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선교 200년] (22) 서로 모여 예배하며 떡을 떼며 나누고
광둥은 화교들의 고향이다. 현지 친구에게 친척 중 화교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사돈에 팔촌까지 생각하면 광둥 사람 중 화교와 관련 없는 집이 없을 거라며 웃었다.
청말 광둥에서 외국으로 간 화교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파산한 농민이거나 인력 수출 명목으로 돈 벌러 나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혹은 정치 박해를 피해 망명한 이들도 있었다.
미국으로 간 화교들은 그곳에서 기독교 성도가 되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고국을 위해 봉사한 이들이 많았다. 화교들은 청 왕조를 반대하며, 혁명을 통한 중국 근대화를 꿈꾸었다. 성공한 화교들은 손중산 선생이 주도하는 신해혁명의 적극적 지지자들이었다. 혁명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화교들의 희생이 중국 근대화에 깔려 있다.
이런 진취적인 화교들이 만든 기독교 촌락이 광저우에 두 군데 있다. 한 곳은 기립촌이고 또 다른 곳은 동산이다. 강 남쪽인 하남 지역의 기립촌은 1903년 감리교 화교들이 만든 마을이었고, 동산은 이보다 좀 늦게 들어온 침례회 쪽 화교들이 만들엇다. 그리고 기립촌은 화교들 스스로 만들었지만, 동산은 미국 침례회 교단과 화교들이 연합해서 이룬 동네라 규모도 훨씬 크고 조직적이다.
광저우 최초의 기독교 촌락 기립촌
광저우 명문인 중산대학에서 서쪽으로 차로 10분 정도 달리면 기립촌(基立村)에 도착한다. 기립촌은 미국에서 돌아온 감리교 화교들이 광저우에 최초로 만든 기독교 촌락이다. 해주구 전진로(前进路)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백년이 넘은 유서 깊은 곳이다. 1903년 유월동·이요한 등 미국 감리교 성도들이 주강 남쪽에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그들은 먼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돈을 모아, 마을 서쪽에 붉은 벽돌 벽에 녹색 기와를 얹은 작은 예배당인 숭진당(崇真堂)을 만들었다. 교회 낙성식을 할 때, 사람들은 성경에서 기립(基立)이라는 두 글자를 발견했다. “여기를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열왕기상 17장 3절)”에서 그릿(Kerith) 시냇가의 발음을 본떠 중국어로 표현한 말이 기립이었다. 한자 의미상 ‘기독교로 서자’라는 뜻도 품고 있어 동네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기립촌 부근의 길 이름은 기립남가, 기립북가, 기립중가 등 모두 기립으로 통한다. 당시 해외로 돈벌이를 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그들은 돈을 벌어 고향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을 위해 예쁜 집을 짓고, 서로 모여 예배하며 나누고 사는 신앙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한 곳이 기립촌이었다.
기립촌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남자들은 돌아왔다가 다시 외국으로 나가서 돈을 벌었다. 남은 부녀자들은 아이들을 키우며 기립촌에서 살았다. 예배당 한편에는 자선 유아원도 만들어 운영했다. 아이들은 예배하기를 좋아했다. 기립촌 초창기 후손들이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들은 성경을 암송하고 찬송을 불렀던 주일학교를 그리워했고, 예배 때 나눠주던 과자나 사탕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성탄절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집 앞에 와서, 종을 울리면 뛰어나가 선물을 받았던 추억을 그리워했다.
우상숭배 금지 등 엄격한 규정
기립촌에 대한 소문은 해외로 퍼져 나갔고, 많은 화교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기립촌 부근은 한적한 변두리였다. 논과 과일 나무 사이에 한두 칸씩 짓기 시작한 집들은 점점 불어나 마을을 이루었다. 기립촌의 벽돌집들은 아담하고 정겹다. 집들마다 작은 화원과 베란다, 그리고 창문을 만들었다. 앞 정원에는 꽃을 심고, 뒤 화원에는 채소를 심었다. 처음에는 사방에 철조망을 둘렀고 두 개의 출입문을 만들었다.
마을은 마을관리위원회를 만들어 관리했다. 그리고 화교 성도들은 촌락의 공공 규정을 엄격히 정했다. 주민들은 반드시 기독교 성도들이어야 했으며, 우상숭배하지 말 것, 향불을 올리지 말 것, 마을 내에서 큰소리로 싸우지 말 것, 그리고 폭죽을 터트리지 말 것 등으로 조용하고 정결한 마을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마을의 중심인 교회에 모여 공동으로 동네 일을 의논하고 해결해 나갔다. 화교들은 스스로 힘을 모아 해외 교회들의 찬조를 받거나 중국 내 인사들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일조했다.
1917년 손중산 선생이 기립촌 가까이 있던 강변의 시멘트 공장을 개조해 대원사부(大元帥府)를 설치하고, 정치 활동을 했다. 많은 혁명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기립촌에는 정부 관리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1930년대 초 주강을 가르는 해주대교가 개통되어 강의 남북이 이어졌고, 기립촌의 정적은 깨졌다. 중일전쟁 때는 집들이 일본군의 실험실로도 사용됐다.
1960년대 문화혁명 기간 동안에는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현재 기립서가 1호에 있는 숭진당은 예배가 회복되지 못한 채 아직도 비어 있다. 1912년 세워진 성경학교 옛터는 전진로 학원항(学院巷) 2호에 있으며, 현재 유치원이 들어서 있고 2008년 광저우시 보호문물이 되었다. 화교들이 살았던 보리수나무 아래 작은 벽돌집들도 해주구 보호문물이 되어 화교들의 꿈을 기리고 있었다.
중국 내 상황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돌아왔던 기립촌 화교들도 다시 해외로 나갔다. 기립촌 가옥들도 다른 이에게 세를 주게 되었다. 마을 규정 중 반드시 기독교 신도여야 한다는 조항은 무너졌지만,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큰 소리로 싸우지 않는다는 전통은 아직도 남아 있다.
선교사와 화교들의 연합으로 시작된 동산
광저우 동산(东山) 지역은 아름다운 동산호 공원을 끼고 주강 북쪽에 있다. 광둥의 명문학교들이 몰려 있어 광저우의 ‘8학군’으로 통하는 곳이다. 20세기 초 미국 남침례회가 이곳에 들어왔다. 이들을 뒤따라 미국의 침례회 화교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신앙촌이 생겼다. 오늘날로 보면, 작은 신도시가 개발된 것이다. 미국 남침례회와 동산지역 개발은 종교지리학의 전형적 사례로 알려질 정도로, 둘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동산은 원래 광저우 성의 동문 바깥을 가리킨다. 산과 언덕이 있던 곳으로, 20세기 초까지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19세기까지 광저우 시민들은 광저우 성을 중심으로 13행이 있는 서문과 남문에 밀집해 살았다. 동산은 크고 작은 언덕과 바위들이 이어지고 산림으로 덮여 있는 목초 지대였다. 침례회는 1907년 동산에 땅을 사서 교회와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미국 남침례회는 비교적 빨리 광둥으로 들어왔다. 1836년 셕(Jehu Lewis Shuck, 1812-1863) 목사가 마카오에 도착했고, 1844년 로버츠 목사와 같이 남문 일대에서 중국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로버츠 목사는 앞에서 소개했듯 복음선 사역을 한 사람으로, 1846년 천자 부두에 광저우 최초로 동석각 교회를 세웠다. 아편전쟁 후 선교가 합법화되면서 광저우는 각국 교단 선교사들이 모여들었다.
기존의 13행 중심으로 있던 학교, 병원 등 선교기구들이 부흥했고 넓혀나갈 대체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13행 부근에는 그런 부지가 없었다. 그래서 침례회는 동산으로 선교본부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동산은 광저우 중심에 가깝고, 땅값도 저렴했기 때문이다. 1909년 동산당(东山堂)교회가 들어서고, 1915년 미국에서 돌아온 화교들이 처음 동산에 양옥을 지으면서 본격적 동산 시대가 열렸다.
경건하고 그윽한 동산 분위기는 많은 화교들이 귀국 후 정착할 곳으로 흡인력을 발휘했다. 화교들이 동산을 선호했던 이유는 시내 중심에서 멀지 않은 지리적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교회가 만든 근대식 학교들, 특히 여학교들도 많아 자녀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화교들의 사읍(四邑)이라 부르는 광저우 부근의 대산(台山), 개평(开平), 신회(新会), 은평(恩平) 쪽 사람들이 모여들어 무리를 이루고 살았다. 이미 미국에서 독실한 크리스천이 된 이들은 성경반 혹은 기도회 등의 모임을 만들어 결속을 다졌다.
일상에서 쓰는 호칭도 종교적 용어를 쓰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성탄절 등의 절기를 챙기며 새로운 생활 습관과 종교적 분위기를 살려나갔다. 서로 모여 예배하며 떡을 떼어 나누기를 즐겼다. 속속들이 생겨나는 학교, 병원, 구제기관 등은 화교들의 헌금으로 유지되었다.
동산 지역 선교가 뿌리내리는 데는 화교들은 큰 역할을 했다. 화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주 지역 등지에서 들어왔다. 광둥은 초기 선교 때 아편전쟁에 의한 외세 배척 감정으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1900년 의화단 사건 이후 이홍장 총감의 배려로 북경이나 상해 등지에 비해 피해를 많이 받지 않았다. 신해혁명 후에도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광둥 선교의 급속한 성장 배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변수가 광둥성 출신 화교들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광둥으로 처음 들어왔듯, 미국으로 들어가는 이민자들의 대부분도 광둥 출신이었다. 이들은 기독교 선교에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다 주었다.
부정적인 면은 중국인 이민배제 법안이 북미 선교사들의 반대 요청에도 불구하고 통과된 것이었다. 미국에서 중국인들의 대우에 대한 불만을 가진 이민자들이 이에 대한 거부감을 광둥성에 전하면서, 현지 선교는 고난을 겪었다. 긍정적인 면은 20세기 들어 기독교도의 급격한 성장의 이면에 미국 크리스천 화교들이 광저우로 대거 귀국했다는 사실이다. 성공한 화교들은 고국 교회 설립에 적극적인 기부자가 되었다. 의화단 사건 때 광둥 지역에서만 24개 예배당이 파괴되었지만, 화교 이민자들의 기부로 완전히 재건되었다.
교통과 선교
1907년 동산에 동산 지역과 홍콩 구룡반도(广九铁路) 간의 철로가 생기면서 기차역이 생겼다. 홍콩과 중국 대륙이 육로로 연결되는 역사적인 일이었다. 동산은 그 후 빠른 속도로 인구가 유입되었다. 교통과 선교는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2차 아편전쟁 후 미국 선교회가 중국의 선교에 더 적극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 내 선교여건이 좋아진 것도 있지만, 교통 개선에서 온 영향도 컸다.
1869년 미국의 대륙 간 횡단철도가 개통되어 미국 내 교통 상황이 좋아졌고, 1870년부터 1880년 사이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증기 선박의 정기 노선이 생겼다. 미국 동부에 있는 선교본부와 중국 간 공간적 거리감이 축소되고 경제적 비용이 절감되었다. 예전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오려면 1백일 이상 범선을 타고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선교 여건이 대폭 개선된 것이다. 미국에 사는 화교들 또한 좋아진 교통 덕분에 왕래가 쉬웠다.
침례회의 중심 기구들이 속속들이 광저우 각처에서 동산으로 집중되었다. 침례회 뿐 아니라 다른 교단의 선교사들도 동산에 자리를 잡았다. 화교들 뿐 아니라 인근이 개발되면서 광둥성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동산으로 몰려들었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