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도리카와에 대한 상념과 투병 중인 선배를 위하여(2)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송영옥 박사 기독문학세계]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나의 생각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소설의 인물 중 하나인 미도라카와에게 몰두해 있으면서, 시선은 선배의 표정을 일일이 따라 다녔다. 늦은 봄꽃이 식당 앞 마당에서 마지막 향기를 뿜어내는 저녁이었다. 실내에는 미군 병사들이 몇몇씩 어울려 여러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불고깃집 음식 맛은 정말 유명해. 이곳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곳일 거야.” 선배는 불고기 1인분을 추가 주문하면서 내게 동의를 구했다. “아마 미군 부대가 가까이 있어서 그럴 거예요. 알음알음 입소문으로 외국인들이 자주 찾아 오겠지요.”

종업원이 주문한 불고기와 함께 파절이 한 접시를 선배 앞에 더 갖다놓았다. “원장님은 파절이 좋아하시잖아요. 더 드세요.” 알바생인 듯한 그녀는 선배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선배가 투병 내내 이 집을 자주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상큼한 파 냄새가 미각을 더욱 자극한 듯, 선배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씁쓸한 웃음으로나마 상대방과 눈을 맞추는 그 순간, 선배는 낯설었지만 따뜻해 보였다. 오랜만에 본 모습이다. 화덕의 불꽃이 빠알갛게 달아올랐다. 사라져가는 봄의 잔향이 희미하게 풍겨왔다.

“이렇게 먹어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선배는 자못 침통한 표정으로 파절이와 고기를 번갈아가며 먹고 있었다. “천천히 맛을 보세요. 절이 위에 고기를 얹어서요.” 선배는 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정원 나무들이 흔들렸다. 바람이 일고, 그 멀리로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의 불빛이 출렁거렸다.

나는 다시 미도라카와를 생각했다. 지각의 문을 열어젖히기만 하면, 그의 지각은 티끌 하나 없는 지고의 순수에 이르러 모든 것의 ‘진실의 정경’을 보게 된다고 했다. 진실의 정경…. 그래,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되고 삶과 죽음의 경계도 허물어지는 상태이다. 육체의 틀을 벗어나 형이상학적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오직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한 시점에서 생겨나는 특별한 능력이라 하였다.

선배가 지금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은, 이제까지 자신이 붙잡고 살아온 모든 것을 절대로 놓을 수 없다는 묵시적 저항 같아 보였다. 우리가 살아온 삶보다 더 큰 영원한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놓아줄 수 있을 텐데, 오히려 그러한 깨달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지….

나는 불안해졌다. 어떻게 이 현상을 펼쳐 보여줄 수 있을까. 마음의 시간이 늦게 흘러갈수록, 봄과 겨울이 반반씩 섞인 스산함이 내 몸을 휩싸고 들어왔다. 선배가 이렇게 식사를 끝내고 일어서자 하면 어떻게 할까.

이 시간이 지나면 선배는 이 저녁 많은 양의 식사와 골고루 섭취한 영양가 있는 음식이 체내에서 어떻게 흡수되었는지 확인해 보려 할 것이다. 암세포를 죽일 수 있는 백혈구 수치를 확인하기 위해 사진을 찍을 것이다. 너무 비싸서 모든 환자들이 받을 수 없다는 검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놓을 것이다.

선배의 불안과 조급함과 기대가 내 심장을 무겁게 눌렀다. 검사 결과가 나올 그 1주일 동안, 선배는 또 불면증으로 시달릴 것이다. 새벽의 새로운 공기는 더 이상 그의 기분을 자극하지 못할 터이다. 새벽의 빛과 함께 왔던 냄새와 나뭇잎이 서로 부비며 내는 소리, 맛, 이 모든 것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젖은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식당 정원에는 우아한 자태를 지닌 수목들이 많이 서 있었다. 막 꽃잎을 떨구어 낸 목련이 분수대 옆에서 영문 모를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향수나 멜랑콜리를 불러오는 슬픔 같은 것이다. 정원 풍경이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심상 때문에 나는 선배의 첫 독창회 무대를 떠올렸다. 선배는 피아노도 잘 치고 노래를 잘 불렀다. 오랫동안 한 합창단의 단원이었고, 여러 차례 독주회를 가지고 노래를 불렀다. 그의 연주엔 언제나 깊은 애절함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에는 향수가 묻어 있다고 했다. <계속>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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