 대상인가?”

시대를 거스른다는 것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모든 것에 반항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세상에 대해 거스름이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 우리가 개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고 있지 못함에 대하여 거스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적어도 그 거스름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개혁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보겠지만, 개혁자들의 모토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 시간 위클리프에 대해 삶을 돌아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지난주에 오랫동안 다른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등록하신 가족과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장로님 중에 한 분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시집간 딸이 잘살았으면 좋았는데, 그만 이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장로의 딸이 이혼한다는 것이 잘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숨겨오다 교인들이 알게 된 것이죠.
논쟁이 일어났답니다.
“계속해서 장로직을 수행해야 하는가? 아니면 장로직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이 이야기는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법들이 율법이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정해놓은 법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빼앗아 버렸다는 생각 말입니다.
교회가 이혼을 해도 된다고 가르치는 공동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이혼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이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온전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말씀으로 양육하고 가르치지만,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때로는 실수한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수에 대하여 기회를 주시지 않았다면 누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교회의 법을 깰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부터 우리는 개혁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위클리프의 개혁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씀인 듯합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존 위클리프는 당시 부패와 세속화에 빠져있던 중세교회에 말씀 선포와 성경적인 교리로 강력히 도전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중세교회처럼 점점 부패와 세속화에 깊이 빠져 있어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영적 침체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때에 이제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먼저 말씀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죠.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리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약 1320-1384)는 1320년경 영국의 요크셔 (Yorkshire)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발리올 (Balliol) 대학에서 수학하여 석사 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심령에 큰 변화를 받은 위클리프는 1338년 19세에 회심하게 되었고, 회심 후 그는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전파하기로 하면서 자신의 전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바치기로 헌신합니다.

14세기 영국은 기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며 타락한 모습을 보이던 때입니다.
사도 시대의 특징이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 능력 있는 기도생활, 견고한 믿음, 항상 깨어있는 영성, 주님 사랑 등의 영적인 것이었다면, 당시 영국교회는 주교들과 수도사들의 무지함으로 저급해지고 더럽혀졌으며, 더 나아가 교회의 참된 교리와 죄의 세력, 칭의, 인간의 무능함, 하나님의 은혜, 강한 믿음 등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주교(bishop)들과 각 마을의 사제들은 결혼식, 세례식 등을 주관하였지만 설교하는 것은 그들의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영국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로 인해 고통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교황은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머리이다.”라고 말하였고, 교황을 중심으로 한 계급주의가 교회에 뿌리 잡고 있었습니다.
또한, 거짓 교리와 부패와 면죄부 판매 같은 관행들이 날로 증가하였으며, 성직자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공표한 것 외에 다른 것은 거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교황청은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 권력까지도 장악하여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고, 교황들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권이 복음을 찬탈한 것이었죠.
당시 교회는 영국 전 토지의 거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었고 교회의 수입은 당시 나라의 수입보다 약 2~3배가 많았습니다.
교회에 부가 많은 이유는 돈 많은 귀족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줄 뿐 아니라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해서까지 미사를 드려준 데 대한 대가와 연옥에 대한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많은 부를 교회에 헌납했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95개의 반박문을 내걸기 전에, 14세기에 먼저 부패한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사람이 바로 존 위클리프입니다. 위클리프는 항상 성경적 핵심 교리를 선포하였는데 그의 성경적 교리의 가르침은 당시 부패와 세속화에 빠져있던 교회에 강력히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모든 교리와 실천을 거부하면서 잘못된 신앙과 가톨릭 교회 교리의 해악을 세상에 들추어내기 시작합니다.
교황에 대해 위클리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인간인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교황은 적그리스도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확신하며 사람들의 손에 성경을 쥐여주기 위해 번역을 시작합니다.
당시 라틴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일반인들이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당시 로마 교회는 성경 번역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었으며 번역자들을 처벌해 왔습니다. 하지만 위클리프는 성경을 번역하는 일과 자신의 생명을 바꾸었습니다.
드디어 1382년 위클리프와 제자들은 최초로 라틴어 벌게이트 성경 전권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간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위클리프 성경 (The Wycliffe Bible)입니다. 성경 전체가 영어로 번역된 것은 1,000년 만에 처음 있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최초로 영국 백성에게 영어로 번역한 성경을 건네준 사람이었습니다. 위클리프 영어 성경은 영국의 종교개혁과 부흥에 불을 지피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1384년 12월 31일 위클리프는 마지막 목회지 루터워스 (Lutterworth) 목사관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루터워스의 교회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콘스탄츠 공회를 열어 위클리프의 성경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미 죽어 무덤에 안치된 위클리프의 유골을 캐내어 불사를 것을 결의합니다.
그가 죽은 지 44년이 지난 1428년 당국은 위클리프의 유해를 무덤에서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웠습니다. 그들은 뼈를 태운 후 그 재를 스위프트 (Swift) 강에 뿌렸습니다. 하지만 위클리프의 재는 개혁과 부흥을 위한 불씨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 및 열매는 결코 태울 수 없었던 것이죠.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들…
복음의 본질이 세속적인 것에 물들 때, 개혁의 대상이 됩니다.
사실 개혁이라는 것은 개혁이라기보다는 본래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위클리프는 특별히 교회의 권력이 세상의 부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비판을 하고 나섰습니다.
교회는 부를 소유하는 곳이 아니라, 나누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결국, 우리의 신앙이 잘못되는 것은 소유하지 않을 것을 소유하려고 생각하면서,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생각하면서 타락해 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는 우리 신앙의 몇 가지를 짚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십일조에 대한 문제입니다.
십일조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말라기 3장 8~10절의 말씀이죠.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곳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화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대부분 요지는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이죠. 그래서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십일조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되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강조점이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죠.
이 말씀의 본래 의도는 부패한 성전과 제사장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직하지 못한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의 본문은,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예로 들어 정직을 회복하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십일조는 정직과 신앙에서 하나의 표징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십일조는 레위기 27장 30~33절, 민수기 18장 21~32절, 신명기 12장 5~18절, 신명기 14장 22~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농사를 짓고 있었기에 그 결실 중에서 10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당시 자급자족하던 농경사회와는 달리 오늘날 자신의 소득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십일조는 정말 만만한 액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소출 중 열의 하나를 정직하게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가르치며 “정직한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액수보다 큰 것을 채워주십니다!”라고 설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이야기해서 십일조는 그런 의미가 아닌 듯합니다.

교회의 타락이 무엇일까요?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인 온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교회의 예산을 늘리기 위해 강조한다면, 그래서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해서 축복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면, 중세교회의 타락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교회를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고, 교황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헌금을 강조한다면, 말라기의 말씀처럼 정직하지 못하고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질책의 말씀이 아닐까요?

저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봅니다.
교인들이 헌금을 많이 하고, 정직하게 십일조를 해서 교회의 예산이 늘어나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동기로 헌금을 강조한다면 그 헌금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쓰일 수 있겠습니까?

올바른 하나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모든 소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린다면 분명히 손해를 볼 것입니다. 십일조를 떼어낸 만큼 남는 부분이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 이 부분입니다.
우리의 수입 중에 일부를 떼어 놓고 손해를 보아도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축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이 돈을 의지하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돈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믿음의 경계선이 십일조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결단이고,
교회적으로는 그 돈이 정직하게 쓰이고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중세시대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을 협박합니다.
너희가 면죄부를 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리라고 말입니다.
마치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나머지 아홉도 하나님이 거두어갈지 모르니까 십일조를 하라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정직하게 설교해서는 사람들이 움직여질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좀 협박도 하고 축복도 이야기해야 지갑을 열 것 같습니다.
이 순간부터 “신앙”이 “종교”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교회라는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장사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가치가 영원한 것에 있다면,

“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남는 것이 줄어들어도 정직하게 십일조를 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우리를 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일조를 하는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러나 제 설교를 오해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 살아가도록 놔두시는 것이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손해를 보느냐 축복을 받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고백이 먼저라는 말입니다. 십일조는 단순히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아홉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처음으로 십일조를 할 때 찾아왔던 두려움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내 수입에서 열중의 하나를 떼어놓고 보니 그것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저축한다면 노후가 든든할 것 같기도 합니다.
열의 하나를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생을 훨씬 즐기며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런 것으로 우리의 인생이 절대로 풍요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을 즐긴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소유가 쌓아가면서 인생의 만족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을 든든하게 보호해주는 보험 역시 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고, 내 삶을 보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십일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지 않는다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우편의 그늘이 되사 나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낮의 해도 밤의 달도 나를 해치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며 모든 것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삶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지만, 그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우리의 노력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입의 십의 하나가 무척 커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보다 크지 않습니다. 그 돈이 우리에게 신뢰를 줄 것 같지만, 하나님보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돈을 믿지 않고 살겠다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고백 말입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이제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에 발걸음을 떼어놓는 것입니다. 

중세교회가 타락한 것은 헌금을 믿음의 고백이 아닌, 교회의 부의 수단이 되게 한 것입니다. 교회는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고, 돈을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런 이유로 세우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클리프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법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재산 소유권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이것은 사도적 가난 때문에 요구되는 영적 가난을 실현하는 데 더 좋은 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교회는 물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물로 분배해야 하는데 교회사의 전환점은 교회가 그 토대 위에서 가이사의 세속 지배권을 소유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위클리프는 아주 급진적인 주장을 합니다.
교회가 타락했다면 세속적인 권력이 교회로부터 이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를 보는 듯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해야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교회의 타락 가운데서 하나님은 늘 누군가를 세우셔서 새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2,000년의 역사 가운데 교회가 잘 못 가는 것 같으나 다시 그 길을 찾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 많은 고민을 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을 묻고 계시는가?
제와 우리 교단이 속한 “감리교”의 자랑이 있었습니다. 감리교에 속한 모든 교회는 교회의 재산을 교단에 속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사유물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감리교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재산은 교단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단이 모든 교회의 재산을 소유하고는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고, 그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권력집단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돈이 모이는 곳에는 욕망도 함께 모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심각하게 고민하고 기도합니다. 감리교단에 속한 모든 재산이 없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는 그곳에 욕망의 근거지가 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유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을 자랑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신기한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하고 나자 자신의 소유들을 내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 돈을 가지고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2장 43-45절,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신앙이 없는데도 그런 삶을 동경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재산을 팔아서 흉내를 내려고 합니다.
다 내자니 아깝고, 그래서 일부를 숨기고 제자들에게 찾아옵니다.
만일 교회가 그 돈에 가치를 두고 있다면 그 반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초대교회 공동체는 돈의 액수가 아닌 믿음의 고백이 중요했기 때문에 거짓으로 드리는 헌금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양심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것 때문에 무서운 화를 당하게 됩니다.

조금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물질에 대한 생각과 헌금이 무슨 의미인지를 말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며 잠시 수능을 보는 수험생들을 위한 기도회를 인도하러 내려갔습니다.
많은 엄마가 아이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울며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왜 부모들이 그렇게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만일 부모들이 기도한다고 아이들이 수능을 잘 보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이유가 이 순간 부모들의 불안한 마음이 위안을 받고자 하는 것일까요?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그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아이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의 뜻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길을 내시며 사막의 강물을 내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God will make a way”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광야에서도 길을 내시고 사막에서도 강을 만드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하늘과 땅이 변해도 주의 말씀이 영원히 나의 삶 속에 역사할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시니 나의 가는 길을 그분이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불안해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이 경쟁사회 속에서 언제나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
위클리프의 종교개혁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동일하게 무서운 채찍으로 다가옵니다.
당시 로마교회가 아무리 자신의 권위를 주장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것은 어떤 효력도 없습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에게 있어서 교회론은 당시 로마교회와 확연하게 차이를 보여줍니다.
로마교회는 세례를 받아 가시적인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제도적 교회를 주장하는 반면,
위클리프는 참된 교회란 제도교회에 속하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주장합니다.
교황, 추기경, 주교들, 사제들, 수도사들, 탁발수도사들의 어떤 직분도 참된 교회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습니다. 교회란 제도가 아니라 성서의 권위를 가지고 ‘참된 교회’가 판별될 뿐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란,
교회가 지켜야 할 모든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으며 신령한 메시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제의 역할은 성사를 집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1378년 가을 교황청이 둘로 갈라집니다.
이유는 권력에 대한 쟁투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타락에 명확한 증거입니다.
한국 교회를 보면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분열이 일어납니다.
창피한 일이지만 이 조그만 땅에 그것도 감리교라는 제도 안에서 서로가 감독이 되겠다고 연회를 10개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열 명에 드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아서 감독 회장이 되겠다고 싸우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성스럽게 보장받아야 할 교회의 권위가 이제는 세상의 법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싸움도 성에 차지 않아 세상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권력을 잡으려고 합니다.
분명히 교회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위클리프에게 비친 당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는 성경은 진리이나 교황은 거짓을 일삼는 것, 그리스도는 가난을 사랑하나 교황은 세상의 권력과 부를 사랑하는 것 등 적그리스도의 11가지의 특성을 열거합니다. 그는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진 교황은 교회의 정당한 지배자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혼탁한 시대에 위클리프가 선지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경관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영원한 진리란 제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의 책이요, 하나님의 법이므로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교황과 공의회의 결정은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이 시대를 보면서 위클리프의 종교개혁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교단마다 총회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곳에서 결정되는 것이 교회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교회를 섬겨야 할 제도가 섬김을 받으려고 개 교회와 사람들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교단이라는 공룡과 같은 제도는 이제 교회에 돈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만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개혁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제 쓰임 받을 이유가 없다면 없어져야 합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인간의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교회는 교회가 아닌 ‘법정’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권위에 위배되거나 조직의 권위에 따르지 않으면 가차 없이 심판을 하고 권위에 굴복시키려 했습니다. 교회의 권위에 위배되는 것은 어떤 것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성경을 보면 볼수록 얼마나 교회가 성경과 멀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거나 따라가는 것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위클리프가 한 가장 큰 공헌이 있다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위클리프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됩니다.
성경은 완전한 진리이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읽고 연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나라의 고유 언어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위클리프가 한 시대의 개혁자가 될 수 있었던 것, 그가 교황청에서 발급한 면죄부에 대하여 담대하게 반기를 들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의 진리도 면죄부를 통해 연옥에 있는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가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붙드는 한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된 것에 대하여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할 종교개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행위들이 물질의 보상으로 생각했던 것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보상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상이 아니라 ‘생활’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믿음을 보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보상이 세상의 맘모니즘과 같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사단의 세력들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성경이 우리를 가르치게 하라고 말입니다.
성경을 벗어난 어떤 권세도 우리를 억압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성경이 진리는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종교 개혁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 앞에 우리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말씀의 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 법의 권위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죽어서도 다시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훼손당하면서도 성경의 권위를 외쳤던 한 사람의 개혁으로 인해 우리 손에 성경이 들려 있습니다.
그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말씀대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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