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리 리뷰] 스캇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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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왕의 복음
스캇 맥나이트 | 새물결플러스 | 304쪽 | 14,000원
복음 제시라는 이름으로, 종종 어렵지 않게 다음과 같은 선포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오늘 밤 당신이 죽는다면, 천국에 가실 수 있을까요?”,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예수 믿고 영생 얻으세요.”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부는 여러 전도축제와 방법론을 통해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한다. 그리고 순서에 맞춰 복음을 선포한다. 선포되는 ‘복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긴 인간의 최후는 지옥입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의 공로가 아닌,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결정적인 선포를 하게 된다. “지금 믿으시겠습니까?”
스캇 맥나이트가 쓴 <예수 왕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전도방법에 대한 고찰과 함께, 새로운 대안을 내놓는다. 저자는 위에서 언급된 ‘복음 선포’는, 복음이 아니라 구원 방법론을 선포한 ‘구원주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복음주의자들이 ‘복음’과 ‘구원’이라는 단어를 (잘못)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복음을 ‘구원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문제이다). 이는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던 문제 제기이다. 책을 통해, 우리가 선포하고 있는 복음에 대해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복음’이라는 신학 주제는, 개론서만 찾아봐도 지금 선포되는 ‘구원 방법론’의 순서를 말하는 단어가 아님을 바로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신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와 같은 의문을 품어보았을 것이다. 신약성경의 사복음서 또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구원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저자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수 왕의 복음>의 내용 전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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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는 본래 제자 삼기를 목표로 하여, 서두르지 않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온전한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복음주의는 결단에 초점을 맞춰, 개인의 구원론을 전파하는 ‘구원주의’에 가깝다고 저자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점은 종교개혁과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전체 목적과 그림을 살피지 못하고 복음을 일종의 ‘개인 구원을 위한 방법론’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형태의 성경 읽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정말로 중요한 점은 인류 구원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더 큰 목적의 일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파선된 세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뒤로 물러나 편하게 앉아서 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목적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에클레시아북스, 2011).”
맥나이트와 달리 톰 라이트는 비록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를 풀어갔지만, 결국 맥나이트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성경을 우리 중심으로 읽게 된다면, 복음과 이신칭의 모두를 잘못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이해해야 하는가?
저자는 복음을 ‘이스라엘 이야기’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이야기의 최종 목적지는 예수님 이야기이다.” 우리는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스라엘 이야기 안에서 복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1세기 제자들과 유대인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는 매우 쉽게 이해가 된다. 1세기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이사(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여전히 포로 상태에 놓여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그러한 포로기의 이해 안에서, 그들에게 삶의 자리에서 던져진 질문은 무엇인가?
①가이사의 통치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는 어떻게 오는가?
②우리를 가이사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해 줄 메시야는 누구인가?
③그 메시야는 어떤 메시야인가?
④그 메시야는 언제 오는가?
1세기 유대인들은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나오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과 생각을 구약에서 찾으려 했다. 즉, 그들은 구약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복음(좋은 소식)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바로 위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며 만유의 주님이시고, 다윗의 혈통에서 난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 안에서 성취된 이스라엘 이야기 말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핵심 사건에 관한 좋은 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달하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하고, 알리고, 선언하고 크게 외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77쪽).” 이러한 복음의 내용은 사도적 복음 전승과 사복음서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 사도행전 안에 있는 복음의 증언이 동일하게 대답하고 있다.
스캇 맥나이트의 이러한 논의는 ‘구원 방법론’과 ‘복음’의 구별을 뚜렷하게 해 주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결단에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 삼기를 목표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한국교회 일부는 미국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구원으로의 ‘결단’과 ‘초청’에 집중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큰 부흥을 이루었으나, 복음의 내용보다는 설득의 방법에 주력하는 ‘인스턴트식 복음’을 양산해 내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법은 ‘결단자’를 양산해 냈지만,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인 ‘제자 삼는 일’에는 실패하고 만 것이다.
제자훈련과 성경개관 프로그램을 구분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복음은 구약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 들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교회의 성경 프로그램은 복음 제시 후 성경개관 훈련을 받게 돼 있다. 즉 복음에 대한 배움과 성경 개관이 분리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신성관 목사.](https://www.christiantoday.co.kr/files/article/db/2014/11/5/1415168813_57a19553bc.jpg)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이것이다. ‘기독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을, 지금 어떻게 전할 것인가?’ 우리는 이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금 사회의 지탄을 받으며 아파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진정한 ‘복음’이다. 스캇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을 통해, ‘구원주의’에서 ‘복음주의’로 돌아서는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복음서는 무엇을 말하는가?’로 이어집니다>
/신성관 목사(「Simply Bible」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