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008년에 “시내산은 어디에 있는가?”의 초판을 내놓았고, 다시 2014년 7월에 교보문고의 퍼플을 통해 보정판을 전자출판한 운곡(雲谷) 강훈기(康勳基)입니다. 1982년에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하여 현재까지 머물면서, 한 사람의 평신도이지만, 저에게 주어진 하나의 동기에 의해 성경의 출애굽 사건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그 사건을 밝혀보고자 다각도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지금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4년 12월 4일에 한국교회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이스라엘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제8차 학술세미나에 대한 발제자들의 글을 읽어 보고, 동영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학술세미나에 대해 느낀 바는, ①발제자들께서 발표하신 내용들이 순수한 학술세미나의 수준에서 벗어났다는 인상과, ②세계 각국의 정평 난 학자들이 발표한 출애굽 사건에 대한 연구논문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 아니라 특정인의 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비판했고, ③발제자들의 발표 내용도 관련된 해당 사안을 성경 전체에서 조명한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부분적인 내용을 가지고 시내산의 위치를 단정해 버린 일과 ④세계적으로 정평 난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자료와 역사서들의 내용을 가지고 자신들이 나름대로 판단하는 주장을 펴지 못한 사실 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1. 강후구 박사의 발표에 대하여
강후구 박사님이 발표한 내용으로 미디안 지역에서 발견됐다는 “암각화, 메노라 모티브, 솔로몬의 도하 기념 기둥, 토기조각” 등을 가지고, 출애굽 사건에 연관시킨 잘못을 지적한 것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타무딕 문자도 출애굽 사건에 관련시킨 것에 대해서는 잘못되었지만 “타무딕 글자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주전 4/3세기~주후 3/4세기이며, 이 언어는 28개 글자에 주로 바위나 야석 위에 새겨진 것으로 알려졌다며, 따라서 타무딕 비문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사용했던 글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후대의 비문이며, 이 비문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증거라 주장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고 단정했다.”에 대해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사용한 문자는 분명히 아니고,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증거도 아닙니다. 다만 부분적으로 이의를 달고 싶은 것은 주전 6세기 이전에 아라비아 반도 북부에서 사용되었던 문자들에 대해 시대별로 정확한 문자의 명칭이 붙지 않아 이를 통칭하여 타무딕 또는 이 암각문자가 가장 많이 발견되었던 지방의 이름을 따서 히스마 문자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고대언어학자들은 원시 시나이/가나안 문자는 주로 가나안 지방 및 시나이 반도에서 주전 1900년~1100년경에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고, 타무딕 문자는 주전 1500년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견되는 암각문자들이 수만 점에 이르는데, 타무딕 문자만도 거의 만 점에 가까운 암각문자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연대측정 결과(Radio Carbon Test) 신석기 시대 말의 문자도 보이고 있어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로 알려진 문자가 타무딕 문자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이고, 아직까지도 완벽하게 이곳에서 발견되는 고대의 문자들에 대한 시대별 정리가 되지 않아 하나의 연구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미디안의 토기가 출애굽한 고대 이스라엘 백성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킬 수는 없지만 “고대 미디안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도망나와 40년간 이드로의 양떼를 친 곳이 바로 “미디안 땅”이기 때문입니다.
2. 정연호 박사의 발표에 대하여
정연호 박사님이 성서지리학적으로 본 “수르 광야의 위치,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수르 광야의 위치,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를 떠난 이후의 여정에 대한 많은 이론들 중, 단지 하나의 주장만을 가지고 그것을 비판하면서 시내산이 아라비아 반도에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 것 역시 안타깝게도 하나의 억지 주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쓴 “시내산은 어디에 있는가?”의 보정판에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와 신 1:2의 열하룻길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성경을 분석하여 기술하였습니다만, 신 1:2의 열하룻길 때문에 시나이 반도 북동부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가 있다고 주장하는 측은 시나이 반도에 있는 자발 무사가 시내산이라고 보았고, 페트라가 가데스 바네아라고 주장하는 측은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알-라우즈산을 시내산이라고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언급은 하나의 특정인과 하나의 특정 경로만을 가지고 비판한 것이고, 정 박사님의 말처럼 신 1:2의 열하룻길을 하루에 220~330km정도 갈 수 있다고 보면, 시나이 반도에 있는 모세 산은 가데스 바네아까지 약 260km,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알-라우즈산은 약 240km의 거리에 있기 때문에 두 산 모두 다 열하룻길에 해당되고 있어 알-라우즈산을 시내산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정박사님의 언급처럼 페트라를 가데스 바네아라고 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나아가 “성서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시내산은 아라비아 반도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증거는 출애굽과 관련돼 있는 중요한 장소들 - 홍해, 수르 광야, 가데스 바네아 - 등이 요단과 아라바 서편에 위치해 있음을 보여준다”며 “일부 학자들이 자신들의 논리에 파묻혀 명백한 성서지리적인 증거를 놓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고 했는데, “홍해, 수르 광야, 가데스 바네아” 등이 요단과 아라바 광야 서편에 있는 것은 맞지만, “성서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시내산은 아라비아 반도에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싶습니다.
1) 알-라우즈산이 요단과 아라바 서편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까지 약 240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신 1:2의 열하룻길로 보는 거리인 220km~330km에 해당되므로 페트라를 가데스 바네아라고 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2) 모세가 이집트에서 도망 나와 40년간 머무르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이 있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고향인 미디안 땅의 위치에 대해 전혀 고려를 하지않았습니다. 고대 미디안은 족장 시대에는 요단 동편에, 출애굽 시대에도 미디안의 자손 일부가 요단 동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모압 평지에 진을 친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 모압 왕 발락이 꾸민 바알 브올 사건에 빠져 이스라엘에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에 의해 점술사 발람과 함께 요단 동편의 미디안은 진멸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에 동행한 미디안 제사장, 겐 자손이라고도 불리는, 이드로의 아들인 호밥의 자손들은 모압평지에 진을 친 이스라엘과 같이 있으면서, 동족인 요단 동쪽의 미디안족속들이 진멸당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점술사 발람에게서 “네 거처가 견고하고 네 보금자리는 바위에 있도다”라고 축복의 예언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삿 1:16에서 이스라엘의 광야여정에 동행한 호밥의 자손들이 유다지파와 함께 종려나무 성읍인 여리고에서 올라가 아랏 남방의 유다광야에 함께 정착했기 때문입니다.
겐 자손은 미디안의 셋째 아들인 하녹의 자손들로 아라바 광야 남쪽, 즉 에세온 게벨의 남쪽인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살았었습니다. 그 지방은 유명한 팀나광산을 비롯해 구리가 많이 채굴되었고, 미디안(하녹) 자손들이 구리를 잘 다뤘기 때문에 구리세공인이라는 뜻을 가진 겐의 이름을 따서 겐 족속이라고도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스라엘에 대적한 미디안 자손과 협력한 미디안 자손들을 구분하기 위해, 사사기 이후에 나오는 미디안 족속에 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에 대적한 미디안 자손들은 그대로 “미디안”, 그리고 이스라엘에 협력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자손은 “겐 자손”이라고 나오다가, 열왕기 하 이후에는 그 후손 중 한 사람인 레갑의 이름을 따서 “레갑 자손”이라고 나옵니다.
3) 그 동안 서양의 학자들의 탐사 결과 및 사우디 정부와 킹 사우드 대학의 고고학 팀에 의한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에 의해 고대 미디안의 위치가 2010년에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미디안은 주전 2000년~1000년경에 존재했던 나라로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인 히스마 지방이 근거지였고, 쿠라야가 미디안의 수도였으며, 미디안의 영역은 아라바 광야 끝에서부터, 쿠라야, 데마(오늘날의 타이마), 드단(오늘날의 마다인 살레, 알-울라), 그리고 홍해 변의 알-웨즈(알-와지히)까지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유명한 고대 미디안의 채색토기가 미디안의 수도인 쿠라야에서 생산되어 에시온 게벨의 가까운 북쪽에 있는 팀나 광산, 네게브 지역 등으로 퍼져나간 사실도 베노 로덴버그 등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습니다.
4) 주후 4세기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시나이 반도에 있는 모세산을 시내산이라고 명명하기 전까지는 시내산이 아카바만 동쪽인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미디안 땅에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전 250년경에 번역된 70인 역 헬라어 성경(출 3:1)과 1세기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The Antiquity of Jews), 및 4세기 유세비우스의 성경백과사전(Onomasticon) 등 신약초기 학자들의 저술서에서도 미디안의 위치가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우디 정부에서 2002년에 발간한 알비드(Al-Bid/Al-Bad)에 보면 알-바드가 이드로의 고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 특히 출 3:1에 대한 여러 성경들의 번역 내용을 보면 70인 역본에는 시내산이 미디안 광야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광야 근처로”라고 번역되었지만, 주후 4세기 이후에 번역된 역본들에는 다르게 나오고 있음을 다음의 표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역본들마다 다르게 변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는 셈족계열의 언어(히브리어·아랍어) 특성상 한 단어가 많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의 “아카르(achar: ﬡקﬢ)”는 장소를 뜻할 경우에는 “저편에(Beyond)”, “뒤편에 (backside)”, “반대편에(far side)”, “서쪽에(west side)” 등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나타낼 경우에는 “후에(after)” 등의 뜻을 가지고 있어 단어 하나를 가지고 다양한 번역이 나왔습니다. 이는 번역 주체들이 시내산과 미디안의 위치를 어디로 보았느냐에 따라 역본마다 다르게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4세기 이후에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살았던 미디안 땅은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있고, 시내산은 시나이 반도의 모세산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6) 갈 4:25에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을 비록 영적인 비유에 사용했지만 종의 신분으로 율법에 매인 자들인 하갈, 이스마엘, 시내산, 지상의 예루살렘"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유한 것은, 사도 바울이 실제로 시내산과 지상의 예루살렘이 동일선상에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에 3년간 가 있었고, 지상의 예루살렘과 알-라우즈산이 실제로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7) 왕상 19:7-9에 엘리야가 브엘세바에서 40주야를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와서 동굴로 들어갑니다. 따라서 시내산에는 반드시 동굴이 있어야 합니다. 알-라우즈산에는 엘리야가 들어간 곳으로 여겨지는 동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내산이라고 주장하는 산들이 13곳 이상이나 되고, 비록 4세기 이후부터 시나이 반도의 모세산이 시내산이라고 믿어왔지만, ①그 이전의 구약 시대 및 신약 초기에는 아라비아에 있는 미디안에서 제일 높은 산이 시내산이라고 믿었던 사실과, ②이드로의 고향인 미디안 땅이 오늘날의 알-바드였고, 사우디 고고학 팀이 밝혀낸 미디안의 위치에 대한 기록과, ③알-라우즈산에는 엘리야가 들어간 곳으로 여겨지는 동굴이 있고, ④구약 및 신약 초기에는 시내산이 아라비아 반도의 미디안 땅에 있었다는 기록들과, 특히 70인역 헬라어 성경에는 시내산이 미디안 광야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기록과, ⑤사도 바울이 갈 4:25에서 시내산이 아라비아에 있다고 기록한 사실 등을 고려하면, 위에서 고찰하여 본 바와 같이 알-라우즈산이 가장 유력한 시내산의 후보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 등을 종합하여 고찰한 결과에 의해 작성한, 고대 미디안의 위치에 대한 지도와 출애굽 경로의 지도를 다음과 같이 올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