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전율에 가까운 희열이 선배와 나 사이를 지나갔다. 의식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은혜의 영역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직관으로서 인식의 신비함, 그것은 말로서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선배를 위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애쓰는 한, 선배도 나도 자유 할 수 없다. 말이 없는 자연의 무게를 인식하고, 말이 없는 직관적 인식에 의해 생명의 신비 사이로 누구나 스스로 가야 할 길이다.
그러나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처럼 사물의 본질적 내재성을 느낄 수 있는 총체적 이해를 어떻게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잠시 전의 그 우연한 체험이 계속된다는 보장이 있기나 한 것일까. 쉽게 변하는 감정을 다스리고 영감적 명상에 도달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 그래서 헉슬리는 메스칼린(멕스코 식물에서 추출한 환각제) 반응을 실험했던 것 아닌가.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밤바람이 불빛을 흔들며 선배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팔십 평생을 무탈하게 살아온 것 이 신비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예측할 수 없게 일어나고 있는 세상인데.” 선배는 자신의 시선을 내게 고정시켰다.
평온해 보였다. 과거의 시간 속을 오가며 오감이 맛본 지각, 소리, 맛, 냄새, 노래, 사랑, 그리고 상처까지도 빛을 발하며 그의 영혼에 닿았음을 나는 알았다.
별들이 촘촘한 하늘이 손에 닿을 듯하다. 밤하늘은 언제나 지나간 시간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밤의 하늘에 전념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행복하고 더 겸손해진다. 더 우아해 진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했다.
‘When I consider your heavens,
the work of your fingers,
the moon and the stars,
which you have set in place,
what is man that you are mindful of him,
the son of man that you care for him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상호 관련성으로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은 신비이다. 과거가, 그 삶이 끊임없이 변하는 계시들로 이루어진 영원한 현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 그래서 죽음과 삶이 하나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선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갈망들이 혼합되어 전체로서의 앙상블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해방되었고 자유로웠다. 음식, 맛, 레스토랑 안 사람들의 이야기 , 저녁 풍경, 거리의 소음… 추억은 새로운 심상으로 태어나고 우리는 해방되었고 자유로웠다.
선배님. 이처럼 사물의 본질적 내재성을 느낄 수 있는 총체적 이해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우연이지. 나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일어나는 변화이지. 신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는 긍휼함이랄까. 뭐 그런 것이겠지.” 선배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좋겠네. 하지만 쉽지 않겠지. 변하는 감정을 다스리고 영감적 명상에 도달한다는 것이… 사는 날 까지 그 길로 가야 할 것이지.” 선배에겐 더 이상 집착이 없는 듯 했다.
미도리카와에 대한 상념으로 시작한 시간은 ‘인식의 문’으로, ‘신의 긍휼’로 흘러가면서 대상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삶과 죽음 사이의 내밀한 의미가 포착되는 순간에야, 비로소 성스럽고 본질적인 비자아의 표현이 가능한 것 같다.
“병원을 정리해야 할 것이야….” 혼잣말처럼 선배는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밤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땅이 흔들렸다. “아직도 나를 의지하고 찾아오는 환자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이고…, 사람들도 만나야 하고…, 그리고 아내와 여행이라도 떠날까… 아, 갑자기 할 일이 많아지네.”
선배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