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선교 200년] (26) 선교 초기부터 일본 침략기까지
앞서 소개했듯이 근대 중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은 광둥성 광저우였다. 근대 중국의 선교 역사도 광저우가 목표점이 되었다. 광둥성 선교는 크게 여섯 단계를 거쳤다. 첫째는 선교 발생기인 1807년부터 1842년 사이이다. 선교가 금지된 상태에서 초기 서구 선교단체와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는 길목은 광저우의 13행이었다. 그들은 외국 회사의 통역관 자격으로 은밀한 선교 활동을 했다.
런던선교회의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최초로 광저우에 들어왔고, 미국 회중파 교회의 브리즈먼(E.C. Bridgman), 윌리엄스(S.W. Williams), 파커(P. Parker), 로버츠 목사 등과 독일선교회의 귀츨라프 선교사 등이 연이어 들어왔다. 이 외에도 네덜란드성공회, 미국침례회, 북미장로회 등도 선교사들을 파송했으나, 광저우로 들어오지 못하고 마카오, 싱가포르, 말라카 등에서 중국 화교 대상의 선교를 하면서 본토 진입을 준비했다.
1835년 13행 거리에 들어선 안과의원의 부흥으로, 의료선교는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공공연한 선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효과는 미미했다. 아편전쟁 전까지 비밀리에 세례를 받은 중국인 성도는 모두 7인이었다. 모리슨 선교사의 인쇄 업무를 도운 채고는 1814년 중국인 최초 신도가 되었다. 말라카에서 입교한 양발은 1816년에 세례를 받고 중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둘째로 선교 성장기인 1842년부터 1900년 사이이다.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중영 남경(南京)조약, 중미 망하(望厦) 조약, 중불 황포(黄埔) 조약이 연이어 체결되면서 외국인 선교사가 중국 각지의 개항 항에 교회, 병원, 학교 등을 세우는 것이 허가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각 선교단체들은 광저우로 대거 들어와 교회를 짓고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는 등 공개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우리가 앞서 소개한 해퍼 목사, 켈 선교사, 노예스 가문의 선교사 등이 들어왔다. 중국은 이 시기에 파란만장한 역사의 굴곡을 지나고 있었다. 영국에 의해 주도된 1·2차 아편전쟁과 그로 인한 서양 열강들과의 잇따른 불평등 조약 및 개방 정책, 태평천국의 난과 구국운동인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 그리고 의화단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1860년경 광둥성에는 12개 교단이 선교 활동을 했고, 성도 수는 약 2천명에 이르렀다. 2차 아편전쟁 후 1858년에 체결된 천진조약으로, 선교사는 자유롭게 중국 내지를 드나들며 선교를 할 수 있었고 관청의 보호를 받았다. 1900년경에 이르러 광저우를 비롯한 광둥성 전역에 30여 개의 선교단체가 있었으며, 각 시나 현에 100여 개의 분소가 생겼다. 광둥 전역의 성도는 13,000명에 달했으며 광둥성 오지에도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19세기 중후반을 넘어가면서, 18세기 초에 왔던 초기 선교사들은 19세기가 되기 전에 대부분 현지에서 순교하거나 본국으로 돌아가서 삶을 마감했다. 이에 초기 선교사들에게 훈련받은 중국인 성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기독교 사역이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독점됨에 따라, 중국인 자립과 자존을 지키고 싶어했다. 1874년 중국인 목사 진몽남(陈梦南)이 광저우에 선도당(宣道堂) 교회를 세웠다.
진몽남은 켈 선교사가 세운 박제의원 의학교에서 의학공부를 했다. 그는 박제의원 부근 조음가라는 골목에 중국인 최초의 교회인 선도당을 세웠는데, 이는 후에 흥화자립회(兴华自立会)가 된다. 이것은 중국인 자립교회 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1881년 장로회 목사 관취광(关就光) 등은 외국 선교사들이 독점적으로 사역을 하는 것에 반대하며, 중국인 장로자치회를 세우고 교회와 주보도 만들었다. 기독교 중국 토착화 현상의 초보 단계라 할 수 있다.
중국인 스스로의 기독교
셋째로 중흥기인 1900년에서 1923년 사이이다. 중화기독교회연감에 따르면 광저우에는 당시 29개 교단이 있었다. 이 시기 각 교단은 선교 사업을 공고히 하면서 확대를 도모했다. 의화단 운동의 영향을 받아 많은 교안(教案, 서양 종교 반대안 운동)이 발생했다. 기독교도가 살해되고 교회가 불타면서 기독교 선교 활동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중화민국의 건설에 힘입어 부흥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1914년 광둥성의 987개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목회자 수는 2,541명, 신도는 48,347명이었다. 1919년에는 1,061개 지역에 2,838명의 목회자, 61,262명의 신도로 증가했고, 1926년에는 1,051개 교회당과 신도 수가 78,519명에 달했다. 성 면적 전체와 인구로 계산했을 때 90㎢당 교회가 하나씩 있었으며, 인구 578명당 1명의 기독교 신도가 있었다.
한편 광둥성에서 가장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한 외국 교단은 미국 장로회와 침례회였다. 1919년 기준으로 미국 장로회의 교구는 165개, 정식 교회 113개, 교회 직원 425명, 세례신도 13,559명이었고, 초등학교는 103개, 중학교 6개, 대학교 1개(영남대학), 의원은 8개에 달했다. 1919년 북미장로회는 중화기독교광둥대회의에 가입하여 최대 교단이 되었다. 기독교 대학이었던 영남대학과 협화신학원 등도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넷째로 후퇴기인 1926년부터 1949년 사이이다. 제1차 국공합작에 따라 1926년부터는 중국 민족 사상의 흐름이 강해져, 영남 기독교와 전국 기독교계가 함께 본색화 활동, 이른바 삼자 운동(自治, 自養,自傳)을 강하게 제기했던 해였다. 일부 서양 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의 반제운동에 찬동하여 기독교 선교에도 삼자 운동 도입을 주장했다.
이 운동의 결과 중국인 교회는 신속하게 각성했고, 일부 서구 선교회는 중국인의 반제운동 흐름을 고려하여 점차 교회 관리를 중국인에게 맡기고 서양 선교사들은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고문을 맡았다. 당시 수많은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중국인 신도들이 맡게 되었다.
광둥 최대의 기독교회는 1926년도에 중화기독교회광동협회를 조직해서 만장일치로 ‘교회주권회수대강(收加教会主权大纲)’을 통과시켰다. 그 내용은 '무릇 외국 교회가 현재 관할하고 있는 모든 사업은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협회가 접수해야 하며, 이후 외국 교회의 관리 행사 및 교회 사업 지배 권한을 정지시킨다. 교회의 인재 및 경제력은 협회 또는 협회 특설 기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각 지역의 서양 선교사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중국인 전도사들도 일부 줄어들었다. 18세기 중후반에 와서 50년 이상 동안 중국 사역을 한 진광학교의 헤리엇 여사와 정신병원의 마샤 여사를 비롯, 명심서원의 나일스 여사와 헤켓여자의대 풀턴 여사도 비슷한 시기에 미국으로 돌아가 은퇴하고 별세했다. 그리고 배영의 윌리엄 선교사도 1923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21년 공산당이 창당됐고, 앞의 선교사들은 여든이 넘은 나이였다. 이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낸 이들이어서 스스로의 선택이었기보다는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된 아편전쟁 전후인 1840년대 전후로 본다면 거의 1백년이 되지 않아 급변했다.
1937년에 출판된 전국 협회연감에 따르면 광둥에 서양 선교사들은 당초 1천명 정도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1백명도 되지 않았다. 중국의 정세 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악화로 외국 선교부는 재정이 어려워 본국에서 송금받는 것으로 교회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회 건축물들이 중국풍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30년대 광저우에 건축된 혜애당과 하남당이 대표적인데, 현재 하남당만 남아있다. 붉은 벽돌 담장과 푸른 기와, 비첨(飛檐)이라 부르는 서까래 끝에 부연을 달아 기와집의 네 귀가 높이 들린 모양과 채색된 기둥 등을 채용한 중서양풍의 교회가 등장했다. 그동안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된 광저우 교회들은 모두 서양 스타일이었다.
더군다나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1938년 광저우가 함락되자 교회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일부 교회와 기독교 단체는 항일 운동에 뛰어들기도 하고, 일부는 홍콩, 마카오로 이전했다. 운남성과 계림 등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일부 교회는 일본 점령기에 창고나 병원 무도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후에 대부분의 영미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대부분의 교회 활동은 정지되거나 반 정지 상태가 되었다. <계속>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