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선교 200년] (23) 동산당 교회와 침례회 학교들
동산지구의 랜드마크인 동산당은 현재 광저우에서 제일 큰 교회이다. 2012년 동산당에 한국 ‘생명로경배단’이 와서 찬양집회를 한 적이 있었다. 본당엔 약 1,300여 명 정도의 인원이 들어갈 수 있으며, 방주에 들어온 것처럼 설계되어 있었다. 초기 로버츠 목사의 복음선 사역이 동산당 디자인에도 반영이 된 듯했다. 중국어로 드리는 찬양 소리가 안으로 모여 그 열기가 뜨거웠다.
동산당은 신해혁명 전까지 신도 수가 2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동산당은 임시 군인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동산당 성도들은 가정교회를 만들어 예배를 계속했다. 1960년부터 교회 합병 운동으로 부근의 교회들과 합쳐져 광저우 기독교 동산당이 되었다. 문화혁명 기간에는 교회의 많은 책과 서류들이 불살라졌다. 동산당은 구위원회 사무실로 변했다. 부설 건물들은 차 수리 공장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1979년 종교 회복운동이 일어나면서, 동산당은 중국 대륙에서 네 번째로 문을 연 교회가 되었다.
예배를 시작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멀리서도 많은 성도들이 동산당을 찾아왔다. 앉을 자리도 없고 성경도 찬송가도 준비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동산당이 복구되면서, 해외에서 많은 화교들이 들어와 교회 재건을 도왔다.
동산에 남아있는 명문학교들은 대부분 침례회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배도(培道) 여자중학교는 1888년 엠마 영(Emma Young) 선교사에 의해 남문 쪽에 설립되었다. 5-6명의 학생으로 출발했다. 이듬해 부녀반과 소경반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학생 수가 불어나서 1907년 동산지구에 부지를 사서 학교를 옮겼다. 부녀반은 배현(培贤) 여학교가 되고 소경반은 모광(慕光) 소경학교로 나뉘어, 1909년 다시 문을 열었다. 점차 학생 수가 급증해서 유치원부터 사범학교까지 모든 과정이 갖추어진 종합 여자학교가 되었다. 지금 동산의 제7중학교가 있는 자리이다.
배정(培正) 중학교는 1889년 침례회 화교 신도 몇 명이 시내에 개설한 학교였다. 후에 침례교단과 연합해서 동산지구로 옮겨와 광저우 최고 명문학교로 성장했다. 배정중학교 내에 미주화교 백년 기념관이 있어 동산을 위해 열정을 태웠던 화교들의 뜻을 기리고 있었다. 또 배현(培贤) 여자 신학원은 1909년 침례회 연합이 설립했다. 화남과 마카오 홍콩 등에서 여자 전도사를 많이 양성한 학교로 유명하다. 현재 광저우 육재(育才) 학교의 전신이다. 이런 흐름은 동산지역이 배(培) 자를 단 명문학교가 모인 교육 특구가 되는 배경이 되었다.
고아원도 1906년 지금의 휼고원로(恤孤院路)에 열었는데, 현재 골목 이름만 남아 있다. 80여 명이 수용되었고, 지금의 배정소학교가 있는 자리였다. 고아원은 같이 생활하는 것 외에 공부도 가르쳤는데, 고아원의 교육과정을 졸업한 후 시험에 합격하면 무료로 배정중학교나 배도중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동산 도련님과 서관 아가씨
동산에는 화교들이 만든 아름다운 벽돌집들이 많이 남아 있다. 겉에서 보면 작아 보이지만 들어가면 안이 깊고 넓은 죽통형의 집부터 신비스런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독특한 화원들도 있어서 역사색을 짙게 해준다. 이 건물들은 보호문물로 지정되어 예술가들의 개인 공방과 미술관 혹은 카페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신해혁명을 지나면서 해외 화교 뿐 아니라 사회 지도층, 특히 관료나 군정 쪽의 사람들도 동산을 선호했다. 그래서 현재 광둥성 정부기관들이 많이 몰려 있다. 우스갯소리로 ‘광저우 시내 전체가 정전되어도 동산 지역만은 불이 켜 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권력층이 집중되어 있다.
미화서로 부근에는 아직도 군 기관이 있어서 경비가 삼엄했다. 이런 동산의 이미지를 타고, 동산 도련님이라는 아이콘이 탄생한다. 당시 사람들은 귀한 것은 동산에 있다고 했다. 그 귀함의 상징이 동산 도련님이었다. 서관 아가씨(西关小姐)와 동산 도련님(东山小爷)은 대비되며 조화를 이루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서관은 광저우 성 서문 바깥에, 동산은 동문 외곽에 있으면서 지형상으로도 아주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다. 13행이 있던 서관은 지대가 낮고 움푹 들어가 있는 수로가 그물처럼 얽혀 있는 곳이었다. 인구가 조밀하고 시장 등이 모여 있는 번잡한 시내였다. 서관 아가씨는 부호 상인의 딸들로, 자태가 아름답고 광저우 본래의 순수한 전통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광둥말을 쓰며 반듯한 교육을 받고 어른을 공경했다. 자수와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등 광둥의 전통적 교양미를 가지고 있었다.
지대가 높은 동산에는 권문 세도의 집안들이 많았다. 고위층 자제들의 스타일은 특별했다. 한 잔의 홍차, 벽난로, 서양식 주택, 즐겨 입었던 서양식 양복, 그리고 서양 스타일의 홍목으로 만든 단순한 가구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정원이 있는 개방적인 서양식 별장과 은밀한 느낌을 주는 서관의 대저택, 그리고 권력과 부의 만남, 신식과 전통의 조화들이 각기 동서로 나뉘었다. 동산 도련님과 서관 아가씨의 시대적 아이콘은 지금도 광저우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침례회의 출판기지 미화서국
동산의 역사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쇄 출판기지 미화서국이다. 1899년 남문 쪽에 만든 침례회 미화인쇄국은 1911년 동산의 신하포(新河浦)로 옮겨졌고, 이름도 미화서국(美华书局)으로 바뀌었다. 동산 지역 안에 신하포라는 하천이 있고, 그 옆으로 미화서로라는 골목이 있다. 미화서국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거리 이름으로 남아서 찾아간 발길을 무색하게 하지 않았다. 당시 동산 지역에는 성내까지 도로가 없었다. 신하포는 주강과 연결되는 수로였다. 인쇄국은 신하포를 통해 소형 전기선을 타고 시내로 왕래하며 신앙 서적을 배포했다.
미화서국은 진광(真光)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중국 기독교 최초의 정기간행물로, 사람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진광 잡지는 사회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생겼을 때 반대편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역할까지 했을 정도로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 1925년 광저우에 노동파업이 생기면서 미화서국은 상하이로 옮겼다. 그리고 1932년 상하이에 8층 건물 진광대루(真光大楼)라는 건물을 짓고 중화침회서국(中华浸会书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로써 출판물들이 화남 뿐 아니라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미화서국을 시작한 이는 로버트 챔버스(Robert E Chambers, 1870-1932) 목사이다. 그는 미국 매릴랜드 출신이다. 1895년 광저우로 파송되어 얼마 안 되어 광서(广西) 오주(梧州)로 들어갔다. 당시 오주는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반감이 거셌다. 현지 지도층들은 서양 종교가 광서 경내에 영원히 발을 못 붙이게 하자는 결의를 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 챔버스 목사가 목숨을 걸고 들어갔다.
작은 민가를 사서 집 공사를 도왔던 목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나중에 이곳이 광서 선교의 본거지가 되었다. 3년 후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1899년 광저우 동석각 침신회당에 미화침신회 서국을 만들어 문서사역에 치중했다. 챔버스 목사는 미화서국을 상하이로 옮겨 전국적 규모로 만든 1932년에 상하이에서 순교했다.
광둥성 최장기 선교사, 그레이브스
1856년 광저우로 파송된 그레이브스(Rosewell Hobart Graves, 1833-1912) 선교사는 오선문 근처에 땅을 사서 선교 사무실과 주거용 건축물을 지었는데, 중국인과 서양인 성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후에 이곳은 장제 광저우 기독교청년회(YMCA)가 되었다. 광저우 기독교청년회는 1904년 설립되었다. 기독교청년회는 후에 ‘로버트모리슨기념당’으로 불리었다.
그레이브스 선교사는 미국 매릴랜드주 출신으로 신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광저우에 도착하자마자 곧 광둥 여러 지역과 광서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56년간 광둥을 포함한 양광(两广)침신회 사역을 한 최장기 선교사였다. 양광은 원래 지역 통칭으로 고대 백월족의 땅을 지칭하는 것이며, 광둥, 광서, 해남, 월남까지 포함했다.
그는 1890년 이후 광저우 학교를 개조해서 신학원 사역에 집중했다. 1899년부터 화남 침신회 선교회 주석을 20여 년간 맡았고, 광저우 의학 선교회를 이끌었다. 다량의 의학 서적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영남대학 의학원을 만들어 중국 의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905년부터 두 눈이 점차 실명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에서 사역하다 1912년 79세로 광저우에서 순교해 교회 묘지에 묻혔다. 침신회 초기 선교의 양대 축을 이루었던 그레브스 목사와 챔버스 목사는 같은 메릴랜드 출신으로 중국 대륙에 뼈를 묻었다.
광저우에서 가장 활발히 움직였던 교단은 북미장로회와 침례회였으나, 역사의 굴곡을 지나면서 지금은 침례회의 사역들이 더 빛을 내고 있다. 아마도 중국인 화교들과 서양 선교단이 처음부터 화합한 성과들이 아닌가 싶다. 역사의 강물은 동네 골목 언덕을 따라 도랑을 내어 복음의 생수를 광저우 구석구석 채우고 있었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