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생명윤리협 입장 표명… “생명 가치는 잔여수명 떠나 동등”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상임공동대표 함준수, 이하 협회)는 지난달 국회에 발의된 ‘존엄사 법안’에 대해 16일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번 의견서 제출은 보건복지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법안 제목에 있는 ‘존엄사’라는 용어부터 문제 삼았다. 협회는 “본 법안 제목 및 제안 이유에 ‘존엄사’라는 용어가 있고, 존엄사에 대해 ‘안락사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으나, ‘존엄사’라는 용어 표현은 재고돼야 한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먼저 ‘존엄사’는 통상 소극적 안락사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소극적 안락사는 인위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중단시키는 조치라는 점에서 안락사의 한 유형이라고 했다.
둘째로 지난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보건복지부 주관 하에 진행된 연명치료 중단 제도화 관련 사회적 논의에서, 존엄사라는 명칭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사용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에 위원들의 합의가 이루어져, 결과 발표에 ‘존엄사’라는 명칭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 첫째 이유는 ‘존엄사’가 소극적 안락사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둘째는 ‘존엄’이라는 단어는 생명을 보존하고 살리는 일에 적합하지 생명을 죽이는 일에 적합한 용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셋째로 ‘존엄사’라는 용어는 학문적·사회적으로 개념이 정립돼 있지 않고, 넷째로 본 법안은 존엄사와 소극적 안락사를 혼동하고 있는 동시에 존엄사와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도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출된 법안은 연명치료를 ‘인위적인 의학적 간섭을 통해 말기환자의 필수적 기능을 유지하여 죽음의 과정을 연장하는 형태의 시술로(2조 4항),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경우 수 개월 내에 사망에 이르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2조 2항)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연명치료에 대한 이 정의는 매우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반생명적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로는 첫째, 법안에서 말하는 ‘연명치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법안 2조 5항에서 기관 내 삽관 또는 체외의 심장마사지, 심장 전기충격 등을 ‘응급의료처치’로 따로 분류하여 정의하고 있는데, 연명치료와 응급의료처치가 같은지 다른지가 명확히 정리돼 있지 않다”고 밝혔다.
둘째, 연명치료가 인위적인 의학적 간섭을 통한 수액·자양분·산소 공급 등을 의미하고 이런 유형의 연명치료 중단을 제도화한다면, 이 법안은 매우 위험한 법안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수액·자양분·산소 등은 건강한 사람이든 병든 사람이든 모두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 요소들로, 비록 의학적 간섭이라는 방법을 통해 공급되더라도 이 같은 기본적인 요소들의 공급은 어떤 경우에도 중단돼선 안 된다”고 했다.
셋째, 환자의 명확한 의사 표명을 통한 무의미한 진료 중단은 일부 응급의료처치에 한정돼야 하지만, 응급의료처치도 의료기관의 수준이나 의료 기술의 발달 수준에 따라 일반적 연명치료로 전환될 수 있으므로, 응급의료처치 유형을 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넷째, 사람 생명의 가치는 그에게 남은 수명의 길이나 신체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잔여수명이 10년인 사람과 1주일인 사람의 생명의 가치는 동등하고, 차별을 두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또 어떤 사람이 신체적 강건 여부, 특정 질병 유무 등도 그 생명의 가치를 다르게 보아야 할 이유가 돼선 안 된다.
협회는 “이런 근거로 생명의 가치에 차별을 두는 것은 심각한 차별행위이고, 건강한 공화국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병든 유아들과 노인들을 인위적으로 제거했던 고대 희랍 사회의 범죄와, 독일 나치 제국의 악명 높은 안락사 프로그램의 전철을 따라가는 조치가 될 우려가 있다”고 우려했다.
또 “모든 인간의 생명은 잔여수명이나 신체 상태와는 무관하게 모두 동등하게 존중돼야 한다”며 “심지어 어떤 말기 환자의 질병 상태가 회복 불가능하다 해서 그 생명의 가치를 건강한 사람의 생명의 가치보다 낮게 평가해야 할 이유는 없다.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생명도 회복 가능한 환자나 건강한 사람의 생명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법안의 ‘말기상태·말기환자’에 대한 정의도 문제 삼았다. 협회는 “말기 상태인지 여부에 따라 연명치료의 보류·중단이라는, 생명에 대한 종국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바 명확한 기준과 정의가 돼야 할 텐데, 규정상 ‘연명치료’의 의미와 ‘수 개월’의 시간적 개념이 명백하지 않다”며 “말기환자의 판단 절차나 기준 등도 없을 뿐 아니라, 19조에 의하면 ‘담당 의사를 포함한 2인의 의사가 환자가 말기상태임을 확인하였을 것’을 연명치료 등의 보류·중단 이행의 요건 중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으나, 의사 2인 중 담당의사 외에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자가 포함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또 “10조는 말기환자가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는 바, 연명치료의 정의가 모호한 상황에서 환자의 중단 요구를 허용하는 것은 환자의 자살을 돕는 의사조력자살, 곧 안락사 허용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의료지시서를 등록하지 않은 말기환자가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경우, 환자의 진술이나 의사를 추정할 수 있는 증거를 제출함으로써 추정판단을 허용하는 15조에 대해서도 “조변석개라는 말처럼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변할 수 있고, 특히 생명의 중단과 관련된 결정은 막상 결행 상황에 이르면 모든 인간에게는 생명을 향한 본능이 있기에 대부분의 생각이 바뀐다”며 “환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환자의 속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피상적 인간 이해를 반영할 수 있다. 신체에 찾아오는 고통, 가족들에게 부담을 안겨준다는 죄의식, 병원 측의 보이지 않는 압력 등에 둘러싸인 환자는 자기 의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했다.
의료지시서를 등록하지 않은 말기환자를 대신해 배우자나 직계존비속 전원이 동의할 경우에 한해 대리판단이 가능하도록 한 16조 3항에 대해선 “보라매병원 사건이나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소송 사건처럼, 가족들은 환자의 의사보다 가족들 자신의 의사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며 “누구도 환자의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인간학적 사실을 고려할 때, 대리판단을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전했다.
더구나 말기환자의 의사 표시에 반하는 연명치료를 한 담당의사 및 그 담당의사를 교체하지 않은 의료기관의 장을 처벌하도록 한 18조에 대해서도 “의사의 환자 진료 여부에 대한 판단을 침해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생명의 유지 상태를 처벌하는 것으로 반규범적”이라며 “이는 환자와 의사 또는 의료기관 사이의 민사적 문제로 전환하거나, 의료기관에 대한 과태료 정도로 규제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의료 조치를 취해도 회복 불가능한 말기환자의 경우, 환자의 명확한 의사표현에 근거해 신중한 의료인들의 의학적 판단에 따라 의미 없는 진료를 중단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 조치”라며 “그런데 故 김수환 추기경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이 조치는 별도의 법을 제정하지 않아도 현재 얼마든지 자유롭게 시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러나 이 법안은 존엄사와 소극적 안락사에 대한 개념상 혼동, 연명치료 개념에 대한 모호한 입장, 위험한 추정 및 대리판단의 허용 등으로 사실상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위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법안의 제도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는 바”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