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1장 17-26절
<서론>
“죽음이라는 병”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죽음이란 병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다 죽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죽고, 또 병들어서 죽고 전쟁에 나가서 죽고 여러 가지 사고를 당해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덧없이 짧은 인생과 죽음에 대해 사색하며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 90:3~6).
아침에 피어 저녁에 시드는 풀처럼 인생의 밤이 되면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처럼 덧없이 짧은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고, 죽음의 절망을 사색하며, 그 바탕 위에서 현실에 임하는 사람이 오늘날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나는 반드시 죽는다고 그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정신없이 떠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절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본론>
1. 큰 고통을 가져오는 죽음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저는 5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 장례식을 참석해서 그 마지막 설교를 해오곤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당한 초상집에 갈 때마다 마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낍니다. 나이가 많아서 살 때로 충분히 살고 가면 덜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청춘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볼 때는 굉장히 마음이 아픕니다. 더구나 어린 자녀들을 많이 둔 어머니가 세상을 뜰 때 그 자녀들의 통곡과 부르짖음은 영혼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또 나하고 굉장히 친한 주의 종이 갑자기 병들어서 떠나갈 때 굉장히 마음에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 고통 없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고 집이나 전토나 지위나 명예를 뒤로 하고 자기가 모르는 미래의 세계로 가니 얼마나 겁나고 슬프고 괴로운지 말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일생에 살면서 한두 번 왕래하게 해 주시면 좋겠는데 전부 초행길이라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가는 길을 모릅니다. 오직 다가오는 것은 두려움만 가슴에 다가올 따름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로 14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실상은 그런데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천년 만년 살 것 같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다리 밑에 거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거지가 우리 학교 영어 담임선생님보다 영어를 더 잘해요. 그래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면 앞을 다투어서 다리 밑에 내려가서 거지에게 영어를 배웁니다. 사람이 참 착하고 좋았어요. 그런데 그는 마음이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마음에 슬픔을 가슴에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은 병들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래도 학생들에게 영어는 기가 막히게 잘 가르쳐요. 이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그에게 영어를 배운다고 쪼그리고 그 다리 밑에 같이 앉아있는데 우리가 아무리 그가 왜 다리 밑에 거지가 되어 쪼그려 앉아 있느냐 물어도 씽긋 웃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거지가 되기 전에 선원이었는데 세계 일주까지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부모도 잃어버리고, 처자도 잃어버리고 하나가 되어 직장도 놓치고 몸도 병들어서 고향으로 돌아와 거지가 되어 다리 밑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불가사의한 것이 그 정도 영어를 잘했으면 그때 미군부대 통역관으로 들어가도 돈을 꽤 많이 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하고 다리 밑에서 그렇게 빌어먹고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회의가 듭니다.
거지 나사로도 어쩌면 처음부터 이사람 같은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거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거지가 되어 태어나는 사람도 혹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지 나사라도 어쩌면 처음부터 거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병든 몸이 되어 부자의 대문간에 버려진 바 되어서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를 먹고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추정해 보면 이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입니다. 부잣집 대문에 병들어서 드러누워 있어도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지 나사로를 사랑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부자는 굉장한 부자인가 봅니다.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은 관리가 입습니다. 보통 사람은 붉은색 옷을 입지 않습니다. 이 부자는 붉은 옷에 또 흰옷을 입었습니다. 아주 흰옷을 입은 사람은 돈이 많고 생활이 부유한 사람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붉은색 옷에 흰옷을 입고 아주 호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호화로운 삶을 산다고 안 죽나요? 부자도 죽어요.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지가 부자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2.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2~24).
거지도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들어가고 아브라함은 낙원에 들어갔는데 낙원에 좌장으로 있어서 낙원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도 죽어서 가장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루고 난 다음에 그가 떨어진 곳은 지옥이었습니다. 지옥은 음부라고도 하고 지옥이라고도 하는데 지옥에 들어가서 얼마나 괴로운지 지옥에서 낙원을 바라볼 수가 있었습니다. 영적 세계는 시간과 거리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그가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아버지여, 내가 이 불꽃 가운데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사로를 시켜서 물 한 방울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 주십시오. 물 한 컵도 아닙니다.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 주십시오. 굉장히 괴로운 곳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 기도에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너는 세상에 있을 때 얼마나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지 않았느냐. 그러면서도 하나님 섬기고 살지 않았는데 이 거지 나사로는 살아있을 동안에 너희 대문가에서 얻어먹고 살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했는데 이제 운명이 달라졌지 않느냐 이 생애에서 고생했으나 지금 낙원에 들어와서 상상할 수 없는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고 너는 그 불꽃 가운데 떨어져서 고생을 하는구나.
여기에서 낙원과 음부가 어떤 곳인가를 성경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음부는 일단 떨어지면 거기는 기도응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응답이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하지 죽고 난 다음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음부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구더기라는 것은 여러분 추하고 더러운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 추하고 더러운 것은 음부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꽃같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인간의 언어로써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음부요 지옥인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한다. 우리가 어릴 때는 해산물을 시골에서는 잘 먹지 못합니다. 여름철에는 도랑에 가서 미꾸라지를 잡아서 그래서 반도를 대고 밟으면 그 미꾸라지들이 그 그물에 걸려서 들어와요. 그러면 그 미꾸라지들을 바구니에 담으면 거품을 내고 하는데 그것이 눈에 선해요. 그런데 그 미꾸라지를 어떻게 하는지 압니까? 소금을 팍 칩니다. 그리고 난 다음 호박잎을 가지고 싹싹 문댑니다. 그 비늘 떨어지라고…. 그러면 미꾸라지가 사생결단으로 뜁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지만 불쌍하더라구요. 꼭 저렇게 안 해도 먹을 수 있을 것인데 저렇게 가혹하게 껍질을 벗겨서 먹느냐. 그러나 그 미꾸라지를 가지고 시래기를 좀 넣고 미꾸라지국을 끓여 놓으면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어요. 아주 맛있습니다.
그러니 지옥이라는 것이 미꾸라지에게 호박잎으로 문지르는 것과 같이 괴롭고 그 다음 불로써 지지는 것 같이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모든 것을 느껴보는 것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서 얼마나 고통당할 것을 우리는 생각하고 지옥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낙원은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한 대로 믿으면 가는 곳입니다. 믿으면 가요. 그 험상궂은 죄인이 살인하고 방화하고 파괴했던 그가 회개할 여가도 없고 수양을 할 여가도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주여, 주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 기억하시옵소서. 그 말 한마디에 예수님의 대답은 오늘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에서 오늘 제가 하는 이 설교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몰라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생명과일을 따먹고 타락했지만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과를 먹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음부와 지옥이요, 예수 믿는 것이 낙원입니다. 믿음 그 하나가 우리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은혜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나의 일생의 죄악을 다 책임지고 그는 육체의 고통과 심령의 고통과 괴로움을 다 겪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내가 서면 예수님이 나를 끌어 안아주시고 예수님이 우리 귀에 대고 해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나의 죄와 불의, 추악, 저주와 절망과 죽음을 다 이루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서 살게 되니 이 웬 기쁨이요, 이 웬 즐거움인 것입니까?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 목숨하나 이르면 무엇이 유익하냐고 했는데 예수님께 나가면 목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자는 아무리 영화롭고 부하게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버림받은 사람이에요. 거지 나사로는 거지로 살았지만 마음에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3. 예수님과 천국
이 땅에 천국을 가르쳐 주신 이는 유일하게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늘 나라에서 사람의 몸을 쓰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천국이 어떠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절로 2절에 보면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바래시인은 아주 보수적인 유대인들이요, 모세의 율법을 조금도 어김없이 지키는 자인 것입니다. 그 중에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의 유대교 신자 중에 높은 지위를 가진 분입니다. 그는 훌륭한 선생의 제자로서 유대인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된 근본 동기도 이 바리새교인 사람들의 충동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밤에 사람이 안 볼 때 그림자를 따라서 이 니고데모는 예수님 계신 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하는 질문이 예수님,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도 하나님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고야 이런 기적을 행할 수가 있습니까? 이 니고데모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영이 죽은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거역하고 그 영이 죽었을 때 그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영이 모든 죽은 사람으로 3차원적 사람입니다. 천당인 4차원의 세계는 모릅니다. 차원이 달라요. 그러므로 3차원에 있는 그가 4차원의 세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예수님께 왔는데 예수님께서 친히 말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육으로 사는 사람이 하늘나라 일을 말해도 모른다. 알아듣지 못한다. 거듭나야 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늘나라 일을 말해도 모른다고 말하니까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이 늙은 사람이 어떻게 거듭납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러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나도 들려야 한다.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불뱀에 물려 떼를 지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여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아 높이 들어라. 그를 보고 믿는 자마다 살겠다 해서 모세가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사람들마다 죽어가면서 쳐다보라니 쳐다보고 믿는 자마다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기를 내가 그와 같다. 이 세상에 마귀에게 물려서 죽음의 병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면 나을 수 있도록 내가 세상 모든 죄악의 해독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 영이 살아나고 하늘나라 일을 말할 때 알아듣지 거듭나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알 수가 없느니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가르침도 모르겠거니와 예수님이 행하는 권능도 세상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시는 일마다 우리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역사를 하신 것입니다. 압박과 설움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해방을 주시고 원수 마귀에게 묶여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신다. 예수 믿는 사람의 특권이 그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어도 해방과 자유를 주님은 누리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냐, 예수님이 보여주신 나라가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냐, 귀신을 쫓아내시고, 온갖 병을 다 고치시고 인간생활에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필요하면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도 하시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고도 열 두 바구니 남게도 하시고 베드로의 고기잡이를 도와주시고 배에 가득히 고기를 잡게도 하시고 베드로가 물 위로 걷게도 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 생명을 얻되 넘치도록 얻고 행복한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예수님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보면 인생의 모든 고난에서 주님이 건지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너희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참새도 자기 집이 있고 들어갈 곳이 있는데 나는 아무 의지할 곳이 없으니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너희들의 삶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꺾어져가는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기름이 다 되어가지고서 팔랑팔랑 불꽃이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신다. 끝까지 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서 갈대가 꺾어져서 손만 대면 부러져 나올 것인데 예수님이 안 꺾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은 좋은 하나님이신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할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한 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다. 절대로 우리에게 나쁜 일을 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동굴에 들어가서 올데갈데 없이 절망에 처할 때도 예수 믿으면 예수님은 그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 밖으로 나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좋으시고 좋고 모든 것에 합동하여 좋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좋은 목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수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권능, 4차원의 영성을 주십니다. 거듭나면 그 영혼은 4차원의 세계의 영혼인 것입니다. 3차원은 물질적인 세계는 3차원이고 우리 영적인 세계는 4차원인 것입니다. 4차원은 물질적인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예로써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영이 살아나서 4차원의 세계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그런 권세가 주어져 있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시지요? 여러분은 4차원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여러분은 권세가 있습니다. 명령하는 권세가 있다구요.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얻은 권세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영이 살아나면 하늘나라 영, 4차원의 영은 3차원에 속한 모든 흑암의 권세를 이기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모르면 못씁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직 거지같이 하나님의 권세를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예수 믿고 거듭나서 4차원의 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차원이 높습니다. 세상 차원보다 높은 차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체가 4차원입니다. 잘나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공부 많이 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남보다 기도 많이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은 모두다 4차원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 환경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여러분은 자연히 믿는 자는 그런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앉아 있어 나는 권세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앉아 있어요. 권세가 있어요. 만일 여러분 모두다 여러분 자신의 권세를 알고 나가서 당당하게 그 권세를 행사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천하에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 강단에 서 있는 조용기는 예수 믿을 때부터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저의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교회 와서 예수 믿자마자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알아야 돼요. 모르면 주신 것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천국의 권능을 보여 주셨으니 3차원인 세계 유물론적 세계를 변화시켜 주시고 그 다음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너도 내가 가지고 있는 권세의 한 부분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영이 살아나고 성령이 너희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속만 했을 뿐 아니라 죽었다 부활하심으로 거듭난 사람의 미래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셔서 사역할 동안에 죄를 사하시고, 허물을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저주를 제하시고, 가난을 저하시고 희망을 주셨으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영생복락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며 생명을 주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4.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40일 동안 처처에 나타나셨습니다. 한번 제자들이 함께 문을 꽁꽁 닫고 방에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래서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는데 도마가 그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그는 어디 갔든지 제자들 모임에 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도마를 보고 우리 예수님 만났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다고 하니까 도마가 하하, 참 무식하다 무식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난다 말이야.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나타나셨다면 여러분 모두다 정신 돈 사람이다. 나는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해서 오셨다면 내 손을 가지고 못자국난 손을 비벼 넣어 보고 예수님 창을 맞은 옆구리 창자국을 손을 넣어서 붙잡아 봐야 예수님을 믿겠다. 참 무자비한 제자입니다.
그래 설명할 수가 없어요. 여드레가 지나고 난 다음에 도마도 함께 제자들과 방 안에 있는데 문을 꽁꽁 닫아놓고 있는데 휙 하더니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도마 앞에 서서 도마야, 그 손가락 내밀어서 내 손에 못자국난 곳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서 옆구리를 만져 보아라. 도마가 얼마나 놀랐든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내 주님, 내 하나님 내가 믿나이다. 야 이사람아 보니까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많다. 예수님은 육으로 죽었다가 육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육으로 부활하면 4차원의 영성이 들어오면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없이 부활했기 때문에 육신으로 천리, 만리도 갈 수 있고 과거, 미래도 갈 수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3차원의 세계 하고는 틀립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 있고 오감각을 따라서 살고 영적인 4차원의 생활은 못합니다. 그러나 4차원은 시간도 공간도 뛰어 넘습니다. 예수님 변화산상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대화를 했습니다. 수백년, 수천년 전에 죽었던 사람이 조금도 변함없이 찾아와서 예수님과 대화했습니다. 4차원의 세계는 죽음이 없습니다. 거리의 멀고 가까움이 없습니다. 아주 기막힌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여러분, 예수님이 육신으로 죽어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여러분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으나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세상을 뜰 때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주님이 그 사람의 영혼을 데리고 낙원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이상 더 확실한 보증을 어떻게 하겠습니다. 예수님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나와 같이 살게 된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늘 마음에 섭섭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 나타나 주시면 좋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꾸 나타나면 안 됩니다. 안 보는데서 믿어야지 내가 눈으로 다 보고 믿어지나요?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안 보이는 중에 믿음으로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대책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8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내가 너희 보혜사 아니냐. 나는 가되 나와 똑같으나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신 것처럼 다른 보혜사도 여러분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 해방과 자유가 없이 속박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면 벗어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믿음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귀와 죄악과 세상의 속박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어야 될 것은 예수님은 자기와 똑같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 다른 보혜사 성령은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 믿으면서 하늘나라 고아가 되어서는 안 돼요.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꼭 그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을 3년 반 동안 따라다닌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한평생을 주님과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다른 예수인 것입니다. 첫째 예수, 둘째 예수. 첫째 예수는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요, 둘째 예수는 여러분 곁에 와 계시고 여러분 속에 와 들어계신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을 달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예수님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 그러므로 다른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예수 성령께서 우리 속에 와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여러분 진리를 알고 담대하게 나가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오라버니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니까 부활하는 그날 우리 오라버니가 살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바로 부활이요 생명인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믿느냐. 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 구주이신 것을 믿습니다.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안 믿어지니까. 무덤가에 와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나사로의 무덤 문을 옮겨 놓아라. 거부했습니다. 주님이여,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 돌문을 열어 놓아 어떻게 창피를 당하려고 합니까? 인정을 안 합니다 예수님을. 살아있는 오라버니는 예수님과 대화할 수 있지만 죽은 오라버니는 예수님의 말을 못 듣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화를 내셨습니다. 마르다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내가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똑같이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여러분이 시련과 환난에 묶여서 꼼짝 못하면 믿으라. 나를 믿으라. 아이고 주님, 예수를 종교적으로 믿고 종교적으로 행사를 하지만 이런 고난에서 어떻게 내가 나옵니까?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믿어라!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내게 맡겨라. 그러면 내가 도와주마.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 여러분, 참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 기도하고 맡기십시오. 떨어지면 낙동강 할 때까지 맡기십시오.
그러다가 주님이 안 도와주면 그냥 죽을 각오하고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맡기지 아니하고 모든 요구를 다하고 난 다음 일어날 때는 다 주워 담아가지고 주님이 그것 내려놓고 가라. 내가 책임질테니 내려놓아라. 다음에 올 때 또 우리가 내려놓겠습니다. 가져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기도했으면 그 기도를 도로 가져오고 도로 가져오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맡긴다는 것은 맡겨 놓고 난 다음에 안 돌봐 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는 말은 맡긴다는 말하고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 말씀하세요. 믿는다는 것은 맡긴다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 큰일 났습니다. 모를 때는 그때는 믿음이 적었어요. 변명을 하는데 이제는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조목사가 믿는 것은 무엇이라고 하느냐? 맡긴다고 합니다. 왜 안 맡기느냐? 맡겼다가 주님이 안 돌봐 주면 나만 손해에요. 그러니까 네가 안 믿는 것 아니냐.
적은 일부터 맡겨 보세요. 그러면 점점 큰일도 맡기게 되고 여러분이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서 다른 예수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다른 예수님 성령이 여러분과 같이 계셔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천국에서 오셔서 사람으로 33년을 사신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영생한다는 이 진리를 마음속에 믿고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몰라요. 여러분과 같이 계신 주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어떻게 함께 하느냐. 다른 예수 성령을 통해서 함께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예수요, 예수님이 성령이요. 둘이 똑같은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 어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두 아들이 어머니 임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큰 아들을 안고서 “Good bye! Good bye!”여러분 Good bye 라는 것은 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아들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하고 영원히 헤어진다. “Good bye!” 그리고 그 동생 막내는 예수님을 잘 믿는데 그 어머니가 품에 안으면서 “See you again!” 다시 보자는 것입니다. See you again.
똑같은 어머니의 자식이라도 임종에 왔을 때 맏아들은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니까 잘 있으라. 그러나 둘째 아들은 다시 보자. See you again. 얼마나 형편과 사정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죽음은 모두에게 다가오지만, 다시 만날 약속이 있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금방 다시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예수님 재림 전에 죽은 자기 가족이 천국에 갔을까 확신이 없어 불안해하자,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써서 다시 만날 소망에 대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죽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계시다가 주님 재림하실 때 같이 데리고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고함과 나팔소리를 들으면서 하늘로써 재림하십니다. 재림하실 때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이 모두다 살아 일어나서 부활의 몸을 얻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영으로 낙원에 가 있지만 부활해서 예수님을 영접할 때는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부활의 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먼저 살아납니다. 그 다음에 살아남은 자가 변화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어떤 마을에 꽃을 파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낡은 옷을 입고 혼자서 살면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손이 아주 뼈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늘 웃어요. 사람들이 그 할머니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우리가 보기에는 좋아할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좋아서 늘 그렇게 웃습니까?” 그러니까 “나라고해서 슬픈 일이 없을 수 없죠. 그러나 예수님 믿고 주 안에서 구원받은 기쁨이 마음에 있는데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나는 나보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사흘 동안 무덤에 있다가 부활하셨다. 사흘만 기다리자! 내게 어려움이 있을 때 사흘만 기다리자고 말하고 사흘이 되면 문제가 다 달라지게 보인다. 사흘만 기다리자!” 여러분도 사흘만 기다리십시오. 어려운 일을 당해서 밥그릇을 내 던지고 싶었지만 사흘 후에 내던지자!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고 사흘 지나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번 우리 다 같이 말해볼까요? 사흘만 지나서 보자! 아멘!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게 위해서 우리도 항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절망으로 다가오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부활이 소망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사흘만 참으면 되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소망이 있고 소망이 있으면 꿈이 있습니다. 꿈이 있으면 믿음이 생겨나고 믿음이 있으면 담대하게 긍정적으로 말하게 되고 긍정적으로 말하게 되면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기도할 때 알고서 기도해야 될 것은 여러분은 중생한 사람이요, 영이 살아난 사람이요, 그 영이 4차원의 세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원하나, 원치 않으나 알거나 모르거나 존재적으로 주어진 권세가 있습니다. 4차원의 권세가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입지 않으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여러분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어요 4차원으로…. 여러분은 그러므로 흑암의 세계에서 해방과 자유를 누리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셨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게 서서 종의 멍에는 매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해방되었습니다. 자유를 가졌습니다. 속박된 사람을 위해서 명령을 내리십시오. 기도를 해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귀신아 물러가라! 질병은 사라져라! 저주는 물러가라! 실패는 사라져라! 여러분은 그런 명령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화상을 분명히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아멘.
/2015. 5. 31. 주일설교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