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박사, 양화진문화원 목요강좌 강연
이어령 박사(양화진문화원 명예원장)가 16일 서울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선교기념관에서 양화진문화원 목요강좌 ‘인문학으로 찾는 신’ 두 번째 강연을 진행했다. 이 박사는 지난달 ‘니체, 신은 죽었다’에 이어, 두 번째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변신(Die Verwandlung)> 분석을 통한 ‘영성 순례’에 나섰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철갑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열린책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카프카의 <변신>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의 독백으로 벌레가 된 이후의 삶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박사는 “<변신>은 상황 설정만 이상할 뿐, 카프카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누가 읽더라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작품”이라며 “<변신>을 이해하면 앞으로 <소송>이나 <성> 등 난해한 작품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스크린으로 카프카의 친필 사인과 원고를 보여준 이 박사는 “글은 쓰는 사람의 안에 있지만, 찍혀 나오면 그 활자와 저자는 멀어진다”며 “쓰는 행위는 말하는 행위처럼 ‘신체성’을 갖는다. 그러나 멀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육필이 하나의 폰트가 되고 인쇄된 활자가 되는 과정에서 문자가 얼만큼 내 몸에서 멀어졌겠는가”라며 “성서에도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고후 3:6)’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훌륭한 교훈”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쓴 문자는 내일도 모레도 남아있지만, 쓰던 때의 마음을 남아있지 않다”며 “모세가 받은 율법이라는 것도 당시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린 문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갖고 매달려선 안 된다. 문자로 새겼어도, 하나님 말씀은 항상 현재형”이라고 했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라는 이름부터 카프카 자신을 상징한다고도 했다. 이 박사는 “기호학적으로 보면, 프란츠 ‘카프카(Kafka)’와 그레고르 ‘잠자(Samsa)’의 철자는 배열이 같은 ‘애너그램(anagram·철자 순서를 바꾼 말)’”이라며 “카프카는 ‘잠자는 곧 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카프카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주인공 이름 대신 K라는 ‘이니셜(initials)’을 많이 썼는데, 이는 자신의 이름 첫 글자와 같다”며 “그러므로 <변신>은 자서전이면서도 객관화된 작품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변형해 작품의 양식과 상징으로 바꾼 것”이라고 했다.
인간이 벌레가 된다는 것, 환상주의인 동시에 현실주의
벌레가 되어보지 않고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다
주인공이 벌레가 된다는 <변신>의 ‘초현실적 설정’에 대해, 이어령 박사는 “한 인간이 벌레가 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에 없는 이야기로, 이것처럼 환상주의가 없지만 또 이것처럼 현실주의가 없다”며 “카프카가 만들어낸 주인공처럼 내가 벌레로 변한다면 ‘나와 가족들의 관계’, ‘나와 직장의 관계’ 등 여태 살아온 일상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데, 이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판타지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리얼리티”라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이는 괴상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다 문득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고, 이로 인해 ‘벌레’ 아닌 ‘인간’으로 살아왔지만 인간의 자리가 무너졌을 때 역설적으로 ‘인간이 무엇인가’ ‘이웃이란, 아버지란 누구인가’를 깨달으면서 죽어가는, 자의식을 가진 한 인간의 이야기”라며 “한 마디로 슬픈 이야기이지만, 자신의 이야기로 들렸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카프카는 ‘벌레가 된 주인공’의 입장에서 상황을 아주 자세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배가 불룩해서 거북하고, 어떻게든 일어나야겠다며 몸부림치다 떨어지면서도 다치지 않도록 머리를 세우고, 벌레가 되니 뒤집혀야 살 것 같다고 하는 등이다.
이 박사는 “카프카는 이 작품에서 ‘내가 버러지가 된다면’이라는 가상이나 상상의 관념이 아니라, 실제 벌레가 된 듯 다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면 끈적끈적한 액체가 남는다는 등 상황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며 “주인공은 벌레가 된 후에도 놀라기보다 ‘빨리 출근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일상의 관성을 뜻하며 작품은 벌레가 됐을 때와 되기 전의 의식이 끝까지 평행선을 달린다”고 분석했다.
“벌레가 되어보지 않고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다”고도 했다. 이어령 박사는 “모든 지성사와 르네상스는 아버지와 황제, 신(神) 등 세 존재를 죽이는 이야기”라며 “권력과 싸워 자유를 찾는 의미로, 기독교를 믿든 믿지 않든 현대인들은 아버지와 황제와 신을 죽이고 ‘이제 뭘 해도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는다”고 했다.
그는 “이처럼 나를 억압하고 질서와 법을 주관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행복할 것 같은데, 오히려 지난달 니체 강연에서 말씀드린 니힐리즘(nihilism·허무주의)에 빠진다”며 “이 허무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대한민국에서 살든 미국에서 살든, 기독교를 믿든 안 믿든 근대인들이 똑같이 갖고 있는 과제”라고도 했다. “바닥까지 니힐리즘에 빠져봐야, 이전의 상태가 다 허물어져 봐야 새롭게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상실하는 순간에도, 가족만은 서로 배려·염려
벌레 되고 나니 서로 소통할 수 없고 문틈으로 내다봐야
소설에서 주인공의 여동생은 벌레가 된 ‘오빠’를 계속 사람을 대하듯 한다. 이 박사는 “꼭 벌레가 되지 않더라도 누군가 가족 중 한 사람이 좌절을 당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숨기고 싶어한다”며 “다른 사람들은 피하더라도 가족들은 설령 벌레가 됐어도 그와 교통할 수 있는데, 그 끈이 바로 기독교에서 흔히 쓰는 말인 ‘사랑’”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이 벌레가 되듯 모든 것을 상실하는 순간에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서로를 배려하고 염려하는 모습”이라며 “이런 장면이 매우 슬프고도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고 했다.
이 박사는 “죄송하지만, 여러분들도 한 번쯤은 벌레가 된 적이 있으셨을 것”이라며 “대학에서 떨어졌을 때, 이혼하고 가족들에게 돌아왔을 때, 우리는 숨고 싶어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주인공이 벌레가 돼 다른 사람들은 가정부까지 모두 도망갔지만, 가족들은 그럴 수 없었다”며 “이 소설은 서양인들보다 정 많고 끈끈한 동양적인 가족, 서로 미워하고 저주하면서도 차마 버리거나 실망시킬 수 없는 마지막을 보여준다”며 “설사 인간의 얼굴을 상실하더라도, 마지막 남은 것은 가족이라는 이야기가 여실히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이 사는 집은 모두 벽들로 철저히 가려져 있다. 이 박사는 “문이 열려 있고 누구나 소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벌레가 되고 보니 그들은 모두 각자 그들의 방에 있는 존재였다”며 “벌레가 된 이후, 주인공 잠자는 벽을 넘어 들리는 소리와 소통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전에는 안팎을 넘나들었기에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벌레가 되어 방에만 있으니 자연스레 갇힌 몸이 돼 ‘바깥 세계’가 생겼다”며 “가족들과 함께하던 식탁에도 영원히 앉을 수 없고, 이들의 모습도 살짝 벌어진 문틈으로 내다보일 뿐으로, <변신>은 자신의 가족들을 처음으로 문틈을 통해 내다보는 이야기”라고 했다.
이 박사는 “사람이었을 때와 벌레가 됐을 때의 관계는 변하게 된다”며 “유난히 사랑하시는 그 손길은 변화에서 생겨나지, 똑같은 일상에서는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들이 벌레가 되고 나니, 웃음이 사라지고 식사할 때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됐다”며 “우리의 ‘살아있음’은 움직임이 아니라 소리를 통해 보이는 것이다. 침묵이 죽음”이라고도 했다.
주인공 잠자는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해 역마다 다니며 물건을 판매한다. 아버지가 진 큰 빚을 갚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으며, 번 돈을 하나도 쓰지 못한 채 빚을 갚고 있다. 그런데 이 잠자가 벌레로 변한 것이다. 벌레로 변해 주인공이 나가지 못하자, 일터 지배인이 집으로 찾아온다. 이 박사는 “잠자는 한 시간도 기다려주지 못하는 각박한 회사에 다니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고 했다.
‘밥상 공동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 박사는 “벌레가 되니 식성도 바뀌게 되는데, 슬픈 것은 여동생이 어제까지 알던 오빠의 식성을 벌레가 된 후엔 뭘 먹여야 될지 모르게 됐다는 점”이라며 “마치 강아지에게 정체 모를 음식을 갖다주고 ‘먹나 안 먹나 보자’고 하는 것처럼, 여동생은 썩은 음식이나 빵 부스러기 등을 갖다주게 된다”고 전했다. 그는 “카프카 소설에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우리도 먹으면서 자주 소통하지 않느냐”며 “예수님도 마지막 날 제자들과 헤어지시면서 만찬을 하시지 않았나. 우리는 먹는 걸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벌레가 되고 나니 주인공은 말을 할 수도 없다. 이 박사는 “우리도 타자 앞에서는 마치 벌레가 된 것처럼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걸 느끼지 않느냐”며 “그냥 안 통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에게 잘 해 주려 하는데 거꾸로 해치려는 느낌을 줄 때가 얼마나 많은가”라고 말했다.
여동생이 벌레가 된 오빠를 보러 가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장면에서, 이 박사는 “이 장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생명 가진 모든 이들이 가진 근원적 슬픔이 있기 때문”이라며 “신파를 보고 우는 것은 누선(淚腺)을 자극할 뿐으로, 카프카의 소설은 잃어버린 내 존재와 만났을 때 마치 숨바꼭질을 하다 만나는 것처럼 참을 수 없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처럼 눈물이 솟구치게 된다”고 했다.
이어령 박사는 “우리는 다행히 직접 겪어보지 않더라도, 문학 작품들을 통해 가장 슬프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처럼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전했다.
작품 속 음악은 우리의 경험 초월한 영성의 세계이자 빛
주인공은 음악 듣고 남들이 짓밟건 오해하건 문지방 넘어
이후 가족들은 생계가 어려워져 자신이 살던 방마다 하숙생을 들인다. 하루는 밤에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와, 주인공은 거기에 귀를 기울인다. ‘저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도취한 나를 동물이라 부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벌레가 된 잠자는 바이올린 소리에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드디어 제 발로 방을 나온다. 그러다 하숙생에게 발각돼 가족들의 생계 수단을 막았다는 비난을 받게 되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이 ‘음악’에 대해 이 박사는 “이 음악은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 저편에서 들려오는 영성의 세계이고 종교로 말하자면 하나의 빛이고 음성”이라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나 잠자는 이 아름다운 음악을 듣지 않으려는 하숙생들에게 분노한다.
잠자의 죽음에 대해선 “여동생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자기 발로 가족들이 있던 곳으로 나아갔으며, 가족들의 저주를 들으면서도 벌레가 되기 전에 그러했듯 가족들을 지켜내려 했다”며 “남들이 짓밟건 오해하건 상관없이 스스로 음악을 찾아 마지막 문지방을 넘는데, 이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했다.
사랑과 죽음은 한편으론 구속과 해방
이 박사는 “우리가 초상집에 가면 살기 위해 더 많이 먹듯, 죽음은 어떤 슬픔이나 사랑, 빈 자리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해방을 뜻한다”며 “사랑은 한편으로 일종의 얽맴과 구속이기 때문에, 죽음은 한편으로 홀가분한 해방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했다. 잠자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해방을 안겨줬고, 가족들은 잠자가 벌레로 변한 후 처음 전차를 타고 시내로 나간다. 이때 딸이 앉아있다 일어서는데, 부모가 “얘가 언제 저렇게 컸어? 어른이 됐으니 결혼시켜야겠네”라고 한다.
음악 통해 본모습 찾은 주인공, 육체서 영으로 가는 모습
그는 “슬픈 육체, 썩고 고통스러운 육체 속에서 싱싱한 봄과 같은 육체를 발견하면서, 처음으로 가족들은 미래와 태어날 새로운 생명을 생각하고 인간은 슬픔만이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며 “이 작품에서는 누웠다 일어서는 것이 대단히 상징적으로 나오는데, 이 장면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령 박사는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누구나 잠자처럼 벌레인데도, 자신이 벌레임을 모르고 살아간다”며 “어쩌면 잠자는 최초로 자신이 벌레가 됐음을 깨달은 사람이고, 음악을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찾았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는 육체에서 영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라며 “우리가 영혼을 갖는다면, 비록 겉모습은 동물이나 걸인 같을지라도 음악을 하는 사람은 동물이나 걸인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 “여러분도 가족들이나 교회를 너무 친숙한 데서만 보지 말고, 1년에 한두 번쯤은 나만의 닫힌 방에서 문틈으로 보이는 낯선 공간들로 경험해 보라”며 “너무 낯익기에 잊고 있었던 것들을 찾는 계기로 ‘일상이 멈추는 순간들’을 가지시라”고 덧붙였다.
이 박사는 “우리와 다른 이름을 가진 카프카와 잠자이지만, 음악을 통해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가는 ‘변신’으로 그들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이 됐다”며 “제 결론은 성경에서 찾는 영혼이 아니라, 소설이나 세속적 문자 속에서도 성경 이상으로 ‘영혼의 세계’를 찾는 길이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