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복음 5:1~12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산에 오르셔서 말씀하신 것이 산상수훈이라고 했죠? 지금 우리가 산에 오르셔서 말씀하신 내용 중에 앞에 나오는 팔복, 여덟 가지 복에 대한 말씀을 보고 있는데 이 팔복은 하나님 나라 성도가 갖게 되는 이런 저런 문제라고 했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이 땅의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마음의 성격을 표시한 것이 팔복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이런 저런 면이 나타나는 마음의 성격이니까 팔복 전체 종합적으로 깨달아가는 것이 필요하죠.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셨으나 이것이 한 사람 성도에게서 이모저모를 나타내는 것이니까 종합적으로 잘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나씩 보는 것은 하나씩 잘 깨달아서 종합을 해보면 '아, 천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런저런 면이 이렇게 이렇게 있구나!'하고 구체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세 번째 특성인 '온유한 사람'에 대한 것을 생각하겠습니다.
○세상 방식의 땅 차지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신 이 말씀은 시편 37:11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신 말씀인데, 거기 보면 "(11)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하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가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온유한 자가 어떻게 땅을 기업으로 받는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가 땅을 차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이 땅을 차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돈이 많으면 땅을 많이 차지 할 수 있죠? 힘이 있어도 땅을 많이 차지할 수 있죠? 역사상에도 땅을 많이 차지하는 사람은 정복전쟁을 잘하는 사람이죠? 정복전쟁을 잘 해서 땅을 많이 차지한 사람이 누굴까요? (...) 나폴레옹, 징기스칸, 알렉산더 같은 사람이 땅을 많이 차지한 사람들이지요? 또 꼭 정복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특히 우리나라 요즘은 땅을 많이 차지하려면 돈이 많이 있으면 되지요?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면 땅을 많이 차지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벌고 돈 버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 아침부터 늦게까지 수고를 합니다. 다같이 열심히 일을 하지만 그중에 좀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땅을 차지하지요? 이런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 나라는 본래 경쟁사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기관이니까 무슨 경쟁을 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다함께 상향 조정이 되어서 가는 사회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강한 자, 돈이 많은 자, 권세를 많이 가진 자, 이런 자들이 땅을 많이 차지합니다. 힘이 없고 돈이 없는 사람은 도무지 땅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 한다!' 하고 말씀하시니 역설적이죠? 어떻게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말인가?
○온유한 사람이 아닌 경우
먼저 '온유한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데, '온유한 사람', 하면 우리가 얼른 떠오르는 관념이 있지요?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하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일을 만났을 때 겉으로 온순하고 조용하면 '아, 그 사람 참 온유하다' 합니다. 그 사람 마음은 우리가 잘 모르니까 겉으로 온순해 보이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화를 내는 사람은 겉으로 아무리 온순해 보여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한 사람이 아니죠? 어떤 사람은 정말 아무런 힘이 없어서 남이 해롭게 하더라도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도 우리가 '그 사람 참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기 쉬운데, 그러나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 그렇죠? '남들은 다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는가?' 하고 속으로 끙끙 앓을 수 있거든요. 그런 사람은 마음속에 불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또 그것과는 반대로 능력이 많은 사람이 있죠? 자제력도 있고 힘도 있어서 누가 뭐라고 해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보다 더 힘이 있기 때문에 '이정도 쯤이야' 하면서 잘 참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온유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상대가 아주 악하게 대항하고 크게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인데도 화를 내지 않고 속으로 참고 있으면 참 온유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쉬운데 그렇게 해서는 답을 잘 못 찾습니다. 우리의 관념은 그릇된 것이 많아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의 관념이 정화되고 교정 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온유하다'고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성경에 '온유하다'는 말씀은 구약의 '아나'( )라는 말, '고통스럽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말의 어근을 보면 결국 '고통스럽다, 괴롭다, 환란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고통스럽다, 환란을 받는다'는 말에서 나온 마음의 상태를 온유하다고 표시했습니다. '고통스럽다, 환란을 받는다'는 말과 '온유하다'는 말을 연결시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얼른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보통 사람이 평화로운 때는 온유하다는 마음 상태를 잘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조용히 앉아 있을 때는 그 사람이 온유한지 아주 호전적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마음 상태를 우리가 다 읽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어떤 때에 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까? 아주 평화로울 때는, 즉 남들과 같이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안정을 유지하고 살 때는 잘 모르지만 아주 고통스러운 일을 만날 때, 환난을 만날 때 어떤 사람은 온유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아주 호전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고통이 있고 괴롬이 있을지라도 강한 분노를 표시하지 않고 주님께서 자신을 신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안정한 심정을 갖는 자가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하다'는 말 자체는 따뜻할 '온' 부드러울 '유'자에,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한자의 뜻인데, 그처럼 어떤 경우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는 자를 온유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평소에는 잘 모르죠. 어떤 일에 부닥쳐 봐야 합니다. 어떤 악한 경우를 만났을 때 거기에 반격을 가하고 맞상대하는 자는 온유한 자가 아닙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반격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 나아가서 호소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가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온유한 사람은 첫째, 성도에게서 나타나는데, 둘째, 어떤 일을 만날지라도 주님께 나아가서 호소하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면서 균형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첫째는, 신앙이 있어야 하지요? 믿음이 있어야 온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고통스럽거나 환란이 올 때 자기 힘으로 안간힘을 쓰고 해결하려 하다가 그것이 만성이 되면 불평이 마음에 꽉 차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 나아가서 호소해야 하지요?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는 참 성도의 마음의 경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마음의 경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전진하는 거기에 적응한 사람의 마음 상태, 이것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좀 내려가면 5:37에 보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옳다'고 할 때 옳다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라는 말만하라. 그러면 됐다. 그 이상 무엇이 나오면 안 된다.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하고 그 이상 무엇이 나오면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주의하라' 이렇게 가르치죠? '옳다' 할 때 '옳다' 하고 '아니다' 할 때 '아니다' 하고 멈추면 되는데, 우리는 종종 넘어설 때가 많지요? '옳다, 아니다' 해놓고 이것대로 안 되면 그만 이성을 잃고 막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3:4에서 '온유하고 안정한 마음으로, 속사람을 단장하도록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다' 합니다.
○거룩한 분노
이 '온유함'이란 무능력하고 나약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잠잠히 당하고만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그분의 영광이 가리어지거나 손상되는 것에는 분노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지요? 예수님도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두 차례나 화를 내셨는데, 그 두 번 모두 예루살렘 성전을 훼손 할 때입니다. 예수님 죽기 전이니까 죽으시기 전까지는 신약과 구약이 교차되어 있는 교차지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약의 성전에 들어가서 훼손하는 일을 볼 때 분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4을 보면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15)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고 진노하셨습니다. 진노하신 까닭이 뭐죠?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됐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성소는 주님께 예배드리는 곳이고 주님의 이름이 있는 거룩한 곳인데, 그런 곳을 시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되는 데도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것은 전혀 온유한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될 때는 거룩한 분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밖에 어떤 상황이든지 평정을 잃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한 사람'의 실례
성경에 온유한 사람의 예를 좀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구약에는 누가 있죠? 구약에는 모세이죠? 찾아볼까요? 민수기 12장입니다. 민수기 12:1을 먼저 보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고 하여 모세를 비방합니다. "(2)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무슨 말이지요? '주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않았느냐?' 합니다. 즉 '모세만 말씀의 권위가 있느냐? 우리도 있다!'는 거죠? 요즘으로 말하면 '목사만 말씀 가르칠 권세가 있느냐! 우리도 있다!' 뭐 이와 비슷한 겁니다.
그렇게 모세를 비방하는 소리를 들으신 주님께서 4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불러놓고 "내 종 모세는 선지자들과 다르다!" 하시고, "모세는 나와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다...모세는 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하시고, "그런 사람 모세에게 감히 시비하다니, 두렵지도 아니하냐?"하고 6~8절까지 말씀 하십니다. 그렇게 크게 화를 내시고 떠나셨는데,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려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화를 내고 떠나시고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이것을 본 모세가 뭐라고 했을까요? '너 그래, 참 잘됐다, 감히 권위에 도전하다니!' 하고 권위를 내세웠나요? 13절에 보면 하나님께 나아가서 '미리암을 고쳐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이런 모세를 보고 3절에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합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하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한 가장 영광스럽고 권위 있는 자리를 차지한 사람인데 그러나 모세의 권위를 놓고 시비할 때 '네가 감히 이스라엘의 최고위 권위자 앞에 항거하느냐!' 하고 자기 권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세를 놓고 '모세의 온유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 모세와 비슷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다윗입니다. 찾아보지요. 사무엘하 16장입니다. 사무엘하 16장에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억울하게 쫓겨나면서 신하들과 함께 수모를 당했는데 그때 다윗이 취한 모습을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16:5~6을 같이 읽을까요?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6)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5절에 "저주하고" 했는데, 누가 누구에게 저주를 하지요? 시므이가 다윗 왕을 보고 저주하지요? "저주하고" 한 말은 '저주를 줄곧 퍼부었다'는 뜻입니다. 6절에서 어떻게 저주하죠? 다윗 왕과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막 던지면서 저주하지요? 돌을 던지면서 저주를 막 퍼부었습니다.
이때가 언제냐 하면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나서 도망을 할 때입니다.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돌을 던지면서 저주를 퍼붓습니다. 7절에 보면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이러면서 저주를 퍼붓습니다. 8절엔 '여호와께서 너를 심판하신다'고 까지 말합니다. 아주 거칠게 욕을 하면서 굉장한 저주를 퍼부으니까 다윗의 신하들이 9절에 보면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합니다. 다윗 왕에게 '명령만 내리시면 당장 가서 그의 머리를 잘라버리겠습니다!' 하자 다윗이 뭐라고 하죠? 뭐라고 합니까? 다윗이? 10절에 "스루야의 아들들아!" 합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은 요압이나 아비새, 다윗의 신하들, 군장들인데요, 그래서 스루야의 아들들아 '이 일은 너희와 상관없는 일이다, 내 일이다' 하고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저주하는 것이라면 누가 시므이를 나무랄 수 있느냐' 합니다. 맞대응하지 않죠?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에게 징계를 내리시는 것으로 알고 그 환란 가운데서도 원수를 맞대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여기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사람을 상대하여 맞대응하지 않는 것 하나 하고, 심지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것이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보통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아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반역하는데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아니,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 있습니까?' 하면서 원망할 수 있죠?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는 것으로 알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이런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온유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야 하지요?
○온유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
이런 온유를 완전히 다 이루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찾아보지요. 마태복음 11:28절부터 볼까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기 "온유하고 겸손하니" 하죠? 온유와 겸손은 같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가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들로부터 갖은 고초를 다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죽기까지 원수들로부터 박해를 당했으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다 성취하시기 위하여 온유한 마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순하고 겸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지금 진노를 당하시면서, 형벌을 받으시면서도 온유할 뿐 아니고 원수들에게도 맞대응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다 드러내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온유한 심정으로 이루신 그 안에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참여시켜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자를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주셨지요? 개인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이루어서 온유를 발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온유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온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성도를 염두하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이죠? 한 개인이 무슨 온유하여 뭘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주의로는 온유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 발휘할 때 온유가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온유한 너희는 복 있다' 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온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교회를 형성하고 보니까 그분의 공급하심이 있고 그분의 사랑을 충만히 입으니까 자꾸 온유하게 됩니다.
신약에 대표적으로 온유함을 보여준 사람이 바울이죠? 고린도후서 10:1에 '그리스도의 온유를 본받고 체득하여 고린도 교인들을 대면했을 때는 겸비하고, 온유하다'고 하고 '그리스도의 온유를 가지고 권한다'고 합니다. 그 말썽 많은 고린도교회를 바로 세우려고 온유한 심정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돌로 침을 당하고 고초를 겪은 사람인데, 그러나 복음 증거의 일을 흔들리지 않고 다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평정을 잃지 않은 사람입니다. 한 곳만 찾아보지요. 고린도후서 11장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중에 당한 고초를 사실적으로 죽 말하는데 고린도후서 11:23부터 보겠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태장'은 째찍 끝에 납을 매달아 치는 무서운 형벌인데, 이 태장에 맞는 중에 죽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 태장을 세 번 맞고 또)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이렇게 하나님 나라 교회를 위하여 복음 증거의 일을 다 한 사람입니다. 목숨을 걸고 교회를 세우려고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닌데도 겸손히 온유한 심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죠.
○일시적인 땅
본문에 예수님께서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십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여기 땅은 일시적인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땅은 다 일시적이지요? 앞에서 말한 징기스칸, 이 사람은 땅을 많이 차지했지요? 그러나 그가 차지한 땅은 영원하지 못했지요? 자손들의 소유가 되지 못했죠? 알렉산더 같은 경우도 역시 자기가 차지한 땅에서 자기 뜻을 채 펴지도 못한 채 도중에 죽었죠? 그렇게 힘으로 차지한 땅은 일시적인 땅이고 영원하지 못합니다. 공동체적으로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얼마나 큰 땅입니까? 다 망하고 말았죠? 영원하지 못합니다. 또 그런 정복전쟁이 아니라도 돈을 많이 벌어서 자기 노력으로 땅을 많이 차지한 경우도 일시적인 땅이죠? 영원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땅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은 영원한 땅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인용을 하신 시편 37:11에서의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거기 보면 "(11)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며 많은 평화를 이루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래 가나안 땅뿐만 아니라 모든 땅이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땅이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오셔서 아무것도 없는 중에 만물을 지으셨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본래 하나님의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닮게 지은 최초 사람이 마귀의 말을 듣고 그만 자기중심적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에덴 땅에서 쫓겨나고 이 땅을 자기 마음대로 정복하는 인간의 땅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마귀의 말을 듣고 인간의 땅으로 전락시켰으니까 이제 이 땅은 누가 왕 노릇 하죠? 이 세상은 누가 왕 노릇 하죠? 마귀가 왕 노릇하죠. 주님께서 왕 노릇 하셔야 하는데, 주님의 땅이니까. 그러나 마귀가 인간을 조종하여 인간의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마귀가 이 땅의 임금 노릇을 합니다. 에베소서 2:2에 "너희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합니다. 여기 "공중 권세 잡은 자"가 곧 마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귀 편에서 이 땅을 잠깐이나마 차지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마귀의 종으로 이 세상의 권력과 물질을 차지하고 그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성도까지 박해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죠? 비록 불신자들이 이 세상을 차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땅을 차지할 주인공은 주님이고 '온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온유한 사람' 성도를 박해하는 것은 자기들이 차지한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안간힘입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편 37:11)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첫째는, 가나안 땅이라고 했죠?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미래의 '새 땅'을 가리킵니다. 베드로후서 3:13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렇게 말한 그 땅입니다. 곧 성도들이 미래에 들어가서 영원히 차지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 땅에는 완전한 '의'가 거하며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자들만이 차지할 것입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바로 '그 땅'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은 먼 미래의 것인데, 그러나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죽어 구원한 성도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나누어 주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는 이미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을 맛보고 있습니다. 장차 영광의 나라에서는 영원히 그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우리를 이 땅에 두신 목적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 지체들인 우리를 이 땅에 두신 목적이 있죠? 예수를 믿으면 바로 천당으로 데려가 버리는 것이 아니고 교회로 불러 모으셔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신 그 땅을 넓혀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두셨습니다.
현재 이 땅에는 마귀가 임금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땅을 자기 품안에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는데, 진짜 차지해야 할 주님의 백성, 온유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들고 슬프도록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백성을 이 땅에 두시고, 주님의 몸체로 두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부터 나타나도록 하십니다. 지경을 넓혀 가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할 목적이 있지요? 예수 믿으니까 천당, 하고 그쪽으로만 기대하고 그저 대기하고 그럭저럭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예수 믿으니까 천당, 하고 내 힘으로 내 맘대로 살다가 천당은 가겠지,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거하는 목적은 주님께서 본래 이 땅의 주인인 것을 인식하고 그분이 이 땅을 통치하시도록 우리부터 다스림을 받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아서 머무는 우리 지역은 곧 주님이 주시는 땅이지요? 주님의 '통치'가 있으면 천국입니다. 그 통치가 있는 천국이 주님의 땅이죠?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아직도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이 땅을 보며 주님께 호소하고, 그리고 우리부터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주님의 땅을 넓혀가야 합니다. 주님의 다스림의 원칙을 이 땅위에 자꾸 드러내야 합니다. 그럴 의무가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라면 그는 예수님의 거룩한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본래 주인이요 왕이시고 소유자인데, 그것을 인식하고 아직도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이 땅을 지체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서 그분의 뜻과 원칙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 지경을 넓혀가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답게 그분의 수족노릇을 통하여 그분의 뜻과 원칙을 이 땅위에 나타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온유한 자가 천국을 확장해 갑니다. 천국을 확장해 가는 것이 이 땅에 있는 온유한 성도들의 거룩한 의무입니다. 여기까지 하시지요.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저희에게 선물로 주신 거룩한 땅을 마귀가 차지하고 그의 부하들에 의해 인간의 땅 마귀의 땅으로 전락하게 만들어 버렸사옵나이다. 하오나 저희를 이 땅에서 구원하여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그 말씀의 자양을 받아서 그 힘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뜻과 원칙이 점점 널리 나타나도록 하시옵나이다. 주님께서 장차는 영원히 자기 지체들에게 차지하도록 할 이 땅을 저희에게 사명을 주셔서 지금부터 주의 다스림과 그 원칙이 점점 드러나도록 하시옵나이다. 주님, 저희가 참으로 온유한 자들이 되어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께 나아가서 호소하고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께서 저희를 사용하셔서 일을 이루어 가시고 영원한 땅을 저희에게 허락하시는 날까지 저희가 주님의 심부름꾼으로 주님의 땅을 넓혀갈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소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